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포리
■ 약물내기
상리를 지나 연하리로 가기 직전인 약물내기 약수가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 있는 약수는 많은 사람들이 위장병을 고쳤다고 하여 '약물내기'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으며, 수량이 풍부하여 이 마을에 있는 수십 마지기의 논농사에도 이용되고 있다. 특히 갈수기인 봄에 물이 모자라면 메를 지어 놓고 치성을 드리면 많은 물이 나온다는 신비스러운 샘이다.
이 마을 남쪽으로는 대내로 가는 길이 있다.
■ 약물내기 약수
약물내기 마을 앞에 있는 샘이다. 석회암 지대인 영월에서 석회 성분이 없고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난 생수로 영월읍민 전체가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할 정도이다. 강원도 보건환경연구회의 수질검사(1784호)에 의하면 그 성분은 철 1.8mg/e, 산도알카리성 8.2mg/e으로 판정되었으며 현재는 주변의 정화 사업이 끝나고 넓은 주차장 시설도 마련되었다.
'약물내기'란 약물이 나는 곳인 '나다'에서 '나기'로 파생되어 'l'모음 역 행동화 현상으로 '내기'가 된 것이다.
■ 대내
웃마을(上里)뒤쪽에 있다. 1972년 수해로 동강의 합수거리에 있던 군부대가 이곳으로 이주했고 예전에는 석회 광산이 있었던 농촌마을이다. 대내는 동강 뒤에 있으며 맑은 내가 흐르는 마을이므로 순수한 우리말로 '뒤내'라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내'로 변하였다. 또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그들이 읽기 쉽고 발음하기 좋은 한자식 지명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 뜻이 완전히 바뀌었다고도 한다.
『예, 서울의 검은돌모루기→黑石隅里로, 풀새기기→瑞草로, 노들나루기→路梁津으로, 영월의 방절리 마굿이(마굿간)→麻谷으로, 삼옥리의 먹굴(먹골)이→默洞으로, 서면의 새내기→新川으로 변이 되었다. 일설에는 대내 뒤의 닭발같이 생긴 계족산(鷄足山)을 일명 계죽산(鷄竹山)이라고도 하는데 이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작은 개천을 이루면서 그 주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대내(竹川洞)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다. 「영월부읍지(寧越府邑誌)」에도 계죽산(鷄竹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계족산(鷄足山)
영월읍 덕포리와 정양리, 연하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가 890m로 그 형상이 닭의 발처럼 생겼으며, 계족산의 땅 기운이 모여서 하나의 혈을 이룬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의 명당터가 발전소 뒤에 있는 태봉(正祖,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이다. 명당은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하는데 합수거리에서 합쳐진 동·서강이 태봉 앞을 곡류 하여 흐르므로 이곳은 영월에서 손꼽히는 명당이라고 한다.
■ 용마굴(龍馬窟)
상리(上里)앞의 삼옥교 밑에 있다. 석항천이 용마암의 기암괴석을 관통하여, 그 사이로 맑고 푸른 물이 흐르므로 여름한철 어린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하송리 엄씨 문중에서 아기 장사가 태어나 며칠만에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시렁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자는 등 집안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엄씨 집안에서 장사가 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나라에서는 이 아기장사가 장차 역적이 될 것이라 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이에 포졸들이 와서 칼로 찌르고 커다란 연자방아를 올려놓아도 결국은 죽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 장사는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님 제가 때를 잘못 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쌀 서말로 술을 만들어 그것을 저에게 목이면 깊은 잠에 빠질 것입니다. 그때 겨드랑이 밑에 있는 날개를 없애 버리면 저는 힘을 못쓰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날밤, 부모는 눈물을 흘리면서 인두로 날개를 태워버리자 이 아기 장사는 죽었으며 지금도 그 무덤이 하송 1리 노인정(은행나무 서쪽) 뒤에 있다. 이 아기 장사가 죽자 덕포리 용마굴에서는 바위를 뚫고 나온 용마가 주인을 찾으며 사흘동안 밤낮을 울었으며, 합수거리에서도 장사의 칼이 윙윙거리며 울어대는 소리가 영월 전역에 퍼졌다고 한다. 이때 주인을 찾지 못하고 죽은 용마의 무덤은 지금도 덕포 상리에 있으며, 칼은 합수거리의 깊은 소에 빠졌다.
그때부터 이곳을 '검봉연(劍鳳淵)'이라 했는데 시인 묵객들에 의해서 '금봉연(金鳳淵)'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용마무덤
상리 용마굴 앞에 있었다. 용마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은 도로확장 공사로 없어졌다.
■ 옹기점 마을
금용아파트가 있는 중리와 덕포 하리에 있었다.
진흙만으로 초벌구이를 해서 만든 윤이 나지 않는 질그릇과 유약인 오짓물을 발라서 구운 오지그릇을 통틀어 옹기라고 칭한다. 옹기는 그 종류와 기능도 다양하였다. 간장을 담그는 큰 대독, 된장·막장을 담가놓는 중도리독, 장아찌를 박아놓은 작은 항아리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뚝배기, 시루, 소줏고리, 물동이, 술독, 화로, 장군, 굴뚝, 소래기 등 그 사용용도에 따라 다양했다.
이곳에 있는 옹기점에서는 주로 장독과 물동이, 시루 등을 많이 만들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발전소로 가는 기차굴 밑에 있는 하리의 옹기점은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상리의 옹기점은 해방 후 몇 년간만 옹기를 구워 내었다.
■ 여우고개
중리에서 하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곳은 하동, 영춘으로 가는 길목으로 예전에는 숲마을이라 할 정도로 나무들이 울창하여 날이 어두워지면 여우가 자주 나타나서 '여우고개'라 하던 이야기가 있으나, '여우'란 '작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작은고개'라는 뜻이다.
■ 하리 옹기점말
상리에 있었던 옹기점보다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시루, 물동이, 뚝배기, 단지 등을 만들었으며, 그 옆에는 하리서낭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소나무가 서 있다.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출처 : 영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