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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스님 법문
부처님은 가정과 부부를 어떻게 보는가?
연기와 중도적 삶의 의미
수행이란 무엇일까요? 수행은 매일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늘 부딪치는 구체적인 일 속에서 실천 가능한 것 입니다. 주부가 요리나 집안일을 할 때, 직장인이 업무를 볼 때, 학생이 공부할 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행을 즉각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행은 일상사가 그대로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일상사의 원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기법에 의해서 살고 있는데, 미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연기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나’는 첫째, 시간적으로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조부모 등 무수한 조상님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둘째, 공간적으로 지구촌이라고 하는 공간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셋째, 외부세계에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와 의식 공간에 존재하던 기존의 관념, 가치 등 무수한 심리적 정보들이 결합하여 연기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넷째,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겨난 상대적 개념이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나’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생각과 앎의 거품이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시간에 의해서 형성된 존재입니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깨달음은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얘기하면 ‘나는 오온五蘊(色受想行識)으로 연기한 존재이다.’입니다. 이 다섯 가지 연기로 있는 존재를 ‘나다.’,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기적 존재인 나를 시간의 관점에 세심히 살펴보면,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지구촌에 툭 떨어져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거슬러 올라가 그 위의 모든 조상님들이 있었기에 지금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백만 명 이상이, 30대를 소급해서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엄격히 따져 보면, 30대 앞에 계셨던 21억의 조상님 가운데 한분만 계시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역사의 모든 인물들이 직·간접적으로 나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연기적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출발이며 상호관계 속에서의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것이 바로 중도적 삶입니다. 바로 아는 것은 지혜이며 이 안목으로 주저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동체대비의 중도 자비행입니다.
공경과 감사의 생활
이런 연기의 원리를 모르면 일상의 삶에서 남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잘 났어, 정말!’이라는 어느 탤런트의 말처럼, 우리 개개인 모두가 다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윗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어 하지 자신이 상대를 공경하고 대접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경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공경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나이 적은 자가 많은 자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공경은 신분, 나이, 계급 및 서열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에게 해야 합니다. 예절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서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웃어른이란, 나이만 많은 거만한 어른이 아니라 자비롭고 지혜로우며 인자한 마음을 가진 이를 말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만 아니라 부모도 자식에게, 형도 아우에게, 스승도 제자에게, 상사도 부하에게 하는 것이 바로 예의요, 공경입니다. 우리 가정이나 사회에 갈등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무지 남의 고통, 남의 처지를 이해해줄 줄 모릅니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여 남을 무시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를 쉽고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공경이며 감사입니다. 즉, 공경은 만행의 근본이며, 인간관계, 개인의 성장, 자연과의 친화는 바로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부처님과 부모님을 모시듯,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하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지금 여기에 있게 한 모든 분들 공경하고 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기쁨 가득한 공존의 생활
공경과 감사의 생활로 연기법을 실천하게 되면, 자연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은 공경하고 감사할 대상들로 가득함을 깨닫게 됩니다. 농부와 산업현장의 일꾼도, 학교의 선생님과 관공서의 공무원도, 철도나 버스 운전사들도 모두 고맙고 공경해야 할 분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물과 공기와 태양도 산과 나무, 강과 들녘도 나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연기법을 공간적 관점에서 보면, 동시대의 지구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공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더불어 살면, 삶은 항상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연기법 수행의 둘째는 공존의 기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정진하는 것입니다.
사고의 발상을 바꾸어 연기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존의 삶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네트워크 시대에는 공존의 밀도가 고도화되기 때문에 ‘나만 혼자 잘 살고 남들은 못 살아도 상관없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가진 자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정보화 사회에서 서로 공존하며 살수 있는 능력을 공존지수, 즉 NQ[Network Quotient]라 합니다. 공존지수가 매우 중요한 측면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인류 맞이하고 있는 네트워크 시대는 연기법의 응용이 극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농경시대에 사용했던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 보다는 네트워크 시대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란 말이 더 설득력 있고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즉, NQ시대의 생존전략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가 아니라 ‘네가 잘살아야 나도 잘 산다.’는 공존의 법칙이 유효합니다. 갈수록 복합적인 상호관계성이 확대되는 사회에서 자기만 잘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관계된 다른 사람에게도 큰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더불어 공존하면 모두가 기쁘고 즐겁지만 남을 이기기 위해 짓밟으면 함께 슬프고 비참해집니다. 그러므로 연기법 수행을 실천하는 이는 큰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기뻐하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고, 북경에 있는 나비의 펄럭이는 날갯짓이 아마존 유역의 태풍의 원인이 됩니다. 미시적 변화가 거시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앞 집 소녀 가장 영희가 그 어려운 와중에도 공부를 잘하여 장학생이 된 것도 기뻐할 일입니다. 이처럼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이 온통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연기·중도적 태도로 가정을 일구어 갈 때 행복한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족공동체의 붕괴
‘가족이란 식구들이 즐거울 때 같이 즐거워하고 괴로울 때 같이 괴로워하고 일할 때 같이 뜻을 모아 일하기 때문에 가족이라 한다.’ 가족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은 『잡아함경』의 구절입니다. 예로부터 ‘가족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된다[家和萬事成].’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불화로 인한 가족붕괴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세대간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이 차이를 극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구국구세의 첩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정사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많이 나오는 한역 경전은 『선생경善生經』 혹은 『육방예경六方禮經』입니다. 팔리어 경전은 『시갈로와다 숫따Siggalovada Sutta』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주 친절한 삶의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부처님은, 자식은 부모의 부속물이 아니라 부모를 인연으로 태어난 독특한 인격주체라고 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진실과 사랑을 다음과 같이 쏟도록 하고 있습니다.
첫째,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멀리 벗어나게 한다.
둘째, 선으로 인도해야 한다.
셋째, 학업을 배우게 하고 기예技藝를 가르친다.
넷째, 어울리는 짝을 구해 결혼시켜야 한다.
다섯째, 적당한 때에 가산을 상속해 주어야 한다.
첫째는 자식이 나쁜 일을 하면 꾸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더라도 바르게 되도록 혼을 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착한 일이 무엇이다.’라는 것을 아이에게 일러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부모의 사랑이 자식의 뼈 속까지 사무치게 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아낌없이 주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식은 5가지 덕목으로써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다.
첫째, 부모님들을 정성껏 봉양해야 한다.
둘째, 부모님들을 대신하여 집의 온갖 책임을 다해야 한다.
셋째, 부모님들께 순종해야 한다.
넷째, 잘 받들어 편안하고 기쁘게 하여야 한다.
다섯째, 위와 같은 효행을 잘 실천해야 한다.
이는 자식은 부모님을 존중하고 봉양하며, 전통을 계승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부모의 지중한 은혜를 생각할 때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식의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이제 남편이 아내에게 베풀어야 할 덕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내를 업신여기지 말고 인격적으로 예우한다.
둘째, 의식주의 걱정이 없게 한다.
셋째, 다른 여인을 사모하지 않는다.
넷째, 아내의 친족을 잘 보살핀다.
다섯째, 아내에게 장신구를 사준다.
부인은 남편을 다음 다섯 가지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남편이 밖에서 돌아오면 일어나서 맞이한다.
둘째, 집안을 잘 정리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시중을 든다.
셋째, 남편의 의사를 존중하고 재산을 잘 관리한다.
넷째, 다른 남자에 마음을 팔지 말고 남편에게 얼굴을 붉히며 대들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남편이 휴식을 취할 때는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불교의 부부윤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부간의 사랑과 화목과 존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부를 인생의 길을 함께 가는 도반道伴으로서의 동반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헌신이나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해야 할 도리라는 쌍방적 형식으로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가족공동체의 파괴는 바로 부부간의 불화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 파괴되면 사회가 불안하고 심각한 사회문제가 만연됩니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은 가족을 수행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가정은 최상의 수행처
가정은 최상의 수행공동체임을 명심하고 일상에서 수행을 하려고 애써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생활에서 바로 체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정이 최상의 수행처가 될 수 있는지 알아봅시다.
첫째, 가족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대 간의 차이나 자란 환경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즈음 부모와 자녀들 간의 세대 차이는 매우 심합니다. 부부간의 사고방식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온 환경이나 타고난 성격이 다른 남남끼리 만나 가정을 이룬 부부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당연한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 입장에서만 생각하여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상대방에게 직·간접적으로 강요할 때, 불화와 갈등이 시작됩니다. 서로의 차이를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섭수 수행이라고 합니다. 받아들임의 수행,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시섭, 애어섭, 이행섭, 그리고 동사섭입니다.
둘째는 받아들였으면 자기의 고집과 관념을 놓아버리는 수행입니다. 받아들이고도 부모인 자기의 생각은 정당하고 성숙되어 있으나 자녀의 생각은 부당하고 철없다고 여긴다면 진실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서로 자기 생각에 대한 집착을 비워버리지 않으면 갈등은 언제 어느 때 다시 생길지 모릅니다. 집착을 놓아야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 있으며, 집착을 놓는 것이 모든 불교수행의 핵심입니다.
셋째는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집착의 관성은 자석처럼 반대의 극이 가까이 오면 어김없이 붙어버립니다. 순간순간 관조하여 자기 마음의 향방을 살피지 않으면 어디에 붙어 갈등과 괴로움을 야기할지 모릅니다. 부모가 자녀를 지도할 때 자기식으로 판단하고 분별하여 자녀에게 강한 압박을 주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욕심이며 집착이지 자녀를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깨어있어 늘 관조해야 합니다.
넷째는 가족 구성원들을 모두 부처님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가족구성원들 간에 사랑과 믿음이 싹트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위 수행덕목들은 가족들 간에 베푸는 마음이 가득할 때 완성됩니다. 가족들이 서로 베푸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들의 삶에 불화와 갈등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위의 수행덕목들을 요약하면, 섭수[受], 방하착[放], 관조[觀], 일체불[佛], 보시[施]입니다. 즉, 받아들이고, 놓아버리며, 비추어 보고, 부처님으로 여기며, 항상 베푸는 생활을 한다면 맑고 향기로운 가정,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이런 가정들이 우리나라 전체로 점점 번져나갈 때 나라가 맑아지고 평화스러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 법문은 ‘우리에게 가족과 가정은 무엇인가 - 새로운 가정의 가치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안성 도피안사에서 열린 법회 중 “부처님은 가정과 부부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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