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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영상 : https://youtu.be/uAH2umFqnJM
제목 : 주객이 전도된 믿음
본문 : 요 18:33-37
날짜 : 2024. 11. 24
예전에 어떤 동네에 아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이 아빠는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을 집에 손님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손님은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고 합니다.
이 정도만 놓고 보면 별문제가 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손님은 가정사에 참견을 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그 집에 주인이 되어서 온갖 폭력과 착취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결국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고 이 손님은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지상파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저도 이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뀐 것을 주객이 전도됐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슷한 사례를 종종 보게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을 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한 권력자들은 국민을 주권자로 존중하고 있을까요?
권력자들이 국민을 존중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권력자들로부터 제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2023 교육정책 인식 조사'에 따르면 중·고등학생 1만1079명을 대상으로 직업별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신뢰도가 가장 낮은 직업은 '대통령'(22.7%)'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정치인’(23.4%)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적어도 국민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주객이 전도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왕의 왕이요 주로 고백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존중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심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을 심문하는 빌라도에게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고 답변이 아닌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심문하는 빌라도를 역으로 심문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너는 내가 왕인 것을 믿느냐?
이것을 보면 믿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너는 나를 왕으로 인정하느냐?”라고 생각을 묻습니다. 즉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마 16:15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은 막 8:29 그리고 눅 9:20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라도 답을 합니다. 이것은 나는 너를 나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너가 유대인의 왕은 될 수 있어도 나의 왕은 될 수 없다는 불신의 대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자신의 주권자 혹은 왕으로 인정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면 만일 예수님을 자신의 주권자로 혹은 왕으로 인정을 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프리카나 이슬람지역과 같이 위험한 곳으로 선교사로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목사에 대한 소명이나 사명도 없는데 신학교를 보내서 목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등등 여러 가지 불안 요소들 때문에 선뜻 예수님을 자신의 주권자 혹은 왕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기는 하지만 내 인생만큼은 내가 주권자가 되려고 하는 주객이 전도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 7:9-11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나의 주권자 혹은 왕으로 믿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또는 왕으로 인정하고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많은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 뒤에는 상상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2. 다른 사람이 네게 알려준 것이냐?
빌라도를 향한 이 예수님의 질문은 “지금 너가 나를 유대인의 왕으로 아는 것은 누가 너에게 알려준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답을 합니다.
여기서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의 왕으로는 인정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달며 예수를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왕임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의외로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성도님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나의 고백인지 아니면 누구로부터 들은 믿음의 고백인지 분별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각자 자신들이 믿는 신과 우상들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없이 종교생활을 합니다. 왜냐면 세상의 종교에는 참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신적인 존재를 향해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종교인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살아계시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서로 간의 교제가 없다면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데 어떻게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자신의 믿음의 고백이 아닌 남에게 들은 믿음, 남에게 배운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이때가 바로 믿음의 시작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롬 10: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확실한 믿음의 확신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미 내 안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단계가 수십년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밭에 씨를 심어도 물을 주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죽듯이, 복음의 씨앗이 내 안에 심겨졌으면 그 믿음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주님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면 당연히 믿음의 확신이 없는 종교인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권자이자 왕이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권자가 되어 제멋대로 인생을 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지금 너가 내게 하는 믿음의 고백은 누구의 고백이냐?”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는 언제나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대제사장을 비롯해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죄’가 없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죄’라고 한 표현을 잘 주목해야 합니다.
‘죄’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이티아’로 법률적인 형사상의 범죄를 말합니다. 둘째는 ‘하마르티아’로 하나님의 뜻과 법에서 어긋한 범죄를 말합니다.
그래서 형사상의 범죄를 유대인들이 재판할 수 없고, 종교적인 범죄를 세상 법을 주관하는 빌라도가 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종교적인 재판을 아무 권한도 없는 빌라도에게 재판을 청구하는 불법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형사상 죄가 없으므로 무죄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높아진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결국 무죄판결을 받은 자신들의 왕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결국 빌라도와 결탁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더라도 예수님을 주권자로 혹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중세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스스로 재판장이 되고 주권자가 되어 마녀사냥을 통해 무죄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산채로 불태워 죽이는 화형까지 행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권자로 혹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범죄한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주권자가 되어 주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그리고 온갖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뜻인냥 자기만족과 종교적 열심에 빠져 온갖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주권자가 되고 왕이 되었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된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오직 주님만을 주권자로 삼고 높여드리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