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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그리스(밧모섬 경유) 성지탐방기
(2004년 11월 1일-13일)
"위스퀴다라 기데리켄 알디다 비르야물 …"
위스퀴다라의 나라, 6 25 사변 때에는 많은 군인들을 보내주어 우리를 구해준 혈맹, 그리고 지난 2002 월드컵 축구대회에서는 우리와 3,4위전에서 맞붙었던 축구의 강호, 우리와는 혈연적으로도 매우 가깝다는 형제의 나라, 터키. 이곳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은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11월 1일 월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8시 30분 시택(시애틀-타코마) 공항에서 뉴욕 케네디 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서 오후 4시 30분 뉴욕(3시간 더 빠름)에 도착해서 목사님 내외분들과 장로님, 권사님, 선교사님들과 모두 37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터키에어로 저녁 7시에 이스탄불을 향해 출발했다. NKPC 내의 "다문화목회연구회" 설립 10주년 기념행사로 미국 장로교 소속 목사님들 일행이다.
터키로 가는 도중 급한 환자가 생겼다고 영국 런던 공항에 불시착하여 3시간을 보냈는데 나는 내내 한동대학교 총장 김영길 박사 사모님의 수기인 ■갈대상자■를 은혜롭게 읽느라고 지루한 줄을 몰랐다.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하루 이상을 비행기 속에서 보냈는데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여행도 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1월 2일 (화)
10시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1시 30분이 되어서야 이스탄불 아타튜르크(Atat rk) 공항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는 큰 관광버스를 탔다. 몇 목사님들이 터키 돈으로 바꾸려고 공항에 있는 은행에 갔더니 1불이 145만 원(리라)이라고 하여, 100불만 바꿔도 무려 1억 4500만 원(리라)이 되니 갑자기 모두가 억만장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요즘 라마단 기간(온 세계 이슬람교인들의 금식기간 - 해 뜨면 금식하고 해가 지면 음식을 먹음)이라 5시만 되면 어두워져서 모두 밥을 먹으러 가니 그 시간 안에 구경을 해야 하므로 점심은 굶기로 하고 먼저 오늘 보아야 할 명소들에 가기로 했다.
오른쪽에 말마라(Marmara) 바다를 끼고 서에서 동으로 가며 최평화 장로님의 시원한 설명을 들었다.
터키 사람들의 주식은 양고기와 빵이고, 면적은 78만 k㎡, 한반도 전체의 3.5배이고 남한의 8배의 크기로, 동쪽 끝에는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이 있고, 이란, 이락, 시리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유브라데 강의 발원지가 터키에 있는데, 그 상류 어딘가에 에덴동산이 있었으리라. 지금은 댐을 만들고 수력 발전을 일으키느라고 관개 시설을 많이 해서 이락 쪽으로 흘러가는 물의 양이 현격히 줄어들어서 이락으로서는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라고 한다. 제발 물을 좀 많이 보내달라고 간청하지만, 터키에서는 우리에게 석유를 보내달라고 맞서고 있다고 한다.
216명의 한국 선교사와 562명의 세계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고, 이들은 혼혈민족으로 EU(유럽공동연합)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중에 있는데 "회교를 버려라, 종교 자유화하라"에 맞서 "안 들어간다"는 회교 강경파와 신경전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토인비가 "터키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라고 할 정도로 고적이 많고 관광객과 호텔이 많은 나라이다. 휘발유 값은 한국보다도 비싸고 삶의 수준은 한국보다는 못하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발달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타튜르크(Atat rk)란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터키의 영웅이며 터키 공화국의 건국자로 존경받는 무스타파 케말을 말하는데 1938년 57세로 죽었다. 황제가 공주를 아내로 주려고 했지만 자신의 가정을 가지면 나라를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없다고 하며, 결혼도 하지 않고 온전히 나라의 건국과 개혁을 위해서만 일생을 바친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한다. 여권(女權)을 신장해서 여성 수상, 변호사, 은행원이 나오게 했고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벗으라고 파격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참으로 뛰어난 선각자이며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는 터키의 문자를 만들기도 했는데, 로마자에 독일의 움라우트( , , 등)를 도입하고, C와 S에 꼬리가 달린 (ch)와 (sh)를 더하여 오늘의 터키 문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I 자는 대문자도 소문자처럼 위에다 점을 찍어 놓은 것( )이 이채로웠다.
하기아 쏘피아 (성 쏘피아 - 거룩한 지혜) :
성당에 갔는데 과거에는 세계 최고의 성당이었는데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라고 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같은 시대의 건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건물 중 하나라고 하는데 웅장하고 아름답다. 벽화들이 훼손은 되었지만 붉은 색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그 높은 천장에 아름다운 벽화들을 어떻게 그렸을까? 참으로 신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아시아의 유명한 두 건축가인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울리는 벽'을 가진 성전을 짓고 싶어 하는 쥬스티니안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지었는데 지진과 화재로 여러 번 파괴되었고 오스만 터키가 이스탄불을 점령하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이슬람교는 인물화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부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화(畵) 위에 회칠이 칠해졌다가 1935년에 아타튜르크의 명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수리 복구되어 비잔틴 시대의 인물화와 장식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쥬스티니안 황제에게는 천민 출신인 데오도라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너무나 지혜로웠고 나라의 위기와 황제 자리의 위기에서 남편을 구했고 성전 수리도 다시 하게 하며 그 여인의 말만 따르면 모든 것이 형통했다고 하며, 사모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는 최 장로님의 말씀이 은혜로웠다.
죠 여왕이라는 여인의 그림도 있었는데 첫째 남편(로마노스 3세)이 죽어서 세 번까지 결혼을 했고 첫째 남편 얼굴을 지우고 마지막 남편(콘스탄틴 모노마쿠스) 얼굴을 다시 그려 넣었고 그녀를 18세로 아름답게 그리지 않으면 죽였다고 한다. 참 무서운 미모의 여인이 벽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멧의 사원) :
이 사원은 고대 히포드럼 옆에, 그리고 성 소피아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고 훌륭한 이슬람 사원으로 남자들은 앞쪽에 가서 절하고 기도하고 여자들은 맨 뒤쪽 줄이 쳐진 곳에서 기도해야만 하고 신발장이 있어서 신발을 넣어 놓는데 없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관광객들은 앞쪽으로는 못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여섯 개의 첨탑이 높이 솟아있고 끝에는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들어가는 입구에는 손발을 씻고 들어가라고 수도가 있고 근처에 초등학교, 병원, 신학교 그리고 술탄의 무덤이 있는 터키의 성지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멧(Sultan Ahmet) I세가 성 소피아를 능가하는 웅장한 회교 사원을 짓도록 명령하여 1609년에 시작하여 7년 만에 완공하였다. 그런데 왕이 금으로 지으라고 명령하였으나 금을 주지 않았다. 건축사는 고심 끝에 금(金)과 동음어인 여섯(六)으로 지을 것을 생각하고 첨탑 6개에, 그 끝을 금으로 입혔다. 내부는 성 소피아가 전부 모자이크로 된데 비해 카펫으로 만들어서 덮어놓았다.
터키는 혼혈민족으로 회교가 국교인데 회교도들의 일생 동안의 세 가지 의무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성지 순례로 사우디 메카를 순례하는 것으로 비행기, 버스, 또는 걸어서라도 해야만 한다. 둘째는 모하메드 신앙을 가질 것. 셋째는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할 것인데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에 갔을 때에는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운전기사가 갑자기 버스를 세우고 자리를 들고 내려서 절하며 기도하고 다시 운전하는 것을 보았다.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에서 예외로 인정되어 먹고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첫째 환자들(병원), 둘째 임산부, 셋째 여행자들인데 버스 운전기사 중에 어떤 사람은 먹고 마시는데 좀 나이 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해가 지기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운전하다가 해가 지자 많은 사람들이 탄 차를 세워 놓고 급히 먹는 것을 보았다.
히포드럼, 오벨리스크, 뱀기둥, 콘스탄틴 기둥, 독일의 분수 :
모두 찬란한 역사의 흔적을 갖고 우뚝 솟아 있는데 세월이 흐르며 많이 낡아지고 침수작용으로 벗겨지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 위용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랜드 바잘 시장 :
실크로드의 정착지라고 무수한 가게들이 있는 곳으로 머풀러들을 선물로 많이 사고 어떤 분은 코트를 사기도 하며 관광객들을 흥분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물건이 싸다고 해서 다투어 사지만 과연 얼마나 싸고 질이 얼마나 좋은지는 미지수이다. 미국에도 싼 물건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뉴욕 거리에서 보았다.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태극식당에서 해물탕, 해물부침, 낙지볶음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에 투숙을 했는데 내일 아침 6시에 식사를 하고 7시에 떠나서 국내 비행기를 타고 아다나(Adana)로 가야 하니 긴장해야 했다. 단체란 나 하나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고 또 비행기를 타려면 일찍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몸은 많이 피곤하지만 흥분으로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11월 3일 (수)
5시에 모닝콜이 울렸다. 아무리 늦게 자더라도 4시에 새벽기도회에 가는 습관이 있으므로 벌써 일어나 있었다. 호텔 식당에 내려가서 토마토, 오이, 햄, 치즈, 빵 등으로 식사를 하고 짐을 들고 내려오니 모든 일행들이 벌써 다 버스에 짐을 싣고 차에 타고 있었다. 정확하게 7시에 떠나서 공항에 와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30분 날아가 아다나에 도착했다.
차로는 15시간 걸린다고 한다. 터키에서 제일 큰 도시는 이스탄불이고 두 번째는 수도인 앙카라이고 세 번째는 이즈밀(성경상의 서머나)이고 네 번째가 아다나라고 하는데 23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다나에서 버스로 2시간 걸려 수리아 안디옥을 찾아갔다.
버스 속에서 '위스퀴다라 기데리켄 알디라 비르야물 … …' 최 장로님이 이 노래를 불러 주셨다. 예전에 내가 어릴 때 뜻도 모르고 불렀던 기억이 있고, 곡조는 기억이 되는 것이라 모두 공감하고 따라서 불렀는데 그 뜻이 너무 아름다웠다. 우리나라에 아리랑이 있다면, 터키에는 '위스퀴다라'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은 얼마나 독이 들어 있는가? 그런데 '위스퀴다라'는 당신이 만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를 밟고 그냥 가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월의 시 '진달래꽃'처럼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이 노래에 터키 사람들의 순박함이 묻어 있지 않은가? 터키를 칭찬하시는 최 장로님은 이곳에 오래 사시며 정이 많이 드신 것 같았다.
수리아 안디옥 :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심해지자 성도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지진으로 폐허된 이 도시에 교회를 세웠고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의 제 1대 감독으로 이방 선교의 중심지가 된 곳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이 탄생한 곳이다. 이곳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1년간 복음을 전하였고(행 11:19-26, 14:22-25), 이방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제 1, 2, 3차의 선교 여행을 하게 되고, 그리하여 여러 교회를 설립하는 산실이 되었다.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후 로마,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에베소와 함께 기독교의 5대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638년부터 시작된 아랍인, 몽골인,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이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1097년 십자군 전쟁시 9개월간 그들의 통치하에 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터키가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 자치령으로 되었다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터키에 속할 것인가, 시리아에 속할 것인가를 주민 스스로의 투표에 의해 터키에 귀속하게 된 파란만장한 역사의 도시이다.
실비우스 산 (Mount Silpius) :
이곳은 높은 산 위에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고전 박물관이며 길이 모자이크 돌들로 되어있고, 가파른 바위와 그 정상에 시타델(Citadel)이 있다.
베드로 동굴 교회 :
실비우스 산 아래에 있는 바위 속의 동굴로 이곳도 평지에서는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초대 기독교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곳으로 믿어지며 이 동굴 내부에는 모자이크의 흔적들이 보이는데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었는데 저분을 안 가지고 와서 뚜껑으로 수저를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이곳 터키의 아파트와 지붕 꼭대기에는 물탱크 같은 것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태양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며 많이 절전할 수가 있다고 한다.
안디옥 한인교회 :
2000년에 한국의 광림 감리교회에서 프랑스 대사관이었던 건물을 매입하여 한인 교회를 세웠다. 이 터키에서 공인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현지인 4명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40명이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우리들이 갔을 때에 현지 여성도가 안내를 하고 있었고 프랑스 선교사가 같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광림교회에서 파견한 함데이빗 전도사가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목회를 하다가 그곳 외무부 담당관이 서류 작성을 완벽하게 도와주어 한국 터키 대사관에 가서 2004년 4월에 정식 목회비자를 받아 2년 동안 법적으로 보장받는 신분이 되었는데 그것은 터키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일 것이라고 했다. 너무나 감사하여 기도하고 헌금을 하고 나와 호텔에 와서 짐을 풀고 호텔에서 주는 양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11월 4일 (목)
사도 바울의 생가 (길리기아 다소) :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길리기아 다소 사도 바울의 생가를 향해 출발했다. 그곳은 초라한 시골이었고 사도 바울의 집터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기념장소로 아마 많은 성도들이 이곳을 다녀갔을 것이다. 지진으로 땅이 꺼져 지하에 집이 있었고 위에 유리로 덮어서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몇 목사님들이 밑으로 내려갔더니 관리인이 와서 올라오라고 한다. 옆에는 우물도 있었다.
건물로 보면 보잘것없지만 위대한 사도 바울의 생가라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교복을 입은 귀여운 초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의 인솔하에 단체로 줄을 서서 들어와서 견학을 하고, 젊은 여자 안내인이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기독교의 훌륭한 사도 바울의 생가라고 그들에게 설명을 했다고 최 장로님이 말씀하시며 그래서 이 터키가 소망이 있다고, 앞으로 종교 자유화가 될 날도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올 때 불안한 마음도 좀 있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터키 사람들이 참 순박하고 그렇게 불안한 요소가 느껴지지 않았고 외국인 관광객과 한국인 성도들을 참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십자가형을 할 수가 없어서 칼로 목을 쳤는데 목이 다섯 번을 굴렀고, 그곳에 못이 생겼다는 말도 있다.
사도 바울의 기념 예배당 :
터키 현지인들의 교회로 성직자는 마리아라는 여자라고 한다. 터키에서 이 교회는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을까? 그래도 사도 바울이 살았던 곳이라 이렇게 교회가 존재할 수가 있는가? 그곳 천장은 세 부분으로 구별되어 있었는데 첫 칸에는 눈이 그려있었고 다음 칸의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가 있고 네 모퉁이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칸에는 비둘기가 그려 있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한다고 한다.
성부의 불꽃같은 눈이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미국 1달러 지폐 뒷면에 눈이 그려있는데 하나님께서 "너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 돈이냐, 재물이냐?"라고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사람들은 돈이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면서 무엇이든지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은밀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그
천장을 올려다보며 설명을 듣다가 다리와 온 몸이 아파 고생하시던 69세 여자 장로님께서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하다가 시원해지며 고침을 받으셨다는 간증을 버스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하셨다. 사도 바울의 기념 교회에서 그런 기적이 오늘날도 많이 일어나서 믿는 자가 많아져야 하겠다.
클레오파트라의 문 :
클레오파트라를 환영하기 위해 예전에 세운 문이 아직도 잘 보전되어 있었는데 그 문 옆으로 버스가 지나가며 그 옛날 줄리어스 시저와 시저가 믿던 양아들 브루터스에게 암살당하는 이야기, 마르칸 안토니우스가 시저를 죽이고 장차 황제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는 이야기를 최 장로님께서 아주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셨다.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칸 안토니우스는 매부간으로 매부를 죽이지는 말아달라는 누나의 부탁까지 받은 안토니우스는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세기의 미녀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독사에 물려 죽었으니 미녀의 종말은 비극이었다.
"지붕 위에 항아리가 있는데 그것은 시집갈 처녀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항아리를 제일 먼저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책을 상으로 드립니다."라고 하여서 우리는 모두 창밖을 열심히 쳐다보다가 드디어 한 사람이 발견하여 상을 탔다.
한참을 달려서 포잔트라는 곳에 들려 생수를 마시고 화장실에도 가고 그곳에서 가벼운 돌로 된 두 개의 부피가 제법 큰 동굴교회의 모형을 샀는데 그때부터 그것을 깨지지 않게 들고 다녀야 하는 수고가 따랐는데 가지고 와서 하나는 교회에 하나는 집에 두고 보며 그곳에서 신앙생활 했던 성도들의 고통과 열정을 생각하고 있다. 드디어 우리는 카파도키아에 도착하여 놀라운 광경을 보고 탄성을 발하였다. 카파도키아는 니데, 카리세리, 네비쉐이르라는 세 개의 도시로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Cappadocia) :
"우리의 눈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화들짝 놀라, 주변의 환상적인 풍경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1907년 여름, 최초로 이 지역, 성지를 발굴해 낸, 프랑스의 예수회 회원이자 학자인 Pere de Jerphanion이 뜨거운 태양에 늘어진 지친 몸을 말 위에 타고 여행을 하다가 이곳을 발견하고 터트린 탄성으로 모든 관광객들도 이곳을 보게 되면 같은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곳이다.
괴레메(G reme)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여기 까지 달려오느라 피곤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한 파노라마를 담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자연의 조화로만 이룰 수 있는 이 카파도키아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함으로써 여행자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이 지역은 약 B.C. 300만 년 전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지진으로 화산이 뿜어낸 화산재로 형성된 암석지대이다. 이 지역의 암석을 파고 그 안에 사람이 살았던 주거 흔적은 B.C. 4000년까지 소급해 올라간다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 박해 기간 중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은신처로 삼아 살았다.
데린큐유(Derikuyu) :
일명 가파도키아 지하도시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한국 KBS에서 촬영한 비디오를 은혜롭게 보았던 그대로 땅속으로 계속 깊이 들어가는 층계가 있었고 그 속에 혼자 잘못 들어가면 길을 찾지 못해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8층까지만 내려갔는데 머리를 숙이고 조심해서 내려가다가 군데군데 큰 홀이 있었는데 그곳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온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지하교회였고 또 지하신학교였다고 한다. 너무 은혜가 되어 사진을 찍다가 하마터면 아래로 깊게 뻗친 층계로 굴러 떨어질 뻔도 하였는데 이곳은 성도들이 꼭 와서 보고 가는 성지였다. 이런 지하교회가 이곳 지하도시 사방에 대략 400개가 넘게 지어져 있고 그곳에 아름다운 붉은 색의 성화가 그려져 있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11월 5일 (금)
오늘은 괴레메의 기기묘묘한 동굴 속에 있는 남자 수도원과 역시 동굴 속 벽에 붉은 색의 성화가 그려진 일곱 교회를 순방하였다. 그 마을 전체가 다 동굴로 기묘하게 되어 있었고 참으로 그 풍경이 가관으로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물이 없고 습기도 없으므로 잘 썩지 않는다고 한다. 먹을 것도 별로 없으므로 기도하다가 그냥 쓰러지면 죽고 그 자리가 구덩이가 되어 있어서, 관광객들이 자꾸 넘어지므로 지금은 철판으로 평평하게 해 놓았다.
굴 속 교회마다 벽에 붉은 색의 빛바랜 성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후래쉬를 터트리는 사진은 못 찍게 하고 있었다. 그 성화들을 최 장로님이 하나하나 설명을 은혜롭게 하셨다. 벽화의 성화를 아랍인들이 파괴하기도 했고 또 옛 사람들은 성화의 얼굴을 긁어서 물에 타서 마시면 천국에 간다고 하여 그렇게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참으로 천국만을 소원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처절함이 느껴진다.
쓸쓸하고 고요한 중에 마침 비둘기가 날고 있었는데 그 비둘기들이 아주 중요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 잘 길들여 통신수단으로 썼고 비둘기 똥(합분태, 왕하 6:25)은 거름이 되었고 또 그것은 빨간색이 되어 벽화를 그리는 염료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 굴 속의 일곱 교회는 다음과 같다.
1. 성 바실 교회 : 앞에 살구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따먹고 살았다고 한다.
2. 애플 교회 : 엘마리 교회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은 벽화 중에 예수님이 사과 모양의 둥근 물체를 손에 쥐고 있는 그림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침 계곡에 사과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따먹고 살았다고 한다.
3. 바브라 교회 : 음녀가 은혜 받고 하나님의 사원에서 봉사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4. 뱀의 교회 : 벌거벗은 여인과 뱀이 그려져 있다. 성 조지(St. George)와 성 테오도르( St. Theodore)가 뱀과 싸우고 있는 그림이다. 수도사들의 음식 저장소가 있었던 흔적이 있고 식당과 부엌이 있었는데 천장이 까맣게 그을러 있었다.
5. 어둠(Dark) 교회 : 원래는 빛이 들어 올 수 없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한쪽이 무너져 내려서 환해져있다.
6. 예수님 샌달 교회 : 예수님의 발자국이 있었다는데 하도 사람들이 만져서 지금은 형체도 찾을 수가 없다.
7. 예수님의 혁대고리(Buckel) 교회 : 예수님의 일생을 벽에 그린 교회로 비교적 크고 길 가 굴속에 있는 교회로 잘 보전되어 있는 교회이다.
젤베(Zelve) 수도원 :
주상(柱上) 성자 시몬의 수도원으로 높은(15-20m) 기둥으로 된 바위 꼭대기에 큰 우산 같은 집에 살면서 주민이 음식을 올려주면 먹고살고 내려오지 않다가 아래에 환자가 생기면 내려와서 고쳐주고 다시 올라가 살았다고 하는데 기묘한 모양의 뾰족한 바위였다.
토마즈, 오닉스, 터키석공장 :
오팔, 호마노를 만드는 공장에 가서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파란색의 아름다운 터키 보석에 눈이 현혹되었다. 서너 사람이 선물도 하고 자기들이 끼려고 팔찌와 보석들을 샀지만 많이 사지 못했는데 부자 평신도들이 와야 좋아하겠다고 우리들끼리 이야기했다. 사과 차를 한잔씩 대접받았다.
카펫 만드는 공장 :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실제로 여자들이 만드는 모습을 견학하였다. 여자들이 한 뜸 한 뜸 뜨고 있었는데 하나가 완성되기까지는 1년부터 5년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는데 비쌌고 그 공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예수님 성만찬 성화는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작은 것이 9,000불이었다. 크고 아름다운 실크 카펫이 6,000불이었는데 아무도 안 사고 나오려니 2,500불까지 내려갔지만 아무도 안 사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사과 차도 대접을 받았고 그들도 수많은 카펫을 펼치며 애썼는데 … 도망 나오는 심정이었다.
도자기 만드는 공장 :
도자기를 직접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름답고 화려한 도자기들을 사라고 안내를 해서 사람들이 많이 샀고 나도 나중에 떠날 무렵 금색이 칠해진 작은 커피 잔을 두 개 사고 차에 올랐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보내고 늦게 숙소 호텔에 와서 짐을 방에 내려놓고 양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11월 6일 (토)
이곳 이고니움(Iconium)은 콘야(Konya)라고 하는데 터키의 아나톨리 고원에 위치한 주요 도시로 로마인들이 점령했을 때 이고니온으로 불렸고 A.D. 50-53년에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왔던 곳으로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강론했을 때 쫓아온 유대인들의 반대로 쫓겨난 곳이기도 하다(행 14:1-5).
이곳을 투르크(Tr k)인들이 점령하여 술탄의 수도로 만들었고 모슬렘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자랄 애드 딘 알루미가 콘야에 거처를 정하고 그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많은 추종자들을 일컬어 선회하는 수피승들 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기도하면서 조용한 신령한 춤을 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알루미는 메블라나의 델카 사원에 안장되었는데 이 사원의 일부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도시는 회교 보수주의 도시로 기독교가 발을 붙일 수가 없는 곳인데 오직 한 곳 핍박받는 성 테크라 성당이 있었다.
성 테크라 성당 :
1910년 회당자리를 보수하여 세워진 이곳 콘야 지역의 유일한 성당으로 이탈리아인 두 명의 수녀들이 문을 굳게 잠그고 지키고 있다가 우리를 맞아 문을 열었다. 성전 안에는 디모데 상이 있었고 테크라 수녀 상이 있어서 기도하고 사진을 찍었다. 회교인들이 돌을 던지며 핍박하는 곳이라 항상 문을 잠그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테크라라는 여인은 사랑하는 결혼할 남자와 같이 있다가 문틈으로 들려오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우연히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아 사도 바울을 따라가 결혼하지 않고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콘야를 출발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얄바치)으로 향하였다.
사도 바울이 발끝의 먼지를 털며 산(트로스 산)을 넘고 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높고(해발 1500-1700), 멀고, 춥고, 험한 길을 걸어서 오직 복음의 열정으로 목숨을 걸고 갔던 그 길(히 11:34-38, 행 14:1- )을 우리는 관광버스를 타고 달리는 것이다.
다시금 사도 마을을 생각하며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졌다. 달리는 차 속에서 최 장로님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터키인들은 변을 보고 휴지로 닦지 않고 왼손으로 닦고 물로 씻는데 그것이 더 위생적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왼손으로는 절대로 악수를 청하면 안 되고 물건을 건네주지도 않고 밥도 안 먹는다고 한다.
터키 캉가리 온천이 시바스에 있는데 그곳 뜨거운 온천에 세 종류의 작은 물고기가 사는데 사람들의 악성 피부병을 쪼아먹고 살아서 무좀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가면 다 낫고 어떤 악성 피부병도 삼 주만 온천욕을 하면 다 낫는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얄바치(비시디아 안디옥) :
바나바와 바울의 교회로 그 때의 안디옥은 부요한 도시였고 바울은 두 차례 안식일에 이곳 회당에서 강론을 하였으며 A.D. 4세기에는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 곳이기도 했지만 그 후에 기울기 시작하여 아랍의 침략으로 패망 후 재건되지 못하였다. 이곳 유태인의 회당에서 바울이 처음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 자리에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비잔틴 시대에 교회를 지었다.
아름다운 호수(Egirdir G lu)를 끼고 산길을 달리던 차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냄새가 나기에, 급히 세우고 점검을 하니 트렌스 미션에 크게 고장이 나 있었다. 지나가던 차를 세우고 다른 차를 빌려서 호숫가 식당에 와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그 호수를 산책하며 사진을 찍었다. 새로운 관광버스를 빌려 짐을 다 옮겨 싣고 3시간을 달려가는 중에 각자가 나와서 자기 소개와 교회 소개를 하며 가니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금방 갈 수가 있었고 각자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다.
파묵칼레(히에라볼리) :
달리는 창밖으로 네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라는 석관형(石棺型), 가옥형(家屋型), 봉분형(封墳型)의 세 종류의 무덤들이 있었고 목화밭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파묵칼레는 목화 언덕이라는 뜻으로 그 하얀 것이 마치 목화성(木花城)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웅장한 대리석의 유적지들이 있었고 아래에는 상가들의 흔적이 있고 대리석 돌로 된 길들이 있고 사도 바울이 설교했다는 단이 있어서 모두들 그곳에서 사진들을 찍었다. 대리석 원형극장과 노천 온천장, 황제의 문이 있었고, 길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던 찬란한 과거의 모습을 그 나타난 뼈대로 짐작할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초라하게 황폐되어 있을 뿐이다. 숲과 길옆에는 수많은 엉겅퀴들이 뾰족하고 무서운 가시를 가지고 우리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과거에 그 화려하던 이 땅이 지금은 이렇게 엉겅퀴만 무성했다.
오늘은 리치몬드(Richmond) 호텔에서 온천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늦게 도착을 해서 8시에 서둘러 저녁을 먹고 9시에야 온천을 할 수가 있었는데 요즘은 비수기라 사람들이 적은 편이라고 했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까운을 주고 큰 수건을 주는 현대식 큰 호텔이었다.
온천은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물이 제일 뜨거웠다. 계속 차 속에 있었던 몸의 피곤이 다 풀어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지만 내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서둘러 떠나야 하므로 오래 할 수가 없었다.
11월 7일 (주일)
5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6시에 호텔에서 마련해준 방에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고 8시에 호텔을 떠났다. 리커스 평야를 달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탐방하는 날이다.
원형극장 :
하드리안 황제 때, 화려한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야외극장으로 낮에는 온천을 즐기고 저녁에는 연극을 즐겼던 곳으로 제일 좋은 자리, 로얄 박스에 황제 내외의 자리가 있었다. 만 오천 명이 들어갈 수가 있고 마이크가 없어도 뒤에까지 소리가 들릴 수 있는 아름다운 원형극장이다.
사도 빌립 기념 교회, 온천 근원지 :
온천 근원지(8 km까지 흘러 에게 해로 가면서 근처를 폐허가 되게 한다고 한다)를 구경하고 유명한 노천 온천장에 갔다.
노천 온천장 :
석회질로 온통 눈처럼 하얗게 층층이 되어 있는 것이 참으로 장관이다. 수천 년 앙금으로 그렇게 하얗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름에는 온천욕을 하는지 사진에 사람들이 그 속에서 온천하는 모습이 있다. 하얀 석회산도 이곳에서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라오디게아(Laodicea) (현재명 - 라오디키야, Laodikya) 교회 :
소아시아 브루기아의 수도이며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2세가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명명했다. 부와 번영의 도시로 황제를 자기 마을에 모시려고 큰 원형극장을 두 개나 만들어 하드리안, 카라칼라 두 황제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진으로 그 화려한 대리석 건물들이 다 땅속에 묻혔는데 지금 관광객들을 위해 계속 발굴하고 있고, 그리하여 그 웅장한 뼈대를 보여주고 있다. 파묵칼레 온천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이곳까지 오면서 미지근해지고 높은 타우르스 산의 차디찬 물이 이곳까지 흘러 내려오며 미지근해져서 만나는 곳이라고 하니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아니하다고 책망 받은 라오디게아의 모습과 너무도 일치한 현상이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성경말씀이 있는데 이곳 라오디게아에는 콜로니온이라 불리는 돌가루 안약의 산지라고 한다. 이곳에도 현재 야외 운동장과 원형 극장 터가 발견되었다.
터키는 그 도시에서 나는 특산물과 짐승을 잘 만들어서 도시의 상징물로 사람들이 잘 보이는 큰길에 만들어 세워놓는다. 데니즐르는 발전하는 깨끗한 신도시로 번화한 길에 화려하게 닭을 크게 만들어 세워놓아서 이곳에서 닭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다른 곳에는 포도, 수박 등을 크게 잘 만들어 번화가에 세워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터키 사람들은 닭싸움, 개싸움 등은 싫어하지만 전쟁은 죽기 살기로 한다고 한다. 6.25 때에 우리나라에 와서 많은 군인들이 죽기도 한 우방인데, 특히 알라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백성들이라고 한다.
빌라델비아(Philadelphia) (현재명 - 알라쉐힐, Ala ehir) 교회 :
포도나무, 옥수수나무들이 줄을 잇고, 늦은 목화를 따는 여인들을 창밖으로 보며 2시간쯤을 달려 예수님의 책망이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교회에 왔다.
이곳은 버가모의 외곽지대로 그리스 시대에는 루디아 동부지역을 상대로 그리스의 문화와 언어를 전파했고 기독교 시대에는 부루기아의 이교도들에 대한 선교로 문이 열려 있는 전초기지였다.
이곳에는 유메네스왕이 나라의 땅을 더 넓히려고 계속 전쟁으로 나가 있는 동안 동생 아탈루스 2세가 나라를 잘 다스렸다. 백성들은 자연히 동생 왕을 더 사랑하게 되어 왕이 되라고 계속했지만 동생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는데 이 소식을 형이 알게 되었다.
형의 명령으로 동생은 왕이 되었는데, 그래도 나라의 모든 일을 사사건건 형에게 물어서 처리하였고 심지어 동전을 만들 때에 형의 얼굴을 크게 하고 자기의 얼굴은 조그맣게 하였다. 이들은 배다른 형제였다는데, 이런 필리아(사랑)와 아델포스(형제)의 두 단어가 합해져서 필라델피아(형제의 우애)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창조했다고 한다.
사데(Sardis) (현재명 - 사르트, Sart) 교회 :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고 사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들기도 한 곳으로 크로수스라는 세계 최대의 부호인 왕이 자기의 부와 행복을 자랑하려고 솔론이라는 유명한 철학자를 산, 강을 건너 아테네에서부터 불러서 금은보석들을 구경시키고 산해진미로 잘 대접하고 나서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행복한가?"라고 물으니 "그것은 그 사람이 다 살고 난 후에 평가할 일입니다."라고 대답을 해서 왕이 불쾌하게 여기고 내쫓았는데, 후에 페르시아 왕이 난공불락이라고 자랑하던 산 위의 성까지 낙타전법으로 쳐들어오니 말이 나가지를 않아 정복을 당하게 되어 죽음을 앞에 두고 "오! 솔론, 솔론. 내가 너무 몰랐다"고 하며 울었다. 이상히 여긴 페르샤 왕이 그 사연을 듣고는 그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 이곳은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비잔틴 시대의 교회는 거대한 아데미 신전의 뒤쪽에 있는데 이 아데미 신전은 희랍시대에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이다. 로마인들의 체육장과 유대인들의 회당을 돌아보았다.
두아디라(Thyatira) (현재명 - 아크히살, Akhisar) 교회 :
비잔틴 제국시대에 교회가 세워지고 한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살면서 상인조합을 만들어 상업도시로 번성했고 자주장사 루디아는 이곳 출신이었다. 현재는 과거의 어떤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고 아폴로 신전으로 보이는 신전 하나와 교회로 보이는 기둥들만이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버가모(Pergamos) (현재명 - 벨가마, Bergama) 교회 :
날이 어두워졌고 경비원들이 밥을 먹으러 가고 없어서 철책을 넘기도 하고 철책 사이로 들어가기도 하며 무지하게 크고 웅장한 세라피스 신전을 보았는데 세라피스 신은 본래 이집트의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의 신전이라고도 하고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이라고도 한다.
비잔틴 제국시대에는 요한계시록의 버가모 교회로도 사용하였기 때문에 '붉은 교회'라고도 불렸던 이 교회는 폭이 26m 길이 60m 높이 19m가 되는 대형 신전이다. 이 신전은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 세워졌으며 특징은 강 위에 세워진 것으로 신전 밑에 강물이 대각선으로 흐르고 있다고 한다.
버가모 교회에는 '사탄의 위'가 나오는데 아크로 폴리스에 있는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아테나, 아스클레피오스, 세라피스 신전과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세 개의 거대한 신당 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의 제단이 있는 곳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순교자 안디바는 이곳의 초대 감독으로 추측된다.
서머나(Smyrna) (현재명 - 이즈밀, Izmir) 교회
밤 8시 30분 화려한 이즈밀 도시의 카야 프레스티지(Kaya Prestige)호텔에 도착하여 밤 9시에 멋진 호텔 양식으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 일하다가 터키에 선교사로 와서 일하시는 테일러(Kent Taylor) 미국 목사님을 만나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늦어서 호텔에서 오래 기다리셨을 것이 참으로 미안했다.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같이 식사도 나누고 그곳에서 선교하시는 보고도 하였다. 교회에서 보내는 선교비도 드렸는데 자기 교회가 이곳에서 가깝다고 하며 다음에 와서 설교도 해 달라고 했지만 그럴 날이 언제 올까 모르겠다.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향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짓눌리고 부서질수록 더욱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 값비싼 향료이다. 서머나는 터키 제3의 대도시이고, 제2의 해군 기지가 있는 중요한 도시라고 한다.
서머나 교회는 AD. 100년부터 313년까지, 곧 콘스탄틴 황제가 최초로 기독교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공인한 밀라노 칙령이 있기까지 혹독한 핍박을 치른 시대를 대표한다. 현재의 서머나는 비잔틴 제국, 셀죽-오토만 제국 그리고 터키 등의 역사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계속 번성하여 지금은 터키의 제3의 도시로 에게해 해변을 끼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발전하고 있고 곳곳에 기독교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기독교 유적은 거의 사라졌다.
11월 8일 (월)
성 폴리갑 기념 교회 (서머나 교회) :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던 폴리갑은 A.D. 115-156년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잡혀서 화형을 당하였고 그 장소에 그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 그 당시 총독이었던 스타티우스는 폴리갑을 살려주기 위해 성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주님은 나를 86년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모른다고 합니까?"라고 하며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교회는 아름다운 성화로 가득했는데 레이몬드 이레라는 프랑스 화가가 폴리갑이 순교하는 성화를 다 그리고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자기도 묶여 끌려가는 모습을 그 성화의 왼편 끝에 그려 넣었는데 크게 은혜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성채 :
파고스 산으로 올라가면 군사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성채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대왕이 낮잠을 자다가 "이곳에 도시를 세워라. 헬레니즘 문화로 세계를 제패하라"라는 계시를 받고 부하 장군으로 성채를 쌓게 하고 도시를 세웠는데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머나 전경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모친 마리아의 집 (마리아 기념 교회) :
에베소 고대 도시로부터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높이 358미터의 언덕 꼭대기 기후가 좋고 대단히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 있다. 매표소를 지나 입구에 들어서면 여러 나라 말의 안내판이 있는데 한국말 안내판도 있고 이곳을 지나면 모친 마리아가 팔을 뻗치며 인자하고 사랑스런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고 있다.
신부가 지키고 있는 마리아가 살던 집(교회)이 나오고 돌아 내려가면 마리아 생수가 있고 소원기도 쪽지를 써서 꽂아 넣는 곳도 있고 큰 무화과나무도 있다. 마리아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시며 당나귀를 타고 오르내리셨다고 하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공기가 좋은 곳이다.
누가의 묘 :
철망이 쳐져있지만 아직도 초라한 이곳은 과거에 화장실이 없어서, 사람들이 이곳에다 변을 보아서 엉망이었던 곳을 지구촌 교회의 윤성희 집사님이 많은 돈을 내어 옆에 화장실을 만들었고 이스탄불 한인 교회에서 돈을 들여 가시철망을 치고 장로님과 성도님들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청소를 해서 오늘 이만큼 가꾸었는데 아직도 더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한다.
에베소(Ephesus) (현재명 - 셀축, Sel uk) 유적지 :
참으로 장관인 고대도시로 우뚝 솟은 대리석 기둥들과 조각들, 끝없이 뻗은 대리석이 깔린 길(말브로드)을 걸으며 웅장한 셀수스 도서관을 보고 열탕, 온탕, 냉탕으로 발전했던 목욕탕, 남자들만이 가는 단체 화장실의 흔적을 보고 또 발자국이 찍힌 돌 모양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창녀촌에 이 발 크기 이상의 사람만이 들어 올 수 있다는 세계 최초의 창녀의 집 그림 광고로 미성년자는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 에베소 아데미 신전에서 사도 바울을 잡으려는 데메드리오(행 19:23-41)의 간계에 흥분한 사람들이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두 시 동안이나 외치게 만든 연극장의 모습도 보인다.
사자를 때려잡았다는 헤라클라스 상이 있고, 하드리안 신전에는 아테나 여신, 아르테미스 여신, 디오클레티안, 콘스탄틴, 막시미안, 갈레리우스 황제들의 동상, 니케 여신(승리 여신)의 동상들이 있고 아고라라는 야외 시장이 있었고 벽에 모자이크로 새겨진 아름다운 그림들이 있는 이곳은 거대한 야외 지상 박물관이었다.
파나이 산의 경사로 세워진 극장은 높이가 60미터나 되고 관중석이 세 구역으로 나누어 있고 입구도 여러 곳이고 2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에게해에서 가장 큰 극장 중 하나이다. 무대의 1층과 2층은 네로가, 3층은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 만들었고 많은 동상들과 조각들을 새겨 넣었다.
또 이곳은 네로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굶주린 사자의 밥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목사님, 사모님들이 아래 경기장에 내려가 "환난과 핍박 중에도…"라는 찬양을 힘차게 불렀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곳에서 기도하고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대리석 길을 따라 나오는데 산꼭대기에는 사도 바울의 감옥이었다고 하는 집을 볼 수가 있었다.
에베소 교회 :
언덕 위에 있는 교회에는 유아세례를 하는 커다란 컵 모양이 있었다. 성인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 삼일 동안 금식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 세워져 있었던 돌로 된 십자가를 누가 치웠다고 지난번에는 있었다고 해서 모두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찾기도 했는데 터키인들이 그렇게 훼손을 한다고 한다.
숲길을 걸어 나와서 버스를 탔는데 제일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께서 오지 않으셔서 모두 기다리고 있었는데 총무 목사님과 두 목사님이 친구가 되어 남아서 찾을 테니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늦기 전에 다음 장소에 가라고 해서 세 목사님을 남겨놓고 떠났다.
성 요한 교회 :
하기아 솔르 언덕 위에 사도 요한의 무덤이 대리석으로 되어있었는데 이곳은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이라고 한다. 사도 요한을 죽이려고 도미시안 황제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유배지 돌 섬 밧모섬으로 보냈으나 요한은 죽지 않았고 황제가 죽은 뒤 요한은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서 죽을 때까지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을 지키며 목회를 했다. 일행을 잃고 방황하실 목사님 걱정을 많이 했는데 교회를 나와 버스를 타려고 할 때에 택시를 타고 온 네 분의 목사님을 만나 합류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반가웠다.
양 가죽 공장 :
냄새가 나는 양가죽 공장에 갔는데 사모님 두 분과 목사님 한 분을 뽑아서 저들의 모델들과 함께 의상 쇼를 하게 하였는데 나이 드신 점잖으신 목사님을 가발을 씌우고 이상한 옷을 입히고 걷게 하였는데 전연 다른 사람 같았고 너무나 괴상해서 한참을 웃었다.
그 다음 설명을 들었고 많은 양가죽 코트와 옷들이 있는 곳으로 일행을 안내하여 사도록 유도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두서너 사람들이 비싼 옷들을 산 것 같았다. 늦게 쿠사다이 아다쿨레(Adakule) 호텔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 식사를 했고 내일 새벽 5시에 식사하고 6시에는 출발해서 그리스의 밧모섬에 간다고 여권을 다 걷고 준비를 했다. 이 호텔은 절벽 위에 있는 참 아름다운 호텔이라고 했는데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서 섭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