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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한국개신교회는 선교초기 정교분리론을 내세운 선교사들의 영향아래 사회참여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인들이 정권을 담당하자, 다수의 한국개신교회와 교인들은 국가권력과 협력하는 친정부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장기독재로 인한 4·19혁명과 정권의 붕괴, 그리고 곧이어 일어난 박정희 군부독재의 탄생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소극적으로나마 사회참여를 시작하게 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1970년대 유신체제가 탄생한 후, 1987년 6·10항쟁을 통하여 민주정부를 수립하기까지 다양한 부문의 사회참여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에서 빠뜨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 지식인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진전시켜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몇몇 부문운동에서는 그 운동의 형성과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또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서 드러난 역사적 사실들과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 1970, 80년대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이 오늘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2장에서는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다루고, 3장에서는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의 전개과정을 1970년대부터 1987년 6·10항쟁까지 역사적으로 개관할 것이다. 이어 4장에서는 한국교회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다룰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현재의 한국교회를 위한 제언을 간단히 펼치고자 한다.
2.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배경
1960년대 말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 고도성장과 이에 따른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빈부의 격차 속에서 경제 사회적 소외현상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산업화는 다수의 노동자 계층과 도시빈민층을 양산하였고, 동시에 그들의 궁핍화를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60년대 말 경제적 위기가 발생하였고, 잠재된 계층 간의 갈등과 학생운동으로 위수령을 발동하는 등 정권의 총제적 위기가 발생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장기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27일 국회에서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라는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통치구조를 탄생시켰다.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일인 독재에 장기집권체제였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견인한 것은 한국교회의 신학자와 기독교인 학자,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지식인 그룹’과 기독청년학생, 젊은 목회자 그룹이었다. 특히 진보적 기독교 ‘지식인 그룹’은 직접 민주화 운동에 헌신함은 물론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표적인 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를 중심으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기독자교수협의회’, ‘목요기도회’ 등 기독교 조직을 통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NCCK는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정치사회 참여를 이끄는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한편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에 이론과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세력이 지식인 그룹이었다면, 기독청년학생과 젊은 목회자 그룹은 민주화투쟁을 대중투쟁 차원으로 발전 전개시켰다. 이들은 대학과 교회의 종교서클과 교회청년회 등을 중심으로 기도회와 강연회를 통해 대중선전과 반정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1969년 말 한국기독학생운동(KSCM)과 대학 YMCA를 통합하여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이하 KSCF)을 결성하여 1970년대 초 ‘학사단 운동’, ‘선거참관인 운동’, ‘신앙수호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KSCF의 조직이 와해되자, ‘한국기독청년협의회’(이하 EYC)를 조직하여 각 교단과 교회의 청년회와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1980년대까지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3.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의 전개과정
1) 1970년대 민주화 운동
a. 유신체제의 등장과 한국교회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인 유신헌법이 통과되자, 가장 먼저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한국교회의 진보적 목회자와 청년들이었다. 1972년 12월 전주 남문교회의 은명기 목사가 철야기도회를 통하여 유신헌법 반대를 표명하였고, 1973년 4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기독청년들이 유신을 반대하는 전단지를 뿌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이를 빌미로 은명기, 박형규 목사와 청년들을 구속하였다. 이에 NCCK를 비롯한 한국교회는 미국과 일본교회와 더불어 정부에 항의 서한을 발송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특히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한국기독교 장로회는 이후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해 한층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게 되었으며, 1973년 5월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을 발표하여 한국기독교의 민주화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신학적으로 제시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장준하를 중심으로 한 재야인사들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하였고, 서명운동의 주동자인 장준하, 백기완을 구속하고 함석헌, 천관우, 안병무, 문동환 등을 연행하여 심문하였다. 개헌서명운동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자, 도시산업선교회 소속의 김경락, 이해학, 김진홍, 인명진 등 소장 목회자들이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였고, 정부는 이들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비록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정치적 항거의 시초였다는 점에 큰 의미를 지닌다.
b. 민청학련 사건과 한국교회
1974년에 들어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직화 되고 전국화 되자,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180여 명을 구속 수감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자생적 공산주의자’라 규정하고, 이를 “민청학련사건”이라 명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학생들뿐만 아니라,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찬국 교수 등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함께 투옥되었고,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이하 KSCF)의 간부들이 다수 구속되어 기독학생운동이 최대의 시련을 맞기도 하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자, 기독교의 대응은 NCCK 가맹교단들과 단체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또한 이때에 구속자 가족들과 교역자 그리고 평신도들은 ‘목요기도회’를 시작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리며 교회의 의견을 모아 나갔다. 민청학련 사건은 민주화 운동을 더욱 확산시켜, 윤보선, 함석헌, 김재준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발족시켰다. 이 기구는 민주화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켜 유신체제 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도록 하였다.
c. 긴급조치 9호 이후의 한국교회
1975년 5월에는 긴급조치 9호가 공포되었다. 이에 개신교계는 1976년 1월 15일 구속자 가족들의 ‘목요기도회’를 부활한데 이어 23일에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원주에서 ‘신구교 합동 일치주간 기도회’를 열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3월 1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함세웅, 이우정, 김승훈 등 개신교와 가톨릭을 중심한 2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선언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목사, 신부 등 다수가 관계된 사건으로 70년대 후반 민주화 연합운동의 이념적, 인적인 기틀이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진보적 개신교회와 가톨릭이 또 다시 유신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으로, 다시금 민주화 운동의 물결을 일으켜 77년 말 각계의 민주화 운동 연합체인 ‘한국인권운동협의회’를 결성토록 하였다.
1978년에는 윤보선, 문익환 등 각계인사 300여 명이 ‘민주주의 국민연합’을 발족하고 ‘8·15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어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 국민연합’을 계승하고,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탄생시켜 유신체제의 극복을 위한 민주화 운동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였다. 이 국민연합은 기독교계를 비롯한 재야, 사회 제 세력의 연대가 최초의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1970년대 기독교의 민주화와 사회참여운동은 79년 8월 11일에 일어난 YH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사건의 배후세력으로 도시산업선교회가 주목되어 이 협회와 관련된 문동환, 인명진, 서경석 목사 등이 구속되었다. 정부당국은 이 사건의 배후세력들을 불순 용공세력으로 매도하였다. 이 사태에 대해 기독교계는 거친 항의를 벌이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존중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정부의 용공조작 정책에 정면 도전하였다. 결국 YH 사건은 70년대 기독교 인권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2) 1980년대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
a. 광주 민주화 운동과 한국교회
1980년대 한국 개신교사회참여 운동은 전체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광주항쟁에서 그 출발점을 갖는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 운동은 사실상 개신교보다 윤공희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이 그 수습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신교회와 교계 인사들의 참여는 미미했고, 광주항쟁 직후 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전개된 EYC를 비롯한 기독청년 학생들의 활동정도였다. 그러나 제 5공화국과 제 6공화국 군사정권 아래에서 전개된 광주항쟁 진상 조사 및 반독재 투쟁에서 개신교회는 1970년대보다 그 참여 숫자면에서 훨씬 증가하였고 활동범위도 다양하였다. 제 5공화국 초기에는 NCCK를 중심으로 한 인권보호운동이 활발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과 민주화 선도투쟁을 하던 학생들의 구속이 잇따르자, 교회는 이들의 인권수호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특히 고문과 용공조작, 재소자들의 처우문제, 강제징집 등의 인권유린이 발생하자, 기독교회(개신교와 가톨릭)는 군사독재정부에 인권유린의 중지를 요구하고 활발한 인권수호운동을 펼쳤다. 한편 1980년대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이 반외세자주화운동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1982년에 고신대 신학생 문부식이 주동이 되어 일어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불신이 반미운동으로 점화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최기식 신부의 구속으로 가톨릭 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고조시켰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전선이 반외세 자주화로 외연이 넓혀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b. 전두환 군사독재와 한국교회
제 5공화국 정권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개신교와 가톨릭의 반독재투쟁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1985년 2·12 총선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군부통치종식’과 ‘대통령 직선제’를 내세운 국민 대중의 민주화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재야 민주화 운동의 총집결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은 문익환 목사가 의장으로 있으면서 80년대 중반 개헌정국에서의 한국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민통련은 개헌투쟁의 주체를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아니라 민중·민주세력으로 보면서 개헌운동을 대중화 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개신교계에서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소속 27명의 중앙위원들의 개헌 서명을 시발로 하여 기장, 예장(통합), 감리교 3개 교단을 중심으로 시국성명서 발표가 잇달았다. 85년 3월 17일 NCCK는 그간의 개헌서명 운동의 성과를 수렴하여 1,050명의 목회자 서명 명단을 공개했다. 개헌 열기를 타고 KNCC, EYC, KSCF 등 기독교 연합기관들은 민주헌법쟁취운동, 개헌서명운동, KBS-TV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CBS기능정상화 운동 등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특히 NCCK가 주도적으로 전개한 ‘KBS-TV 시청료납부 거부운동’은 개헌운동의 열기를 다른 측면에서 고양시킨 일종의 ‘대중적 항거운동’이자 ‘자유언론 쟁취투쟁’이었다.
한국교회는 1986년 4·13호헌조치 이후, 호헌반대성명서 발표 및 구국단식 기도회 등을 계속함으로써 6월 민주항쟁의 서막을 열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국민운동본부의 전국적인 투쟁지도 및 확산 기능을 보완하고, 또 투쟁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6월 항쟁 기간 중 성직자들과 성도들은 집회에 직접 참여하여 투쟁 열기를 고양시켰으며, 전국적인 연락망과 조직망을 통해 큰 역할을 하였다. 6·10 대회이후 6·29 선언이 있기까지 개신교의 각 교단과 지역 협의회, 각 노회들은 잇따라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거나 시국성명을 발표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6·10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시국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침묵을 지켜오던 보수교단들도 참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도 4·13 호헌 조치의 철회와 언론자유, 인권탄압중지 등을 결의하고 시국연합집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처럼 시국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친정부적인 태도를 보여 온 개신교 보수교단들도 6월 항쟁시에는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것이었다.
4.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의 역할과 그 한계
1970년대는 한국교회가 역사참여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하기 시작한 시기이며, 교회의 예언자적 정신을 널리 알리는 시기였다. 아울러 1980년대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은 일반사회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1987년 6·10항쟁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시기이다. 이러한 한국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였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1970년대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고,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적 주체였다. 한국교회 내의 신학자와 성직자, 기독교인 교수 등 진보적 ‘지식인’ 그룹은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인 ‘유기적 지식인’으로 정의하고, 직접 민주화 운동에 헌신함은 물론 운동의 이념적,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또한 기독청년학생, 젊은 목회자 그룹은 민주화투쟁을 대중투쟁 차원으로 전개시켰다. 이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표적인 기관인 ‘NCCK’ 중심으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기독자교수협의회’, ‘KSCF’, ‘EYC’ 등 기독교 조직을 통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NCCK는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전체의 민족·민주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부문운동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 나갔다. 70년대에 기독교회가 참여했던 부문운동에는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청년학생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했다. 이들 가운데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의 경우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비판과 참여가 극도로 억압된 상황에서 기독교의 참여가 민주화 운동의 형성과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 사회참여운동 전체를 이끌어 가는 핵심영역이었다. 80년대에도 군사정권 퇴진운동은 물론 개헌운동, 재소자 인권보호운동, 강제징집 철폐운동, 도시산업선교, 도시빈민운동, 농민운동, 주요 시국성명서 발표, 언론 자유화운동 등등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실로 이 시기에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들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셋째로, 1980년대에 전개된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은 6, 70년대 민주화 운동과 별개로 전개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들 운동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연대활동을 벌여 나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70년대보다 오히려 그 참여의 숫자나 폭이 훨씬 더 넓어지고 외연이 확대되었다. 70년대 개신교 민주화 운동이 일부 소수의 목회자와 신학자, 기독학생, 그리고 몇몇 교회 중심의 신앙고백적 차원의 운동이 80년대에 들어와 다수의 교회와 교단, 그리고 지도자들의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점점 더 성숙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한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1970년대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은 다수의 대중이 포함된 전 교회차원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한계를 지녔다는 점이다. 특히 조직의 목적을 달리하는 재야 운동권세력과 쉽게 연대함으로써 입장이 달랐던 교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교회 일부는 군사독재에 협력하는 반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1970-80년대 보수적인 다수의 교회들은 민주화 운동에 무관심하거나 외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에 협력하거나 이끌려 가는 태도를 취하였다. 보수적 지도자들은 여전히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독재자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특히 87년 교회의 사회참여가 절정에 달한 시기에도 대부분의 보수교단은 낡은 껍질을 벗지 못한 채 불의한 정치권력에 침묵하거나 협조하였다.
5. 한국교회를 위한 제언
1987년 6·10항쟁을 통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한국사회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경실련, 기윤실,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 단체들의 출현으로 시민사회라는 공간을 창출하였고, 문민정부 시절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였다. 최근의 모바일 혁명과 인터넷 매체의 발달은 시민들로 하여금 실시간으로 정치적 이슈들에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고양된 정치적 민주화와는 달리 지난 25년간 한국사회와 교회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와 이로 인한 중산층의 붕괴, 금융과 산업자본의 재벌집중으로 인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몰락, 노동시장 유연화로 야기된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실업의 문제 등으로 계층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교회의 성장은 멈추었으며, 대형교회로의 수평이동은 중소교회를 고사 직전에까지 몰아가고 있다. 교회의 빈부격차는 극에 달하여 교회의 80%이상이 미자립 상태이며 대리운전을 하는 목회자 수도 급증하고 있다. 70·80년대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을 견인하고, 세계교회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던 한국교회가 생존자체를 위협받는 극단적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수의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은 교회성장주의와 교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교회를 향한 사회적 요구와 필요에 진지한 응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교회운영으로 야기된 교회세습, 재정의 불투명성, 목회자의 부도덕성과 비윤리성, 교권을 둘러싼 다툼 등의 문제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 지도 오래되었다. 더욱이 이명박 정부가 등장한 후, 대다수 한국교회는 사회의 보수화 경향과 더불어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무관심 혹은 보수화 경향을 뚜렷이 보이고 있으며, NCCK 비롯한 한국교회의 진보진영 또한 그 영향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비판적 지식인들과 젊은 세대들로부터 ‘개독교’라는 오명을 쓴 채 ‘공공의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기상황을 맞아 이를 극복하고, 한국교회가 민족의 종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필자는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속에서 담당한 예언자적 사명과 그 역할을 다시 발견하여야 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이를 2010년대 오늘의 사회현실에 재해석하여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이 한국교회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언한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먼저 ‘교회정치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정치제도를 보다 민주적으로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태생적으로 유교적 권위주의가 뿌리를 내려 민주적 역동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박정희 개발독재 아래 성장한 한국교회는 교회의 운영전반에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담임목사 혹은 소수의 목회자나 장로에게 집중된 의사결정구조는 다수의 부교역자나 여성을 비롯한 평신도들의 민주적 참여를 가로막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총회나 노회는 이를 교회법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교회의 최고의결기관이 공동의회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의회 위에 제직회, 제직회 위에 당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일한 하나님의 일꾼임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에게만 위임의 형식으로 70세까지 정년과 수많은 혜택을 보장해주고 있는 반면, 다수의 부교역자들에게는 1년마다 교회의 신임을 묻고 사실상 최저생계비 수준의 생활을 강요하고 있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청산된 제왕적 정치체제를 교회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개인적, 개교회적 차원에서 교회직분의 재신임 혹은 임기제 등의 형식으로 간헐적인 논의들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단의 총회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대사회적 예언자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교회되어야 하기’(Let Church be Church) 때문이다. 재세례파 전통의 기독교 윤리학자 하우워와스(Hauerwas)는 교회가 시민사회에 정책을 제안하고 사회가 잘 운영되도록 협력하는 것보다 교회가 먼저 교회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교회자체가 ‘사회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하고,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며,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의사결정구조를 비롯한 교회 정치적 구조의 민주화를 선행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이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구체적 운동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으로 인하여 전 지구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실천의 30년 동안 세계는 계속적인 경제위기를 경험하였다. 러시아의 경제 위기,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경제 위기,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경제위기 등 세계는 수많은 경제 위기로 출렁거렸고, 마이너스 성장의 깊은 수렁에 빠졌었다. 미국의 리먼 브라더즈 사태로 시작하여 오늘의 그리스 경제 위기도 신자유주의 경제 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실패는 그 경제 구조가 갖고 있는 결함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기본 정신은 경쟁과 효율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쟁이 너무 지나쳐 동반성장의 가능성을 차단시켰고, 효율성은 과도한 비용절감을 요구하고 하청업체의 몰락과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가져왔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부의 불공평한 분배로 야기된 20대 80, 혹은 1% 대 99% 사회, 금융자본의 재벌집중으로 인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몰락, 노동시장 유연화로 야기된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실업의 문제 등으로 계층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경제적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경제 민주화’를 위한 구체적 운동들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의 중심세력인 재벌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인, 정부관료, 언론,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매김 한지 오래되었으며, 유일한 자본주의 경제제도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먼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경제의 관점에서 한국의 경제적 상황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진지한 연구와 토론이 요청된다. 더 나아가 신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차원에서의 목회자들에 대한 경제교육과 개 교회 차원에서의 조심스런 교육을 통한 평신도들의 의식의 각성이 요청된다. 뿐만 아니라, NCCK를 비롯한 에큐메니칼 단체들과 그 지도자들의 경제 민주화와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활발한 활동이 요청된다. 1970년대와 80년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하여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예언자적 정신으로 헌신한 것과 같이 이제 경제정의와 경제민주화를 위해 그 노력을 경주할 때이다.
김명배 l 교수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베어드학부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