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을 막지 마라
瓦也 정유순
길을 갈 때 걸어서 가든, 차를 타고 가든 길이 막히면 우선 짜증부터 난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 올 때엔 더 한다. 자동차의 경우에는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면 십중팔구 사고를 부른다.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조그만 돌부리에 뒤집혀 지거나 정상 차선을 이탈하여 다른 사고를 불러 오기도 한다. 비행기와 선박도 장애물을 만날 때 잘 대처하지 못하면 대형 사고가 일으키게 된다. 물과 바람도 가야 할 길이 있을 것 같다.
<국도>
어렸을 때 비가 온 뒤 아버지를 따라 집 앞의 도랑 물길을 터 준적이 있다. 그 길을 터주지 않으면 물이 고여 집안 마당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도랑에 쌓인 흙도 밖으로 끄집어내고, 나무 토막과 돌덩어리도 들어내면 물은 제 길을 찾아 잘도 흘러간다.
<갯골>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이 모이면 힘이 배로 늘어나 갈 길을 찾아 흘러가는데, 빠르게 직선으로 흐르면 엄청난 힘이 가속으로 생겨 위험한 무기로 돌변한다. 홍수가 일어 산사태를 일으키고 물 바다로 만든다.
<삼부연폭포>
다행스럽게도 물은 쉼의 여유를 안다. 물은 유유자적(悠悠自適) 흐르다가 힘들면 쉬어 가고, 또 힘이 솟아나면 바다까지 간다. 어느 강을 봐도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강은 없다. 구불구불 굽이를 돌아 흐르면서 여울목도 만들고 폭포도 만들면서 온 고을을 적시며 만물을 살찌운다. 이렇게 흐르면서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넓은 곳을 쉼터로 삼아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
<한탄강>
우리는 하천을 정비하여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곳을 가끔 찾아가곤 한다. 그러나 그곳을 볼 때마다 물의 성질을 모르는 사람이 어설프게 일을 저질러 놓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거의 직선형 하천으로 만들어 물의 쉼터도 없다. 물이 가는 길을 인간의 잣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라뱃길>
한강만 봐도 그런 구석이 많다.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로 숲을 이루고 있는 잠실지구, 반포지구, 이촌동지구, 여의도지구 그리고 경기도 일산지구 등이 옛날에는 한강 물이 쉬어 가는 ‘물의 쉼터’였다. 잠실의 ‘석촌호수’와 고양의 ‘일산호수’는 한강의 본류로 물이 흐르던 곳이었는데 물의 쉼터를 없애는 과정에서 다 매립하지 못하고 남은 자투리 같은 생각이 든다.
<석촌호수>
일산지구에서 생산하는 쌀은 밥맛이 아주 좋아 조선시대에는 임금님 수라상에 올릴 정도였다. 물이 실어 나르는 각종 영양분을 쉼터에 공급함으로써 땅이 비옥해져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인구 증가로 주택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런 공간을 사람이 다 차지하게 되었지만,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생태계의 보고로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일산호수 길>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한 것은 1980년대 소위 ‘한강정비사업’이다. 강바닥의 모래를 다 파버렸고 물길도 거의 직선으로 만들었으며, 강 옆의 하천 부지도 콘크리트로 길을 만들어 버려, 물의 쉼터가 아닌 사람 중심의 휴식 공간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한강>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한강은 물이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집중호우로 한강 상류에 있는 댐의 수문을 열면 한강은 거대한 해일(海溢)로 변해 버리는 것 같다. 이렇게 급하게 흐르던 물이 서해의 밀물과 마주치면 힘의 원리에 의해 역류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큰 홍수가 날 수밖에 없다. 이것도 물이 가는 길을 막아버린 결과일 것이다.
<한강 변>
바람도 가는 길이 있다고 한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인데, 공기의 흐름이 좋을수록 기분이 한껏 상쾌해진다. 바람 길은 물길을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아름다운 강 옆으로 고층아파트가 빽빽하게 진을 쳐 버리니 바람 길도 막힐 만하다.
<천변아파트>
그래도 한강은 강폭이 넓어 그런대로 봐줄만 하지만, 지방 도시에 가면 도랑 같은 좁은 하천 변에 고층아파트가 숨이 막힐 정도로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당연히 바람 길이 막혀 여름이면 무덥고 겨울이면 더 춥다.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고층건물 사이에서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와류(渦流)현상’이 일어나 공기의 질도 떨어지고 뜨거워진다. 소위 ‘열섬’현상이 발생한다.
<서울도심>
경남 합천 해인사에 가면 고려 고종 때 완성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있다. 이를 보관하고 있는 서고는 비바람만 막아주는 허술한 건물뿐이다. 이 건물 속에서 우리의 국보가 천년 가까이 아무 탈 없이 버텨 온 것도 참으로 신기하다.
<대장경각>
오래전에 이곳을 방문한 어느 대통령께서 이렇게 귀한 ‘국보’를 허술한 곳에 보관하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국가 예산으로 현대식 시설을 갖춘 건물을 짓게 하여 옮겼는데, 얼마 가지 않아 경판에 습기가 차서 눅눅해지고 곰팡이가 슬어 예전의 건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현대과학을 믿었다가 국보를 잃을 뻔했다. 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은 바람 길을 이용하여 지은 건물이었다.
<대장경각 내부>
경남 밀양에는 삼복더위에도 얼음이 언다는 ‘얼음골’이란 곳이 있다. 골짜기의 동굴 같은 작은 구멍에서 찬바람이 나와 얼음이 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여 년 전에 그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얼음이 얼지 않고 그냥 찬바람만 시원하게 흘러나왔다. 가마솥더위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잔뜩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잘못 알고 왔나 하여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으나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밀양얼음골-네이버캡쳐>
노점상에게 “언제부터 얼음골에 얼음이 얼지 않았죠?”하고 물어보았더니 “저기 저것이 들어선 뒤부터요” 하고 의외로 쉽게 말해 주었다. 그 아주머니가 가리킨 곳은 얼음골로 올라오는 입구에 들어선 큰 건물이었다. 그래서 “저 건물 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하고 의아해 하며 다시 물었더니 “바람 길이 막혀서 그렇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한쪽 귀로 흘리고 말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 길이 막혀서…”라는 말이 가슴속 깊이 와 닿는다. 그 건물이 바람 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꾸 의심이 더해가는 것은 숨길 수 없다.
<태백의 구문소>
아름다운 해변에 도로가 나고 아파트나 호텔 등 호화건물이 들어서면서도 많은 변화가 생긴다. 해수욕장은 모래가 파도에 밀려오지 않고 씻겨 내려가기만 해 해마다 다른 곳에서 모래를 들여와 채우기에 바쁘다. 역시 바람 길을 막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해운대>
우리 주변에는 수백 년 이상 아주 오래된 고택과 고목들이 있다. 이것들이 오랫동안 버티며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물길과 바람 길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어느 교수의 말도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고택에 가보면 바람이 잘 통하는 것 같고, 오래된 고목 밑에 가보면 물도 맑고 바람도 순하다.
<한옥마을>
아마 ‘물길과 바람길’만 제대로 찾아주어도 환경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자연은 물과 바람을 통하여 모든 생명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만 같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말이 있다. 즉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자는 흥하고, 이를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라는 뜻을 되새겨 볼 일이다.
<그림 - 장영철 화백>
<비행기>
<정유순의 ‘우리가 버린 봄·여름·가을·겨울’ 중에서>
https://blog.naver.com/waya555/222929868742
첫댓글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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