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암에서 석관정을 향하여
석관정에서 이별암을 바라보며
나주본관 성씨 75개
16일 어제 개천사에서 나오는 길 변천리 숲쟁이와 볏단을 사진에 담았어야 한다고 화순 심학예사에게 알렸다. 아울러 김삿갓에 대한 자료 즉 그가 화순에서 머문 곳과 기간에 대해 더 깊은 면담이 필요함을 느꼈다는 것 전했다. 운주사 마감하느라 혼났다.
17일 국가기록원에 자료 복사비 입금여부를 알렸다. 일봉샘이 방문하여 그간 소식 나누고, 평생교육에 대해 논했다.
18일 광주면 관내 지적원도가 도착하여 확인 작업과 붙여서 살폈다. 아쉽게도 소유자가 국유지만 기록돼 있었다. 城으로 나온 지목도 있었다. 옛 관아건물을 복원할 수 있을까. 선행연구에서 애써 보았지만, 속 시원하게 나온 것이 없었다. 왜 모두 사실을 망각했을까.
19일 광주 지적원도 읍내와 다른 구역도 살폈다. 기획모임에서 처음으로 발언했다. 통일교육전달이 자료에 입력되지 않아서 구두로 알렸다. 눈에 핏발이 가셨다.
20일 가족 점심을 동식당에서 같이했다.
21일 사포를 답사했다. 카페지기는 시골집으로 갔다. 시골에 창고지은 모양이다. 동상 창고 건립에 출연 요청해왔다.
22일 조용헌 칼럼리스트가 갑자기 방문해서 김덕령연구자, 카페지기와 함께 영산강 수운에 관해 의견 나눴다. 수학여행가 연가 내고, 경양방죽과 태봉산에 대해 밤샘 공부했다. 장께 사전 보고 건으로 2번 전화 왔다.
23일 나주고 학부모님들과 영산강 답사했다. 래새미이 동행했다. 황국장과 유나네에서 만나 저녁하고 최승원과 충무집에서 최후까지 갔다. 무지한 짓이지만, 느낌 때문에 다행이다. 영산포학술보고서를 보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고생이 시작됐다.
24일 아침 운동을 마치고, 카페지기와 전라도 닷컴에 관한 얘기하며 황국장과 대화를 나누자고 전했다. 흔쾌히 답해서 곧 진월동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짬을 내서 동구청에 들려 국윤숙 주사가 확인 못한 경양방죽 사정당시 토지대장을 찾아냈다. 풍향리 574번지 65,418평이 池,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담양 답사 도중 재시인, 종화백, 장말님 만나 자료 얻고, 좋은 얘기 나누었으나, 모자 분실했다. 수북면 궁산리 537번지(중골)에 종화백 집인데 이사하던 해 재시인은 그 곳을 나왔다는 것이다.
25일 아침운동하고 방콕하면서 책을 보았다. 저녁에 철님과 양산동 용두식당에 가 적당히 마시고, 귀가 했다. 황국장 일행이 와 이전 여부를 상의했다.
26일 구진포부터 석관정까지 뱃길탐사를 카페지기와 했다. 영산포사람들이 마련한 행사에 참석하여 동영상과 사진 많이 찍었다. 저녁 때 샘들과 만나 선지국 많이 마셨다. 2차로 그날에서 날을 바꾸어 얘기했다. 시낭송회를 앞으로 열 모양이다.
27일 누리재단 영산강 답사 안내를 갔다. 염주동 출발지, 남평 농업박람회, 나주영산강문화축제장에서 시간이 어긋났다. 상무지구를 걷다가 과음하고, 윤갱샘에게 전화하면서 그렇고 그렇다고 했다.
28일 손불로 답사갔다. 카페지기는 선태님 결혼식 갔다. 손불면 월천리 일공구마을에서 라면 맛나게 먹었고, 농장마을에서 임윤문 님 만나 삼양사 김연수 손불농장 얘기를 정취하고, 오카피주와 삶은 달걀, 도라지안주도 먹었다. 읍내로 와 백샘 성댁 이전한 가게에서 뻘낙지를 먹었다. 광주 귀가하면서 충무집에서 독배하니 주인 잘 가라고, 충고해 조용히 들어와 잘 잦다.
29일 동명과 나주시에서 메일과 문자가 왔다. 다 상한 내용으로 고생이었다. 황국장이 내달 초순에 이사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30일 부산에서 두 분이 오셔 자초하지 말자고 했다. 시월에 마지막 밤을 보내자는 나주목사 메일이 왔다.
31일 목포대 주최 ‘영산강과 광주’ 주제로 글을 작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