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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강좌 40강
이번주 디카시 강좌에는 천융희 디카시집 <<파노라마>>에 실린 오민석 교수의 '저 낮은 곳의 비경' 해설과 <뉴스 경남>에 탑재된 이기영 시인의 '디카시 한편'을 소개한다.
I.
디카시가 널리 알려진 요즘도 디카시에 대한 오해가 많다. 가장 큰 오해는 디카시를 사진 시와 혼동하는 것이다. 디카시는 사진 시와 다르다. 디카시는 사진을 문자로 ‘설명’하지 않는다. 디카시는 사진과 문자가 어우러지는 장르이지만, 디카시의 문자는 사진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디카시의 사진은 그 자체 독립된 장르가 아니며 문자도 마찬가지이다. 디카시에서 사진과 문자는 디카시라는 하나의 장르를 구성하는 두 개의 원료이다. 이것들은 서로에게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데, 양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깊은 화학작용은 이 둘을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빵에서 밀가루와 우유와 설탕과 버터를 분리할 수 없듯이, 그리고 이것들의 섞임이 없이 빵이 만들어질 수 없듯이, 디카시에서 사진과 문자는 따로 떼어낼 수 없다. 둘 사이에 화학반응이 없을 때, 디카시라는 장르도 사라진다. 디카시에서 사진은 문자 때문에 살고, 문자는 사진 덕분에 산다. 이런 상보 작용이 없을 때 디카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카시의 문자가 사진의 설명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디카시의 문자는 사진을 ‘설명’하거나 ‘묘사’하지 않고, ‘은유’하거나 ‘환유’한다. 그러므로 해바라기 사진을 놓고 그것에 ‘해바라기’라는 문자를 가져다 붙인다면 그것은 디카시가 아니다. 디카시의 문자는 사진을 은유하거나 환유함으로써 사진의 의미를 굴절하고 확장한다. 문자가 피사체를 은유할 때, 문자는 피사체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꾼다. 이 이름 바꾸기를 통하여 피사체는 변형되고 새로운 존재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의 존재 위에 새로운 존재가 더해진다. 이렇게 한 존재를 두 개의 존재, 즉 겹 존재로 만드는 것이 은유의 작업이다. 은유가 성사될 때, 은유 이전의 사물과 은유 이후의 사물 사이에 새로운 유사성이 생성된다. 로만 야콥슨R.Jakobson의 말대로 모든 은유는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가동된다. 은유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세계를 확장하는 장치이다. 디카시의 문자는 또한 사진을 환유한다. 야콥슨에 따르면 환유는 인접성의 원리에 의해 가동되는데, 시인은 피사체에 인접해 있는 기억을 환기하여 사진의 의미와 세계를 확장한다.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면서 냉장고 주인을 위해 그것에 맛있는 음식을 채워 넣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은 환유적 상상력이다. 디카시인들은 문자로 사진을 은유하고 환유하면서 유사성과 인접성의 원리 사이를 왕복 운동한다. 이 두 가지 원리에 의해 피사체, 즉 대상-세계의 미적 변형과 확대가 일어난다. 디카시에서 사진과 시를 동시에 읽을 때 독자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벌어지는 이 정서적 감응 작용이 디카시만의 매력적인 풍경을 이룬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진을 은유하고 환유하는가. 똑같은 사진도 서로 다른 시인들에 의해 다른 은유와 환유의 길을 간다. 그러므로 시인이 사진을 은유 혹은 환유하기 위해 동원하는 문자들이야말로 시인의 고유한 세계를 보여준다. 똑같은 가을 풍경을 보고 어떤 시인은 존재의 완성을 읽는가 하면, 어떤 시인은 존재의 소멸을 읽어낸다. 천융희 시인은 사진을 어떤 의미의 패러다임으로 은유하고 환유할까. 이것이 이 시집을 읽는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이다.
천융희 시인의 디카시들은 우선 사진부터 눈길을 끈다. 디카시가 카메라에 순식간에 포착된 이미지에서 시작한다면, 그녀의 사진들은 출발부터 이미 그 자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어찌 보면 디카시에 최적화된 상태의 것들이다. 사진 자체가 이미 많은 의미를 방출하고 있으므로, 짐작건대 그녀는 이미 사진을 찍는 순간 해당 시의 절반 이상을 썼을 것이다. 그녀의 사진들은 대부분 디카시를 쓰려는 다른 시인들이나 독자들에게도 상상력과 영감을 강하게 자극할만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디카시 창작의 필수 과정인 시적 이미지의 순간 포착에 이미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어렵고 힘든 길인 줄 알아요
가신 발걸음만 따라갈게요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테니
이 길의 끝이 어딘지만 알려주세요
―「알고 싶어요」 전문
담쟁이가 건물을 기어올라 만든 초록 십자가의 모습은 그 자체 누가 봐도 독특하지 않은가. 이 사진에선 십자가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여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에 ‘인접’해 있는 어떤 것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사진은 매우 강력하게 환유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진이다. 이럴 때도 시인은 ‘십자가’라는 ‘설명’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진과의 화학반응이 없다면 이 시 속의 “가신 발걸음”, “이 길”이라는 문자들의 의미는 미지의 사막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인은 환유적 상상력을 가동하면서도 애써 설명을 회피한다. “알고 싶어요”라는 제목을 뒤집어 읽으면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라는 고백이다. 이 겸손한 고백은 환유적 상상력이 뻔한 의미로 닫히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밸브이다. ‘잘 모르겠다’는 진술은 피사체의 의미를 신비로운 ‘비결정성indeterminacy’의 상태로 남겨둔다. 이 비결정의 상태야말로 시적 의미가 머무는 공간이다.
II.
이제 앞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갈 차례이다. 천융희 시인은 무엇으로 사진을 은유하고 환유하는가. 이 질문은 쉽게 바꾸면 시인은 피사체에서 피사체가 아닌 무엇을 읽어내는가, 라는 질문과 상통한다. 그녀가 피사체에서 궁극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 혹은 그것과 연관된 사유들이다. 그녀의 사유는 십자가의 담장이처럼 저 밑바닥에서 저 높은 곳으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나 ‘저 높은 곳’은 ‘저 낮은 곳’에 대한 통감痛感과 공감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저 높은 곳’은 ‘저 낮은 곳’에 대한 사랑의 절대적인 신호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저 높은 곳은 저 낮은 곳의 한숨 소리를 듣고 함께 아파하며 그 낮은 곳의 궁극적인 구원을 궁구한다. 그리하여 천융희의 사유는 저 낮은 곳의 풍경에 대한 따뜻한 공감에서 시작해서 저 높은 곳의 존재를 향하여 끊임없이 움직인다.
방앗간 옆집 사는 창녕 댁
코로나 확진 소식에
살아 있소!
우짜든지 며칠만 잘 참아보소, 밥은?
―「응원」 전문
사진만 봤을 때, 아무도 그 내용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사진이 문자와 뒤섞일 때, 비로소 이것이 이웃에 대한 아름다운 관심과 사랑의 풍경임이 드러난다. 정겨운 사투리는 질병의 심각함마저도 삼켜버리는 온기를 가지고 있다. 느낌표를 동반한 “살아 있소!”라는 감탄사는 죽음 앞에 철저히 무력한 피조물들끼리의 끈끈한 우애를 느끼게 해준다. “우짜든지 며칠만 잘 참아보소.”라는 전언은 담을 사이에 두고 감염된 자와 감염되지 않은 자들 사이에 오가는 뜨거운 통감과 공감의 언어이다. 마지막의 “밥은?” 먹었냐는 질문은 이 사랑의 공동체에 가장 적확한 리얼리티를 부여해준다. 피조물들의 모든 것은 밥에서 시작해서 밥에서 끝난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래서 불쌍하고 그래서 장엄하다. 밥을 벌기 위해 일을 하며, 밥을 못 먹을 때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근래에 보기 드문, 사랑의 드높은 코뮌을 표현한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저 높은 곳은 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에 가장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아흔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생이
비경으로 펼쳐지는 찰나
―「파노라마」 전문
고목은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정도로 주렁주렁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시인은 피사체에서 “마지막 불꽃”을 읽고, 그 마지막 불꽃은 “아흔 어머니”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마지막 불꽃이기 때문에 더 화려하고, 더 슬프고, 더 장엄하다. ‘늙음’의 인접성과 유사성이 한편으로는 환유적 상상력을, 다른 한편으로는 은유적 상상력을 가동한다. 사진 속의 고목은 한 번에 많은 열매를 생산하고 있지만, 시인은 그것에서 늙은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생”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읽는다. 한 장의 스틸 컷 안에 90년 풍상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온 한 존재의 “비경”과도 같은 삶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알츠하이머 진단받은 지 수 년째
혈류 끝에 매단 저 섬만이
숨 하나 근근이 이어가는 연유다
요양병원에 기댄 봄, 속수무책
―「막내」 전문
낮은 곳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긍휼은 이 시집의 전편에 깔려 있다. 낮은 곳은 결핍만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리이고, 아픔만큼 위로가 필요한 자리이다. 그 사랑과 위로는 존재의 옆과 위에서 온다. 시멘트벽에 악착같이 붙어있는 담장이 덩굴을 시인은 “알츠하이머 진단받은 지 수 년째” “숨 하나 근근이 이어가는” “막내”로 은유한다. 존재의 옆에서 보내는 사랑의 한계는 그것이 타자의 “속수무책”인 상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시인이 존재의 위쪽, 저 높은 곳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에겐 날개가 있어요
사람들은 지느러미라 부르지만
별빛 찬란한 밤이 오면
찰랑찰랑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꿔요
―「우주여행」 전문
제목은 “우주여행”이지만, 이 시는 사실상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직적 상승-욕망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의식적일 수도 무의식적일 수도 있지만, 천융희의 시 세계를 움직이는 중요한 정동affect 중의 하나이다. 이런 욕망은 돌 위에 앉은 나비의 이미지를 끌어들인 「봄의 초입」이나, 높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 식물의 이미지를 포착한 「천 개의 바람」에서도 드러나며, 앞에서 인용한 「알고 싶어요」에서도 나타난다. 담쟁이로 만들어진 초록 십자가를 아래에서 위쪽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단연코 그 위쪽 어딘가에 있는 절대자를 향해 있다. 시인은 낮은 곳의 아픔에 공감하되 그 모든 것의 운명이 궁극적으로 저 높은 곳의 존재에 달려있음을 확신한다.
III.
니체의 19세기가 신을 죽인 이래 인간들은 니체가 말한 자기 긍정의 위버멘쉬Übermensch를 성취하지 못했다. 밝은 정오에 등잔불을 부여잡고 시장으로 달려가서 신의 죽음을 외쳐대던 광인은 이어서 사람들에게 “이제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20세기의 인간들은 신이 부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인류 역사상 최악의 페시미즘pessimism에 자기 몸을 맡겼다. 그리하여 좌절, 우울, 절망이 20세기 모더니즘의 브랜드가 되었다. 천융희는 이런 흐름과 정반대로 간다. 그녀는 신을 살해한 19세기의 정신에 동의하지 않으며, 문제의 궁극적인 열쇠가 그들이 죽인 신에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밖으로 밀려났다고 절망하기 없기
기회라고 생각하기
신의 인도 따라가기
―「새옹지마」 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여러 사건 혹은 국면들에 대한 해석의 기본 원리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인도”이다. 그리하여 “밖으로 밀려났다”는 인간의 판단은 언제든지 “기회”로 전복될 수 있다. 저 높은 곳의 문법은 이렇게 인간사의 다양한 굴곡들을 “새옹지마”로 만든다. 시인이 볼 때 신의 새옹지마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향해 있다. 그것에 대한 믿음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긍정적 태도를 만든다. 니체의 19세기가 애써 신을 살해한 상태에서의 자기 긍정 혹은 자기 사랑을 요구했다면, 시인의 긍정은 신의 존재 상태에서의 긍정, 신이 인도하고 가르쳐준 긍정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20세기 모더니스트들과 달리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노래한다.
버티다 못한
지하 매장이 폐업을 하자
삼 년여 만에 쬐는 햇볕이다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기대」
이 작품은 마치 살해된 신의 부활을 노래하는 것 같다. “폐업”이 어떤 일의 종결 즉 죽음을 의미하고, 그것이 발생한 공간이 하필이면 “지하 매장”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진의 피사체들은 그 ‘지하무덤’에서 나와 생명의 “햇볕”을 쬐며 부활을 꿈꾼다. 식물들의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시인은 스스로 식물이 되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라고 말한다. 식물 화자가 된 시인의 “기대”는 모두 무덤의 반대쪽에 있는 생명의 신, 부활의 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천융희의 시는 이 낮은 곳에서 그 높은 곳으로 가는 먼 길 위에서 써진다.
온 집안이 급류에 휘말렸을 때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끄떡없다
힘줘 말하던 아버지 눈을 보는 순간
붉은 노을이 흐르는 실개천 같았다
―「그해 여름」 전문
겉으로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이 작품에도 많은 함축된 의미들이 들어 있다. 이 시 속의 식구들은 “온 집안이 급류에 휘말렸을 때도” 어떻게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끄떡없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이었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동시에 시인이 믿는 신의 알레고리이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아버지”가 모든 것의 주권자이므로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현실의 어떤 고난도 극복하게 만든다. 사진의 돌들은 믿음의 단단한 ‘반석’의 의미를 반추하게 함으로써 이런 해석을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
천융희 디카시들은 크게 두 방향을 향해 있다. 그것은 그녀의 옆과 위이다. 그녀의 옆은 저 낮은 곳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결핍과 고통에 시달리는 것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끌어안는다. 그녀의 위는 저 높은 곳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낮은 것들을 향해 있는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들을 읽는다. 그녀 그리고 그녀의 옆과 위는 따로 놀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문법 안에 통합되어 있다. 천융희의 디카시들은 이 문법과 마주치는 독자들에게 넘치도록 그윽한 희망과 평화를 준다. 그것은 저 낮은 곳과 저 높은 곳을 오래도록 궁구해온 시인의 따뜻한 선물이다. (끝)
<뉴스 경남>에 탑재된 이기영 작가의 디카시 한 편을 소개한다.
https://www.newsg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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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는 한편의 단편영화다. 디카시인은 디지털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다. 또한 디카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1초 , 또는 3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디카시는 디지털 세상을 밝히는 기획의 영화다."
[금주의 디카시]에 김옥임 님의 <늦 둥이>를 선정한다.
#금주의디카시
늦 둥이 / 김옥임
김옥임 님의 '늦 둥이'는 저출산 시대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족에 대한 의미를 만든다. 아이의 탄생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희망의 서곡이다. 세 명의 늦 둥이 탄생은 인구 증가의 청신호다.
산부인과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늦 둥이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또한 디지털 영상, 디지털 글쓰기, 디지털 제목 3종 세트를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가족은 서로 힘이 되어 주는 끈끈한 존재지만, 어느 순간 육아의 어려움 때문에 아이 없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늦 둥이는 그런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신선한 활력소가 된다.
디카시 향기로 물들이는 디지털 꽃밭에서 소중한 가족의 중요성을 발화시키고 있다.
"디카시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디지털 우주선이다. 스마트폰이 켜져있을 때 디카시 심장소리 즉, 디카, 디카, 디카 소리가 들리면 디카시를 삶의 신앙으로 여기는 존재다."
정유지(부산디카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