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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유적답사 및 관광코스
제 1 코스(화개산 등반 소요시간6시간)
월선포→비석군→교동향교→화개사→부근당→교동읍성→교동도호부지→철종잠저소→동진나루→사신당(사신등선로)→경기수영→영산골한증막→화개산성약수→화개산성→화개산봉수대→구향교터→고구저수지→형옥지→고읍성→고목근현지→경원전지→낙두포→호두포→신골(연산군유배지)
제 2 코스(화개산등반 외 소요시간 6시간)
월선포→비석군→교동향교→화개사→부근당→교동읍성→교동도호부지→철종잠저소→동진나루→사신당→경기수영→조개맨들→황경례정려문→망부석→말탄포→난정저수지→망향단→북진나루→미륵불→회나무 와 굴깍지바위→고구저수지→고읍현터→고읍성→형옥지→경원전지→낙두포→호두포→신골(연산군 사지)
교동의 오늘 과 내일
경기만 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는 서쪽으로 황해 바다와 서북간에 해주와 연안 동북간에 배천과 개성 동남간에 서울 인천을 끼고 있는
유래없는 역사적 유적이 풍부한 삼각구도의 도서이다. 또한 그 형국이 어머니 품안에 안 긴 영아와도 같아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자연재해란 전연 모르는 아늑하고 조용한 살기좋은 섬이기도 한다.
이 섬의 조산인 화개산은 동남쪽으로 자리하
고 서쪽으로는 수정모양의 수정산 서북쪽으로
는 날으는 학의 모습을 한 선월산 북쪽으로는
밤의 머리와도 같다는 율두산 동쪽으로는 점잖은 모습의 왕봉산 남쪽으로는 경치 좋은 남산(진망산)이 섬 주변을 둘러싸고 섬 중앙부 는 넓고 넓은 교동평야가 끝도 모르게 펼쳐져 서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화개산은 그 모습이 바로 뚜껑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옛 선인들이 빛나는 뚜껑이라는 뜻으로 화개산(華蓋山)이라 명명한 것 같다.
남쪽에서 화개산을 쳐다보면 마치 이 섬에 사 는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주며 허물을 막아 주 는 큰 뚜껑이 덮여 있는 것 같고 서쪽에서 바 라보면 교동평야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쌓아 두었다가 교동주민의 양식으로 제공하는 노적 봉과도 같은 형상이다.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한 눈에 북쪽으로 바다 건너 연백평야가 펼쳐
지고 동북으로 개성 송악산 봉오리가 손에 잡
힐듯이 안전에 전개된다.
가까이는 교동도 전체가 조망되어 옛 읍 자리 와 인진나루에서 건너오는 길목으로 추정 되는 왕족들의 유배지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뿐만 아니라 교동읍성과 남산포(월곶진터) 수군 훈련장 그리고 망망대해 황해의 끝없는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한양에서 강화를 거쳐 황해에 이르는 수로도 좁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 같다. 눈앞에는 마치 수도권의 관문으로 수문장을 상징하는 삼지창 모양의 매녀(鷹岩)가 바다 가운데 떠 있고 교동에 전기를 공급해 주는철탑이 서 있기도 하다. 교동은 원래 이름이 대운도(戴雲島)라 하였다. 그 유래는 화개산 정상이 편편하여 평소에 구름이 낄때면 마치 구름을 떠안고 있는 형국 같아서 대운산이라 했고 대운도라고 명명한것 같다. 그리고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이라 불렀으나 고구려때 비로소 현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喬桐縣)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림,고목근,교동등 모두 높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 일맥상통한 점이 있는데 하늘에 닿은 아주 높은 곳이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고시대의 교동은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을 중심으로 3개의 섬이었는데 오랫동안의 갯벌 충적으로 한 개의 섬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과 같이 옛날지도에는 무학리에서 부시미산까지 인사리에서 부시미산까지 바닷물이 이어진 것이 대략 나타나 있으며 교동평야의 조수가 흘렀으리라 짐작되는 곳과 다른 곳의 지질이 완전히 다르다. 개삼이 벌과 쑥밭들이 중앙지대의 흙과 염분을 많이 함축한 로토(鹵土)로 되어 있음을 보아 그를 증명한다.
오랜 세월 한강 임진강 예성강에서 흐르는 물에 따라 충적된 갯벌이 쌓이고 쌓인 충적토로 교동평야가 이루어 졌는데 역사적으로는 고려때 비로소 축동이 완공되어 완전한 농경지를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영농법이 건답직파 일변도였기 때문에 소출이 적고 묵는 땅이 많았다.
1972년 이래 전기가 들어와서 지하수가 개발되고 또한 두 개의 저수지가 완공되고 경지정리가 잘 되어서 기계화된 영농기술로 전 보다 몇십 배의 생산고를 올리게 되니 육지에서도 보기드문 곡창지대로 뽑히게 되었다. 따라서 농가소득의 증가는 자연 생활수준이 제고 되고 도시에 못지않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원래가 문향이었던 까닭에 향학력이 대단해서 현지 교육기관은 물론 경향각지의 대학진학으로 자녀 교육을 위해 경인지방에 주택을 안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풍요와 향학력은 바로 교동의 훗날 발전을 말해 주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교동은 지금 전체 도민이 꼭 한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첫째도 연육교요 둘째도 연육교의 실현이다. 교동에 연육교가 가설되어 강화와 연결만 된다면 서울 인천까지 한 시간 거리의 수도권에 진입하는 것이다.
훗날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서 연백과 교동간에 연육교가 가설되면 교동은 그야말로 물류의 허브가 되고 남북간의 가교역할을 충분히 하게 될 것이다. 그 옛날 고려때 중국과의 교역이 성행 했을 때 교동이 물류중심지가 되었던 것처럼 인적 물적으로 남북 교류의 중심이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희망을 갖고 교동의 앞날을 축복으로 맞이하자.
(필자 : 이강성)
교동의 연혁
상고시대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 달을신(達乙新)
고구려시대
혈구군에 속하는 고목근현으로 호칭 장수
왕 63년-475년에 고목근현이 됨
통일신라시대
9주 중 한주(漢州)에 속함
해구군(강화군)에 속하는 3현 중 하나인
교동현(경덕왕16년-757년 행정구역 개편
에 의함)으로 개칭
고려시대
5도(五道) 양계(兩界) 중 양광도(楊廣道)
에 속함. 강도군의 3현 중 하나인 교동현
으로 호칭
조선시대
8도(八道)중 경기도에 속함
-1627년(인조7년)남양부 화량진으로부터 겅기수영을 읍내리로 이전. 교동부로 승
격 현청을 읍내리로 옮김
-1633년(인조11년) 삼도통어영 설치 삼
도 통어사를 둠
-1895년 강화군으로 편입
-1896년 교동군으로 복귀
강화군 교동도 관광 안내
(문화재 유적지 명승지 일람)
교 동 향 교
교동도 문화재, 유적지, 명승지
1. 교동향교
가. 노룡암
나. 하마비
다. 구 향교터
2. 화개사
3. 비석군
4. 부근당
5. 문무정
6. 교동읍성
7. 교동부지
8. 철종 잠저소
9. 교회 발상지(교회옛터)
10. 성공회 성당 옛터
11. 연산군 적거지
12. 교동에 유배된 왕족
13. 열무당지(교동초등학교 시발지)
14. 삼도 수군 통어영지
15. 사신 등선로
16. 사신 관지
17. 사신당
18. 완초공예품 원산지
19. 응암
20. 화개 서재
21. 단묘
(사단,여단,독신각,기우단)
22. 동진나루
23. 사원지
(갈공사,안양사,화암사,월정사)
24. 봉수대
25. 화개산성
26. 효자묘
27. 고목근현지
28. 고읍성
29. 경원전지
30. 고읍형옥지
31. 현관분묘군
32. 조개맨들
33. 한증막
34. 빙고지
35. 고구저수지
36. 낙두포
37. 호두포 나루
38. 청주펄
39. 회나무와 굴깍지바위
40. 북진나루 돌미륵
41. 망향대
42. 무서산지
43. 난정저수지
44. 말단포 와 월미정
45. 돈지미마을
46. 망부석
47. 황경례 정려
48. 갑산창지
49. 월선포
50.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터
51. 부시미산
52.기반식 지석묘
53. 교동 온천
54. 약수
55. 교동 팔경
56. 신 교동 팔경
1. 교동향교(喬桐鄕校)(지방유형문화재 58호)
소재지 : 읍내리
유적내용 : 고려 인종5년(1127) 각주에 향교가 설치 될 때 이곳도 화개산 북쪽 구 향교골에 향교가 설치 되었다. 충렬왕 12년 (1281)유학제거 문성공 안유(安裕)가 그의 제자 김문정(金文鼎)을 시켜 원(元)나라에 가서 공자상과 그 제자 의 상을 모셔 오는 길에 교동에 들렸을 때 향교에 문묘초막을 짓고 봉안한 것이 이 나라 문묘의 시초이며 그 후 전국으로 설치 됨. 때문에 교동향교는 전국의 수묘(首廟)가 된 것이다. 조선 영조 17년(1741)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록에 있던 것을 남록인 현 위치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로룡암(老龍巖) : 교동부 동헌(東軒) 북쪽뜰 층계밑에 있었
는데 겸부사인 충민공 이봉상(李鳳祥)이 명명하였고 손자 이달해(李達海)가 찬각 하였다. 현재 향교 뜰에 보존 돼 있다.
하마비(下馬碑) : 수령이하개하마(首令以下皆下馬)라 쓰여 진 하마비가 향교 앞에 세워져 있다. 원래 위치는 읍내리 북
문 밖이었는데 보존상태가 부실하여 향교 앞으로 옮겼다.
지금도 북문밖의 함앞 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하마비 앞이라 는 뜻이다.
구향교골 : 화개산 북록 현 예비군 훈련장 위쪽으로 가면 축대가 있고 향교터가 나온다.
2. 화개사(華蓋寺)(비지정문화재 210호)
소재지 : 읍내리
유적내용: 전에는 화개암(華蓋庵)이라 불렀고 고려 때 목은 이색(1328-1396)선생의 독서처로 유명하다. 목은 이색선생은 고려의 충신이며 성리학자로 유명하며 교동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특히 화개산을 전국의 8대 명산중 하나 로 찬양하였다. 고려때 유물로는 부도 1 기가 있을 뿐이다.
3. 비석군(碑石群)
소재지 : 읍내리
읍내리 어귀의 비석거리에 있었으나 새마을운동 당시 남산포 길가로 옮겼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39기 비석 대부분이 겸부사(兼府使)의 선정비이며 그 중 거사대(去思臺)라는
특별한 양식의 비가 3 기 포함되어 있다.
4. 부근당(扶芹堂)(비지정문화재 209호)
소재지 : 읍내리
고을 수호신을 모신 곳으로 탱화 1장과 남근목 3개가 보존 되어 있다.
일설에는 탱화가 연산군과 그의 비 신씨의 화상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연산군이 사망 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당을 짓고 해마다 굿을 했다고 전한다.
5. 문무정(文武井)
소재지 : 읍내리(화개산 남록)
화개산 남록 화개사위쪽 100m 지점에 돌무더기가 있는데 동쪽이 문정 서쪽이 무정이라고 하여 합쳐서 문무정이라고 한다. 이 곳은 많은 전설을 낳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예로 문무정 샘이 넘쳐 흐를 때면 이 지역에 문무양재(文武良材) 현관귀직(顯官貴職)이 다수 배출 됐으나 샘이 마른 후로는 인재가 끊어졌다고 한다.
6. 교동읍성(喬桐邑城)(지방문화재 56호,기념물 23호)
소재지 : 읍내리
유적내용 : 조선조 인조 7년(1629) 수영이 설치되었을 때 축조된 것으로 둘레는 305m 높이는 2.4m 옹성(甕城) 세곳 치첩(雉堞) 네곳이 있고 동,남,북에 3개 문이 있다. 문마다 누각이 있는데 동문에 통삼루(統三樓)북문에 공북루(拱北樓) 남문에는 유량루(庾亮樓)가 있었다.지금은 남문에 홍예만이 남아 있다.
7. 교동부지(喬桐府址)(비지정문화재 203호)
소재지 : 읍내리 267-1
유적내용 : 태조 4년(1395) 월곶진(月串鎭)을 설치하여 만호겸지현사(萬戶兼知縣事)를 두었다가 그 후 현으로 승격 현감을 두었다.
인조 7년(1629) 화량(花梁)(영흥도)으로부터 수영을 월곶진으로 옮겨 오면서 교동부로 승격된다. 4년 뒤 인조 11년에 3도(경기,충 청,황해) 수군 통어영이 설치되어 부사로 도호부사 수군절도 사 겸 3도 수군통어사가 도임한다. 부에는 근민당(정아) 응수 당(정당) 백화당(비장청) 안해루등이 있었고 지금은 누각석주 (樓脚石柱) 2개만 남아 있다.2개는 교동보통학교 교문으로 사 용하다가 교동초등학교 동편 공원에 보존되어있다.
8. 철종 잠저소(哲宗潛邸所)
소재지 : 읍내리 270
유적내용 : 조선조 25대 철종(1849-1863)은 어릴적에 강화읍 내수골 초가집에서 아버지 전계군(全溪君)과 살았는데 조부 은언군(恩彦君)이 야소교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피살되자 13살 되던 헌종 10년(1843) 3개월간 교동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다시 강화로 가서 얼마후에 보위에 올랐다
9. 교회 발상지(敎會發祥地)(교회옛터)
소재지 : 읍내리
유적사유 : 1899년 강화홍의교회 교인인 권신일권사(당
시55세)가 처음으로 복음을 교동읍에 전하면서 세워진 교회였는데 1933년 박성대 박형남부자의 주선으로 상용리로 이설 되었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다.
10. 성공회 성당 옛터
배천교회 이의경 전도사가 1911년 인사리 선착장에 민가를 빌어 전도를 시작한 것이 교동성공회의 첫 출발인데 그 후 각처에 교인들이 증가하여 1922년 읍내리에 새 회당 을 건립할 것을 협의 결정하고1924년 10월1일 즈마가 주교 가 읍내리에 건축된 새 회당을 축성 하였다. 지금은 옛터만 남아 있다.
11. 연산군 기거지(비지정문화재 207호)
소재지 : 읍내리 273
유적사유 :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연산군(1494-1506)은 교동으로 유배되어 그 해 11월 전염병으로 사망 하였다.
일설에는 연산군 당시의 현청은 고읍리였고 예전의 뱃길은 강화의 인진나루(인화리)와 교동의 호두포였으므로 현읍과 나루터 근처에 폐군을 감시하기 좋은 곳으로 신골(봉소리)을 택했다는 설이 있다.
12. 교동에 유배된 왕족들
○ 희종(1181-1237)-고려 21대 왕
최충헌에 의해 1211년 왕위를 쫓겨나 처음 강화에 유배 되고 1215년 자연도(영종도)를 거쳐 교동에 유배 된 후 복위 운동을 펼치다가 1227년 다시 교동에 유배 되어 사망(고읍리)
○안평대군(1418-1513)-세종의 3남
1453년 계유정란때에 세조에 의해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어 사사됨(고읍리)
○임해군(1574-1609)-선조의 첫째 서자
1608년 광해군에 의해 처음 진도로 유배되고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가 1609년 사사됨
ㅇ 능창대군-인조의 동생으로 이름은 전(佺)
어려서부터 총명한 것을 시기하던 광해군이 장차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명국의 무고로 광해군 7년(1615) 교동에 위리안치 그 해 11월 거처에 불을 질러 살해 하였다.
○광해군(1575-1641)-인조반정
(1623년)에 의해 폐위되어 처음 강화도에 유배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태안으로 옮겼다가 난이 평정되자 강화도로 다시 데려옴
1636년 청나라가 처 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자 다시 교동으로 보내졌다가 1641년 제주도에서 사망
○승선군-인조의 5남
1651년 무고로 1652년 처음 강화에 안치 되었다가 다시 교동으로 안치 1656년 석방 됨
○익평군-철종의 4촌
상계군(常溪君) 담(湛)의 아들로 헌종 12년(1847)교동에 유배 됨
○이준용(1870-1917)-흥선대원군의 손자
1895년 법무협판 김학우의 피살사건에 연루되어 교동에 유배 되었다가 2 개월만에 석방됨
13. 열무당지(閱武堂址)
소재지 : 읍내리
유적내용 : 읍내리 남문밖에 사창마을이 있었는데 조선시 대 군대를 조련하던 곳이었으나 1906년 화농학교 건물로 사 용 하였다. 화농학교는 현 교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4. 삼도수군 통어영지(三道水軍統禦營址)
소재지 : 읍내리 남산포
유적내용: 읍내리 앞바다에 있는 응암바위에서 남산포 해안선 일대가 옛 월곶진지(月串鎭址)였으며 수영이설 이후는 동편이 군항으로 서편이 주사조련장(舟師操練場) 이었다 한다
지금도 군함을 묶어 두던 계류석이 보존되어 있다.
15. 사신등선로(使臣登船路)
소재지 ; 읍내리 남산포
유적내용 : 고려시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배에 오르고 내리던 선착장인데 해변암석이 마치 계단모양으로 되어 있고 징으로 다듬은 자욱이 역력하다.
16. 사신관지(使臣官址)
소재지 : 읍내리 남산포(대빈창)
유적내용 : 고려때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숙박하던 곳이며 이곳에서 적어도 1 주일이상 묵으면서 날씨를 보고 중국행을 결정 하였다고 한다.
17. 사신당 (使臣堂)
소재지 : 읍내리 남산포(대빈창)
유적내용 : 고려때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무사 여행을 기원하던 곳. 당집에는 임경업(林慶業)장군의 화상이 모셔 있고 지금은 근처 어부들이 풍어를 빌면서 해마다 굿을 한다.
18. 완초공예 원산지-읍내리
교동은 조선조 후기부터 골풀로 된 공예품이 교동의 특산물로 유명하였는데 그 원산지가 바로 읍내리였다.
당시에는 골풀로 제작한 화문석, 화방석, 꽃송듸등 수공예 제품을 다량 생산하였으나 그 후 왕골제품으로 대체 됐으며 현재 완초장으로 중요문화재 제 호가 된 읍내리 출생 이상재(李祥宰)는 완초공예의 일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 응암(鷹岩)(매녀)
소재지 : 읍내리 앞바다
유적사유 : 기암괴석(奇巖怪石)이 해중에서 솟아 오른듯한 형상이며 높이는 수10장 둘레는 1 리 미만이다. 가팔라서 정상에 오르기 힘들고 섬 전체가 석영석(石英石)이어서 유리 원료로도 쓰여 졌다. 조수가 밀물때는 섬자체가 적을 소(小)자로 변하고 썰물때는 뫼산(山)자로 변하여 마치 날으는 매의 형상과도 같으며 삼지창(三指槍)의 모습과 같아서 서해를 지키는 수도권의 수문장을 상징하기도 한다.
1972년 이섬에 전기철탑이 세워졌다. 매녀에 달이 뜨면 너무나 아름다워 교동 8경의 하나가 되었다.(鷹岩賞月)
20. 화개서재(華蓋書齋)
소재지 : 읍내리 화개산 남록
유적내용 : 읍내리 화개산 남록에 서사니골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고려 때의 서재터였으며 당시의 고관이었던 서상서 (徐尙書)가 수장하던 곳이라 해서 그 지명이 유래된다.
이 밖에 봉소리에도 서재마을이 있는데 서재란 원래가 사립교육기관이어서 이곳에는 신천영(申天榮)이란 분이 서재를 세워 자녀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라 한다.
21. 단묘 (壇廟)
가. 사단(社壇)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제사하던 곳이나 백성 들의 복을 빌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왕이 처음 사직단을 세웠다고 전한다. 고구리 북쪽 구산부 락에 있던 사단을 철종3년(1852) 진망산(남산) 북쪽으 로쪽으로 옮겼다.
나. 려단(厲壇)
독신이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하던 곳으로 고읍리에 있던 것을 철종3년(1852) 향 교 동쪽으로 옮겼다.
다. 독신각(纛神閣)
꿩의 깃털로 만든 군중(軍中)의 큰 기를 제사하던 곳으로 진망산(남산) 동쪽에 있었다.
라. 기우제단(祈雨祭壇)(기우제를 지내던 곳)
냉정단(冷井壇)(화개산 서정상) 진망단(鎭望壇)
(진망산-남산) 마재단(馬載壇)(매시리마재단) 화개단 (華蓋壇)(화개산정상) 율두단(栗頭壇)(율두산) 수정단(水晶壇)(수정산) 상주단(上主壇)(상주산)
22. 동진나루(동진포)
교동읍이었을 때 서울 인천 해주로 통하는 항구이었다.
동진송객(東津送客)이라고 해서 교동 8경의 하나로 꼽힌다.
지금도 돌로 쌓은 선창이 남아 있다.
23. 사원지(寺院址)
가. 갈공사터(고읍리) : 화개산 북록에 있으며 목은 이색 선생의 독서처라 한다.
나. 안양사터(상용리) : 화개산 남록에 있으며 약수터로도 유명하다. 전에는 숲이 우거져서 절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쌀뜨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비로소 절이 있음을 알았다 한다.
다. 화양사터(지석리) : 돌곶리(乭串里) 화양동(華陽洞)에 있었는데 절의 규모가 몹시 컸던 것 같다. 전에 석탑이 있었
으나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으며 샘은 여전히 잘 흐른다.
라. 월정사터(일명 법정사) : 상방리 법쟁이 산기슭에 있었는데 지금도 자리가 역연하다.
그 밖에 교동에는 고려때 많은 절이 있었는데 옛 절터로 봉소리에 2 곳, 상용리에 1 곳, 빈장산에 1 곳, 고구리에 1 곳이 있다.
24 봉수(烽燧)
옛날 변경에 이변이 있을때 봉화를 올려 급변을 통보하는 장치로서 화개봉수, 수정봉수, 진망봉수 세 곳이 있었으나 지금 은 화개봉수만 남아 있다.
25.화개산성(華蓋山城)(비지정 204호)
소재지 : 고구리
유적내용 : 축조 연대는 미상이나 구 현감이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고구려나 백제 때 축조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선조 명종 10년(1555) 왜변을 당하여 현감 최제운이 성을 개축했다고 하며 선조24년(1591)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헐어 읍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산성주위가 10 정, 21 칸, 6척(약 2km)이며 높이는 3 장(5m)이고 석성이라고 국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성안에는 연못이 한 곳, 샘이 한 곳, 군창(軍倉)이 한 곳 있다고 하였다. 샘 한 곳이 바로 지금 유명한 교동약수인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광개토왕과 관미성(關彌城)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392년 7월에 광개토왕이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개 성을 뺏었다.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공함(攻陷) 하였다. 그 성은 사면으로 초절(峭絶)(가파르다)하고 바닷물로 둘려 있는데 왕이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 하였다.”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를 국역한 이병도박사는 관미성은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백제성 이름중의 각미성(閣彌城) 그것이 아닌가 한다. 각(閣)과 관(關)은 글자모양도 비슷하고 음도 비슷함으로 혹 혼용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성이 지금 어느 곳인가에 대하여 나는 일찍이 경기만의 교동도에 비정한 일이
있다. 교동은 고구려 소유시대에는 고목근현이라 하였다. ‘고목’은 ‘고마’ ‘고무’의 사음(寫音)으로 ‘간미’ ‘각미“ 와도 상관이 있는 말인듯 하며 더욱 그 지리로 보아 양자의 비정을 가능케 한다. 이 섬의 유명한 ‘화개산성’은 후세에 개수를 많이 거친 것이지만 백제 고구려 이래의 고성일 것이다.(이형석 제공)
26. 효자묘(孝子墓)
소재지 : 고구리(화개산)
유적사유 : 누구의 분묘인지 미상이나 효자되는 분이 하루 도 거르지 않고 참배한 것이 역력하다. 갓, 양손, 양무릎 자국
이 또렷하며 찾는 사람들도 누구나 한번씩 참배하는 것이 예사로 되어있다.
27. 고목근현지(高木根縣址)
소재지 : 고구리 283-1
유적내용 : 교동은 고구려 때 처음으로 고목근현이 설치
되었고 신라 때에는 교동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때는 감무 를 두었고 조선조 인조 7년 이전까지 읍 이였고 인조 7년에 읍이 현 읍내리로 이전했다. 관아터는 토성으로 둘려 있고 동헌(東軒)터 앞에는 1500년으로 추정되는 무풀레나무 고목이 아직도 싱싱하게 살아 있다. 동헌 우측에는 연못자리가 움푹하게 파져 있고 동쪽에는 부근당 자리가 있다.
28. 고읍성(古邑城)
소재지 : 고구1리
유적내용 : 고구려 신라 고려에 걸쳐 읍이 있던 곳으로 둘레가 1171m로서 일부 석축과 성문터가 남아 있었으나 경지정리공사 때 많이 훼손되고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29. 경원전지(慶源殿址)
소재지 : 고구1리 206
유적내용 : 고려21대 희종(熙宗)(1181-1237)이 권신 최충헌에 밀려 교동으로 유배되어 기거하던 곳이라 한다.
희종은 1211년 왕위에서 쫒겨나 1215년 교동으로 유배 되었
고 다시 1227년 또 교동으로 유배 되었다. 능은 강화에 있는
석능(碩陵)이다. 추정되는 전각지(殿閣址)에는 주초석과 축대 등이 남아있고 천 년된 느티나무 와 대나무 숲도 있다.
30. 고읍형옥지(古邑刑獄址)
소재지 : 고구1리 산 112
유적내용 : 오늘날의 형무소와 비슷한 감옥으로 죄인을 수
용하였으며 황해도의 죄인도 이송 수감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일명 감옥서지라고도 한다.
31. 조선조 현관분묘군(朝鮮朝 縣官墳墓群)
소재지 : 상용리
유적내용 : 조선시대의 이름난 인물들의 무덤들이 교동에 집중되어 있다. 대사간 전사안과 감찰 황태빈의 무덤은 지석 리 염주동에 있고 습독관 김현 영릉참봉이며 이황(이퇴계)의
친구인 김봉상, 경산현령 김구상, 군위현감 김경선, 습독관 전윤서, 남부령 전거 의 무덤은 화개산 북대우동에 있고 제흥
군 고언백의 무덤은 수정산에 있다.
정사공신 황경기 진무공신 황후헌의 무덤은 봉소리에 있고 그 외에 충신 황경례 도사 안여지 지평 전광서 권득평의 무 덤등도 있다.
32. 조개맨들(貝塚)
소재지 : 대룡리
유적내용 : 대룡리 해안쪽 들을 조개맨들이라고 하고 현재 논둑과 논바닥에 대형 대합의 패각과 소라 굴껍질이 흩어져 있는 속에서 풍납동식 경질 무문토기조각과 승석문 타형문의
원삼국시대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33. 한증막(汗蒸幕)
소재지 : 고구리 영산골
유적내용 : 조선조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찜질방의 원조라 하겠다. 교동에는 각처에 한증막이 산재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문화생활을 엿볼 수 있다.
34. 빙고지(氷庫址)
소재지 : 고구리 빙고채
유적내용 : 고구리가 읍 이었을 때 얼음저장고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 된다.
35. 고구저수지(古龜貯水地)
소재지 : 고구리
사유 : 교동평야를 적셔주는 대 저수지로 77년도에 준공 되었고 저수지 면적은 89ha 몽리면적은 769ha 이다.
주위 경관이 아름답고 근처에 유적지도 많다.
36. 낙두포(落頭浦)
소재지 : 고구1리
유적내용 : 본도 북단에 위치하며 고읍의 문호였고 예성강 병난도로 통하는 길목이며 고려 때 중국과의 물류중심 포구 였다. 고려 때 개경을 내부(內府) 교동을 외부(外府)라고 한 것도 낙두포로 인해서이다. 교동지에 의하면 본군은 경도(京 都)의 지근 하류에 위치하여 수륙 운수가 편리하고 조세(漕稅 )를 날으는 선박 장사치 (상고)(商賈) 등으로 붐볐고 조정선비(朝士) 부호 등이 많이 기거한 곳이다 라고 적혀 있다.
37. 호두포 나루
호두산을 끼고 있는 포구로 강화 인화리와 직결되는 나루터이다. 지금은 휴전선으로 해서 교통이 막히고 있으나 예전에는 강화로 가는 주요 포구이며 연산군도 이 포구로 해서 교동으로 건너 왔다는 것이다. 앞으로 연육교 후보지로 유망시 되고 있다.
38. 청주펄(靑州邑)
소재지 : 봉소리 앞바다
전설내용 : 청주펄은 매시리 앞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옛날에는 이 고을에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부자들은 모든 사치를 다 했으며 교동까지는 놋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
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이 어쩌다 시주를 오면 너무나 인색해
서 오물을 퍼 주거나 쪽박을 깨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 에 할머니 한 분이 스님에게 정성껏 시주를 하였는데 어느날
폭풍우가 밀어 닥쳐 청주펄이 물에 잠겼을 때 그 할머니 만이 살아서 연백으로 건너갔다 한다. 지금도 연백땅에 있는 고
미포라는 포구 지명은 그 할머니로 인해서라 한다.
39. 회나무 와 굴깍지바위
소재지 : 삼선리 안골
유적내용 : 예전에 삼선리 안골은 동네 앞까지 조수가 들 어 왔고 회나무 밑에는 굴깍지 바위가 있는데 지금은 굴깍지 가 붙어있던 흔적만 보인다. 전에 회나무 밑에서는 출어하기
전에 당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옆에 바둑판식 지석
묘(?)가 있는데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40. 북진나루와 미륵불상
소재지 : 인사리
유적내용 : 북진나루는 교동북쪽의 주요포구로 봉이가미를 건너 연안으로 가는 길. 강화 개풍을 지나 한강 마포로 가는 길. 갑곶(甲串)으로 해서 인천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교동읍지를 보면 북진나루터에서 봉이가미까지 조선조 선조
2년(1569)에 13년간 육지가 형성되어 인마가 통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북진나루터 위쪽 인현산 기슭에 바다에서 떠 내려온 돌미륵이 모셔져 있는데 하반신 부분은 연꽃 같아 마치 물에 떠 있는 미륵의 모습을 표현 한 것 같다.
41.망향대(望鄕臺)
소재지 : 지석리
내용 : 교동 북쪽 해안의 언덕에 위치한 곳으로 좁은 비탈 길목 건너에서 황해도 연안읍이 손에 잡힐듯이 가깝게 보인
다. 연백군등 황해도를 고향으로 하는 실향민들이 1960년에 이곳에 망향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이면 제를 올린다.
42. 무서산리(舞鼠山里)
소재지 : 무학리
전설내용 : 이 마을은 작은 산 넷으로 이루어져서 멀리서 보면 쥐 네 마리가 움직이는 모양을 해서 무서산이라고 한다.
당두동산과 전동산은 새끼 쥐이고 마파동산 과 구룡동산은 어미쥐 같이 보이는데 마치 두 새끼 쥐가 어미를 따라가는 형국이다. 그리고 서월산은 노적봉이고 묘산(고양이산)은 고양이 모습인데 쥐(무서산)가 노적(서월산)으로 가고 있으나 고양이가 지키고 있고 또한 그 고양이가 쥐를 보고도 바닷물 때문에 오지 못하므로 쥐는 좋아서 춤을 춘다 하여 무서산이 라 하였다고 한다. 무학리 서북땅 연백군과 경계지점에 있는
역기도(域岐島)는 무학리 산 1번지이다.
43. 난정저수지(蘭井貯水地)
소재지 : 무학리
내용 : 교동평야의 거의 50 %를 적셔주는 난정저수지는 인공호수로서 앞으로 관광명소가 될 전망이 밝은 곳이다.
저수지 면적은 118.89ha 이고 2006년도에 완공 되었으며 몽 리면적은 1070ha 이다.
44. 말단포 와 월미봉
소재지 : 서한리
유적내용 : 교동의 서북단에 있는 포구이며 말탄이란 맨끝 부분에 있는 여울이란 뜻이다. 말탄포 앞바다는 서해의 큰 어 장이었으므로 어선들이 몰려들어 어시장을 이루었다 한다. 또한 월미봉은 고려때 중국 상선들이 기착하던 곳이라고 한다.
45. 돈지미마을
소재지 : 동산리
유적내용 : 고려말기 왜구가 자주 침입하였는데 이곳에 진
을 치고 수비하던 곳이다.
46. 망부석(望夫石)
소재지 : 동산리
유적내용 : 1720년 숙종 때 머르뫼 조골의 조장군 묘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후 자손이 없어 여러곳으로 이동되면서 많은 전설을 낳고 있다.
47. 황경례공정려(黃景禮公旌閭)
소재지 : 양갑리 236-2
유적내용 : 이 정려는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반란군
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순절한 교동 출신의 무관이며 선전관
이던 충신 황경례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이다. 증손 양신이 왕에게 진언하여 정문을 하사 받았다.
48. 갑산창(甲山倉)
소재지 : 양갑리
유적내용 : 고려말기 서갑리(지금의 북갑리)에 둔전(屯田)
이 있었는데 둔전에서 수확한 군향미(軍饗米)를 저장한 갑산
창이 있던 곳이다. 그 터가 지금도 창터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49.월선포(月仙浦)
소재지 : 상룡리
유적내용 : 선멀 앞에 있는 주요포구. 달밤에 멀리서 바라
보면 고요한 바다위에 둥근 달이 비치어서 바닷물 속에도 달 하늘에도 달 겸하여 노송이 물위에 비치니 그 광경이 달의 신선이라 하여 월선(月仙)이라 하였다 한다.
50.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터-상용리
송암 박두성 선생은 세칭 훈맹정음(점자)의 창시자로서 생가가 바로 상룡리 뱃선멀에 있다. 이분이 만든 점자로 해서 시각장애자는 모두 눈을 뜨게 되었으니 얼마나 위대한 공로인가.
51. 부시미산(富示米山)
소재지 : 대룡리
유적내용 : 읍내리 용정우물에서 용마가 튀어 나와 부시미쪽으로 떨어져 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부시미산 모양은 마치 말머리처럼 생겼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52. 기반식 지석묘(碁盤式 支石墓)
소재지 : 화개산 정상, 금성산 정상
유적내용 : 화개산 정상과 금성산 정상에 바둑판 모양의 구멍이 바위위에 새겨져 있는데 마치 별자리 모양 같기도 하고 바둑판 모양 같기도 하다. 어느 때 조각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기반식 지석묘인지 연구대상이다.
53. 교동온천-상룡리
상룡리 뱃선멀 교동교회 바로 아래쪽에서 섭씨 30도의 온천수가 용출하고 있다. 피부병 기타질환에 특효가 있다고 하며 지금은 창후리로 날라다가 일반에게 제공하고 있다.
54. 약수-교동에는 수많은 약수터가 있는데 알려진 약수터를 소개한다.
①화개산 산성약수
화개산성 안에 있는 이 약수는 바위틈에서 용출하며 각종 질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②성전약수
교동향교 대성전 밑에서 나오는 성전약수로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③수정약수
수정산 서쪽 정상에 있으며 수량은 많지 않으나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④안양사지 약수
화개산 남쪽 안양사터에 있는 이 약수는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⑤선월산 약수
무학리 선월산에 있는 약수로 수질이 좋고 물맛이 좋다
⑥냉정약수
화개산 서쪽 정상에 있는 이 약수는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단오날에는 인근 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55. 교동8경(喬桐八景)
① 동진송객(東津送客)
읍내리 동진포에서 손님을 배웅하는 모습이 아릅답다.
② 북문관가(北門觀稼)
읍성 북문에서 바라보는 밭 갈고 씨 뿌리며 농사짓는 농부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③ 고암선종(孤菴禪鐘)
화개암에서 울려 퍼지는 선종소리가 아름답다.
④ 응암상월(鷹巖賞月)
매녀에 떠오르는 달 구경이 아름답다.
⑤ 용정탐화(龍井探花)
절 밑 일대에 만발한 진달래꽃이 아름답다.
⑥ 서도어등(黍島漁燈)
기장섬 앞바다에서 새우잡이 하는 어선들의 밤불빛이 아름답다.
⑦ 원포세범(遠浦稅帆)
세곡을 싣고 저녁노을에 포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아름 답다.
⑧ 진산석봉(鎭山夕烽)
진망산에서 저녁나절 올리는 봉화불이 아름답다.
56. 신 교동 8경(新喬桐 八景)
① 화개효종(華蓋曉鐘)
화개사에서 새벽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
② 빈장모범(賓嶂暮帆)
저녁이면 빈장포로 돌아오는 어선들.
③ 잠두목적(蠶頭牧笛)
지석리 율두산 누에머리에서 소치기 목동들의 피리소리.
④ 말탄어화(末灘漁火)
말탄포 해변에서 고기잡는 배들의 불빛.
⑤ 수정낙조(水晶落照)
수정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면 망망대해로 끝이 없으며 서해바다에 붉은 물을 들이며 떨어지는 낙조는 절경이다.
⑥ 호포제월(虎浦霽月)
달 밝은 밤에 저녁 기러기가 떼지어 날아 가고 해변에 교교히 비치는 달빛은 수면에 유리를 깔아 놓은 듯 아름다운 풍경.
⑦ 인산관창(仁山觀漲)
인현산(인사리) 앞 바다에 조수가 밀려오는 광경은 장관을 이룬다.
⑧ 진망납량(鎭望納涼)
진망산(鎭望山)은 현재의 남산으로 여름에 시원해서 피서하기 알맞은 곳이다.
첫댓글 우리는 교동이 고향이니 그래도고향을 조금은 생각해주심사 하고 이렇게 ............ 난 그레도 교동이 좋아!......
내가모르던 교동이 새롭게 느겨 짐니다. 데니스님 고마워여...
데니스님 ㅡㅡ 좋은 자료 올리셨나이다 ㅡㅡ 교동의 역사 자료들이 쭉 한꺼번에 나열해 놓으니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네여 ㅡㅡ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기두 하니 고인되신 우리 아부지 생각이 납니다 ㅡㅡ 끝내 지치지두 않구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것을 왜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 졌는지 ㅡㅡ 열심히 참고 들어 줄걸 딸자식 지금에야 후회가 납니다 ㅡㅡㅡㅡ
47번 황경례 공정려는 바로 우리 황씨 가문의 몇십대 조상 이십니다 ㅡㅡㅡㅡㅡ 충신문 사진을 제가 얼마전에 올렸구요 ㅡㅡㅡ 고마워요 ㅡㅡ 계속 진행시켜 주시와요 ㅡㅡ 교동의 소식들 ㅡㅡㅡㅡ
왜 또 안 올리시나요 ㅡㅡㅡㅡ 바쁘신가요 ㅡㅡㅡ 교동소식은 다보고 싶고 무조건 좋아요 ㅡㅡㅡ 기대가 됩니다 ㅡㅡㅡ
애기봉 월미봉 후망산 부시미산 무서산 호두산 솔미산(59) 월래산(65) 삼성산(65) 선월산(78) 개곡산(82)
서한리에 있다고 하는 월미봉은 해발 얼마인지 알고 싶어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