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편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
6. 성전에서 넷째 날 (유투브)
125:6.1 예수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지상 부모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아침 식사 때에도 나사로의 어머니가 그때쯤이면 부모님이 집에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가 뒤에 남겨진 것 때문에 부모가 걱정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125:6.2 예수는 다시 성전으로 향했지만, 올리브산 정상에서 명상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아침의 토론 과정에서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선생들은 예수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것은 진리에 대한 그의 지식이 아니라 그의 나이였다.
125:6.3 오후 회의에서, 그들은 기도의 목적과 관련된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사회자는 소년에게 앞으로 나와 자기 옆에 앉아 기도와 예배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하도록 했다.
125:6.4 전날 저녁에, 예수의 부모는 율법 학자들과 아주 재치 있게 싸운 이 이상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소년이 그들의 아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수가 엘리자벳과 요한을 만나러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가리아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나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사가리아가 혹시 성전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유다 시로 가는 길에서 멈추었다. 성전의 마당을 거닐면서, 잃어버린 소년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성전의 선생들 사이에 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을지를 상상해 보라.
125:6.5 요셉은 말문이 막혔고, 마리아는 오래도록 쌓아온 두려움과 걱정을 터트리며, 이제 놀란 부모에게 인사하려고 서 있는 소년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다. “내 아이야, 왜 우리를 이렇게 대했니? 네 아버지와 내가 슬픔에 잠겨 널 찾아다닌 지 사흘이 넘었구나. 무엇에 사로잡혔길레 우리를 버린 거니?” 긴박한 순간이었다. 모든 시선은 예수가 무슨 말을 할지 주목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책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25:6.6 예수는 젊은이로 여겨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아동의 정규 교육을 마쳤고, 율법의 아들로 인정받았으며, 이스라엘 시민으로서의 성화 의식을 거쳤다. 그럼에도 그의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고 숭고한 노력의 한가운데에서 그를 다소 심하게 꾸짖었다. 이로 인해 그는 진리의 교사, 의로움의 설교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는 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기회 중 하나를 영광스럽지 않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125:6.7 하지만 그 소년은 상황에 걸맞게 대처했다. 이 상황을 구성한 모든 요소를 공정하게 고려하면, 어머니의 의도하지 않은 꾸짖음에 대한 소년의 답변에 담긴 지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한 후, 예수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찾으셨습니까? 이제 아버지의 일을 할 때가 되었으니, 아버지의 집에서 나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125:6.8 모두가 소년의 말하는 태도에 놀랐다. 그들은 부모와 예수만 세워두고 모두 조용히 물러났다. 아이는 즉시 모두 세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덜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나의 부모님, 이리 오세요.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일을 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이런 것들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125:6.9 그들은 말없이 출발하여 여리고에 도착해 밤을 보냈다. 꼭 한번 멈추었는데, 올리브 산 정상에서였다. 그곳에서 소년은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리고, 격렬한 감정에 몸을 떨며 이렇게 말했다: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곳의 백성들이여, 너희는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로마의 멍에에 복종하고, 자신의 전통에 희생당하는 자들이여―그러나 나는 돌아가 그 성전을 깨끗이 하고, 이 얽매인 상태에 있는 내 백성을 구원할 것이다!”
125:6.10 나사렛으로 향하는 3일 간의 여정 동안 예수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의 부모도 그 앞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로 맏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비록 그 말들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한 말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125:6.11 집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의 애정을 부모에게 확인하여주고, 그의 행동 때문에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 드릴 기회가 다시 올까 근심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하는 말을 간단히 하였다. 이 중요한 선언을 이렇게 맺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지만, 나는 또한 땅에 있는 나의 아버지에게도 복종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125:6.12 비록 그럴지라도 예수는, 그의 mind에서, 그의 부모의 선한 의도와 잘못된 노력들이 그의 생각의 방향을 지시하거나 지상에서의 일을 계획하는데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그의 헌신적 마음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그는 땅에 있는 아버지가 바라는 것과 육체를 입은 가족의 관습들을 가장 품위있게 순응했다. 심지어 그가 동의할 수 없을 때에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순응하려 했다. 가족에 대한 충성과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조정하는 문제에서 예술가와 같았다.
125:6.13 요셉은 혼란스러워했지만, 마리아는 이러한 체험들을 되새기며 위로를 얻었다. 궁극에 그녀는 올리브 산에서의 예수의 말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그의 메시아적 사명을 예언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그의 생각을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새로운 힘을 다해 일을 시작했고, 예수의 가장 좋아하는 삼촌의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는 맏아들이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이방인의 정치적 억압을 영원히 물리칠 지도자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임무에 모든 방법을 다했다.
첫댓글 주제 : 누가 주인공인가?
유란시아서는 사람이 아니고 기록으로 내려온 계시서이다. 4부의 기록은 유란시아 행성의 영구 거주자들인 중도인들의 기록이다. 그래서 그 관점 또한 중도인들의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했다. 그럴지라도 중도인들이 가진 관점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유란시아서의 중도인들은 1차 중도인과 2차 중도인들이 합쳐진 연합중도인들로 활동한다. 4부 기록은 사도 안드레의 초인간 보호자의 자료에 기초를 둔 것을 감안할 때, 개인적 측면에서, 그 중도인의 나이를 계산하면 대충 3만8천 살 정도 되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 이런 분을 직접 대면한다면, 우리는 절로 고개가 수그러질 것이다.
13세의 예수는 성전에서 4일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4일간 성전에서 자신이 즐겨하는 일에 몰두한 예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을 찾느라 헤메고 있는 두 부모의 모습이 대비적으로 그려지는 상황이다. 3만 8천살 되는 중도인의 촛점은 예수이고, 마음 고생이 심했던 예수의 부모님의 입장은 인간사의 한 장면일 뿐이다.
이 장면의 주체자였던 예수는 현재 지역우주의 주권자로서, 일곱번의 수여 생애를 마친 파라다이스 하나님의 아들로서 매스터 아들로 승격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분이 이 에피소드를 볼 때,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웃으면서 모론시아 존재가 된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즐거운 담화를 나누었을까? (이것은 순전히 나의 인간적 관점)
이 장면에서, 중도인들은 13세의 예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기회 중 하나를, 어머니 마리아의 인간적 감정으로 인해 영광스럽지 않게 마무리된 것에 대해 아쉼움을 금치 못한다. 결론적으로 예수가 행한 태도는, 부모님을 위로하고, 자신이 행한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고, 합리적인 마무리 말로서 끝을 맺는다: “나의 부모님, 이리 오세요.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일을 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이런 것들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는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지만, 나는 또한 땅에 있는 나의 아버지에게도 복종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 마리아는 용기를 내어 예수를 향한 자신의 뜻을 진행시키지만, 그 이후의 기록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 않아서 늘 상처를 입었다.
순간 순간 우리는 우리의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와 전쟁을 할 때가 많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사회, 사회와 국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늘 이런 갈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갈등의 해소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갈등의 해소 시간은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몇 달이 될 수도 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을 바라보는 이들은, 하루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 주체자들은 결코 시간을 당기지 않는다. 힘없는 자신의 백성들이 죽어나갈지라도, 전혀 상관없는 악마같은 지도자들. 그들은 전체 역사를 써내려가는 주인공들이다. 그것은 세속의 역사이고, 우리는 우주의 영적인 역사 속에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한 순간에 감상하며, 그 이유와 결과, 미래의 나아갈 길을 정한다.
결국 그때란 것은 나의 역사이고, 나의 personality가 성장한 시간이 된다. 예수님의 생애를 중도인들의 관점에서, 사실적 사례와 상황을 기록하고, 우주에 계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록을 보고 각 사람마다 자기의 각도에서 한 분의 역사를 자신에게 비추어 보게 된다. 우주의 아버지는 바로 나의 역사, 나의 personality를 보신다. 역사의 한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파라다이스 신들은 세 분의 관점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그 이상이 연합한 집단적 의(義)를 이루기 원하신다.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며, 우주 또한 그러하다. 모든 상승의 훈련을 마친 자들을 유란시아서에서는 finaliter (파이낼리터, 최후자)라 부른다. 파아낼리터가 된 후 첫번째 일은 파이낼리터 군단에 입단에서 삼위일체 신들에게 서약하고, 각 초우주(제1초우주 ~ 제7초우주)에서 온 상승자들 7명이 한 조를 이루게 된다. 이 개별적 조들은 바깥우주에서 활동할 기본 단위이다. 결코 개인적 의견이 아닌, 집단적 의견이 반영된 활동이다.
영적 세력들 (조절자, 성령, 진리의 영)은 우리가 연합된 가운데 활동할 때, 더 큰 세계를 열어준다. 혼자일 때는 자족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함께 할때는 더 큰 모험의 세계와 그에 따른 영의 세계가 열린다. 더 큰 만족과 기쁨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