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배척함
누가복음 9장 51-56절/ 51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본문에 앞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자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므로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께서는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내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면서 나를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하였으면서도(막 9:14-29),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들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까닭에서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막음은 자신들만이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갖는 것으로,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 못하는 모습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가 자신과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행하는 이적 행함을 용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정에서 그가 행한 이적이 예수님의 이적 행함을 모방하여서 하려고 하거나,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끌어 모으며 돈을 벌 욕심에 있거나,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자랑하며 자신을 따르게 하여 그들의 교주가 되려고 하는 따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이적 행함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의 경우와 같이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기는 그분의 이름이 지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허용되고 있는 일이였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자일 것이냐?”는 생각이란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생각을 가지고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열 두 제자의 신앙고백에서 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심에서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고 주님으로 영접한 믿음에 있어 주님의 이름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주님의 허용에 의해서 그 또한 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해 나가는 것에 있었을 뿐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적을 통하여 드러내는 일이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런 그가 천국에서 큰 자임을 시사하면서, 그 일을 하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누가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여 하여 물 한 잔이라도 준다고 하면 그는 반드시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에 마음이 갈라져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구속주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같은 마음을 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렇게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에 반하여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악함에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의 때가 이르러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마음에 굳게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미리 앞서 사마리아 동네로 보내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는 사마리아 동네를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 동안 계실 방을 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간 그들이 돌아와서는 자신들이 온 동네를 다 다녀도 방을 구하지 못했다고 예수께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을 반기지 않아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크게 분노하여 말하였습니다. “주님,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사람들을 태워서 멸망시켜 달라고 구할까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는 그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 일은 앞서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는 한 사람과 대조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반대하여 배척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예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진 것과 관련하여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게 되는 고난을 당하실 것을 이제 바로 눈앞에까지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뜻에 순종하여 받들어 가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싫어하며 배척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여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으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을 반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크게 분노하고 그들을 불로 태워 멸망시킬 것을 하나님께 청하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자신과 제자들을 배척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로 가지 않고 돌아서 다른 동네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내리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을 내려 태워 멸망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변에서는 자신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히 대하나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의감을 품고 거칠게 대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을 혐오하며 상종할 수 없는 자로 취급합니다. 때때로 기독교인에게서 자행되는 것입니다만 단군상이나 부처상 또는 돌탑 등 우상숭배의 형상을 부수거나 불태웁니다. 그러면서 용기백배 충천하여 저지른 자신들의 행동을 구약 이스라엘에게서 보는 남 왕국 유다의 제3대 왕 아삽, 제13대 왕 히스기야, 제16대 왕 요시야이 행한 종교개혁, 또는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맞서 싸운 선지자 엘리야에 견주며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보는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반대하며 배척한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며 응징하듯이 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여 맞이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에게서 떠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능을 장차 마지막 날에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처하실 것에서 행사하실 것입니다만(마 25:46), 땅에 계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신을 반대하며 배척하는 자들을 혼내며 징벌하는 곳에는 쓰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영이 예수님과 함께 하여 권능을 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로 나오게 하여서 죄에서 구원하실 것에서입니다. 포로 된 자들을 풀려나게 하시는 것에서,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는 것에서,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것에서 발휘되고 있는 주의 영의 권능을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행하시는 구속 사역을 통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에서 베풀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 6:44)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께로 나오도록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예수께로 나올 수도 없습니다. 설사 예수님을 보더라도, 예수님을 보고서도 믿지 않습니다(요 6:36). 사도 바울은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라고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 ‘성령’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반복적으로 말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음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권능이 작용하지 않았는데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하신다는 것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인 땅 위의 모든 족속이 언약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신데 따른 것임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부름에 있는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여 그들에게 복을 주실 자기의 종으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를 먼저 세상에 보내셨다며(행 3:25-26),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유일한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게 하셨으며, 이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행 4:11). 그리고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이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행 4:33). 이렇게 사도들이 증거하는 것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우리를 이 믿음으로 살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은 우리를 지배하십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힘입어 찬송가 438장의 가사에서 보는 대로 우리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주 예수와 동행하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날마다 벗고 있는 짐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고 부를 수 없는 것,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지 않는 우리 육 전체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악한 본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저주할 자가 아니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사하시고 생명을 주신 우리의 주님이시오!” 라고 자기 부인이 일어나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주님을 따름에 있어 왔습니다. 438장 찬송가는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든 내 주 예수님 모신 곳이 하늘나라라고 찬송합니다. 우리가 말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배척하는 것에 있은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만, 예수께서는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심으로 증거되는 복음의 전파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더불어 사마리아도 그리고 온 세상이 그동안 악한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얽매임에서 풀려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에 자유한 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행 1:8). 그에 따라서 사마리아에도 생명의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구원이 임하는 큰 기쁨이 있었으며(헹 8장), 이방 땅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게 됨으로 베드로와 함께 한 할례 받은 신자들이 크게 놀라워하였습니다(행 10:44-48). 이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까닭입니다(행 11:18). 그에 따라서 유대인에게서,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척에서 보는 악함에서 보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중한 죄 짐으로 억눌림에 있던 우리들이 그 악함에서 벗어난 것은 참으로 주님의 크신 은혜요 은총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는 마음에 있게 된 것은 예수님에게 임하신 주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도록 권능을 행하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가 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신앙하는 경건을 가볍게 여기며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음에 있으면서도 이 권능으로 산다는 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교회에는 나가며 종교 생활을 하지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 말로 기독교를 믿는 종교인이요, 기독교의 계율에서 요구하는 신앙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으며 진리를 깨달으려는 하지 않고 오히려 역행하며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가져다 줄 영광스런 나라에 소망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오래 참음과 인내로 그 날을 기다림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래야 할 마음도 품지 않으며 그래야 할 생각도 갖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이며, 믿음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입니다(딤후 3:5-8).
그리스도인은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알려 주시고 있는 경건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무릇 경건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경건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인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합니다. 이는 말이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그러니까 경건의 내용인 하나님의 뜻을 무지하고 어리석어 생각이 어둠에 있는 세상에서도 분별하고 받들어 가는 순종에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는 것입니다. 헌데 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는 그 어디에나 하늘나라고 찬송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산다고 하는 그 어디에서, 그 무엇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는지요. 그 어디에서, 그 무엇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사는 경건이 있는지요. 마음은 있으나 몸이 그 정도까지일 마음은 갖지 않는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경건에 있으면서 그 경건의 능력이 가져다 줄 하나님의 은혜로운 일들에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만, 그가 사는 삶에서 어떤 경건의 능력으로 산 것이 없는, 그야말로 아무런 능력도 나타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고 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으며, 그렇게 살고자 하는지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 속에서 잠재해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 권능을 의지하여 무릇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말이죠. 무릇 우리 마음에 품어지는 소원,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우리가 이런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함은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우리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달라붙어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의 주님으로부터 넘어지게 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주께 견고히 서는 믿음으로 있어 나가야겠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으면 이 살아 있는 몸에서, 또한 우리가 죽음에 있게 되면 죽음에 있는 그 순간의 시간에서도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한 자이심을 나타내고자 함이 우리가 품고 있는 것이어서 늘 바람에 있는 간절함이 항상 살아 있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