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9-10절)
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 매우 큰
사건이지만 영적으로는 그 전에 맹인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가 눈을 뜬 다음에 삭개오의 사건이 나오는데 즉 영안이 열리므로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를 원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름이 의나 정의인 삭개오는 부자이지만
어느날 부터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되어 드디어 그가 예수께 달려가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마귀의 자녀들로 변질이 된 이스라엘 중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구원을
제 자리에서 선언 받는 복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입이 막히면 하나님을 안 겁니다.
예컨대 요나도 말이 많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입을 닫고, 욥도 입을 가립니다.
집안의 모범생이던 맏아들은 말이 많으나 돌아온 탕자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어버린 자가 찾음이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혐오스러운 여리고를 지나가십니다(눅19:1)
지금도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오고 또 오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주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지만 삭개오에게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는 하나님과 피조물, 특히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신기한 매커니즘입니다.
문제는 삭개오처럼 철학적인 고민을 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구원을 사모해야만 하는데
현실 세계는 소유와 기능이 대세이기 때문에 소유가 있는 자는 그 소유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변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겉 사람인 육체의 행위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말도 합니다. 이 실용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육신의 겉 사람의
소욕이 신앙의 복이라고 말하므로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면 삭개오처럼 존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도마뱀처럼 잘라내는 악순환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현재교회의 폐해입니다.
결국 소유를 다 차압당하고 그래도 안 되면 건강까지 손을 대시는 징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다윗의 반열은 사람의 막대기나 인생채찍으로 징계하셔서 돌이키게
하지만 사울신앙의 계보는 징계로 흔들어 깨우는 예고가 없이 바로 처단해 버리십니다.
삭개오는 먼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므로 세리장이요 부자인 자신의 존재를
포기합니다. 그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드디어 주님이 그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삭개오가 헌금을 듬뿍하겠다고 했다면 주님이 결코 그 집에 들어가시지 않았을 겁니다.
주님께서 삭개오 집에 들어가니 주변에서 삭개오가 죄인임을 수군거려 줍니다(눅19:7)
삭개오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합니다. 소유의 절반, 등을 친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노라 하고 나옵니다(눅19:8) 부자는 욕심이 많은 법이고 수전노인데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고 주님을 모시고 나니 드디어 소유가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려 하늘에 상급을 쌓자고 하니 존재가 드려지지
못해 그만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이 주님은 바깥에 계시고 자신들의 파티가 되고 맙니다.
삭개오의 구원을 보면서 처음 주님을 만나는 회심의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방인은 유대인 외의 민족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이방인이 되고 중언부언하게
됩니다. 돈을 벌면서 주님 돈 좀 주세요 하면 그게 바로 중언부언이며 밥과 약을 먹고
있으면서 주여 건강을 지켜주옵소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방인과 같은 중언부언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입혀 주실 것을 알고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먹거리가 있는 줄
알고 날아다니는데 백합화가 쪽팔리게 옷을 구하고 공중의 새가 먹거리를 구하는
중언부언을 하지 않음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의 사람들은 적어도 겉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당연히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진리를 터득한 그리스도인은 그 속사람의
간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주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내 뜻대로 마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프로슈케)를 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만약 아니면
아직 삭개오와 같은 구원이 일어나지 않고 겉사람의 행복을 구하는 자연신관일 겁니다.
어쨌든 삭개오의 구원의 패턴은 존재가 먼저 포기되고 그 다음에 소유가 포기된 다음에
비로소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좌정하시고 구주가 되신 겁니다.
아! 성령께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아담 안에 잃어버렸던 너를 찾아 주께서 오신 거야
말씀하시는 구원의 감격은 어디에 비길 수 있으랴! 다윗이 자신의 혈통인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시므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실 것을 미리 보고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던
것처럼 삭개오 또한 눈이 밝아져서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지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므로 주님께 발견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이와 같이 속사람이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참여하여 주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참 회심의 사람에게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존재를 먼저 드리고 난 다음에 보화관이 바뀌므로 소유를 드려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순서입니다. 소유부터 먼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유대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마21:13) 기도를 해도 겉 사람의 필요를 위한 기도뿐일 겁니다.
존재를 먼저 주님께 드려 주님을 모신 다음에 가치관이 바뀐 삭개오에게 드디어 그 놀라운
구원이 그의 존재에 기름 붓듯 부어집니다. 당연히 기쁨과 구원의 소리가 넘칩니다(시118:15)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좋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