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입니다
2009-12-07 (월) 오전 7:38
이순구 교수님;
서울 다녀오시고 보내주신 메일 잘 받았습니다.
댁내 두루 평안하시지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니 친구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악어가 가끔 어슬렁거리는 이 미국의 풀로리다에서 강물을 보며 앉아 있는 점잖은 병산서원
근처까지 통신이 가능하네요. 나야 워낙 이런 것을 몰라 타이프도한 손에 한 손가락이고
그나마 자판을 외우지도 못한채 땀을 흘리며 겨우 메일을 칠 정도지만요.
오늘서야 겨우 책 두어권 사인을 해서 봉투에 넣었고 내일 우체국에 가서 보낼 생각입니다.
내가 하도 칠칠치 못해 최근에 발간된 책을 찾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그 한권 밖에 없어 망서리다가 보냅니다.
물론 책이야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하면 금방 보내주니까 걱정은 없습니다.
내가 은퇴한 해인 2002년부터 모교인 연세의대에서 본과 2년 생에게 '문학과 의학'이라는 강의를
일주일에 4시간 강의해 주고 있던 것을 혹 아시는지요. 내 의대생 시절을 되생각하면서 강의를 수락햇지만
상당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많이들 그런 과목이 있습니다.
과학하는 사람에게 인문학의 상상력이 도움도 되지만 그들의 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거지요.
혹 글을 쓴 것이 잇으면 내게도 한번 보여주세요.
나는 요지음 내년 4월 내 귀국을 맞추어 새 시집을 내려고 준비중입니다. 물론 제목도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고
시도 10편 정도 더 써야합니다만.... 즐거운 연말을 즐기시기 바라면서 오늘은 이만 합니다. 마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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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2009-12-07 (월) 오후 1:36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또 선생님 메일 뵈옵고 선생님께 부끄럽기만 합니다.
평소 글을 쓴 것이 없으니 선생님께
보여드릴 내용이 없는 것이 너무 미안 합니다.
선생님이 쓰신 “아름다운 향기”의 글들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손길”속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도 보였더니,
저보다 더 열심히 읽으면서,
그 책들을 몇 권 더 사서 레지오 단원들에게 선물 주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딸은 제게 성당 안 나가면 마 선생님께 일러바칠 것이라고 어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2009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의 제목시인
“파타고니아의 양”이
어떻게 요즘의 제 마음 풍경과 그리도 흡사한지
오늘 종강 시간에 학생들에게도 낭독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열심히 시도 쓰고
에세이도 쓰고 싶습니다.
첨부해서 베껴 넣은 글은
작년에 대학 동창회에서 원고의뢰를 받아 쓴
짧은 대학생활기입니다.
어리석은 제 젊었던 모습이 숨김없이 들어있어서 선생님께
보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선생님께 무엇인가를 보낼 수 있도록
선생님 주소도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내내 안녕히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이순구 드림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동창회 60주년 기념문집(2008)
안동대학교 생명자원과학부 식물의학전공
이순구(72학번):
나의 대학생활
브-람스 교향곡 1번
“1972년4월17일, 월요일. 독일어 휴강. 오늘 농대 강당에서 서울시향 연주회 있었다.” 그날의 내 일기장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하여 한 달 보름여 지났다. 우리 입학동기 이전에는 1학년 교양과정부를 서울공대 공릉동 캠퍼스에서 보내었고 우리 동기 이후로는 1학년을 관악 캠퍼스에서 보내었는데, 우리 동기들만 입학식은 지금 대학로가 있는 동숭동 캠퍼스 운동장에서 했고, 수원 농대 캠퍼스에서 1학년 교양과정부터 전공과정 모두(161학점)를 보내었다. 그리고 졸업식은 관악산에서 했다. 말이 서울대학이지 우리는 순전히 수원 역전 농대만 다녔던 셈이다(76학번도 우리처럼 학교 댕겼다고 함). 내가 농대를 지망한 것은 고교시절에 읽었던 류달영 교수의 책들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부산 시내 도회지 한 복판에서 자랐던 나로서는 자연과 전원 그리고 주경야독은 하나의 꿈이었다. 처음에는 원예학과를 생각했었는데 입시 원서를 쓸 때 안내 팸플릿에 있는 각 학과 소개란의 농생물학과 식물병리전공에 써 있는 말 — “도시 출신이라도 잘 적응할 수 있으며 농대 내에서도 가장 아카데믹한 학과” — 에 속아서 입시 원서를 쓰기 직전에 식물병리전공으로 바꾸어 합격했다. 등록금 48,000원 중, 기성회비와 수업료를 면제받고 나머지 2만여 원과 기숙사비 6,000원만 지불했으니 겨우 합격한 것은 아니었다. 하여튼 그때는 우리들 대부분이 가난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더 가난했다. 고3때,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치던 날(1971년11월16일), 아버지가 혼자 배를 타고 거제도에 다녀오신다는 것이 그만 해난사고로 행방불명되신 것이다. 그런 사정을 내가 다녔던 동래고교에서도 알고서는 따로 동창회 장학금을 마련해주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날은 대학축제(상록문화제) 첫날이었다. 정재동씨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곡목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교향곡1번이었다. 그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본 것이다. 교수들과 학생들 모두, 강당에 (엄숙한 표정으로)앉아서 그 연주를 보고 들었다. 나는 줄곧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파트의 어느 예쁜 여자 바이올린 주자만 열렬하게 쳐다보며 그 연주를 들었다. 작곡 스케치에서 완성까지 무려 21년이나 걸려 1876(작곡가 나이 43세)년에 완성한 작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같은 c-단조이고 제4악장 주제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와 그 분위기가 너무나 흡사하다. 어둠(암흑)에서 빛(광명)으로 나아가는 베토벤의 정신적 투쟁의 성격이 진하게 깔려있다. 그래서 한스 폰 뷜러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에 이어질 제10번이라고 말했다. 투쟁, 번민, 위안에 이어 승리, 기쁨을 구가하는 인간승리의 정신(파우스트적인 투쟁). 관현악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란 기치를 들고 나타난 최후의 위대한 에세이라고도 하는 바로 그 곡이다. 그 후, 한창 세월이 지나, 박사학위를 1985년 취득한 후 처음으로 조그만 오디오를 장만한 나는 음반 수집벽에 걸려 거의 강박-편집적으로 이곡의 음반(LP 혹은 CD)을 찾아서 모았다.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이 곡을 듣는다. 내가 더 이상 이곡을 듣지 않을 때가 바로 나의 죽는 시간이 될 것이다. 거의 서른 장 이상의 연주음반을 가지고 있지만 대학 1학년 그때, 농대강당에서 들었던 그 연주만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나의 원초적 음악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농대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학내 동아리(그때는 써클이라 했다)활동 소개에 당시 농생물과 4학년인 이찬복 형이 MLS(Music Love Society)이라는 치졸한 이름의 써클을 소개하면서, 입으로(허밍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줄줄 부르는 것을 보고 놀라 자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형한테서 식물병리전공이 뭐하는 학과냐고 물었더니, 순전히 곰팡이 하는 학과라고 했다. 하기사 식물병의 거의 70-95%가 곰팡이류에 의해 일어나기에 그런 대답도 타당하지만 나는 금방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학교 옆에 있는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그때는 농업기술연구소라 불렀다) 병리과 과장으로 계신 고등학교 선배님(무려 18년 선배)인 벼 바이러스병 연구가인 정봉조 박사님께 물었더니 ’식물의사‘라고 하셨다. 바로 그 정봉조 선배님이 자기 동기이며 학과 교수로 계신 조용섭 선생님께 나를 부탁해서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전공 학문과 실험 등에 가까이 접근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학과내 여러 선생님들의 촉망과 관심을 거의 독점적으로 받았다. 미생물학, 균학I, II, 균병학I, II, 식물분류학 및 수목학, 작물육종학 수업이 나에게는 가장 재미있었던 수업이었고 그 과목들의 학점은 모두 A+를 받았다. 그러나 교련은 정말 하기 싫어서 D를 받는 수치도 겪었다. 나는 대학 입학초기(3월15일)에 부산고교를 나온 학과 선배인 손재만 형(그 형이 당시 교장으로 있었던)으로부터 서둔야학 교사로 봉사활동해보길 권유받고 1학년 말까지 두 학기 동안 그 일을 했다. 그리고 졸업후 장래 희망란에 농촌 중고교 교사가 되기를 써놓고 꿈꾸어 보았지만 이루지 못하고, 대신 지금 내 자식이 그 일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그때 내가 가르쳤던 남학생중 한 명이 내 e-mail주소로 간곡한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때 부산에서 내가 부친 편지를 첨부파일로 보내면서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다 나와서 지금은 용인 시청에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독일어가 무척 재미있어서 대학에 들어와서도 그 수업을 무척 좋아했는데 마침 그 수업의 강사 선생님이 독문학 번역가이자 시인이시며, 클래식 음반 해설가이신 송영택 선생님이셨다. 수업 첫 시간은 신원조회를 해서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놈들(부산고, 경남고, 동래고)은 무조건 학점을 A+주시는 바람에, 나는 독일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원 박사과정 시험(입학 및 졸업)칠 때 제2외국어를 독일어로 선택해서 큰 덕을 보기도 했다. 딸이 영어교육과 다닐 때 독문과에 가서 제2전공으로 독일어를 공부하라고 강요할 정도로 지금도 나는 독일어-독문학을 좋아한다. 이렇게 나는 좋은 선배님들과 선생님들을 대학에서 만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살았다고 이 연사 큰 소리로 외칩니다.
첫댓글 오고가는 아름다운 마음들^^* 글들이 이렇게 오가는 모습이 참 경이롭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닿을 수 있다는것이...
안녕하십니까. 저희 아버지는 손재만(70학번)이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자료들이 있을가 하여 검색중에 이순구님의 글을 보니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가 우연히 있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아버님이 99년에 돌아가셨는데.. 학창 시절의 아버님의 일화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됩니다.
위의 글을 쓰신분이시라면 기억나시는 사항이 있으시면 듣고 싶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