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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의 문신(文身)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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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길거리, 혹은 TV에서 문신(文身)을 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로 멋을 부리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단체의 다른 동료들과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하는 것 같은데, 옛날에 문신은 형벌이었습니다. 그 형벌을 자자형(刺字刑)이라 불렀으며, 때로는 경형(鯨刑) 또는 묵형(墨刑)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자형은 대개 도둑질한 자들에게 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새겨 넣었으며, 원래는 고대 중국의 형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형벌은 오늘날처럼 징역을 살게 하거나 벌금을 물리지 않고, 죽이거나 신체에 직접 해를 가하는 잔인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처벌이 우선이었습니다.
특히 자자형은 죄인의 코를 베는 의형, 발 뒤꿈치를 자르는 월형,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 목숨을 빼앗는 사형과 함께 오형(五刑)이라 칭했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형벌은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자자형은 남아 송에서는 국가의 공식적인 형벌로 제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송이 명으로 교체되는데, 명의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는 절도에 대하여 초범은 오른팔에 '절도(竊盜)' 두 글자를 새기고, 재범은 왼팔에 새기며, 삼범은 교수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를 본딴 조선에서도 절도범에 대해 자자형을 처했는데, 이와 비슷한 기록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사서인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절도를 범해 귀양 간 죄수가 도망쳤을 때 얼굴에 글자를 새긴 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고을에 쫓아낸다는 기사가 있으며, 묘청의 난에 가담한 자들에게 '서경역적(西京逆賊)'이나 '서경(西京)'이라는 글자를 얼굴에 새겨 유배 보낸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어쩌다 종종 집행된 정도였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절도범이 창궐한 세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자형의 규정은 팔꿈치와 팔목 사이, 즉 팔뚝에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이나 조선 모두 팔뚝 뿐만 아니라 얼굴 등 안면 부위에 새기곤 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처벌에 대한 시각적 효과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초기 절도범이 기승을 부리자 당시 조정에서는 도적에 대한 처벌로 팔에 글자를 새겨 봐야 옷에 가려 죄인에서 수치심을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세종 25년(1443)에 도둑질한 자의 양쪽 뺨에 글자를 새겨 가족과 주변인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조치를 내렸는데, 이를 특별히 경면(鯨面)이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주로 바늘 10여 개를 묶어서 살갗을 찔러 상처를 내고, 먹물을 칠한 후 베로 그 부위를 싸매고, 봉한 후에 죄수를 3일 동안 옥에 가두어 두어 먹의 흔적이 피부 깊숙이 새겨지게 했습니다.
법도가 그렇다지만 모든 절도범이 자자형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노인과 어린이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종이 정한 것으로 70세 이상 노인, 15세 이하 어린이는 자자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인과 여자, 양반 관료들도 대개 제외가 되었지만 양반 관료의 경우 세종 6년(1624) 경상도 선산부사 시절의 비리에 연루된 조진처럼 실제 자자형에 처해진 사례도 있긴 했습니다. 어찌 됐건 일단 자자형을 받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경멸은 물론이며, 조상 제사 및 경조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동네 아이들에게조차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하여 거주지에서 왕따를 당해 살 수가 없게 된 자자형을 당한 사람들끼리 인적이 드문 동대문 안에 움집을 짓고 살며, 거지 노릇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자자형은 숙종 때까지도 시행됐지만 그 후 법으로만 남았고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조 16년(1740) 자자 도구를 모두 불살라 버리고, 다시 이를 사용하는 자는 엄중히 징계하도록 하여 공식적으로 문신을 새기는 처벌, 즉 자자형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특이한 것은 이렇듯 문신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녀 간의 애정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 사례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바늘로 사랑하는 남녀 서로의 팔뚝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연비(聯臂)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규경의 시기보다 훨씬 앞선 성종 연간에 애정행각으로 유명한 여인 어우동은 사랑을 나눴던 사내들 중 특히 좋아했던 5, 6명의 이름을 팔에 새겨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연비의 기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효도의 행위로 문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명종 10년(1555) 김수영은 부모가 죽자 3년 동안 죽으로 연명했으며, 스스로 효를 하늘에 맹세하는 글 132자를 지어 직접 양쪽 무릎에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