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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8~21(315) 감사의 씨앗 2019-11-17
오늘은 2019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교회력을 보면 1년 중에는 여러 절기가 있지만, 유독 감사절만 2번 겹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반기에 맥추감사주일이 있고, 그리고 하반기에 추수감사주일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분은 맥추 감사주일이나 추수감사주일은 성경에 근거도 없이 교회서 돈 긁어내기 위하여 만든 절기라고 비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비난에 속지 마십시오. 성경에 보면 맥추절이나 감사절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글자가 없다고 해서 비난하는 무식함은 없어져야 합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1년에 감사절기가 두 번이나 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감사의 생활화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감사의 소중함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 신앙월력에는 두 번의 공식감사가 있지만, 더 많은 감사로 하나님에게 풍성하게 드려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입에서 “감사합니다”를 잊어버린 사람은 그 영혼이 병든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냐? 불신자냐? 이것을 따지지 말고, 사람이라면 응당 말과 행동에서 감사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 상태가 맑은 사람이고, 타인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은 친구로 두어도 됩니다.
특히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항상 감사해야 하는 것을 절대 잊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영혼에 병이 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은혜의 통로가 막힌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다 막혀 버린다는 반증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나, 많은 재산을 드려야 하는 것처럼, 고민에 고민을 해야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감사에 소홀한 성도들을 보면 <신앙의 감기>에 걸린 분으로 판단합니다.
감기라는 질병은 아주 사소한 병이에요. 쉽게 감기 들었다가 언제 사라진지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 감기입니다. 하지만 이 감기라는 간단한 질병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인 것을 간과해서 안 됩니다. 감기는 쉽게 치료해서 쉽게 넘길수도 있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합병증으로 사망까지 하는 것이 감기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린 사람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신앙의 감기에 걸립니다. 감사를 회복하면 이 신앙의 감기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런데 감사를 잊어버린 신앙의 감기를 치료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내 영혼 전체를 구렁텅이로 몰고 갈수도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하나님께서 1년에 2번씩 영혼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라고 감사절을 주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상반기 감사가 무엇입니까? 맥추 감사입니다. 그리고 하반기 감사이자, 지나온 일 년에 대한 감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추수감사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점검해 봄으로 신앙의 건강을 회복하고 감사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감사와 신앙 : 성령충만의 증거는 “감사”입니다.
먼저 감사와 신앙의 관계를 살펴보십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증거합니까? 18과20절 보십시다.“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18 하반절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말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성령님께 내 인격과 삶의 모든 부분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기분 좋은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가 나오고 콧노래가 자연스럽게 흥얼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내 안에 내주하게 되면, 내 감정 또한 성령님의 이끄심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자연스럽게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또한 내 행동과 말에서는 자연스럽게 감사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감사는 성령 충만한 성도의 모습이며, 불평하는 성도는 성령님이 떠난 모습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좋으면, 감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환경이나 조건이 좋아도, 얼마든지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비교의식 때문에, 자기보다 조금 나아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금세 자신을 보면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것을 <상대적 빈곤감>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잡지에 실린 어느 평범한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집사님의 가정에는 아들만 셋이 있는데,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아이들 운동화를 제때에 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운동화 가격이 좀 비쌉니까? 새 운동화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너무나 활발하게 뛰어 노는 관계로 곧 신발이 헤어져 버립니다.
돈이 없어서 메이커 신발을 파는 매장으로 가지 못하고, 동네에 있는 시장에 가서 신발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신발가게에서 여러 신발을 살피 보다가 신발 가게 여주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자신에게 있는 남자아이 4명이 얼마나 개구쟁이인지 신발이 금세 닳아서 당해내기 어렵다”고 신세타령을 합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가게 여주인이 슬며시 내실로 들어가 버립니다. 무슨 말 실수 했는가 싶어 당황하고 있는데, 그 남편이 사연을 말해 줍니다. “우리 집에 외동 아들 하나가 있는데, 태어나서 12년 동안 한 걸음도 걸어 보지 못한 장애아입니다. 손님 이야기를 듣다가 마음이 아파서 저러겠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분은 자신은 참으로 복에 겨운 사람이라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낡은 운동화를 가슴에 품고, 자신이 배부른 불평을 했다는 생각합니다. 비록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래도 밥 세끼 챙겨 먹을 형편은 되고, 아이들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이 감사하다고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12년을 장애로 사는 아이를 가진 부모도 있는데, 그것에 비하면, 자신은 불평하는 것조차도 호사스러운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부끄러운지 회개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마침 돌아 오는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이 되어, 가족 전체가 개개인 이름으로 정성스레 감사헌금을 드렸다는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불평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게 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보이게 합니다.내가 받은 은혜는 생각나게 하지 않고, 내가 겪은 고난만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환경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생각이 잘못되면, 항상 원망 불평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환경과 여건이 나빠도 생각만 건전하면, 항상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살전 5:16~18 말씀을 보세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어떤 분이 이렇게 패러디 했습니다. “항상 낙심하라. 쉬지 말고 원망하라. 범사에 불평하라. 이는 너희를 향한 사탄의 뜻이니라.”우스개 소리지만 참 무서운 내용 아닙니까? 무섭다기 보다는 사탄이 성도들에게 구사하는 전술전략이 그대로 나타나는 말입니다.
우리 덕민교회 성도님들은 모든 일에 풍성한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환경 탓을 하면서 불평으로의 사는 인생이 되어서 안 됩니다. 내가 감사 할때에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사라집니다. 내가 감사할 때에 내가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항상 감사하고, 잊어버리지 말고 감사하는 상도가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2. 감사와 행복 : 행복은 “감사의 꽃”입니다.
첫 번째가 감사와 신앙의 관계를 보았다면, 이제 감사와 행복의 관계를 살펴 봅시다.
저는 감사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고, 행복은 감사라는 씨앗이 땅에 뿌려져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이나 귀한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감사의 씨앗을 심으면, 행복의 꽃이 피어납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이 재산順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지위順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적順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감사順입니다!
① 행복은 감사 순서(順序)입니다.
우리는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소유의 크기나 조건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에 정비례한다.”따라해 보십시다.“크게 감사할수록 행복도 커집니다”뒤집어 놓고 말하면, “나는 불행합니다, 나는 감사하지 않습니다”를 크게 외쳐 보십시오. 진짜로 불행해지고, 진짜로 감사할 내용이 다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런 겁니다. “좋은 신앙이 감사를 만들어내고, 감사하는 신앙이 행복을 만들어 낸다”는 점입니다. 잊지 말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행복을 누리고 싶으시지요? 그렇다면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항상 행복해질 줄로 믿습니다!
② 항상 감사, 항상 행복 :
본문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for everything)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always)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범사에, 항상 이라는 말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서든지 항상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불평불만이 산재한 곳에서 감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내 속에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내가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그리고 행복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대로 살면 행복하고 이 법칙대로 살지 않으면 불행하고 그런 겁니다.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파송 나가 있는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언어 훈련 때문에 학교 근처에 있는 낡은 아파트를 임대하여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집세도 싸고, 시가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지 않고, 모든 것이 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집에 와서 방문을 열면, 수많은 바퀴벌레들이 거실에서 반상회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바퀴벌레 퇴치 약을 사서 뿌려도 보고 설치도 해보았지만, 효과가 전혀 없어 스트레스가 폭발 직전입니다. 당연히 기도생활은 멈추어 버렸고, 생활이 힘들다 보니 감사라는 단어는 잊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러다가 살고 있는 지역에 갑자기 지진이 발생합니다. 선교사님이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도 흔들렸고, 복도를 따라 벽에 크랙(금)이 보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신기한 것은, 날마다 보이던 바퀴 벌레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퀴 벌레가 보이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지만, 예전에 들은 말 한마디가 생각이 떠오릅니다. “출항하는 배에서 쥐가 보이지 않으면, 배가 침몰할 것을 미리 알고 다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보이지 않는 바퀴 벌레 때문에 오늘밤에 잠을 자다가 아파트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온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아침 일찍 집을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는 친구 선교사님 댁에서 3일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 옵니다.
집으로 돌아와 집 문을 여니, 누가 가장 먼저 반겨 주었을까요? 바퀴벌레인 거에요. 이때의 바퀴벌레는 어떤 바퀴벌레인가요? 짜증 나는 바퀴벌레가 아니라,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바퀴벌레인 거에요. 그래서 선교사님이 큰 소리로 “하나님~ 바퀴벌레 감사입니다”라고 고함을 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생각만 바꾸면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감사와 기적 : 기적은 “감사”의 열매
감사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성도에게는 <기적>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기적을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 주어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기적이라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지 못합니다.
뛰어난 설교로 수많은 은혜를 끼친 스펄전 목사님은 <감사의 3단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1단계는 “만일(if) 감사”입니다. ‘만일 내가 부자가 되면’이라는 감사인데, 이것은 이런 저건 조건이 성립되면 감사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불신앙적 태도입니다.
2단계는 “때문에(because) 감사”입니다. 이것은 조건이 갖춰져서 이제 감사한다는 겁니다. if 감사보다는 진일보했지만, 아직은 초보적 신앙의 감사입니다.
3단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감사”입니다. 환경 조건이 나빠도,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성숙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단 3:18절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무지막지한 고생을 하는 중이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혀를 내두르는 축복과 기적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의 이야기입니다. 디즈니는 오늘날 애니메이션과 영화 사업으로 대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지만, 청년 시절에는 정말로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작은 사업도 망하고, 실직한 후 출판사와 신문사 이것저곳을 기웃거리며 자신이 그린 만화를 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낙심한 디즈니를 교회목사님이 교회 행사 전단지 디자인을 맡겨줍니다.
이에 디즈니는 교회에 딸려 있는 창고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허름한 창고였고, 쥐가 들락거리는 곳이었지만 감사를 합니다. 처음에는 징그러웠던 쥐가 점차 적응이 되면서 귀여워집니다. 먹던 빵 조각을 던져 주면서 함께 지내는데, 어느 날 아이디어 하나가 번득 떠오릅니다. 그것은 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미키마우스>입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이 예비한 길이 보인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 증자(曾子)의 말입니다.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면 바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일일삼사!(一日三謝) 하루에 세 번 감사하자는 겁니다. 내가 하루를 보내면서 감사할 것 세 가지를 끄집어 낼 수 있다면, 인생은 보다 여유롭고 풍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성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2019년의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하고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