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고승 마하거사난다 스님
달라이 라마, 틱냣한 스님, 숭산 스님과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일컬어지는 마하거사난다 스님,
이 이름이 우리에게 낮 설기까지 한 이유는
우리에게 스님이 소개된 바가 전무하기 때문일 것 같다.
숭산 스님과 유난히 교분이 두터웠던 스님은
월남 출신의 틱냣한 스님과 함께 생전에 활동했던
미국 불교계나 세계 평화분야에선 ‘캄보디아의 간디’ 로 잘 알려져 있다.
고국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 정권 치하에서도
캄보디아 불교의 맥을 이었으며 미국 이주 후 달라이 라마,
요한 바오로 2세 등과 함께 세계적인 평화 운동에 참여했었던
그야말로 ‘마하’ 큰 스님이셨다.
캄보디아 프놈펜 중심가에 있는 대사찰 썀뽀미야스는
마하거사난다스님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생전에 마하거사난다 스님을 시봉했던
사리츠(Sarith) 스님을 만나 거사난다 스님의 동상이 모셔진
법당에서 생전의 활동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스님 한창 젊었던 시절이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기간이었지요.
크메르루즈 정권치하에서 불교가 위협 당하자
불교를 지키시려고 온 힘을 다 쏟으셨었어요.
미국서 체류하시며 해외를 다니시다가 고국에 오시면
항상 이 썀뽀미야스 사찰에 머물곤 하셨는데
제가 옆에서 시봉했습니다. 스님은 무척 평화로운 분이세요.
항상 미소 짓는 얼굴로 주변을 밝히시는데
어린 아이들을 보면 참 많이 웃고 좋아하셨어요.
2007년 3월 미국 메사추세츠 사찰에서 열반에 드신 후,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로 계신데 캄보디아 정부 차원에서
시신을 고국으로 옮겨오는 일을 추진 중입니다.
저는 2003년 스님과 함께 담마야트라 순례를 같이 하였습니다.”
2003년 거사난다 스님이 열반하시기 3년 전, 스님을 시봉하며
2003년 순례를 같이 했던 회상에 젖은 사리츠 스님 얼굴에
스승을 닮은 큰 평화로움이 더 한다.
거사난다 스님은 1992년부터 매년 담마야트라,
‘워크 위드 담마’ (Walk with Dhamma) 라는 전국 불교 순례를 했었다 한다.
도법스님이 해오고 계신 생명평화결사의 탁발 순례와 유사한데
매년 한 달간 자비와 평화의 기치를 걸고 전국을 걸으며
불자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한다. 지금은 스님이 안 계셔도
거국적인 불교 행사로 자리매김 되었다는데
국교가 불교이고 국민 거의가 불자이니 거국적인 행사가 될 만도 하겠다.
“스님은 기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오계만 지킨다면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고 믿으셨어요.
평화가 각자 자신 안에서 시작, 그것이 공동체로,
또 사회로, 국가로, 세계로 퍼져나가길 원하셨던 것이지요.
순례를 하시면서 어디서나 불자들에게 오계의 중요성을 설하시고
비폭력적인 평화와 자비를 말씀하셨지요.”
거사난다 스님이 창안한 이 담마야트라는
캄보디아 국민의 민심을 불심으로 채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옛 평화로움을 재건하자는 취지였다.
생전의 사진으로 뵙는 스님은 작은 체구였지만
그 뜻은 우주만큼 컸던 것이다.
스님은 1929년 캄보디아 중남부 다케오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8살에 출가한 후 프놈펜의 불교대학을 나온 다음
인도 나란다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다.
이후 캄보디아 민중불교에 투신,
최초로 크메르루즈 정권 난민촌에 첫 불교사찰을 열었다.
그 때 난민뿐 만이 아닌 전국적으로 불자 2 만 명이 모였고
온갖 박해 속에서도 불교에 의지하는 국민의 모습을 재건시켰다 한다.
크메르루즈 정권이 모든 종교적인 활동을 위법으로 선언하고
많은 승려를 강제 환속을 시키던 와중에 스님은 대단한 용기로
불교의 맥을 잇는데 최전선에 나가 힘을 쏟았었던 것이다.
스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크메르루즈 정권이 불교를 박멸하려 했지만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이 캄보디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기에
아무리 박해해도 불교는 결코 죽일 수 없었습니다.”
거사난다 스님의 경력을 말하자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할 지 모를 정도인데 스님의 행동반경이
워낙 전 세계적으로 넓어 스님을 찾으려면
지구를 뒤져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80년 UN의 캄보디아 망명정부 자문을 지낸 것에서 시작,
미국 북부에서 시작해 유럽과 호주에 까지 난민 정착촌을 세워
캄보디아 불교를 세계 속으로 이식시켰다.
무엇보다도 자국의 평화만이 아닌 세계 평화운동으로 전개했던 것은
전쟁과 학살을 겪은 당사자로써 그 참상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세계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캄보디아와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모임’ 을
공동으로 창립한 후 83년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이태리 아시시의 종교 평화운동을 주도하였다.
88년 캄보디아의 종정을 지냈고
94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조국의 수난기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절망한
국민들의 가슴을 따듯하게 해주며 암울했던 시기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국내만이 아닌 세계로 뻗어나가 평화를 상기시켜준 큰 스승이자
참 불제자였던 거사난다 스님의 일생은
바로 ‘자비의 화신’으로 산 삶이었다.
김나미
월간 불광 2008년 6월호
[출처] 블로그 youraiseme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