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수행한 전쟁의 구속사적 의미
8장은 다윗이 사방의 대적을 물리치고 국력을 확장한 내용입니다. 문맥적으로는 5장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6장에서 법궤를 메어 오고, 7장에서 메시아언약 세워주심을 받은 후에, 8장에서 사방의 대적을 정복하게 하시는 문맥입니다. 그렇다면 8장의 전쟁하는 내용을 구속사의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를 두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합니다.
첫째 단원(1-14) 다윗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둘째 단원(15-18) 정의와 공의로 행한 다윗
첫째 단원(1-14) 다윗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8장은,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1)고 시작이 되는데, 전체가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수행한 전쟁의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1), 또 모압을 쳐서 “땅에 엎드리게 하고”(2), 소바 왕 하닷에셀을 쳐서 영토를 유브라데 강까지 확장시키고(3), 소바 왕을 도우러 오는 아람 사람들을 쳐서 종이 되게 하고 조공을 바치게(6) 합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또 다윗 왕이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7-8) 합니다.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다윗은 호전주의자(好戰主義者)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6)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기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14절에서도,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합니다. 여기에 8장의 중심점이 있는데, 그렇다면 다윗이 싸운 싸움은 다윗 자신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싸움”(삼상 25:28)을 싸우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왜 정복을 했는가? 이 열방들은 신정왕국” 곧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대적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화친”하고자 하는 자들을 치지는 않습니다. 첫 절에서 “블레셋”을 언급하고 있는데 5:17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들은 축하 사절을 보낸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골짜기에 가득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왔던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더 강해지기 전에 말살하려는 계략에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 열방들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시 2:2) 하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구속사(救贖史)라는 더 넓은 문맥으로는 창세기까지 소급해 올라가는데,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신 그 연장선상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라고 지칭한 자는 표면적으로는 하와를 유혹한 “뱀”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는 배후 조종자 사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네 후손”이란 결국 사탄을 추종하며 사탄의 조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건설을 대적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하십니다. 이들이 곧 뱀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을 위시하여 열방들이 다윗 왕국이 세워지자 이를 대적하고 있는 데서도 뱀의 후손들의 특성을 보게 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싸움”은 불가피한 것인데, 이점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사탄은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나, 우리는 구원하려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싸움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만 하는데, 만일 가나안을 정복하여 정착하지 못했다면, 또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다윗이 왕이 되자 대적한 블레셋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선민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싸운 싸움은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삼상 25:28) 한 “하나님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싸움”이 어찌하여 구약시대에는 육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는 자기 아들을 “육신을 입고” 보내셔서 대속제물을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무산시키려 했기 때문에 이를 이루시기 위해서는 이를 분쇄하는 “육적” 싸움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 구속사역을 이루어놓으신 신약시대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즉 한마디로 악령인 사탄과의 싸움임으로 영적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3-5) 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무너뜨리고” 라는 말이 3번이나 강조되어 있는데 이 무너뜨림이 구약시대는 직접적으로 신약시대는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한 싸움은 아직도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들을 향해,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30)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맛 왕 도이의 아들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10-12) 하고, “여호와께 드리되—-드리니라”합니다. 다윗은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려 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장의 중심점은 두 번(6, 14)이나 강조되어 있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라, 모세도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습니다. 구약시대만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형제도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실 것을 말씀에 의지하여 확신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여호와의 영광과 그 이름을 위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고”(삼상 25:28)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13) 하는데 시편 60편의 표제는 다윗이 이때에 지은 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旗)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4)
그렇습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전사들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십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십시오. 대적 아말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진군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공격해 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한 첫 싸움이었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섭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리므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파하도록 손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출 17:15)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60편의 결론을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12)
궁극적인 대적은 블레셋이 아닙니다. 모압도 아닙니다. 사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장도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신 예수 그리스도시오, 주님께서 발등상 시킬 대적은 사탄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
둘째 단원(7-18) 정의와 공의로 행한 다윗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 새”(15), 다윗이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는 말씀은 둘째 단원의 핵심일뿐만이 아니라 첫째 단원과도 결부되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대내적(對內的)으로만 정의와 공의로 다스린 것이 아니라 대외적(對外的)으로 그가 수행한 전쟁도 “정의와 공의”로 행한 선한 싸움이었음을 말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찬양하기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고 그 자리에 올리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왕이 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세워 그들의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대하 9:8) 했습니다. “정의와 공의”, 이것이 메시아왕국의 예표인 다윗 왕국의 강령(綱領)이었던 것입니다. 1장에서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왕관을 가지고 왔을 때나, 4장에서 간신들이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왔을 때도 다윗은 흔들림이 없이 “정의와 공의로” 행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윗이나 솔로몬은 예표의 인물로, 온전히 정의와 공의로 행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영원히 견고할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바로 메시아왕국입니다. 이점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 하면서,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시99:1-4)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16), 다윗은 군사령관과 사관과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대신들(16-18)을 임명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행하여 마땅합니까?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행하여야 마땅합니까?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6),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로 행했다”(15)는,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적용되는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