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지구 답사(2025. 2. 18.) 안내 자료 1. 부산 금강식물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155 (온천동) *이동 거리 및 시간 : 반월당→ 부산 금강식물원 입구 105km. 1시간 26분간 걷다 보니 겨울을 만끽하는 금강식물원, 요즈음 나무에 니트를 만들어 예쁜 겨울옷을 만들어 입히는 ‘그래피티 니팅(Graffiti Knitting : 일명 벽에다 낙서하는 뜨개질의 합성어로 직접 손으로 뜬 뜨개옷)’이 유행이다. 금정구 지역의 도로엔 ‘그래피티 니팅’으로 냉해와 병충해로부터 수목을 따뜻하게 보호하고 거리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나무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듬뿍 담긴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인이 운영하는 금강식물원은 1969년 9월에 성창기업(주) 회장 정태성씨가 부산 시민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하여 조성한 종합식물원이다. 입구 매표소에서 어른 1,000원, 노인청소년은 600원, 어린이(4세부터 400원)을 받고 있다.
소나무와 향나무가 어우러진 금강식물원 모습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바위와 어우러진 키 큰 소나무와 잘 정돈된 향나무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금강 폭포, 분재원, 온실, 연못 등 오밀조밀하게 배열되어 있어 슬로 힐링을 만끽한다. 식물 종류도 꽤 다양하여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 표본 수목 및 자연석 조경 작품 지역 15개와 표본온실 및 생산 온실이 있다. 온실에는 야자류 및 열대식물 580여 종, 선인장과 다육식물 540여 종, 기타 2000여 품종이 자라고 있다. 금강식물원은 영국 왕실에 본부를 둔 세계식물원협회에 가입된 우리나라 3대 식물원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사계절 휴양지로 사용되고 식물학 연구와 교육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뭐 볼 것이 있다고 사전에 짐작하면 큰 오산으로 힐링과 포토존이 멋져 겨울철 식물 구경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금강식물원 내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멀리서 황량한 겨울산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햇볕이 잘 드는 산의 능선엔 초록 소나무들이 가득하다. 그늘진 곳에는 온통 참나무가 점령한 우리나라에서 소나무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은 마음 아픈 일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애국가 구절이 들려오는 금강식물원이다. 금강 공원 가까이 있으며 금정산 자락에 자리 잡은 금정산 둘레 길 코스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 금강 식물원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하기 가능하며, 주변에는 금정산성, 동래 온천, 우장춘 기념관, 복천박물관 등 또 다른 불 거리가 많다.
아름답게 조성된 금강식물원 외부 모습 2. 釜山海岸自然史 博物館 : 부산 동래구 우장춘로 175(온천동 산13-1) *이동 거리 및 시간 : 금강식물원 입구→ 해안 자연사 박물관 입구 507m 1분간 세계 각국의 진귀한 해양생물 전시품 및 열대 생물을 확보하여 해양 자연사 자료로 영구 활용하며, 국제적 해양 자연사 명소로 육성·발전시키고자 설립되었다. 1992∼1994년 해양생물 소장가인 김동섭 씨로부터 세계 각국의 해양생물 1만 7,000여 점을 무상 기증받아 1993년 4월 23일 온천동 구 해양수족관 용지를 구매하여 1994년 6월 10일 5개 전시실을 갖추고 국내 최초의 해양 종합 전문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부산해안자연사 박물관 그 후 1996년 5월 연건평 3,695㎡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3층 모두 14개 전시실을 갖추고 증축 개관하게 되었으며, 1998년 열대 생물(파충류)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열대 생물 탐구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2003년 4월에는 면적 5,210㎡, 25개 실 규모의 제2전시관을 개관하였다. 해안자연사 박물관 내부 아쿠아리움 어류· 패류· 갑각류· 두족류· 파충류· 극피류· 산호류· 해수류· 화석류· 열대 생물 등 세계 100여 개국 해양생물 표본 2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현존하는 패류 중 가장 큰 종인 식인 조개(103㎝, 301㎏), 현존 민물 어류 중 가장 큰 종인 아라파이마(175㎝, 145㎏), 한 달 중 보름은 산에서, 보름은 바다에서 산다고 하는 전설적인 물고기 산갈치(386㎝, 30㎏), 어류 중 가장 큰 종인 고래상어(1,000㎝, 6,600㎏), 오징어류 중 가장 큰 종인 점보 오징어(200㎝, 48㎏)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다양한 모형과 아쿠아리움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뼈 화석 중 가장 완벽한 중생대 용각류 공룡의 어깨뼈 화석, 남미 아마존강 등에서 강을 건너는 소나 양들을 무리 지어 공격해서 뼈와 가죽만 남기고 먹어 치우는 육식성 어류인 피랴냐, 경골어류로 턱에는 이가 없고 알(캐비아)은 고급 요리로 사용되는 철갑상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크게 자라는 물왕도마뱀, 대형 종으로 성질이 매우 거칠고 이빨이 강한 악어거북,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육지 거북이 종인 며느리발톱거북 등이 소장되어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까지이며, 관람료는 2010년 9월 4일부터 무료이다.
살아 있는 대형 구렁이 3. 금강공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155 (온천동) *이동 거리 및 시간 : 해안 자연사 박물관 입구→ 금강공원 입구 250m. 1분간, 입구에서 공원까지 610m, 도보 9분간 부산시민공원이 생기기 전,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은 바로 이곳이었다. 모든 부산 사람의 기억에 자리를 잡는 금강공원과 금강식물원이다. 일본 상인이 금정산 자락의 일부를 자기 개인 정원으로 꾸며 만들고 1940년대는 ‘금강원’이라 불리다가 광복 후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금강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금강’이라는 이름은 '금정산의 수려함이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도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사계절 인적이 끊이지 않는 공원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다.
부산 금강공원의 입구 금강공원 케이블카도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1966년 만들어진 케이블카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빨갛고 노란 옛날 느낌 그대로 운행하고 있다. 대인 기준 왕복 9,000원을 내면 탈 수 있는 금강공원 케이블카는 6분 정도 운행되는데,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금정산성 남문을 시작으로 하는 등산로로 바로 이어진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금정산성 동‧서‧남‧북문의 성곽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외에도 체육시설, 지방문화재기념물 제13호인 임진 동래의총, 7개의 기념비도 볼 수 있다. 공원 내에는 다양한 문화시설이 있다. 동래지역이 가진 전통 민속예술의 발굴과 계승, 보급을 위해 1974년 9월에 개관한 부산민속예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해양 자연사 전문 박물관인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 금강공원 케이블카 4. 우장춘 기념관 : 부산 동래구 우장춘로62번길 7 *이동 거리 및 시간 : 금강공원 입구 → 우장춘기념관 입구 1.7km, 4분간 씨 없는 수박의 기초원리를 규명한 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박사가 생전 연구 활동을 펼친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2동 850-47번지에 건립하고 1999년 10월 21일 개관한 기념관이다. 우리나라 육종학의 변천 과정을 알기 쉽게 패널과 모형으로 전시해 청소년 학습장으로 손색이 없다. 대지면적 약 1,000㎡(3백여 평), 연건평 241㎡(73평) 규모의 지상 2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1, 2층을 전시실로 구성했고 야외마당에는 자유천과 우장춘 박사의 흉상이 잘 다듬어진 조경시설을 짜임새 있게 배치했다. 이곳에서는 매년 8월 10일 우장춘 박사 서거 추모식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에 일조하였던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즉, 우장춘 박사는 친일파의 아들이었다. 친일파의 아들은 호위호식하며, 유복하게 지냈을 듯하지만, 우장춘 박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보육원에서 생활할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우장춘 박사 유적지 이후 '종의 합성' 논문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지만, 박사님의 삶은 굴곡과 굴곡으로 가득했다. 아내는 일본인이었음에도 우장춘 박사님과 사랑에 빠졌다. 조선인과의 결혼은 절대 안 된다는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우장춘 박사와 결혼하여 2남 4녀의 대가족을 이루었다. 광복 이후, 키울 것도 먹을 것도 없었던 대한민국에서는 귀국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고 세계적인 과학자로 발돋움한 박사를 대한민국으로 모셔 오고자 하였다. 박사는 가족들과 이별하면서까지 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을 위하여 떠날 것을 결심한다. 한복을 갖춰 입고 귀국 환영식장 단상에 선 박사님은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약속하였고, 이후 박사님의 행적은 그 말 그대로였다. 정부로부터 보조받은 거액을 모두 대한민국에 심을 종자 사들이는데 써버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지역 환경에 따라 가장 재배가 잘 될 수 있는 작물들을 선별하였다. 벼, 무, 배추, 감귤 등 대한민국의 배고픔을 걷어내기 위한 종자 개량에 전념하였다. '씨 없는 수박'은 이 과정에서 회의적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작은 이벤트와 같은 것이었다.
우장춘 박사 근영
자유로이 일본을 오갈 수 없던 시절이었기에 박사님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였다. 연구실 한편에 빈소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이때 받은 조의금으로 손수 마을에 우물을 만드셨다. 이 우물을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라는 뜻으로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이름 지었다.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하였으나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굴레는 쉬이 벗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의심과 멸시의 눈초리는 여전하였다. 귀국 10년 차가 된 1959년에야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는다. 병상에 누워 있던 박사는 드디어 조국이 나를 인정해 주었다고 대단히 기뻐하였고, 문화포장 수여로부터 사흘 뒤인 8월 10일, 박사님께서는 눈을 감는다.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는 고인의 다짐처럼 박사는 당시 농촌진흥청이 있었던 수원으로 모셨다. 장례는 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신 분을 위한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사회장이었다. 기념관은 하루 세 번(11:00, 13:00, 14:00) 사전 예약을 통하여 과학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을 수 있으니, 꼭 신청하여 해설을 들을 수 있도록 주선하길 바란다.
자유천(慈乳泉) 꿀팁 자료-1 : 인물 탐구- 우범선 우범선(禹範善, 1857년 5월 24일 ~ 1903년 11월 24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무신 및 군인 겸 정치가이며,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조선인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한 조선 시대 말기 고위 인사의 일원이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일본 망명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위장 밀정 자객 고영근에 의해 1903년에 암살됐다. 또한 대한민국의 농생물학자인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1876년 과거 무과 시험에 급제한 뒤 황해도 지역에 배치받아 근무하다가,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었을 때 여기에 참가하였다. 우범선은 일본의 사주로 창설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참여하면서부터 일본을 배후로 둔 개화 세력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로써 명성황후의 민 씨 친척과 대립하여 유배당하기도 했다. 1894년 일본군이 민 씨 세력을 실각시킨 뒤 개화파가 집권하자 군국기무처에서 갑오경장에 참여했으며, 1895년 일본의 주도로 훈련대가 창설되었을 때 이두황(李斗璜), 이주회 등 친일파 군인들과 함께 대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의 반일, 친러 노선으로 러시아 세력의 득세가 예상되었고, 이에 반발한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는 훈련대의 간부들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세웠다. 우범선은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였으며 명성황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왕명으로 우범선, 유길준, 조희연, 장박(張博), 권영진(權濚鎭), 이두황,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2월 15일 고종은 우범선 등에 대한 참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그는 체포를 피해 은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김홍집 내각이 몰락한 이후, 그는 일본으로 피신했다. 원래 진작에 나이가 차도록 미혼 독신이던 그는 도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일본 여자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를 만나 결혼하였다. 당시 미우라가 우범선에 대해 “사람은 좋지만 언제 피살당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하였음에도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혼 후 1903년 구레로 이사한 뒤, 집들이하던 날 다른 사건으로 망명해 있던 고영근에게 위장 접대를 받고 결국 암살되었다. 그의 향년이 47세였다. 대한민국 농학 발전의 기초를 닦은 유명한 육종학자인 우장춘(禹長春) 박사는 우범선이 도쿄에서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서,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가 결혼할 때 일본 승려인 회운사 주지승 아라이가 우범선이 피살되면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키워주기로 했던 약속대로 키워주게 된다. 그가 바로 우장춘 박사이다. 5. 동래 읍성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236-4 *이동 거리 및 시간 : 우장춘 기념관→ 동래 읍성 입구 2,1km. 9분간 동래 읍성의 공식 명칭은 동래도호부 읍성으로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 일부를 포함한다.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모두 갖춘 읍성이다. 성의 둘레는 1,962m, 높이 0.5~3m이며, 넓이는 103,647㎡이다. 삼한시대에 건립되었으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수축(修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말~조선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동래읍성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동래성 남문 밖에서 ‘戰則戰矣 不戰則假道(굳이 싸우겠다면 할 수 없지만,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라고 쓴 나무판을 보이며 협박했다. 이에 송상현 부사는 '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써 내걸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동래 읍성은 모든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에 맞서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임진왜란 초기의 최대 격전지이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성을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았다. 이때 쌓은 성이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의 기원이다. 동래읍성지는 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서장대가 있는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역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된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표적인 읍성이다. 동래 읍성 동래읍성의 공식 명칭은 동래도호부 읍성으로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 일부를 포함한다.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모두 갖춘 읍성이다. 성의 둘레는 1,962m, 높이 0.5~3m이며, 넓이는 103,647㎡이다. 삼한시대에 건립되었으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수축(修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읍성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공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戰死易假道難 :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답신하고, 모든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에 맞서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임진왜란 초기의 최대 격전지이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성을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았는데, 이때 쌓은 성이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의 기원이다. 읍성에는 동·서·남문과 암문(暗門)의 4개 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 하였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고 나머지 3개 문에도 옹성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동래 읍성 인생문 꿀팁 자료-2 : 문화 탐구-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우리 민족정기 말살의 하나로 일제 강점기인 1930년경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금강공원 숲 속에 버리다시피 했던 동래부 동헌 바깥 대문인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 80여 년 만에 동래부 동헌 제자리 인근으로 찾아간다. 함께 독진대아문 상량식이 동헌 독경당 마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독경당· 찬주헌 준공 등 동래부 동헌 복원·정비 설명에 이어 독진대아문 상량문 낭독과 봉헌, 상량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호인 '독진대아문'은 1636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동헌 정당(正堂)인 충신당과 함께 지은 것으로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이다. 부산 동래구는 '동래부동헌 일곽 정비 종합계획'의 하나로 부속건물인 독경당· 찬주헌 준공과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 좌병영 휘하 경주 진영에서 동래독진(東萊獨鎭)으로 독립·승격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란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다. "鎭邊兵馬節制營(진변병마절제영) 交隣宴餉宣慰司(교린연향선위사)라고 적힌 주련의 뜻은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영이고, 대일외교 떄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이다.
동래독진대아문 동래구는 원래 망미루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연고도 없는 지금의 금강공원 숲속으로 방치하다시피 옮겨진 독진대아문과 금강공원 입구에 있던 망미루를 원래 자리 인근으로 이전·복원하기 위해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동래구는 일제 잔재 청산을 통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지난 3월에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됐던 부사의 휴식처 혹은 무관들의 대기소였던 '독경당'과 동래부사를 호위하는 비장의 처소인 '찬주헌'을 복원했다. 금강공원에 있던 '이섭교비', '내주축성비'를 제자리 일원 등으로 옮긴 바 있다. 한편 말을 관리하던 '고마청', 부사의 휴식 공간인 '완대헌' 등 동래부동헌에 딸린 부속건물들도 순차적으로 복원해 나갈 계획이다.
附言 :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나 사치롭지 아니하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조선경국전에 등장하는 고사성어로, 백제와 조선의 미(美)를 상징하는 말로, 한자 그대로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華而不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글의 처음 등장은 고려 중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의 궁궐 건축에 대해 평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