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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2:16-17(335)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2021. 10. 17.
오늘날에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기독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C.S.루이스(C.S. Lewis, 1898-1961)라는 분이 있습니다. 영국의 학자이며 소설가였고, 약 40권의 책을 집필하였는데 책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바탕으로 쓰여져서 신앙을 가지지 않는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루이스는 암으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하나님을 떠나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고통 중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루이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루이스 나이 50중반대에 뒤늦게 사랑이 찾아 왔습니다. 조이 데이빗먼 (Joy Davidman, 1915-1960)이라는 미국 유대계 여성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두 아들을 가진 엄마이었으나 이혼한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루이스가 데이빗먼이 영국에서 만날 때에 이미 데이빗먼은 골수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녀의 모든 상황을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을 키워 나갑니다. 조이는 유태인이었지만, 루이스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기독교로 개종을 합니다. 그리고는 1957년 3월, 루이스는 그녀가 입원해 누워 있는 병상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병세가 약간 호전되는 듯 하였지만, 1960년 3월에 다시 병이 재발됩니다. 1960년 4월 루이스는 아내가 바라던 평생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로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지 3개월 후 아내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1960년 7월 13일에 사망합니다. 루이스 또한 아내가 세상을 떠난 1년 후에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됩니다.
아내의 죽음은 루이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아내를 떠나 보내고 힘들어 하던 그 시기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 중, 학생 한 명이 루이스에게 질문을 합니다. “교수님!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왜 이 세상에 형언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많습니까?”
아내를 잃은 고통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루이스의 마음을 사정없이 후벼 파내는 질문이었습니다. 학생의 질문을 받고 한참 침묵하던 루이스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오만하고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 고통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루이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나고 있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루이스의 모습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도 루이스의 모든 책은 훌륭한 신앙의 교훈이 되는 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통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내 목소리를 듣게 되면 나는 더 나락으로 빠집니다. 내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 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역경 속에 있는 자를 외면하지 않는 분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성도의 기도를 모른 체 하는 분이 아닙니다. 고통에서 회복시켜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본문은 두 구절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본문입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염원이며, 희망이고, 하나님에 대한 기도입니다. 이런 저런 일로 힘들어하고 낙심하면서, 신앙에서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고난과 역경을 믿음으로 견디어 이겨내면서 신실한 믿음으로 든든하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좋은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바라보아야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무엇인가를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두 구절로 되어 있지만, 16절과 17절은 함께 묶어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게 16절과 17절을 한 구절이라 생각하고 살펴보면, 여기에는 세 부분으로 문장을 나눌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구절로 되어 있는 한글 성경 본문입니다.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해를 돕기 위한 세 부분으로 나눈 것입니다. “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2)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3)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소대지를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1)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2)마음을 위로하여 주시는 하나님, 3)모든 일에 굳건하게 하시는 하나님’
1.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16절 상반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여기의 ‘사랑하시고(아가페사스)’인데“이타적이고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항상 베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변하지 않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권면합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권사님이 만두집을 운영하였습니다. 최고의 재료를 가지고 정성으로 만두를 빚습니다. 어디에 내어 놓아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최고의 만두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다 보니, 맛 집으로 인정이 되어 먼 곳에서도 찾아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만두를 좋아하는 딸이 만두를 가지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권사님은 정성껏 만두를 만들어 포장을 해놓았습니다. 잠시 후 딸이 만두를 가져가며 “엄마! 이 만두 팔다가 남은 거지? 팔다가 남은 찌끄러기 모아서 주는 거지요?”라는 말로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권사님은 그 말이 너무나 섭섭하게 느껴졌습니다. 시집간 딸이 먹고 싶은 만두라고 해서 더 정성껏 만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은 ‘먹다 남은 거죠?’라는 말입니다. 딸이 서운한 말에 권사님은 갑자기 머리에 떠 오른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과 최상의 것을 주시는데, 나는 하나님께 불평한 적은 없었는가? 왜 하나님이 내게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지는 않았는가?”
얼마 전에 목사님이 하신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권사님은 자신의 딸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투정했던 못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불평하고 원망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이리라도 권사님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에게 모든 것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불평을 가지게 됩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며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원망을 멀리 떠나 보내시기 바랍니다.
2. 놀라운 은혜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16-17절,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여기에 보면 성도에게 항상 은혜가 되는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1)영원한 위로, 2)좋은 소망(good hope)’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소망은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입니다.
‘영원한 위로’가 무슨 뜻인지 살펴 봅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원어에서 나타나는 말의 의미는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고 항상 함께하며 변함이 없는 위로”를 의미합니다. 슬픔을 겪는 사람 곁에서 가식적으로 함께 슬퍼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거짓눈물로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위로도 아닙니다.
지난달 23일에 흥미로운 외신 뉴스 하나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9월 23일 일본의 명문 사립대 간사이대학 세지마 요시히로 교수팀이 발표한 ‘치유 로봇’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치유로봇은 ‘눈을 이용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능을 가져 우울증, 스트레스 등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위안’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면에 보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로봇입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로봇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봇이 흘리는 눈물에 도리어 심한 불쾌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읍니다. 우울증환자를 치료하는 로봇이라는데 왜 이런 강한 거부반응이 나타나는 건가요? 그것은 로봇의 눈물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가짜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로봇의 눈물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감정을 나누는 위로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공상 과학영화를 보면, 인간과 감정을 교류하는 로봇들이 등장하는 미래 세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아무리 로봇이 진화되어 인간의 감정을 가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보여 주시는 영원한 위로를 절대 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한 때는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위로를 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함께 감정을 느끼면서 감정의 교류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에 숨어 있는 깊은 응어리를 밖으로 풀어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위로는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들은 영원한 위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 “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인생을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시련을 겪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뜻하지 않던 고난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난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새 힘을 주시며 위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위로입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의 저자 김창옥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화려한 언변과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청중을 휘어잡는 김교수는 토크쇼를 인도하는 강사입니다. 본래 그는 믿음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의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너무나 많은 스케줄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강의를 멈추면 되지만, 스타강사의 욕심 때문에 멈추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면서 청중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급기야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자살까지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강연을 중단하고 두 주간의 휴가를 내어 혼자만 머무는 조용한 곳으로 떠났습니다.
며칠 동안 기도와 말씀을 보면서 보내던 중에 마음속에 하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주 간단한 음성입니다. 마음에 들려 온 말은“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라는 말입니다. 김교수는 마음에 들려온 이 말이 바로 하나님이 던져 주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생각하였던 자신을 위로해 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판단합니다.
‘여기까지 잘 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가 어디인가요? 이곳은 김교수가 머물렀던 한적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앞이었습니다. 고로 여기까지 잘왔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잘 왔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자신을 살렸다고 김교수는 간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힘들더라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 삶의 승리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3. 모든 일에 굳건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7절,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선한 일과 말에 힘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선한 일과 말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때에 뒤로 물러서가나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목표를 세우게 되면,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모습을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다’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란 말은 ‘初처음 초, 志 뜻 지, 一 한 일, 貫 꿸 관’ 한자를 가진 사자성어입니다. “처음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모습이라는 뜻과, 처음 품을 뜻을 한결 같이 꿰 뚫는다”는 뜻을 가진 한자 사자성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믿음 안에서 항상 초지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동일하신 분입니다. 고로 기독교인들 역시 믿음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는 중국의 공산당 정부는 매우 싫어하지만, 중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여러 문화유산들은 좋아합니다. 중국의 문화유산 중에는 세계적 자랑거리인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지도상의 연장은 약 2,700km이지만, 기복이 있거나 중첩된 부분을 고려한다면 총 길이 5,000~6,00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류가 만든 불가사의 건축물입니다.(달에서 관측)
어떻게 이런 놀라운 건축물인 만리장성이 시작된 것일까요? 장성의 시작은 기원전 221년이었고, 만리장성의 첫 삽을 뜨면서 시작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진시황제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리장성은 나라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이어져 만들어 집니다. 모든 황제들이 초지일관하게 모든 힘을 다해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결국 오늘날과 같은 만리장성이 완성된 것이 16세기 명라나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무려 1800년 동안 건축된 놀라운 세계 문화유산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초지일관되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초지일관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고 동일하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나요? 예전에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지금 내가 깨닫는 은혜가 다른 것처럼 판단되어 지나요? 그것의 정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좋은 10월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더 행복한 시간을 누리기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