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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le Vanya (바냐 아저씨)
그룹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번 공연 관람은 레프 도진(Lev Dodin) 연출의 ‘Uncle Vanya’다. 나는 원래는 연극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특히 순수연극은 더욱. 연극 보다는 영화가 훨씬 좋았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작품을 표현하는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고 장면 전환이 느릿느릿 이어져 답답했고 연기하는 배우들의 과장되어 보이는 대사나 몸짓들도 보기에 불편했다.
그러나 영화배우 중에서도 정말로 연기가 뛰어난 배우들은 연극에서 기량을 닦은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영화에서 큰 인기를 누리면서도 별로 돈도 안 되고 힘들어 보이는 연극 무대에 서는 걸 늘 향수처럼, 그리고 숙제처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연극에는 내가 모르지만 영화와는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해온 정도였다.
‘안톤 체홉’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교 때였다. 그의 작품이 특별히 좋아서 읽었던 것은 아니고 러시아 문학이 이야기될 때 ‘톨스토이’ ‘도스또옙스끼’ ‘뚜루게네프’ ‘푸쉬킨’‘고리끼’ 등과 함께 빠짐없이 나오는 그의 명성의 비중 때문에 한 번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의 작품 ‘바냐 아저씨’를 위시한 ‘갈매기’ ‘세 자매’ ‘벚꽃동산’ ‘결투’ 등을 읽은 소감은 한마디로 그저 그랬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의 콩쿠르 문학상 수상작들 같은 것들처럼 너무 난해해서 도무지 뭔가 뭔지 알 수 없다거나 하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강렬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도 뚜렷하게 없었다. 뭔가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을 찾는 나의 취향은 아니었던 것이다. 특별히 극적인 장면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일상의 이야기가 그저 밋밋하게 이어져 나가는 게 마음에 별로 들지 않아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나의 독서 습관은 원래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면 깊이 빠져들어 몇 번이고 되풀이 읽고 더 나아가 그걸 쓴 작가의 다른 작품들 까지 깡그리 찾아 읽는 것인데 ‘안톤 체홉’의 작품들은 다시 읽을 만한 작품 속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다시 ‘안톤 체홉’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우연히 생겼다. 10여 년 전이었다. 인디아나 주립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미국인 친구와 이메일을 교환하면서 그가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그가 강의 하는 게 ‘안톤 체홉’ 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와의 풍성한 화제를 위해 ‘안톤 체홉’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생겼다.
20여년 만에 다시 읽는 그의 작품들이 전과는 맛이 좀 달랐다. 일상의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밋밋한 이야기 같은 데 그 안에 배어 있는 잔잔한 슬픔, 고독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떤 장면에서는 코끝이 찡해질 정도의 감동도 있었다.
좋은 책들이 세월을 두고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감동이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했던 책들에서였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세월이 흐르고 내가 나이가 들면서 받아들이는 느낌 같은 게 달라진 때문이리라.
어떤 작품, 어떤 장면의 어떤 대사에서 받았던 특별한 느낌을 서투른 영어로 써 보냈고 그 미국 친구는 너무도 놀라워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전공으로 가르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꽤 세밀한 느낌을 써 보내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칭찬을 많이 받았고 그 칭찬이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런 인연으로 그와는 존경심을 바탕으로 한 더 깊은 우의를 다지게 되고 서로를 방문하게 되면서 더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안톤 체홉’은 잊혀졌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국내의 영어권 작가들의 모임인 지금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룹 멤버 중 영어 연극 연출가인 D 대학교 교수와 몇 편의 영어 연극 작업을 하게 되면서 관객으로서의 연극 아닌, 연출가나 배우 입장에서의 연극의 매력을 차츰 발견 하게 되었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즐기게 된다는 말은 어디에도 통용되는 것 같다. 대본이 쓰이기 전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부터 그 연극이 무대에서 상연되는 마지막 단계까지 관여하게 되면서 연극 감상에 더 깊이가 있어지게 된 것 같다. 무대 장치나 조명, 음향효과, 배우들의 등장, 무대에서의 위치, 대사, 동작 등이 전부 세밀히 계획된 연출자의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고 리허설을 통해 끝없이 다듬어진 후 무대에 서게 되는 것을 보면서 연극을 감상하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공연 전날 밤 다시 한 번 ‘바냐 아저씨’를 정독했다. 공연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흘러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무상함,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삶.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이런 주된 느낌이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 자못 흥미진진하고 가슴 설렜다. 더구나 오리지널 러시아 연극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러시아 연출가와 배우들에 의해 러시아어로 상연 된다는 것도.
이 연극의 연출가 Lev Dodin(레프 도진): Lev Abramovich Dodin은 1944년 시베리아 출생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을 23년간이나 이끌어오는 인물로 연출가와 교육자로서의 탁월한 업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소비에트연방과 러시아의 국가연극상, 대통령상, 트라이엄프상, 골든마스크 국립연극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고 특히 세계 최고 권위의 유럽연극상을 수상한 최초의 러시아인이다.
또 극중의 배우들은 거의 모두가 러시아의 국민예술가, 명예 아티스트, 명예배우 등의 자랑스러운 칭호를 받는 사람들이다.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간단히 더듬어보기로 한다.
Uncle Vanya: 47세의 독신인 그는 25년간을 매부인 쎄레브랴꼬프 교수를 존경의 대상으로 섬기며 농장에서 뼈 빠지게 일해 교수의 생활비를 보내며 살아왔지만 교수가 은퇴 후 농장으로 온 뒤 그의 위선과 가식, 허풍과 거만한 태도에 실망하고 뭔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와 한탄으로 괴로워한다. 잘만 했다면 자기가 쇼펜아우어나 도스또옙스키도 될 수 있었다고 극중에서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어릴 적부터 알아오던 사이라 마음먹었다면 어쩌면 자기의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교수의 부인 엘레나를 깊이 사랑하지만 그녀는 그런 면에서는 조금도 그에게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인 의사 아스뜨로프와 격정적인 키스신을 보여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맛보여준다.
수익성 없는 농장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어 파는 게 좋겠다는 쎄레브랴꼬프의 제안에 극단으로 내몰리게 된 바냐의 분노가 폭발하고 살인과 자살 미수로 이어지지만 결국은 평상으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는 삶이 있기에.
Uncle Vanya를 연기한 Sergei Kurishev는 2004년 골든마스크 러시아 국립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한 명배우로 그의 지적이면서 울적해 보이는 진지한 마스크와 카리스마 넘치는 풍부한 육성, 절제된 대사와 동작이 타고난 배우인 것 같다.
“난 겨우 마흔 일곱이야. 혹 예순까지 산다고 해도 아직 13년이 있어. 그 13년을 난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 어떤 일을 하면서 그날그날을 메꾸어 가야 한단 말이야...... 후략.”
기대할 아무런 희망도 없이 길고 끝없는 나날들, 언제 샐지도 모르는 밤과 밤을 살아가야하는 운명인 Vanya가 울부짖으며 내뱉는 절절한 대사에 가슴이 뭉클해온다.
엘레나: 쎄레브랴꼬프의 27세 젊은 아내로 은퇴 후 성치 않은 몸으로 만날 골골하는 남편에게 충실하려고 애쓴다. 나이든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처음에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랑과는 좀 다른 존경과 흠모의 감정이었다고 이제는 생각하며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싶은, 일탈을 꿈꾸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육욕적인 사랑을 원하는 시골의사 아스뜨로프에게 약간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열렬하게 키스를 하기도 한다.
엘레나를 연기한 Irina Tychinina는 아마 실제 나이가 40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도 27세의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여인 엘레나를 기품 있게 연기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가 좀 탁한 게 좀 거슬렸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그녀는 러시아 명예 아티스트 칭호를 갖고 있는 저명한 배우다.
아스뜨로프: 독신의 중년 시골 의사로 환자들을 찾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의사로서의 직분 외에 후세를 위해 나무를 보호해야한다는 건전한 사명감을 지닌 인텔리지만 엘레나에게 사랑에 빠져 욕정을 참지 못하고 자꾸 바깥에서 은밀하게 만나자고 대쉬한다. 그의 유창한 대사를 들으며 러시아 언어의 어떠함을 막연하게 짐작하게 된다. 숲의 필요성과 개발 계획 등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대사를 들으며, 말하는 도중 그가 언제 숨을 쉬나 불안하여 내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다른 배우들의 대사에서도 대사가 길어질 때 약간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그의 대사는 유난히 심했다. 러시아어 자체가 그런 것인지 그의 유창한 언어 능력 때문인지.이 극에서는 연출가가 그에게 특히 많은 비중을 둔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는 그의 배역이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에게 할애된 시간이 아마 주인공인 바냐보다 더 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중을 두었다. 나중에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이야기를 원작과 달리 약간 비튼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아스뜨로프를 연기한 Petr Semak은 50여세의 중년으로 소련 국가상을 수상하였고 러시아 명예배우 칭호를 갖고 있는 저명한 배우다.
쏘냐: 쎄레브랴꼬프의 전처의 딸, Uncle Vanya의 조카딸이다. 바냐와 함께 농장을 경영하는 처녀로 미모는 아니지만 마음씨가 곱고 착하며 생활력이 강하다. 농장에 드나드는 의사 아스뜨로프를 깊이 사랑하지만 마음을 전하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새엄마인 엘레나를 통해 아스뜨로프가 자기에게 남녀로서의 사랑의 감정이 없음을 전해 듣고 절망하지만 동병상련의 쓰라림을 안고 있는 바냐 아저씨와 함께 평상으로 돌아간다.
쏘냐를 연기한 30여세의 Elena Kalinina는 말리극단 소속으로 여러 연극에 출연한 배우다.
이 극에서 그녀는 사랑 받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쏘냐,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같은 처지인 외삼촌 바냐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성실하고 착한 쏘냐 역을 섬세하게 연기했다. 이 극은 바냐에게 하는 쏘냐의 대사와 함께 막이 내린다. 다소 신파적인 그리고 확실히 계몽적인 대사와 함께.
“......전략. 운명이 우리에게 내리는 시련을, 굳은 인내심을 갖고 꾹 참고 나가십시다. 지금도, 이윽고 늙어서도, 한시도 쉬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마침내 때가 오고, 저 세상에 가면 하느님도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실 거여요. 그때 우리에게는, 아저씨과 저에게는 밝고 아름다운 고상한 생활이 펼쳐질 거여요. 그러면 우리는 현재의 불행한 생활을 그립게 미소를 띤 채 돌이켜보고 편안히 쉬게 될 거여요......(손수건으로 아저씨의 눈물을 닦아준다.) 불쌍한 바냐 아저씨, 안돼요, 울고 계시는군요.(눈물어린 목소리로) 아저씨는 한평생 기쁜 일도 즐거운 일도 모르고 지내셨지요, 하지만 이제 조금 남았어요, 바냐 아저씨.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되는 거여요.....멀지 않아 쉴수 있게 되요. (아저씨를 얼싸 안는다) 쉴 수 있게 되요! 쉴 수 있게...”
천정에 매달려있던 거대한 세 덩어리의 건초더미가 천천히 내려온다. 일상으로 돌아온 바냐와 쏘냐는 책상에 앉아 장부 정리를 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한 바냐의 허탈한 눈매.
보통 연극이 시작되면 객석의 불이 꺼지고 커튼이 올라가거나 옆으로 벌어지면서 무대가 열린다. 그런데 이번 연극은 달랐다. 객석의 불이 켜진 채로 무대 조명도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은 채 무대 옆문에서 배우들이 걸상이나 소품 같은 것들을 직접 들고 느릿느릿 나와 자리 잡으면서 연극이 시작되었다. 객석의 미등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켜져 있었다. 그리고 막과 막 사이에 커튼이 쳐지는 일도 없었다.
이런 방식은 틀림없이 연출가의 의도에 의해 기획된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커튼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관객들이 누리는 큰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나로서는 처음부터 아무 특별한 변화 없는 제1막의 시작이 약간 의외였다.
뒤 벽면과 창문, 걸상 몇 개가 전부인 아주 단순한 무대 장치가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만 공중에 매달려있는 세 덩어리의 커다란 건초더미가 특이했다. 이 장치는 이 극에서 아주 유명하고, 꽤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힘겨운 농촌생활과 이를 감수하며 살아내야 하는 삶 같은 것들.
아주 가볍고, 그러면서도 거추장스럽게 덩어리가 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도 나가지 않는데다 머리 위에 있어도 인물들에게 위험할 것 같은 불안감을 주지 않는 하찮은 물건으로서.
러시아어를 모르니 자막으로 봐야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어서 그런대로 몰입할 수 있었다. 같이 간 서양 친구들도 러시아어를 모르는데 더군다나 영어 자막도 없으니 그들은 나보다 훨씬 불편했으리라. 가끔 자막이 대사와 약간 엇박자로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자막만 보고 상황에 맞지 않게 관중석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에 실소가 나왔고, 의사 아스뜨로프가 숲에 대해 장황한 대사가 이어질 때 앞좌석 아가씨는 고개를 푹 꺾고 코를 골 듯 졸고 있었던 것도, 그리고 깜짝 놀라 깨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앞에 등장인물을 통한 시놉시스에 젤라긴을 빠뜨렸다. 젤라긴은 이 극에서 중요인물은 아니다. 젤라긴은 몰락한 지주로 바냐의 농장 일을 거들며 얹혀사는데, 그의 아내가 결혼식 다음날 다른 좋아하는 남자와 도망가고, 그녀와 정부 사이에 태어난 딸의 양육비로 재산을 탕진할 정도로, 시쳇말로 약간은 모자라는 인물이다. 그래서 더욱 순순한 이미지가 있는 인물이고.
늙은 유모나, 바냐의 어머니, 하인 보다는 좀 더 비중 있는 배역이지만 연기를 잘못하거나, 연출가가 중요하게 만들지 않으면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는 배역이다. 그런데 아마 이 극에서 젤라긴이 가장 인기 있었던 것 같다. 그의 표정 변화, 대사, 몸짓 한 장면 한 장면에 관객들이 몰입해서 환호했다.
늘 기타를 들고 나오며, 주인공들이 노래할 때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는 목소리로 허밍을 하거나, 바냐가 떨어뜨린 권총을 조심스럽게 감추는 장면이라든가, 들떠서 지껄이다가 갑자기 슬픈 표정으로 변하는 장면 등 모든 연기가 최고였다. 젤라긴을 연기한 나이 든 Alexander Zavialov, 단연 최고다.
주인공들보다 더 갈채를 받는 조연. 이런 조연들 때문에 극이 늘 빛나는 것 같다. 흥행몰이에 성공한 잘 만들어진 영화에도 늘 조연들의 탄탄한 연기가 뒷받침되어있음을 우리는 본다. 어쩌면 영화나 연극 아닌 실생활에서도 조연의 역할은 너무도 소중한 것 같다. 주인공만 있는 세상, 상상해보면 얼마나 재미없고 기괴할 것인가.
전체적으로 이번 ‘Lev Dodin’의 ‘Uncle Vanya'는 대사와 동작이 원작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고 보였다. 다만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의사 아스뜨로프의 비중이 의외로 크게 부각된 점이 좀 이상했고, 끊임없이 대쉬해 오는 아스뜨로프에 대한 엘레나의 감정을 원작과는 좀 다르게 연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작에서는 제3막에서 아스뜨로프가 엘레나에게 키스하지만 (그 장면을 바냐에게 들킴) 그것은 엘레나가 거부하는 데도 불구하고(속마음이야 어쨌든) 거의 강제로 한 키스였고, 제4막에서의 아스뜨로프의 키스는 작별하기 전 엘레나의 볼에 번갈아가며 하는 이별의 키스였다.
그런데 이 극에서는 두 장면에서 모두 완전히 욕정에 사로잡힌 남녀의 진한 키스로 연출 했다. 엘레나도 참고 있던 욕망이 폭발한 듯 강렬하게 응대하고.
원작에서도 이별의 기념으로 엘레나가 아스뜨로프의 연필을 간직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아스뜨로프에게 어떤 연심을 품은 게 사실인 것으로는 보이지만 그렇다고 원작에도 없는데 정신없이 키스를 퍼붓도록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좀 아니라고 본다. 엘레나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욕정의 표출, 은밀하게 꿈꾸어온 일탈 같은 것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고 싶어서였다고 이해하려고는 하지만 좀 불편하다. 좀 싸구려틱 해지는 감정이라고나 할까, 고상한 맛을 잃어버린 것 같아 영 기분이 찜찜하다. 여운도 없고.
같이 간 친구들도 나의 이러한 불편한 감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원작자인 안톤 체홉이 이 장면을 본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거장 Lev Dodin이 Uncle Vanya를 그렇게 연출했으니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연극 한편으로 약간은 마음이 산란해졌다. 늦도록 잠을 못 이룰 만큼.
내일을 위해 준비만 하느라 지금 현재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을 위해 아끼지 말고(돈 이야기가 아님), 하고 싶은 일, 바라는 일이 있으면 지금 하고 볼 일이다. 남 보기에 다소 파격적이고 도를 넘어서는 일이더라도 그게 남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없다면 그냥 저질러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바로 지금.
먼 훗날,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보며 그게 아니었는데, 그 때 왜 그걸 놓쳤지 하는 아쉬움으로 후회하지 말고.
세월은 빠르게 든, 느리게 든 끊임없이 흐른다. 지금 나는 과연 내 인생을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싶은 것들을 거침없이 하며......
‘멋진 인생
부드러운 세상을 꿈꾸며’
박봉현
첫댓글 다 읽기에는 너무 길어 .. 문화생활 적극 동참일세..그런데 학교시절 러시아 문학도?? 나는 고교시절 러시아 작가중 도스트엡스키, 톨스토이, 뚜루게네프, 작품을 친구집에서 빌려 겨울 토요일이면 밤새워 러시아의 대평원을 연상하며 "사냥군 이야기" "까라마조프 형제들" "죄와 벌" "전쟁과 평화" 등... 그런데 대학 전공은 수학을 택하고 말았지
길지만 다 읽고 상기와 같이 소감을 올리네. 혹 오해는 마시게나. 너무 길다는 표현은 지루하다는 의미가 아님을 , 단지 표현방법이 미숙해서...
긴 글 맞네. 원래 인터넷에 올린글이 아니고
모 예술잡지에 실렸던 글로
그저께부터 시작하게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각색번역하다
문득 생각나 올린거네.
러시아 소설 읽다보면 그들의 서민적 감성이
다른 서구 국민들보다 훨씬 우리와 코드가
맞다는 생각해왔었네
나도 고교때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연인들 읽은 후부터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네.
물론 나도 전공은 문학이 아니였고.
폰글로 그냥 올리네.
성아 ㅡ앞으로 계속 좋은 내용 영화든 연극 이든 상관없이 자주 올려주시게 해박한 성아 를 사부님 으로 존경 하며 모시겠음니다 모처럼 한편 영화 공짜로 보게되어 고마워 용 난 남주기 아까운 영화 받는뎅
승동 성, 과분하게....쑥스럽구만.....
승동 "말"에 나도 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