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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이 떠졌는데, 일어나 불을 켜보니 세 시였다.
쓸데없이 너무 일찍 일어났던 것이다.
격이 아프다.
아니, 정확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어쩐지 아픈 것 같다. 그렇게 건강하던 녀석이......
밥도 안 먹고, 힘도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나를 끄는 힘도 예전만 못하다.
내가 개를 끌고 가다 보면, 개 줄에서 그 힘을 느끼게 되기도 한데,
축 늘어져서 낮잠을 자는 개가 안쓰럽기도 하고, 내가 너무 개를 못살게 굴었던 건 아닌지... 후회스럽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움직이면 꼬리를 살살 흔들거나, 일어나 나를 따르려 한다.
그런데 그 모습도 이전과는 다르게, 뭔가 힘에 부친 모습이다.
사람처럼 말이나 한다면, 어디가 아픈지 알기라도 하련만......
그러니,
'저렇게... 죽어 가는 건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 슬플 것 같았다.
주인을 잘 못 만나서......
키큰 아저씨 말로는,
"쫑긋한 귀와 꼬리를 봐서는... 괜찮을 것 같은디..." 하셨는데, 제발 그랬으면 좋으련만......
점심을 먹고 나니 금방 비라도 올 것처럼 날이 후텁지근했다.
'모처럼 배라도 타 볼까?' 하는 생각으로 나가려다, 격을 바라보니... 개도 나와 눈을 맞추면서 꼬리를 흔들어대는 게, 뭔가 눈치를 채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개를 데리고 배 있는 곳으로 갔다.
물이 많이 빠져나간 호수엔, 배가 땅에 걸려 있었다.
배를 물에 밀어 넣어야 탈 수 있는데, 내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처음엔 좌우로 움직이며 조금씩 물에 밀어 넣으니 조금 들어가긴 했는데, 뭐에 걸렸는지... 꼼짝하질 않았다.
산장아저씨를 부를까 하다가, 오늘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고 계시기에... 그마저도 관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말뚝을 박아 놓고, 호숫가로 걸었다. 격을 위해서였다.
비실거리던 격은 오랜만에 나와선지 활기를 찾는 듯 호수를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물 속에 첨벙첨벙 스스로 몸을 넣기도 했다.
'개도 더운가?' 했지만, 아직은 힘이 남아있는 것 같아... 그런 모습을 보니,
'아프지 않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몽상 있는 쪽의 둔덕으로 가서 다시 배를 밀었는데, 그러느라 진흙이 신발로 삐져들어온 것을... 물로 씻어내며 발을 씻었다.
그러고 보니 고무신의 한 쪽에 구멍이 나 있었다.
'3 개월 여 신었더니, 신발도 삭아버린 모양이네?' 하고 있는데,
격은 물새를 쫒기도 하고, 혼자서 호숫가를 맘껏 달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으로는, 어디 아프다고 볼 수가 없을 것 같긴 했는데......
그러니 나는 또,
'내가 배를 탔다면, 오늘은... 다시 수영을 하라고 유도해볼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날이 너무 더운데다가, 지 스스로 물에 몸을 담그기도 하니... 내가 배에서 부르면 따라올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하필이면... 배는 육지에 댕그러니 올라가 있으니......
비가 올건지 아닌지, 내내 흐리기만 할 뿐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
비가 와야, 화초들도 땅에 제 뿌리를 내릴 것이고, 비료를 준 옥수수도 클텐데......
저녁을 해 먹고 화초에 물을 주었다.
정말 비가 안 올 것인가.
아무리 땅이 척박하다고는 해도, 지난번에 옮겨다 심은 코스모스는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다.
물론, 다시 간격을 맞춰주기 위해 옮겨 심은 것들은, 아직도... 몸살을 앓는지, 크기는커녕 까맣게 볼품없이 왜소한 모습이긴 하지만.
나팔꽃과 더덕에 줄을 매준 것은 마치 무슨 샤머니즘(무당 집) 냄새가 나는 분위기여서, 묘한 느낌이다.
원룸에서 살 때도 느낀 거지만, 나팔꽃 줄을 조절해주는 것도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 아닌데......
그러고 나서 하모니카 몇 곡을 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불안했고 또 고통스러웠다.
요즘 내 작업을 못하고 있어서다.
물론 다른(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 일을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나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근데, 웬일인지... 그림 그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날은 더워져가고, 밤 시간이 짧아져서 그런지, 한갓지게 방안에서 문을 닫아놓고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아니, 그 것은 핑계다.
어쩐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러니까... 괴롭고 귀찮은 일에서 편히 있고 싶은 유혹에 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머리 속에서 당장 튀어 나올 어떤 영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몇 시간씩 뭔가를 꺼내려고 골머리를 싸매는 일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걸 '태만'이라고 하나, 아니면 '나태'라고 하나......
그러니, 하루하루 마음이 무거워가기만 해서, 사이사이... 김 선생님께서 읽어보라고 주신 책을 펼쳤지만, 어째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내 맘이 글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글이 밍밍한 것인지, 어떤 맛이 없는 것이다.
책을 덮고 바깥에 나가 구름에 덮인 하늘을 바라보는데, 선선한 바람이 반바지 입은 다리를 스친다.
날이 선선하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돌아와 보니, 격이 조금의 사료를 먹은 뒤였다.
오늘 밤 자고 나면 조금 나아 있을까?
6 . 10
아침에 개 용변을 보게 한 뒤 기로는 바로 통나무집에 갔는데,
언뜻, 마당에 박 만석이 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와 보니,
"접대(엊그제) 빌려간 붓 가지고 왔는디, 거기 있었고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가 아픈지, 밥도 잘 안 먹고... 힘도 없어요." 하자,
"눈깔이 총총한 걸 보니, 별 일은 아닐 거 같은디?" 하고 박 만석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을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둘이는 산장에 닿아 있었는데,
"참, 산장 아저씨! 얼마 전에 개가 새끼를 낳았다면서요? 강아지 좀 보여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려? 따라 와 봐..." 하더니, 박 만석은 이제 겨우 눈을 떠 몽실몽실한 새끼 몇 마리를 꺼내왔다.
"아이! 이 놈들 봐라......" 하고 기로가 소리를 지르며 강아지를 어루만지자,
"어? 장씨가, 개를 상당히 이뻐하는구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가요?" 하던 기로는, "그럼, 이렇게 귀엽게 생긴 새끼들을 이뻐하지 않을 사람도 있나요?" 하자,
"글씨..." 하고 박 만석은 고개를 뾰토룸하게 젓기도 했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러니 기로는,
'허긴, 이쁘다기 보다는... 사랑스럽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구나......' 하고 혼자 생각을 했다.
무릇, 모든 동물의 새끼들은 다 이쁠 터였다. 그러면서는,
'내 새끼들도 이뻤지......' 하다간,
얼른 그 생각마저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夢想?'에 돌아와 기로는 아침을 챙겨먹었다.
그리고 흙작업에 들어갔다.
비어있는 석고 틀에 흙을 채워 넣는......
그 작업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닌, 그저 단순노동이니까 정성만 필요할 뿐 어려울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이라도 해 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는,
'나에게 뭔가 새롭게 만들어가는(창조적인) 부분은, 고갈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흙작업을 끝내놓고 기로는 밭에 올라갔다.
토마토의 샛가지를 뜯어내고 긴 가지는 다시 지줏대에 묶어 주었다.
그런데 두세 개씩 열리고 있는 토마토는, 이제 제법 그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놈들이 맛이 있어야하는데......' 하면서 기로는,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자기들 맘대로 토마토에 비료를 주냐고?' 하고 상범 처형을 원망하고도 있었다.
기로는 반장이 알려준 대로, 토마토에는 비료를 주지 않으려... 그동안 정성스럽게, 아궁이의 재를 퍼다가 주었었는데, 엊그제 놀러왔던 상범의 처갓집 식구들이(처형) 무턱대고 비료를 주었기 때문에,
처음엔 알지도 못하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그 비료의 흔적까지 호미로 긁어냈던 걸 상기하면서. 그러면서도,
'허기야, 나는... 가능하면 다른 작물에도 비료를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 옥수수 정도를 제외하곤......' 하고도 있었다.
점심을 해 먹으면서, 기로는 격에게 밥 조금을 청국장에 말아 주어 보았다.(개를 위해 일부러 끓였었다.)
그런데 개는 김치와 고기만 건져먹고, 밥은 남겨 놓는 것이었다.
그것도 겨우 두어 숟가락을 주었을 뿐인데......
그러니 심사가 났지만, 아픈 개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게 흐리고 후텁지근한 오후로 이어졌는데,
'스케치를 하나 할까?' 하고, 기로는 개복숭아 있는 빈 집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왠 여인네 네 명이 호숫가에서 뭔가를 하려고 자리를 펼치는 등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방금 타고 온듯한 택시와 그 기사인 듯한 사람은 길에 그대로 있었는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하고 기로가 조용히 묻자,
"예, 미꾸라지 몇 마리 놓아주려고... 하는데요?" 하는데,
기로가 언뜻 보기에도 '미꾸라지'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뭔가 '방생'을 하려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가 알기론, 이 호수에는... 그 어떤 행위, 낚시도 방생도 금지되어 있는 걸 모르세요?" 하고 묻자,
"그래도... 생명을 풀어주는 건데, 괜찮지 않겠어요?" 하고 꼿꼿하게 되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로는,
"아주머니들이 굳이 이 호수를 생각해주지 않아도 될 건데요? 그리고 아주머니들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호수를 내버려두는 게... 훨씬 이 호수를 위해서도 좋을 거거든요? 그렇잖아도 이 호수엔 물고기가 많아서 난린데... 굳이 이 구석까지 와서 방생할 이유는 없을 테니..." 하면서,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제가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여긴, 신고하자마자 경찰이 바로 달려오거든요?" 하고 엄포(?)를 놓자,
"알았어요!" 하긴 했는데, "저 아저씨... 되게 꼬장꼬장하네?" 하는 말도 하면서,
어쨌든 하던 일을 멈추고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겨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니, 그 여자들이... 뭘 가져왔는지 두 손에 가득 들고(미꾸라지 뿐만은 아닐 듯했다.), 다시 택시를 타더니... 둔덕을 올라 사라져 갔다.
그제야 기로는 갈 길을 가면서,
'저런 사람들이 왔다 하면, 남기는 건... 쓰레기밖에 없어.' 하는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기로가 그랬던 데에는,
엊그제 일요일에 기로가 김 선생님 댁에 가서 여기에 없을 때,
마을 사람들이, '夢想?' 앞 평상에 웬 두어 가족이 와서 음식을 해 먹고 난리였다고 했는데,
나중에 기로가 돌아와 보니... 쓰레기 천지였기 때문이다.
그걸 치우면서 기로는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참에 이 사람들을 봤기에,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이던가?
그 날(일요일)은 무슨 일이 그리도 많았는지, 그들인지 다른 사람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빈집의 개복숭아를 몽땅 따갔다는 반장의 얘기도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가보니, 아닌 게 아니라... 나무가 훵했다.
기로는 약이 오르기까지 했다.
'아, 지난 봄에 꽃이 너무 아름다워... 내가 이 나무를 소재로 '개복숭 꽃'이라는 수채 드로잉도 했고, 그 뒤론 여기를 지날 때마다... 그 열매가 조금씩 커가는 걸 보면서, 감탄을 하곤 했었는데...... 그리고 지금 같으면, 그 열매라도 보고 싶은데, 비맞은 닭처럼... 엉성하고 썰렁한 모습으로 남았구나......' 하는 허무함에 마음까지 아파오는 것이었다.
# 비오는 밤
모처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내내 흐려있더니 오늘 져녁 무렵에 결국, 마른땅에 하나 둘 짙은 색이 늘어가면서... 비는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무척 오랜만에 비가 내리는 듯... 나는 매우 반갑게 비를 맞습니다.
채소와 화초들을 옮겨 심은 뒤 내내 가물었었거든요.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를 들으며 작업 방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빈 시간이었습니다. 빈 마음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한 시간 여를 앉아 있다가, 빗 소리의 유혹에 져서... 슬그머니 마루로 나왔습니다.
비에 맞은 자갈들이 어둠 속에서도 가로등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당 끝에는 코스모스와 도라지가 오랜만에 오는 비에 몸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아, 쟤네들은 얼마나 시원할까?
방의 불을 끄고 마루에 앉아있었습니다.
마루 아래 토방에서는 죽은 듯이 개가 엎드려 있고,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뭔가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풀냄새 같기도 하고, 아니면 비 냄새일지도 모를...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오늘 같은 밤엔 누군가의 전화라도 오면 좋겠지만, 그 건...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작업방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역시... 지고 말았습니다.
쏟아지는 잠에,
모든 걸 포기하며 잠 자리에 들었던 것입니다.
비가 온다고, 잠이 온다고...
내 일을 과감히 포기하는 화갑니다.
나는......
말로는,
"그 일이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6 . 11
잠에서 깨어났던 기로가 더워서 마루에 나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밖은 시원했다.
눅눅한 게 싫어서 전 날 저녁에 군불을 지펴 놓았던 방이 너무 따뜻해서(뜨거워서) 눈이 떠졌던 것이었다.
그렇게 몸이 조금 식도록 앉아 있었는데,
"어?" 하고 깜짝 놀랐던 건,
개의 밥그릇이 깨끗이 비워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제 저녁도 개가 밥을 안 먹어서,
"밥도 안 먹고 지랄이야!" 하고 혼자말로 씨부렁댔었는데......
그런데 개는 웅크린 채로도 기로의 소리를 듣고는, 꼬리만 살살 흔들기에,
"격, 너... 이렇게 밥도 안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어? 그러면, 내가 너에게 뭘 어떻게 하라고?" 하면서도, 마루에 하나 남아있던 두유 팩을 가위로 자르고 있었다.
그래도 개는 힘에 겨운지 꼼짝하지 않고 있기에, 기로는 스텐레스 그릇에 두유를 담으면서,
"먹어!" 소리까지 쳤었다.
그 때서야 개는 삐죽이 일어서더니, 혀를 내밀고 달려들었는데,
두유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릇에 팩을 기울이고 있는 기로의 손까지도 핥기에,
바로 방으로 들어와 버렸었는데......
밤 사이에 밥 그릇을 깨끗이 비워놓았기에,
"격, 밥을 깨끗하게 먹었네? 잘 했다!" 하는 칭찬까지를 했더니, 토방에 올라와 다시 핥으려고 해서,
"안 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불을 켜보니, 시계는 한 시가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쳇! 나는... 지금이 새벽인 줄 알았는데......' 하면서, 기로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 '달개비'를 심은 사람
이 집 '夢想?'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과 축대로 경계가 나 있습니다.
둥글둥글하고 커다란 바위로 쌓아 놓은 축대라, 보는 사람들은 멋지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사실, 나는 축대를 쌓으려는 친구에게, '그 돌은 이 지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대의견을 피력했던 사람입니다.
그 거야, 이제 지난 일이니... 그렇다고 칩시다.
어디거나 축대를 쌓으면 거기에 따른 조경공사를 해야합니다.
특히 아파트 공사에는 축대를 쌓아놓고, 그 돌 틈에는 '연산홍' 같은 화초를 심는 게 상례화 되어있습니다.
물론, 이 집에도 그런 바위 틈에 뭔가를 심어야할 과제로 남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파트 조경공사처럼 연산홍을 심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니 싫었습니다.
기왕에 1 년을 살아갈 예정인데, 그 동안 만큼은 내 맘대로 해 보고 싶어서... 친구에게는 '나에게 맡겨달라'고 부탁까지 해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산장아저씨 지시대로 친구는 통나무집 쪽의 축대엔 ‘금잔화’라는, 한 번 피면 가을까지 오래간다는 꽃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꽃도 맘에 들지 않아... 내 뜻대로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군산의 형집에 갔더니, 형수님이 '겹채송화'씨가 있다길래... 씨앗을 얻어다 심었습니다.
납작납작 번지는 채송화가 바위 틈에 아롱다롱 꽃을 피우는 건, 그런대로 어울릴 것 같아서... 기대를 가지고 심었는데, 그 씨앗은 두어 달이 지나도록 단 하나 싹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봄이 지나가고 있는데, 어느 비오는 하루,
나는 집 주위에 널려있던 '달개비'를 뽑아다 바위 틈새에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달개비를 심는 내 모습을 산장 아저씨가 보게 되었습니다.
"뭐 허는 짓여?" 놀라면서 하던 말이었습니다.
"왜 공들여 그까짓 풀을 옮겨다 심느냔 말여?" 하드라구요.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이 앞을 지나다니며... 달개비가 커나가는 걸 보게 된 것입니다.
키큰 아저씨도 어느 날은,
"이 거, 일부러 심어 놓은 것 같은디?" 하고, 의아하다는 듯 말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 제가 일부러 심어 놓았는데요." 하자,
"풀을... 뭐 허게?" 하고 정말 시덥잖다는 표정을 짓기에,
"꽃이 피잖아요......" 하긴 했지만,
나는 조금 멋쩍었답니다.
그런데, 그런 내 행동이... 마을 사람들에겐,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전해진 모양입니다.
별스런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한 것으로요......
그 것도, 50에 가까운 사람이... 철없는 애들의 장난 같은 일을 서슴없이 해내는 일로요......
그런 달개비가 이제는 많이 자랐습니다.
어떤 건, 너무 웃자라서... 머리가 삐쭉삐쭉 길은 것처럼 눈에 거슬리기도 한 모양샙니다.
아담하게 바위틈에서 맑은 파랑 꽃을 피우면, 그런대로 어울릴 것 같은데, 너무 웃자라버리니... 조금 꼴사나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마당의 풀을 뽑고 있는데,
비가 잠깐 갠 틈에... 여기저기서 어슬렁어슬렁 나온 마을 분들은, 자연스레 마을의 한 중심인 '夢想?'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비록 한 쪽 구석이지만, 조금씩 풀을 뜯어 말끔해진 마당을 보면서는...
"역시, 사람의 손이 가는 게 좋아!" 하는 말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산장아저씨가,
"아이고, 달개비를 심어 놔?"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간의 장난기 어린 억양이었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있던 다른 분들 모두가 웃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함께 있는 상황이라, 다른 말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모두는 날더러...
'쯧쯧... 뭐 할 짓이 없어서, 일부러 풀을 옮겨 심었느냐?'는 핀잔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마땅한 변명을 할 그 무엇도 찾지 못한 채, 그저 아무 말도 못한 채 웃기만 했습니다.
사실, 그 어떤 말로도 시골에서 한 평생을 살아온 분들에게는, 이해가 안 될 경우였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옆집 할머니도,
"그런 걸 뭐땜에 심어놨어?" 하시면서, "못써, 뽑아 버려!" 하셨던 적도 있었거든요.
이 마을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아, 오며가며 보게 되는 축대사이의 달개비 꽃.
아마 마을 사람들은 그 것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던가 봅니다.
허기야, 봄부터도 보면... 이 마을엔 지천에 오랑캐 꽃, 민들레 꽃... 등 수도 없는 야생화가 피고 지는지라,
처음 와서 사는 나는, 민들레 한 송이에도 감탄을 하며 아꼈는데... 마을 사람들에겐, 한낱 귀찮은 풀에 불과했던 겁니다.
호미로 그 깊게 박힌 민들레 뿌리를 뽑아내면서,
"이 것은 뿌리가 깊게도 박혀!" 하면서 짜증을 내던 모습을 보았거든요.
더구나 이 부근엔 우리나라 재래종이라는 '하얀 민들레'가 많은 지역인데도요.
그러니까 그런 야생화마저도 천덕꾸러기가 되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비가 와서 쭉쭉 자라난 '夢想?'의 달개비를... 고운 시선으로 볼 리가 없는 것이지요.
작년에 나는 서울의 원룸 베란다에서 저절로 난 달개비를 키운 적이 있거든요.
파랑색 달개비 꽃이 아주 이쁘지는 않을지라도, 그런대로 소박한 맛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기억으로, 어차피 올해는 내가 여기에 사는지라... 꽃도 내 맘대로 심어보려고 했던 일인데,
이 시골 사람들에겐, 아주 우스꽝스런 일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부끄러울 것까지 있겠습니까만,
시골의 특성상, 이들은 그런 내 행동을... 자기들 끼리끼리는, 뭐라고 수근거렸던 것 같은 눈치였습니다.
썩 기분 좋은 건 아니었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달개비는 모처럼 내린 비에 겁없이 커 있고, 이미 한 두 송이 파랑 꽃을 내보이기도 하는데요......
다만, 작년에 아파트 베란다에서처럼 아담하게 자라났으면 좋겠는데, 어떤 녀석은 바위보다 더 크게 자랐으니... 잔디가 웃자란 것처럼 보기에 흉한 모습인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원룸 베란다에서 자란 것 보다 야생의 본능이 강해서, 키가 사람의 허리까지 올 정도로 큰 녀석도 있다 보니... 조금 징그런 느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비가 내리는 관계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간 뒤,
나는 삐쭉삐쭉 웃자란 달개비 순을 손으로 뚝뚝 잘라냈습니다.
대충 꺾어주는데도, 금방 손으로 한 움큼씩 잡히드라구요.
그랬더니, 조금은 안정된 모습으로 바뀌긴 하던데,
어쨌거나... 이제 머지않아, 그 녀석들은 파랑 꽃을 내 뵐 겁니다.
'달개비를 심은 사람'.
이 마을 사람들은 내년에 내가 떠난 뒤에도, 내 얘기를 할라치면...
그런 얘기를 꺼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내 스스로도... 조금은 우스웠습니다.
'달개비를 심은 사람'
꼭, 무슨 제목 같기도 하고...
서울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이런 시골에선... 아주 이례적인(기행을 일삼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느껴갑니다.
6 . 12
#자연의 섭리
아하!
격이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 어디가 아픈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까웠고 퍽 걱정했었는데, 아마... '발정기(發情期)'에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그동안 하도 개가 시름시름 기운을 잃어가고 밥을 먹지 않아서, 내내 신경이 쓰였고 마음까지 아팠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원래의 주인이었던 형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다른 집으로 갔던, 격의 자매에게서도...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개도 갑자기 먹을 걸 안 먹어 걱정이라는 연락이 오더니, '발정기에 접어든 것 같다'는 소식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어차피 한 어미 밑에서 같이 태어난 새끼(자매)들이니, 우리 격도 그런 증상일 거라는 게... 형과 나의 지론이었던 겁니다.
형은,
"며칠 더 두고 보다가, 혹시 거기 가까운 곳에 진돗개 수놈이 있으면... 데려가 봐라." 하더군요.
다행히 우리 마을엔, 산장집에 한 쌍의 진돗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산장아저씨는 우리 개가 발정을 하면... 데려오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기에, 그러면 될 듯싶습니다.
녀석!
원래 그리 크지 않은 종자라서인지, 아직은 어린 티가 얼굴에 배어난 그저 아담한 개에 불과한데,
그리고 아직도... 어떤 때는 애기처럼 혼자서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며 노는 모습이 꼭 강아지 티를 막 벗어난 개 같은데,
무릇, 만물은 생식과 종족 보전의 본능에 따라 가는 게 섭리인데, 개도 그랬던 것입니다.
그 것도 모르고(내가 개를 키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개를 괴롭혔던 것을 자책하고 안타까워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격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나는, 혹시 속병이 걸려서 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지나 않을까... 몹씨 걱정했었거든요.
'병원을 데려가 수술을 시켜야되나, 그러면 그 비용은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내가 아프다 해도 병원비 때문에 가기가 망설여지는 형편에, 개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것까지를 고려했던 것인데요......
이래저래,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답니다.
가만있자!
근데, 이 녀석이 새끼를 낳으면... 어떻게 한다지요?
그 이쁜 강아지들을...... (하필이면, 그저껜가 나는... 산장집에 가서, 이제 겨우 눈을 뜬 강아지 몇 마리를 보았던 게 떠오르고 있었답니다.)
벌써부터 나는, 격의 새끼들을 만져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어갑니다.
6 . 13
아침에 일어나 기로가 격을 데리고 나갔는데, 산장 할머니가 깨를 뽑으면서,
"바뻐서 큰일여..." 하는 것이었다.
"놉을 사서 깨를 심을라고 혀도, 사람이 있어야지..." 하면서, 땅이 꺼져라 걱정이었다.
그러니, 기로도 마음이 꺼림칙해졌다.
자신이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스스로가... 그런 일에는 자신도 없을뿐더러, 자기 자신의 할 일도 많은 사람이 무슨 날품을 한다고 나서겠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제 온 비로, 코스모스도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였다.
기로가 날마다 물을 줄 때는 겨우 생명만 유지한 채 비쩍 골아있는 모습이더니, 비를 맞고 나서는... 거의 모두가 제 모습을 찾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팔꽃도 이제 줄을 타는 놈이 몇 포기는 되고... 더덕도 줄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다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라선지... 기로가 밭에 가보니, 여기저기 풀도 많이 자라 주변이 온통 풀 세상 같았다.
'이 풀들을 어떡한다냐?' 하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일을 완전히 포기한 채 풀과 씨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그러려고 이 시골로 온 건 아니니......' 하면서 옆을 보니,
고추도 어느덧 따 먹을 수 있는 풋고추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보니... 한 쪽에는 웬 벌레들이 새카맣게 붙어있는 것이었다.
'아니, 몇 포기 심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해충이 이렇게 극성을 부리면... 이걸 어떡한다지?' 하면서도, 기로는 어쨌거나 농사를 짓는다는 것도, 특히 농약을 치지 않은 상태로 농사를 짓는다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란 걸 스스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시작한 일이라, 기로는... 아침부터 마당의 풀 뽑는 일을 시작했다.
지겹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자기 시간을 빼앗긴다는 사실이 짜증까지 났다.
'에이, 이 시간에... 다른 일을 해도 뭔가를 해 낼텐데...... 허다 못해 책이라도 읽을 수 있는데......' 하기도 했지만,
'그래, 이번까지만 뽑아주자......' 하면서, 일을 계속했다.
오후엔 서울의 서 창모와 통화를 했다.
언제나 그러듯 기로는,
"니는, 전화도 자주 않냐?" 며 야단을(?)쳤다.
그러자 서 창모는,
"헤-헤-헤..." 웃기만 했다.
사실 그와 통화를 하면서 기로는 장화를 신고 산장 할머니 옆 빈집에 오디를 따러 가던 길이었는데,
전화가 끝나기 전에 그 곳에 닿았는데... 새카맣게 익은 오디가 정말 탐스럽고 좋아 보였고,
"야, 오디가 정말로 좋다." 하자,
갑자기 서 창모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근데, 왜 꿀 먹은 벙어리야?" 하고 기로가 한 마디 하자,
"좋겠수!" 하는 것이었다.
순간 기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내가, 술 담궈 놓을 테니... 나중에, 놀러 와라." 하자,
"알았슈." 하는 것으로 그와의 통화를 끝냈다.
'오고 싶으리라......' 하면서 기로는,
검은 자줏빛에서 잉크색 같은 짙은 색으로 익은 오디를 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디는 힘이 없어서, 가지만 움직여도... 두둑둑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에 잡으면, 과즙이 툭 터져... 손이 금방 검은 보랏빛으로 물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개를 맛을 보니, 달콤했다.
그렇게 많은 오디를 담을 마땅한 그릇이 없어서 기로는, 우유 1 리터 플라스틱 용기에 오디를 따 넣었다.
나중에 돌아가서 거기에 설탕을 조금 넣고 소주를 부어놓으면 될 터였다.
'그래가지고 술이 될까?' 의심스럽긴 해도, 그 전에 버찌로 그렇게 술을 담궈도 아주 맛이 좋았었기 때문에,
'맛있게 술을 담궈, 서 창모 등이 오면... 맛보여야지!' 하면서 오디를 땄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위엔, 밝은 붉은색의 석류꽃잎이... 선홍빛 피처럼 뚝뚝 떨어져 있었다.
옆집 할머니 집 석류나무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아, 정말... 석류꽃도 한창이구나!' 하면서 '夢想?'에 돌아왔다.
기로가 저녁에 보니, 깨끗하고 널찍한 마당이 보기가 좋았다.
그 끝에는 코스모스가 어제 온 비를 맞아서 옆 가지를 내밀도록 커가고 있고, 그 한 쪽 꽃밭에는 도라지가 파릇파릇 생기를 내 뵈고 있었다.
그리고 옆 할머니집 축대 쪽에는 나팔꽃 넝쿨이 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래, 화려하지는 않을지라도... 이렇게 정갈하고 깨끗한 마당에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살고 있기도 하다. 비록 내 집이 아닌 친구의 집일지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사는 인생, 어떤 조건이거나 환경에서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가며 산다는 건 행복일 것이다......' 하고 만족해 하고 있었다.
'이 번 주말도 비가 온다던데, 이러다... 장마가 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