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한줄요약
마음과 경계는 서로 다른 두 실체가 아니라, 장식의 바다에서 업풍을 따라 함께 나타나는 파도와 같습니다.
2. 머릿말
지난 회차에서 세존께서는 마음과 의식의 작용을 이렇게 구분하셨습니다.
마음은 업을 모으고, 의는 그것을 널리 헤아리며, 여러 식은 대상을 분별하고, 앞의 다섯 식은 눈앞의 경계를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대혜보살에게 새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세존께서는 앞에서는 장식과 일곱 식을 바다와 파도에 비유하시며 서로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마음은 업을 모으고, 여러 식은 각각의 대상을 분별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청색과 적색 같은 바깥 경계가 먼저 존재하여 우리의 식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이 먼저 일어나 바깥 경계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계는 언제나 ‘나’와 ‘대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나는 꽃을 보고, 음악을 듣고, 음식을 맛보며, 좋고 싫음을 판단합니다. 이때 우리는 보는 나와 보이는 꽃, 듣는 나와 들리는 소리가 서로 독립된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바로 이 당연해 보이는 분리를 다시 묻습니다.
바다와 파도를 둘로 나눌 수 없듯이, 마음과 경계도 실제로는 둘로 나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회차에서 대혜보살과 세존의 문답은 능가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인 ‘능취와 소취’, 곧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의 관계를 깊이 드러냅니다.
3. 한문원문
1) 대혜보살의 질문
爾時,大慧菩薩以偈問曰:
이시, 대혜보살이게문왈:
青赤諸色像,眾生發諸識,如浪種種法,云何唯願說。
청적제색상, 중생발제식, 여랑종종법, 운하유원설.
2) 세존의 답변
爾時,世尊以偈答曰:
이시, 세존이게답왈:
青赤諸雜色,波浪悉無有,採集業說心,開悟諸凡夫。
청적제잡색, 파랑실무유, 채집업설심, 개오제범부.
彼業悉無有,自心所攝離,所攝無所攝,與彼波浪同。
피업실무유, 자심소섭리, 소섭무소섭, 여피파랑동.
受用建立身,是眾生現識,於彼現諸業,譬如水波浪。
수용건립신, 시중생현식, 어피현제업, 비여수파랑.
4. 한글번역
1) 대혜보살의 질문
그때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여쭈었습니다.
“청색과 적색을 비롯한 온갖 색과 형상으로 인해 중생에게 여러 식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갖가지 법이 파도처럼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어떠한 이치인지 바라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2) 세존의 답변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청색과 적색을 비롯한 온갖 색은 파도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업을 모으는 것을 마음이라 말한 것은 모든 범부를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업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마음이 취한 경계를 떠나면 취해지는 대상도 없고 그것을 취하는 주체도 없다.
이는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다.
몸과 생활의 환경을 세우고 누리는 것은 중생의 현식이 드러낸 것이다.
그 식 위에 여러 업이 나타나는 모습은 마치 물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5. 경전의 종지
1) 색과 형상은 마음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혜보살은 청색과 적색을 비롯한 여러 색과 형상이 중생의 식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바깥에 꽃이 있으므로 눈으로 꽃을 보고, 바깥에 소리가 있으므로 귀로 소리를 듣는다고 여깁니다. 외부의 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감각기관이 그것을 받아들여 마음속에 인식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청적제잡색, 파랑실무유”라고 답하십니다.
청색과 적색 같은 온갖 색은 파도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파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물과 별개로 존재하는 ‘파도’라는 물질은 없습니다. 물이 바람과 조건을 만나 출렁이는 모습을 파도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험하는 색과 형상도 마음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실체가 아닙니다.
경계가 실제로 없다는 말은 눈앞의 사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순한 부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분별하는 모습 그대로의 세계가 마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2) ‘마음’이라는 이름도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입니다
세존께서는 앞에서 “마음은 업을 모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게송에서는 업을 모으는 것을 마음이라고 말한 이유가 범부를 깨우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 드러납니다.
능가경은 바깥 세계의 실체를 부정한 뒤 그 자리에 ‘마음’이라는 새로운 실체를 세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우주를 창조하는 영원한 실체나 변하지 않는 자아로 이해한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집착이 됩니다.
세존께서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중생이 바깥 경계를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입니다.
바깥 경계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 일체유심을 설하지만, 마지막에는 그 마음마저 붙잡지 않아야 합니다.
능가경의 가르침은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붙잡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과 경계, 주체와 대상이 함께 고요해지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3) 능취와 소취가 함께 사라져야 합니다
원문의 “소섭무소섭”은 취해지는 대상도 없고, 그것을 취하는 주체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대상을 붙잡는 주체를 능취라고 하고, 주체에 의해 붙잡히는 대상을 소취라고 합니다.
능취는 ‘보는 나’, ‘듣는 나’, ‘생각하는 나’입니다.
소취는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이 두 가지가 분명히 나누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능취와 소취가 서로 의존하여 함께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보이는 대상이 없다면 보는 자라는 생각도 성립하기 어렵고, 보는 자가 없다면 보이는 대상이라는 분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를 조건으로 삼아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경계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취하는 나도 비어 있습니다.
바깥 대상만 허망하다고 하면서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실제라고 붙잡는다면 아직 이원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4) 마음과 경계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입니다
세존께서는 능취와 소취가 없는 이치를 다시 바다와 파도에 비유하십니다.
파도는 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언제나 파도인 것도 아닙니다.
바람이 불고 조건이 갖추어질 때 물결이 일어나며, 조건이 사라지면 파도도 잦아듭니다.
마찬가지로 장식이라는 근본 바탕에 무명의 바람이 불고 업의 조건이 모이면 여러 식의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 식의 파도 위에 나와 남, 좋음과 싫음, 성공과 실패, 얻음과 잃음이라는 수많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분별은 장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파도가 사라진다고 바닷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분별이 쉬어도 마음의 밝은 앎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은 마음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마음 위에 일어나는 분별의 파도를 실체라고 붙잡지 않는 일입니다.
6. 심층 분석
1) 대혜보살은 왜 다시 질문했을까요
대혜보살의 질문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선 게송에서 세존께서는 장식과 여러 식이 바다와 파도의 관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음은 업을 모으고, 의는 널리 헤아리며, 여러 식은 대상을 분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설명만 들으면 마음, 의, 의식, 앞의 다섯 식이 각각 고정된 기능을 가진 실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청색과 적색 같은 외부 경계가 식을 발생시키는 원인처럼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대혜보살은 바로 그 지점을 묻습니다.
“색과 형상이 여러 식을 일으킨다면 바깥 경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 식이 파도처럼 일어난다면 그 파도를 일으키는 마음도 실재하는 것 아닙니까?”
세존의 답은 양쪽을 모두 부정합니다.
바깥 경계도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다만 인연에 따라 마음과 경계가 함께 나타날 뿐입니다.
2) ‘업이 없다’는 것은 인과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피업실무유”, 곧 그 업도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업과 인과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업이 없다는 것은 업이 고정불변의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업은 생각과 말과 행동, 습관과 기억, 환경과 관계 등 수많은 조건에 의존하여 형성됩니다.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 것은 조건이 변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업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라면 수행도 참회도 변화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업은 인연 따라 생겨났으므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면 그 흐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업의 공성은 인과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와 해탈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가르침입니다.
3) 현식은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이는 작용입니다
“수용건립신, 시중생현식”은 몸과 삶의 환경이 중생의 현식에 의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현식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시각 작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식에 저장된 업과 습기가 인연을 만나, 몸과 세계와 삶의 조건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드러내는 작용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비는 농사를 살리는 반가운 은혜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행사를 방해하는 불편한 날씨가 됩니다.
같은 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충고로 들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비난으로 들립니다.
사건 자체만으로 우리의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지닌 기억과 습관, 기대와 두려움, 욕망과 업식이 사건과 만나 하나의 세계를 구성합니다.
능가경은 이 사실을 단순한 심리 현상에 한정하지 않고, 중생이 경험하는 몸과 국토와 생사의 세계 전체로 확장합니다.
4)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사실보다 해석인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짧게 인사하고 지나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사실 자체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곧바로 해석을 붙입니다.
“나를 싫어하나?”
“화가 난 것 같다.”
“나를 무시한 것이 틀림없다.”
그 순간 단순한 인사 하나가 불안과 분노의 세계로 변합니다.
다른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바쁜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괴로움도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깥 사건은 같지만, 업습과 분별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식이 세계를 드러내는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해석을 객관적인 사실로 착각합니다.
마음에 일어난 파도를 바닷물 전체라고 믿는 것입니다.
수행은 사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건 위에 더해진 자신의 분별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5) 일체유심은 마음대로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말을 세속적인 자기계발의 문구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현실의 어려움이 모두 개인의 생각 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능가경의 유심은 개인의 의식이 외부 세계를 마음대로 창조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 핵심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장식의 업습과 분별을 떠나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병과 가난, 재난과 사회적 고통을 단순히 당사자의 부정적인 생각 탓으로 돌리는 것은 능가경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멉니다.
유심은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판단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라, 내가 붙잡고 있는 세계와 자아의 고정성을 돌아보기 위한 수행의 가르침입니다.
7. 선종으로 보는 마음공부
1) 경계를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수행을 시작하면 불편한 소리, 싫은 사람, 복잡한 생각을 모두 없애야 마음이 고요해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없애려는 마음 자체가 또 하나의 강한 분별입니다.
파도를 억지로 손으로 누르면 물결은 더욱 어지러워집니다.
선종의 공부는 경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끌려가는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없애려 하지 말고, 그 소리를 싫어하는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끊으려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붙잡아 이야기를 만드는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경계가 문제가 아니라 경계를 실체화하고 거기에 자신을 묶는 집착이 문제입니다.
2) 첫 생각보다 두 번째 생각을 살펴야 합니다
눈앞에 어떤 사건이 나타나는 것은 막기 어렵습니다.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말하며, 기억이 떠오르고,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첫 번째 일어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은 그다음부터 커집니다.
“왜 저 사람은 언제나 저럴까?”
“나는 역시 안 되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쁜 일이 생길 것이다.”
하나의 경험 위에 수십 개의 생각을 덧붙이며 마음의 파도를 키우는 것입니다.
첫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인연의 작용입니다.
그러나 그 파도를 붙잡아 끊임없이 새로운 파도를 만드는지는 수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일어난 순간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고, 단지 마음에 나타난 한 생각임을 알아차리면 파도는 더 큰 파도를 만들지 못합니다.
3) ‘보는 나’를 다시 돌아보십시오
꽃을 볼 때 우리는 꽃만 바라봅니다.
화를 낼 때는 상대방의 잘못만 바라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일으킨 사건만 바라봅니다.
선의 공부는 그 시선을 돌려 ‘보고 있는 자’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이 생각을 붙잡는 것은 누구입니까?
지금 이 감정을 나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분별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일어나 어디로 사라집니까?
이 질문은 새로운 답을 머리로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능취와 소취가 갈라지기 이전의 마음을 직접 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보는 자를 찾으려 하면 고정된 보는 자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생각은 일어나지만 생각을 소유한 영원한 자아는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능취와 소취가 함께 비어 있음을 조금씩 체험하게 됩니다.
4) 파도 속에서 물을 보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모든 생각과 감정이 사라진 특별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순간 그 파도의 본질이 물임을 아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분노를 실체화하지 않고,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픔이 일어나더라도 슬픔을 밀어내지 않고, 밝게 알아차리는 마음 안에 나타난 한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파도는 바다를 떠나지 않고, 번뇌도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번뇌를 없애려 싸우기보다 번뇌의 본성을 바로 보면, 번뇌는 더 이상 나를 묶는 실체가 되지 못합니다.
8. 용어
1) 청적제색상(青赤諸色像)
청색과 적색을 비롯하여 눈으로 인식되는 온갖 색과 형상을 말합니다.
단순히 두 가지 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접하는 모든 외적 경계를 대표합니다.
2) 채집업(採集業)
여러 경험과 행위의 종자를 모아 저장하는 마음의 작용을 뜻합니다.
능가경에서는 이러한 업의 축적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3) 능취(能取)
대상을 취하고 분별하는 주체를 뜻합니다.
보는 자, 듣는 자, 생각하는 자라는 관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4) 소취(所取)
인식하는 주체에 의해 취해지는 대상을 뜻합니다.
색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생각 속의 대상 등이 포함됩니다.
5) 현식(現識)
장식에 저장된 업과 습기가 몸과 환경, 대상과 경험의 세계로 드러나는 식의 작용을 말합니다.
6) 수용건립신(受用建立身)
중생이 업에 따라 형성한 몸과 그 몸이 살아가는 환경, 재물과 생활 조건을 포괄적으로 가리킵니다.
7) 자심소현(自心所現)
중생이 경험하는 경계가 자기 마음의 업습과 분별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드러난 것이라는 능가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9. 결론
대혜보살은 청색과 적색 같은 외부 경계가 여러 식을 일으킨다면, 마음과 경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습니다.
세존께서는 바다와 파도의 비유로 답하셨습니다.
파도 가운데 물과 별개인 파도라는 실체가 없듯이, 마음에 나타난 경계에도 마음과 분리된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경계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계를 취하고 판단하는 주체도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능취와 소취는 서로 의지하여 함께 일어났다가 함께 사라집니다.
세존께서 마음과 의식, 업과 현식을 구분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것들을 영원한 실체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범부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한 방편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마음의 파도를 경험합니다.
기쁨과 슬픔, 칭찬과 비난, 얻음과 잃음이 쉼 없이 일어납니다.
파도를 없애려고 싸우면 또 다른 파도가 생깁니다.
그러나 파도의 본질이 물임을 알면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경계를 탓하기 전에 경계를 붙잡는 마음을 보고, 생각을 믿기 전에 그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언제나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업습과 분별을 따라 나타난 마음의 파도임을 알게 됩니다.
파도는 일어나지만 바다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생각은 일어나지만 생각의 본바탕은 본래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 본래 고요하고 밝은 마음을 스스로 비추어 아는 것이 능가경이 가리키는 자각성지의 길입니다.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10. 참고문헌
『대정신수대장경』 제16권, 『능가아발다라보경』 권제1, 유송 구나발타라 한역, T670.
『대승입능가경』 권제2, 당 실차난타 한역, T672.
『입능가경』, 원위 보리류지 한역, T671.
감산덕청, 『관능가아발다라보경기』.
정법장, 『능가경의소』.
CBETA 전자불전집성, 『능가아발다라보경』 권제1.
#능가경 #능가경강해 #능가경39회차 #능가아발다라보경 #대혜보살 #유식사상 #아뢰야식 #장식 #현식 #능취소취 #자심소현 #일체유심 #마음공부 #선종 #참선 #불교공부 #불교경전 #정혜의구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