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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기원전
시리아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이스라엘과 구약성경과도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었다
1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시리아 지역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흥종교 이슬람 세력이 7세기 중반에 시리아로 확산되기 전까지, 시리아는 주로 그리스도교인들 활동 지역으로 그리스도교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7세기: 이슬람 제국과 이슬람교와 그 분파
7세기 신흥종교가 생겨났다. 예언자 마호멧트가 일으킨 종교로, 유일신을 알라(하느님)를 믿으며 마호멧은 신의 사자라고 한다.“이슬람”이란 뜻은 “유일신에 대한 복종”이란 뜻이다. 이들을 따르는 무리를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슬람은 제정일치의 교리를 가졌기에 종교는 곧 정치이며 따라서 교리가 곧 법이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강력한 이슬람 군대가 당시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비잔틴 제국을 크게 무찌르면서 시리아 전역이 이슬람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는 수니파(80-90%), 시아파(10-20%)이다. 초기 이슬람 제국은 "책의 사람들"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인세人稅를 내는 조건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새로운 이슬람 통치자를 덜 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으며 군사적 저항이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9-10세기: 이슬람 시아파인 알라위파 유입
알라위파는 이슬람교 시아파의 독특한 분파로, 시리아 서북부의 산악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 덕분에 외부 세력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으며 오랜 기간 독자적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10세기 이슬람 세계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당시 시리아 지역은 시리아 전역을 통치하는 세력이 없었고, 지역 왕조들이 각자의 시리아 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0세기 후반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 서부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해 시리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시키면서 시리아 내에 시아파가 유입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지만, 다른 종파에 대해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시리아 내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고 공존하였다.
16세기: 쿠르드족 유입
16세기 이전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동부와 이라크 북부를 중심으로 수천년간 살아왔다. 그들은 이 지역을 '쿠르디스탄'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쿠르디인의 땅이라는 말이다. 16세기 초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과 시아파인 페르시아 제국이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고, 쿠르디스탄은 전쟁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펼쳤다.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여 시아파와 싸웠다. 쿠르드족은 조금 더 안전한 지대인 시리아 북부 쪽으로 이동하면서 이 시기에 시리아 영토 안으로 많은 수의 쿠르드족이 유입되어 살게 되었다.
1918년: 오스만 제국의 붕괴-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통치
오스만 제국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붕괴했고, 공식적으로는 1922년에 해체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여러 승전국들이 분할하여 통치했다. 시리아 지역은 프랑스가 통치하여 1946년 시리아가 완전 독립할 때까지 이어졌다.
1920년-1946년: 프랑스 식민지 시대
프랑스는 시리아을 다스리면서 다수파인 수니파를 견제하기 위해, 소수인 시아파(10-20%) ‘알라위파’만을 군인으로 채용하였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다른 종파에 비해 점점 큰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알라위파는 시아파의 한 부류로 시리아에서 15%밖에 되지 않는 소수였다. 알라위파는 음주를 허용할 정도로 세속적 타종교에 관대한 편이다. 따라서 시리아 내 그리스도교도 호의적 지지를 받았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철수했다.
1950-1960년대: 정치적 혼란기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 후,군부, 여러 정치 세력간, 민족적, 종교적 갈등으로 분화되어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1963년: 시아파 알라위파 소속 ‘하페즈 알 아사드’, 군사 쿠데타로 정권 장악하고 독재 시작
1966년부터 ‘알라위파’ 소속으로 국방 장관직에 있었던 그는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70년 '백색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1971년 시리아의 대통령이 되어 대를 이어 독재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들 부자父子도 프랑스처럼 다수인 수니파를 견제하기 위해 알라위파만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였고 비밀 경찰을 이용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백성들과 다수의 수니파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2000년: 바샤르 알 아사드 독재 계승
2000년 하페즈 알 아사드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을 계승하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약속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며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반대파 억압과 권위주의적 통치를 일삼았다.
2010년:* 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시위로 자이르 벤 알리 대통령의 축출 되었다. 이후 이집트와 리비아 등 다른 아랍 국가들도 영향을 받아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다. 리비아에서는 카다피 정권에 대한 시위가 폭력적인 내전으로 발전하면서 국제적인 군사 개입을 초래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2011년, 시리아 안에서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시위가 발생하였다. 시리아 남부 작은 도시 ‘다라’에 사는 15명의 아이들이 학교 벽에 ‘국민은 정권의 퇴진을 원한다’라고 썼다. 이것은 당시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시위에서 흔히 사용한 민주화 구호였다. 그런데 경찰이 아이들을 체포하고 혹독하게 고문을 하였다. 그러자 다라 지역민들이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경찰은 강경 진압으로 대응하였다. 이 시위가 다마스쿠스로 이어지고 정부의 가혹한 진압으로 연쇄 대응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은 10대들의 낙서로 시작되었지만 기나긴 독재 정치 기간 시아파인 알라위파에게 억눌려온 다수의 수니파의 불만이 터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군 결성
2011년: 시리아 자유군(Syria Free Aemy)’ 결성
2011년 민주화 시위 4개월후 시리아 공군 대령 ‘리야드 알 아사드’가 아사드 독재 정권에 반발하여, 탈영병들과 시위대들을 모아 ‘시리아 자유군(Syria Free Aemy)’을 결성하여 대항하였다. 반군 세력은 시리아 북부와 동부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군 내에서는 다양한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나타났고,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 알누스라 전선이 두각을 드러내면서 내전의 성격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개입(IS)
시리아 정부군이 다마스커스를 지키기 위해 북동 지역 정부군을 이동시키고자 움직이자 이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이슬람 근본주의자IS가 침공하여 차지하였다. 전쟁은 정부군 반군 IS의 삼파전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 시리아에 외국세력들이 개입하여 더욱 복잡하고 처참한 전쟁터가 되어갔다. 이때부터 내전 양상은 'IS와 반(反)이슬람 국가' 구도로 옮겨갔다.
*수니파 카타르와 사우디 아라비아, 알카에다+수니파 근본주의자파 반군 지원
알카에다는 반미 반유대주의자들이다. 수니파)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시리아의 민주화를 꺼리며 알카에다와 연관된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을 직접 지원하였다. 이들의 결성으로 가장 처음 반군으로 결성된 시리아 자유군(Syria Free Aemy)은 무력화되고 민주화는 물거품이 되었다.
2013년:이란+ 레바논 헤즈볼라 개입
2013년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조직 헤즈볼라가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내전에 개입했다. 헤즈볼라는 시아파 세력을 지지하기 위해 주요 전투에 참여하며 시리아 내전에 종파적 요소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아사드 정부와 헤즈볼라 연합군 대 반군 간의 대립 구도가 확연해졌다.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으로서 시아파 정권인 시리아 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이란의 외교 전략은, 테헤란 이라크의 바그다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레바논으니 베이루트를 연결하여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고립시키고 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가 정권을 잃는 것은 이란의 원대한 구상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2013년 시리아 정부군은 다마스쿠스 인근 구타의 교외 지역에서 사린 가스 공격을 감행해 1,300여명이 숨졌다.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와 함께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축출을 위해 시리아 공습을 검토했으나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시리아 공습을 반대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금식 기도에 나서며 시리아 공습을 저지했다. 미국 오바마는 이에 굴복해 시리아 공습을 포기하고 대신 반군지원과 IS에 대한 공습을 하였다.
*미국 개입: 미국은 시리아 반군, 쿠르드 민병대(YPG), 시리아 민주군(SDF) 지지
미국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아사드 정권의 화학 무기 사용을 규탄하기 위해 개입했다. ISIS의 테러 위협을 억제하고자 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아사드 정권에 반대했다. 또한, ISIS 격퇴를 목표로 쿠르드 민병대(YPG)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민주군(SDF)과 협력했다
2014년: ISIS(이슬람 국가)개입
2014년 ISIS(이슬람 국가)가 이라크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시리아 동부까지 진출했다. ISIS는 급속히 영토를 장악하며 "칼리프 국가"를 선포했다. 이로인해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헤즈볼(레바논 시아파 무장 조직 단체)과, 반군, 그리고 이슬람 국가ISIS 간의 다자간 전쟁으로 치달았다. 특히 ISIS는 반군과 정부군 모두를 공격하며 스스로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2015년: 러시아의 개입
2015년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여 정부군을 지원했다. 러시아는 시리아 지중 해변 도시인 ‘타르투스’에 해군 기지를 두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가 자진 유일한 해외 기지인데다 몇 안되는 부동항이다. 이것을 잃는다는 것은 아랍과 지중해에 대한 영향력이 대폭 줄어들기에 러시아는 국익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아사드 정권을 도왔다.
2016년: 알레포 전투
*2016년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은 결국 알레포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알레포 전투는 정부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군이 주요 도시에서 후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과 쿠르드족(YPG) 개입, ISIS의 쇠퇴
미국과 쿠르드족 민병대(YPG)로 구성된 시리아 민주군(SDF)이 주도한 공세로 ISIS는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시리아 북부의 락까가 함락되면서 ISIS의 주요 거점이 상실되었다. 이로 인해 ISIS는 시리아 내 주요 세력이 될 만한 입지를 잃었다. 미국(도널드 트럼프)은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 응징하고자 시리아 공군 기지 공습하였다. 미국, IS 수도 라카에 백린탄 투하하고, 미국 주도 국제연맹군, IS 수도 라카 48시간 집중 공습하였다. 이에 IS는 패퇴하고 시리아 동·남부는 아사드 정부군이, 서·북부는 쿠르드족 세력이 장악하였다. 시리아의 전쟁은 다시 정부군과 반군 간의 대립으로 돌아갔다.
*쿠르드족
2016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계 주축의 시리아 민주군(SDF)은 IS를 격퇴한 후, 그 땅을 차지하여 자치를 하고 있다.(30%) 쿠르드는 미국이 시리아에서 완전 철수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2017년: 미국의 시리아 공격
시리아 정부군이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주(州) 칸셰이쿤 마을에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하였다. 그러자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시리아의 공군 비행장을 공습했다. 이 공격은 미국의 정권이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상대로 한 첫 공격이다.
2018년: 미국의 시리아 공격
시리아가 또다시 화학 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자, 트럼프는 화학무기 시설에 대한 폭격을 명령하였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와 합세하여 시리아 내 관련 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을 단행하였다.
2019년:튀르키예 개입
튀르키예는 내전 초기부터 반군을 지원하였다. 2016년부터 시리아 내전에 직접 개입하였다.
2019년 튀르키예가 시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미국이 철수하자 튀르키예는 북부 시리아 국경에 인접한 시리아 쿠르드족을 ‘테러 리스트’라고 규정하여 시리아 북동부 지역의 쿠르드 민병대(YPG) 침공하였다. 이는 쿠르드 민병대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2023년: COVID-19와 시리아 전쟁
코로나19 팬데믹은 시리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내전 상황은 일시적 정체기에 들어갔다. 국제 사회는 시리아 내전에 대한 개입을 줄여갔다. 2021년, 시리아 대선과 아사드의 재선되었다. 2022년 이들리브 지역에서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간의 충돌이 다시 격화되었다. 튀르키예의 영향력이 미치는 이들리브 지역은 반군의 마지막 주요 거점으로 남아 있었는데, 시리아 정부군은 이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다. 이들리브의 충돌은 시리아 정부군과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반군 간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2024년: 반군의 재공세, 시리아 정부 붕괴
2024년 11월 하순부터 반군이 시리아 정부의 주요 지원 세력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으로, 이란과 레바논 헤즈볼라가 각자의 사유로 힘의 공백이 줄어든 것을 틈타 2024년 시리아 반군은 재공세에 나섰다. 하야트타흐리르알샴(HTS)이 주축이 된 반군 연합은 2024년 11월 27일 시리아 북서부에서 공세를 시작한 후 사흘 만에 제2도시 알레포를 함락시켰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11일 만에 수도까지 장악했다. 2024년 12월 8일 결국 다마스쿠스가 점령되고 시리아 정부는 붕괴되었다.
**하야트타흐리르알샴(HTS):‘시리아 해방 의회’를 뜻한다
2011년 국제테러단체 알카에다 연계조직으로 창설된 ‘알누스라’를 전신으로 하는 조직이다. 지도자는 아부 무함마드 알졸라니이다. 그는 시리아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시리아내 반군을 규합해 HTS를 결성했다. 그는 통치는 민주주의가 아닌 이슬람 방식으로 이뤄져야한다고 천명했다.
2024년 12월 11일: 이스라엘군 시리아 공격(2024년 12월 11일, 연합뉴스)
시리아 반군이 정부를 무너뜨린 후 이스라엘은 이 과도기를 틈타,시리아 정부군의 전략 무기가 남아있는 군사시설을 대규모로 공습했다. 이스라엘군은 10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해군 미상리함이 9일 밤 시리아 해군 함정 15척이 정박해 있는 알바이다항과 라타키아항 두 곳을 타격했다"라고 밝혔다. 이스라엘군 전투기는 지난 48시간 동안 시리아 영공에 진입해 수도 다마스쿠스와 홈스 등지에 있는 공군 비행장과 무기 생산시설 등을 350차례 폭격했다. 시리아 반군 승리 사흘째인 이날 이스라엘 지상군은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불과 20km 떨어진 카타나 지역까지 침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군은 자국 안보를 위한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시리아 반군과 추가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선을 넘는 움직임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전쟁관련 기밀정보 유출 의혹과 부패 혐의 등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린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할 목적으로 시리아 공세에 속도를 내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참고:유투브,지식인 브런치,시리아 내전 10년, 인터넷 백과 사전, 연합뉴스(24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