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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1:3~4(377) 산 소망을 가지라 2022.11.13.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책이 있습니다. 미국 작가 미치 앨봄이 쓴 비소설로써 1997년에 출간된 이후 2022년 1월 현재 전 세계 50개국 1,800만부가 판매되었으며 205주 동안 《뉴욕 타임스》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책입니다.
이 책에는 두 사람의 대화로 꾸며져 있는 내용입니다. 슈워츠(Morrie Schwartz 1916-1995)교수와 그의 제자였던 미치 앨봄입니다. 모리는 브랜다이스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노년에 갑자기 루게릭이란 병에 걸리게 됩니다. 루게릭 병에 대해 들어 보셨던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루게릭 병에 걸리게 되면 몸에 있는 근육이 굳어지면서 근육 하나하나가 죽어버리는 병입니다. 순가락을 들 수 있는 손가락 근육이 굳어져 숟가락을 들지 못합니다. 걸을 수 있는 대퇴근육이 사라져 걷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심장 근육이 멈추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매우 잔인한 불치병입니다.
은사인 모리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제자 미치 앨봄이 화요일마다 찾아와 스승을 위로하면서 대화를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가는 교수와 젊은 제자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의 내용을 편집해서 모리 교수가 사망한 이후에 앨봄이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이 책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배려하고 활발하게 감정을 나누는 인간, 그리하여 작별 인사의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만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주 생동감이 있는 대화들이 많이 오고갑니다. 이런 말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있다”.
참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은 땅에서 나타나는 슬픔과 아픔을 견디고 나갈 수 있습니다. 소망을 미래에 두고 사는 사람은 현재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소망이 확실하게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가 당하는 이런저런 아픈 현실은 별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근본은 소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소망을 가진 사람은 현실의 절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환경과 여건이 주는 열악함에 굴복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이러한 소망이 있었기에 극심한 어려움과 환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AD 64년 7월 로마시내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악독하기로 유명한 네로 황제가 지른 불이었습니다. 그는 불타는 로마 도성을 바라보면서 춤을 추며 노래합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수많은 사람들이재산을 잃고 죽임을 당한 방화사건의 주범이 네로황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네로에게 적극적으로 항의를 하자, 네로 황제는 백성들이 가진 원망의 화살을 ‘그리스도인들이 불을 질렀다’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죽임을 당하는 네로박해가 시작됩니다.
이때에 로마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지금의 터키 지방인 소아시아로 건너가 바위 굴 속에 피신합니다. 이런 성도들에 대해 벧전 1:1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Pontus),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이렇게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버린 성도들에게는 그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 때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는 흩어져서 슬픔을 안고 힘들어하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산 소망’ 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living hope’, 즉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산 소망’이라는 단어에 촛점을 맞추어 보아야 합니다. 살아 있는 소망이 있다면, 살아 있지 않은 죽은 소망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소망이라는 말은 희망이라는 말이며 소망은 마음에서 생각하고 바라는 희망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는 소망이 아니라 이미 죽어 버린 소망,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는 이미 죽어버린 소망이 있다는 말일까요? 저는 이 죽어 버린 소망을 두고, 이런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살아오시면서 복권구입을 한두번 즈음은 해보셨을 것입니다. 주택복권이던 로또복권이던 모든 사람들이 복권을 구입하고서는 발표하기까지 자신이 1등에 당첨되는 행복한 꿈을 꾸고 소망을 가집니다. 복권당첨이 확증되기 전까지 모든 복권은 1등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살아 있는 소망이 됩니다.
하지만 복권 당첨 발표가 끝나고 나면, 당첨되지 아니한 복권은 어떠한가요? 당첨에서 탈락한 복권을 그냥 신경질이 나서 찢어버리거나 꼬짓꼬짓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어 버립니다. 왜 가차 없이 버리나요? 당첨되지 않은 복권은 이미 죽어 버린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미 당첨발표가 끝난 복권을 들고서 당첨되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한번 발표되어 지나가 버린 복권은 절대 당첨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헛된 일에 마음을 두고 복권을 간직하면서 당첨을 꿈을 꾸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소망은 소망이되, 죽어버린 헛된 소망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죽어버려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소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현실은 로마정부당국의 박해를 피하여 여기저기 유랑하면서 도망자 신세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기에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좌절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다. 이제 살아 있는 산 소망을 가지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11월은 죽은 소망을 만나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산소망은 거듭나게 하는 소망입니다.
한국성도들에게 특히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찬송가 중에 488장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모두도 매우 좋아하고 많이 애창하는 찬송가일 것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몸에 소망이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소망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요? 물질의 소망, 건강의 소망, 믿음의 소망, 가족들이 평안하고 자녀들이 무탈한 소망,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이 즐겁고 행복해지는 소망, 아마도 이런저런 여러 가지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수백수만가지 바라는 소망이 사람들마다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에서는 이런저런 소망의 내용과 종류를 따져 묻지 않습니다. 그냥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몸에 소망이 무엇인가?”라고 크게 물어 봅니다. 이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답변을 해야 올바른 신앙인의 답변이라 칭찬을 받게 될까요?
그 해답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몸에 소망이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라고 답변합니다. 건강의 소망, 물질의 소망, 축복의 소망, 다 좋습니다. 그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세워야 되는 답변은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주 예수 밖에 없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이어져야 되리라 믿습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에게 나의 소망이 매여져 있지 않다면, 나의 모습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구원의 주님으로 신뢰함으로 거듭남으로 산 소망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 몸에 소망 무언게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이 찬송가 가사를 작고한 분은 영국의 에드워드 모우트( Edward Mote 1797-1874)라는 목사님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 모우트의 직업은 목공쟁이였습니다. 나무를 가공해서 의자와 침대, 식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모우트는 37살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활에 변화가 생긴 모우트는 당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일기장에 기록하였습니다.
“내 망치 소리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나는 거듭났으며,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항상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때문에 삶의 모습이 변화된 모우트는 45살 되던 해에,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주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모우트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던 첫 날, 37때 자신을 찾아와 산 소망을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복하여 감사시를 적게 됩니다. 그 감사시가 바로 찬송가 488장의 ‘이 몸에 소망 무엇인가’라는 찬송가 가사가 됩니다. 그리고 이 가사에다가 아름다운 곡조가 어울리게 작곡되면서 전세계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찬송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3절을 보세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3절 설명은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궁무진하신 사랑의 긍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항상 우리 모두는 지키고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제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없는 존재는 미완성존재입니다. 불안한 존재입니다. 정상에 우뚝 서 있다고 큰소리치지마는 곧 천길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위험성을 늘 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 던져지는 들풀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냥 들판에서 아무렇게 났다가 그냥 아무렇게 사라져 버리는 무의미한 들풀같은 존재가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들풀같이 아무런 쓰임새가 없는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늘나라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래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말라버리는 풀처럼, 떨어지는 꽃처럼 절망을 안고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아무런 구원의 소망과 천국의 소망이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에게 산 소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늘, 항상 하나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참 아름다운 찬송이지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면 고백이 바뀝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스럽다 할지라도 다시 사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동행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붙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나를 거듭나게 하고,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2. 천국의 유업을 이어지게 하시는 산소망입니다.
4절 보세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산 소망을 가진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놀라운 복입니다. 본문에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무엇이길래 썩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것인가요?
이것은 바로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입니다. 성도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안식처인 집을 빼앗깁니다. 일평생 피땀 흘려 일군 재산을 탈취 당하고 생명과도 같은 기업을 빼앗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사자밥이 되거나 목이 달아나는 참혹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단 한가지만으로도 오늘날에도 전세계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박해와 핍박이 이어졌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탄마귀가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산 소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 다시 한 번 더 의미를 생각하며 다 함께 읽어 봅시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빼앗기지 않는 기업, 흔들리지 않는 기업, 영원한 기업을 하늘에 준비시켜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떤 어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믿음에 굳게 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20여년 전인 2003년 2월에 대구지하철에서 고의 방화로 인한 대형 화재가 발생합니다. 이 사고로 인해 192명이 사망합니다. 이 대구지하철 화재 때에 대구서부교회에서 30년 동안 믿음 생활한 69세의 김창제 집사님이 교회 기도모임에 가려고 전철을 탔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김집사는 출입문이 굳게 닫혀 나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불 타고 있는 전동차에 갇혀 버립니다. 부인 석태순집사가 사고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여러 번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수화기 안에 들리는 소리는 사람들이 고함과 비명소리가 들리는 끔찍한 상황입니다.
남편이 안전한지 아내가 물어 보자, 남편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먼저 하늘나라로 먼저 올라가네. 할렐루야 아-멘” 그리고는 전화가 끊겨 버립니다. 그리고 전화통화가 끊긴 후 반나절 만에 성경책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은 남편의 시신을 병원에서 만나게 됩니다. 불길에 의한 화재 사망이 아니라, 의자가 타면서 나오는 유독가스에 의해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전국의 지하철안의 모든 내장재가 불연재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은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힘든 상황과 앙울한 상황이 이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믿는 산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였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도들은 너무나 신앙생활하기 좋은 환경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산 소망을 다들 놓아 버립니다. 세상이 주는 물질의 소망만 바라봅니다. 이런 어리석은 모습에 머물지 않도록 우리 개개인의 신앙을 돌아 봅시다. 그리하여 산 소망을 하나님의 은혜 중에 생활하는 11월이 되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