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서울중앙지법의 1심 판결은 학살이 발생한 지 55년 만에 나왔다.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원고인 응우옌 티 탄씨는 이날 선고 직후 소송 대리인단과의 화상통화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이 투쟁이 끝이 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오늘 이 소식을 듣고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씨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일부 승소한 뒤 화상연결을 통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이날 법원은 “응우옌씨에게 3천만 100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성동훈 기자© 경향신문 한국 정부는 1965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32만명의 장병을 베트남전쟁에 파병했다. 1968년 2월 파병된 청룡부대(해병대 제2여단) 소속 1대대 1중대 군인들이 퐁니 마을에서 7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이번 판결의 대상인 퐁니 마을 사건이다.
1999년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베트남인의 증언이 처음으로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도, 공식적으로 학살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2월15일 트란 둑 루옹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불행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했고, 2001년에는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마저도 민간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와 박근혜씨는 이 문제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3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쩐 다이 꽝 국가주석에게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사과했다.
2020년 4월21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 국가배상 청구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경향신문 응우옌씨가 2018년 4월 한국을 찾아 직접 피해사실을 증언한 것을 계기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점차 주목을 받았다. 응우옌씨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률가들이 연 모의재판에 참여했다. 이때 모의법정에서 1중대 소속이었던 참전군인이 학살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모의재판 재판장을 맡은 김영란 전 대법관은 선고문에서 “이 사건은 (전쟁 중) 의도치 않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아니라 의도된 집단학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응우옌씨는 2019년 4월 다시 한국을 찾아 진상조사, 희생자들에 대한 공식 입장 표명, 피해회복 조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베트남전 때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거나 피해를 입은 16개 마을 103명의 베트남인을 대표해 낸 청원서였지만 한국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국방부는 “한국군 전투 사료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려면 한국의 단독 조사가 아니라 한국·베트남 정부 공동조사가 선행돼야 하는데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고만 답변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소송을 낸 끝에 2021년 4월 국정원에 있던 당시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퐁니 마을 학살이 논란이 되자 1969년 11월 중앙정보부가 1중대 소속 1~3소대장 등을 조사해 신문조서와 보고서 등을 남겼다는 내용이다. 이번 소송에서 응우옌씨를 대리한 이선경 변호사는 “오래 전 일이라 증거가 없고 대한민국이 가해국가이기 때문에 대리인으로서 힘들었지만 피해자와 가해자의 기준이 국적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대한민국 국격을 높인 판결”이라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