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첩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스님 되려면 정전 납부·시험 통과 후 도첩 받아야
고려 충숙왕 당시 사료에서 도첩제도 시행 기록 처음 발견
베 50필 바쳐야 머리 깎는 것 허락…쌀 200말 규모로 추정
세조 대는 금강경·심경·살달타 통과하면 천민도 도승 기회
스님이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과정을 일컫는 말이 출가(出家)라면,
도승(度僧)이란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승려에게
그 자격을 부여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국가로부터 승려의 자격을 받은 이에게 가장 먼저 주어지는 것이 도첩(度牒)이다.
도첩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승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된 승려 신분증명서이다.
기록에 따르면 ‘도첩’의 제도를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는 중국의 당(唐)나라였다.
송나라의 찬녕(贊寧, 918~999)이 쓴 ‘대송승사략’에는
“(당 현종) 천보(天寶) 6년(747) 5월…
모든 승려들은 사부(祠部 : 상서성 산하의 관청)로부터 도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도첩제도를 시행한 기록이 보인다.
‘속일본기’에는 720년
“비로소 승려들에게 공험(公驗)을 발급했다[始給僧尼公驗]”고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공험을 도첩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있다.
이로 보아 ‘대송승사략’에 기록된 747년 이전에
이미 당에서 도첩제도가 시행되고 있었고,
이를 일본에서 받아들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당나라와 일본의 이러한 추세를 감안하면 한국에서도 같은 시기인
8세기 전반 통일신라 때 도첩제도가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전하는 한국사의 사료에 처음으로 ‘도첩’이라는 용어가 발견되는 것은
이보다 한참 뒤인 고려 충숙왕 12년(1325)의 일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해 2월 왕은 교지를 내려
“주현(州縣)의 향리(鄕吏)로서 아들 셋을 둔 자는 자기 아들들을 승려로 만들 수 없다.
비록 아들이 더 있더라도 반드시 관청에 신고해
도첩을 얻어야만 아들 한 명으로 하여금 체발(剃髮)하는 것을 허락한다”
(‘고려사’ 권85, ‘지’ 권제39, ‘형법 2 금령’)고 하여, 처음으로 도첩에 대한 기록을 전한다.
공민왕 20년(1371)에는 정구(丁口)로서 승려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
“정전(丁錢)으로 50필의 베[布]를 바쳐야만 머리를 깎는 것을 허락”하라
(‘고려사’ 권84, ‘지’ 권제38, ‘형법 1 직제’)는 교지가 내려진다.
이때 도첩의 비용인 ‘정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출가로 인하여 국가에 바쳐야 할 노동력이 결락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출가자 본인이 직접 화폐(여기에서는 당시의 교환가치인 베)로써 대납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공민왕 당시 베 한 필은 쌀 4말[斗]과 같으므로(‘고려사’ 권79, ‘지’ 권제33, ‘食貨 2 화폐’),
베 50필은 쌀 200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에 구체화된 도첩제도는 조선 개국 후에도 계승됐다.
조선 개국 선포 후 두 달여 뒤 1392년 9월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승려가 되려는 사람 가운데 양반의 자제는 오승포 100필을,
서인(庶人)은 150필을, 천민은 200필을 바치게 하며,
소재지의 관사에서는 베의 숫자를 계산하여 도첩을 발급하여
출가를 허락”하는 것(‘태조실록’ 1권, 1년(1392) 9월 24일)으로 도첩제의 시행 규칙이 정해진다.
조선 초 오승포 100필은 쌀 150말에 해당되는 값이다.
즉 서인에게 부과된 오승포 150필은 쌀 225말로서
이는 공민왕 대에 정구에게 매겨진 정전가보다
쌀 25말 정도 비싼 가격이므로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100필에서 200필을 아우르는 이 수치들을 두고
조선 초 승려 수를 제한하고 불교를 억제하기 위하여
높은 정전가를 책정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구체적인 비용을 살펴보면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신분에 따라 평생 국가에 부과해야 할 신역(身役)의 비용을 대신한
합리적인 책정액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후 태종과 세종 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도첩제도에 대한 주요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먼저 태종 2년(1402)의 기록에서 도첩의 발급 조건으로
정전 이외에도 자격시험[試才]의 과정이 필요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도승의 신분과 정전에 대해서는
세종 말 신역이 있는 사람 이외의 양가(良家) 자제 즉 양반에 한하여
정전으로 정포(丁布) 20필을 받고 도첩을 발급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세종실록’ 95권, (1442) 2월15일)
이러한 조선 전기의 도첩제도가 획기적으로 변화된 계기는 세조 대의 일이었다.
먼저 세조는 “승려가 된 사람[爲僧者]이 3개월이 찼는데도 도첩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연유를 관청에 고하고,… 매양 3개월이 차면 반드시 관청에 고하는데
1년이 찼는데도 도첩이 나오지 않은 사람은 환속”(‘세조실록’ 7권)하도록 하였다.
이는 도첩 발급의 기회를 3개월씩 1년까지 모두 4번에 걸쳐 유예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여기에서 도첩 발급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정전을 납부하지 못했거나 자격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조 대 도첩제도에 대한 결정적인 변화는 세조 6년(1460)에 이루어졌다.
이 해 세조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민에 대해서도 도승의 길을 열어주었다.
즉 “공노비[公賤] 가운데 승려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양종에서는 여러 불경을 시험하여 능히 외우고 그 심행(心行)이 취할 만한 다음…
(예조에서) 머리를 깎도록 허락”하기로 하고,
사노비[私賤]인 경우 주인이 허락하는 한
공노비와 같은 절차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세조실록’ 21권)
그리고 이듬해에는 노비출신으로서 도첩 발급을 위해 시험봐야 할 과목으로
‘금강경’ ‘심경(心經)’ ‘살달타(薩怛陁)’를 지정하였다(‘세조실록’ 23권).
이처럼 긴 과정을 통하여 완비된 조선 전기의 도첩제도는
마침내 성종 초 조선의 국가 법전인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등재된다.
승려가 될 사람이 3개월 이내에 선종이나 교종에 신고하면 불경 외우기ㅡ
‘심경’ ‘금강경’ ‘살달타’를 시험하고, 본조[예조]에 보고한 다음ㅡ
사노비의 경우 상전의 의사를 들어서 한다ㅡ임금에게 보고하여, 정전을 받고ㅡ
정포 20필ㅡ도첩을 발급한다.ㅡ3개월이 지나도록 도첩을 못 받은 경우에는
족친이나 이웃사람들이 관청에 신고해서 다시 일반백성으로 만들어
군역을 부과하며[還俗當差], 알고서도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모든 죄를 벌한다.
성종 16년(1485) 정월 반포 시행된
을사년 판 ‘경국대전 예전(禮典) 도승(度僧)’ 조항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중종 11년(1516) 항목이 삭제될 때까지
불과 30여년 정도만 시행될 운명이었다.
2022년 3월16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