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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40) 2023. 9. 20
시므이의 저주에도
삼하 16:5-14
동화작가인 정채봉님이 ‘간장종지’란 책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평소 사람들은 자신의 참모습을 숨기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려면 몇 가지를 함께 해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함께 여행을 해보라고 합니다. 거기에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둘째는 식사할 때 드러납니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예절을 통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감사하면서 먹는지….
셋째는 도박해보면 안다고 합니다. 이기려고 이렇게 저렇게 속이는 사람이 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도박을 함께하기는 좀... 게임을 해야 할 듯).
넷째는 운동을 같이하면 압니다. 골프 칠 때 공을 조금 옮겨놓고 칩니다. 도박과 비슷한 면도... 다섯째 갑자기 위기의 순간을 당하면 진실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얼마 전 영상을 하나 봤는데, 함께 오던 젊은 남녀가 칼을 든 사람을 마주치자 남자 혼자 내빼는 장면... 손을 잡고 함께 피해야지. 연인이라면 결혼하지 말아야 함.
저는 그 사람의 진면목은 위기의 순간을 맞았을 때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 요약>
다윗은 지금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통해 다윗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다윗이, 피난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급히 예루살렘에서 나온 뒤 ‘벧메르학’이란 곳에서 만나 ‘잇대’입니다.
누가 함께 나왔는지 점검을 하는데,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이 다윗 왕 앞을 지나갔습니다. 다윗은 그들 중에 가드 사람 ‘잇대’란 인물을 발견합니다. 그는 ‘쫓겨난 나그네’입니다. 아마도 정치적인 망명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블레셋 가드 출신의 장수로써 많은 가족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윗에게로 망명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그가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너는 어제 왔고’). 자신을 따라가면 또다시 고생길이 될 테니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잇대는 ‘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나 죽으나 함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감동을 받은 다윗은 그와 그의 가족을 먼저 배려하여 ‘기드론 시내’를 건너게 합니다.
두 번째 만난 사람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나와 다윗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언약궤를 돌려보냅니다.
세 번째 만난 사람은 ‘후새’였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편에 선 아히도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했었는데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압살롬에게 가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네 번째 만난 사람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시바’입니다. 다윗은 시바에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길 것을 명령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바는 ‘사울 왕가를 섬기는 사람’이기에 그의 출현은 뜻밖의 선물이었습니다. 시바가 나귀 두 마리에 안장을 얹고, ‘떡’과 ‘건포도’, ‘여름 과일’과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시바는 순수하게 다윗을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환심을 산 후, 자신의 주인을 무고한 말로 모함하고 그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온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중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자 시바는 므비보셋이 사울 왕가의 회복을 기대하고 예루살렘에 남은 것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사이를 이간질해 자신의 주인인 므비보셋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시바의 말만 들은 다윗은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줍니다. 이는 경솔하고 성급한 결정이었습니다. 이 성급한 결정으로 다윗은 그의 일생에 또 한 번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시므이의 저주>
오늘은 다섯 번째 사람을 만나는데 이번에는 다윗을 저주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시므이’란 사람입니다.
5~6절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다윗이 ‘바후림’에 가까이 갔을 때 ‘시므이’를 만납니다. 감람산을 넘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바후림’이란 마을이 있습니다(예루살렘 동북쪽 4km). ‘바후림’이란 지역은 사울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가 사는 지역으로 사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후림’과 관련된 일화 -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통치할 때, 사울 왕이 죽고,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바지 왕으로 세워놓고 다스리디가, 이스보셋과 불륜 문제로 헤어지게 되면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정치적인 거래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재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는 조건을 겁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미갈을 빼앗아 올 때, 미갈의 남편(발디엘)이 울면서 바후림까지 따라옵니다. 삼하 3:15~16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6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다윗 일행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친척이었습니다. 말로만 저주한 것이 아니라 돌까지 던졌습니다. 돌을 던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입니다.
그럼 왜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할 정도로 미워하였을까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7~8절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시므이는 다윗을 ‘피를 흘린 자’, 즉 ‘살인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다윗이 반란을 일으켜 사울 집안 사람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는 여호와께서 사울 집의 모든 피를 다윗에게 돌리셨고,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나라를 넘기셨다고 주장합니다. 즉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이 이렇게 쫓겨나게 된 것은 다윗이 사울 집에 저지른 살인죄 때문에 여호와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저주의 내용은 진실일까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였고,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습니다(삼상24:10, 26:9). 그리고 요나단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요나단의 후손은 지켜주기로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실제로 사울과 요나단은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니라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삼상31장).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금식하며 애도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요나단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사울 왕가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고, 왕의 식탁에서 식사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시므이가 말한 '사울 족속의 모든 피'(8)란 사울 왕의 비참한 죽음이 아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울의 군장 아브넬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오해일 뿐입니다.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 역시 다윗과 무관하였습니다(삼하3:8~27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문제로 갈라섬, 4:1~12 요압의 칼에 찔려 죽음). 이스보셋의 경우 그를 죽여 그 머리를 들고 왔던 사람들에게(군 지휘관 바아나와 레갑) 상을 주는 대신 오히려 엄중히 문책하면서 이들을 처형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사울 가문에 대한 반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삼상13:14).
그런데 시므이는 지금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도 안 되는 억울한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므이는 다윗과 같은 의인을 살인자로 매도하며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것일까요?
그것은 시므이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소위 혈연과 지연에 매여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집안의 몰락 원인을 사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윗에게 그 원인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집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므이의 태도를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과연 우리는 모든 일을 판단할 때, 진정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의를 첫 번째 기준으로 삼고 판단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일화가 성경에 나옵니다.
마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성도 여러분,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생각하지 않고 혈연이나, 지연, 자신의 인간적인 욕심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불신앙임을 꼭 기억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비새와 다윗의 반응>
시므이가 저주하는 말을 들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분노합니다.
9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아비새는 다윗의 이복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이자 요압의 동생입니다(2:18). 즉 다윗의 조카입니다(대상2:15~16). 다윗의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수입니다. 그는 시므이를 ‘죽은 개’라고 표현합니다. ‘죽은 개’는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입니다.
앞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의 은혜를 입은 뒤, ‘죽은 개같은 나를 어찌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삼하 9:8).
그런데 아비새는 용맹스럽기는 하나 성격은 매우 급했습니다. 당장 시므이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예전에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사울 왕을 죽이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삼상26:8)
아비새의 말에 다윗은 이렇게 대응합니다.
10~11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표현은 당시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말로서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수22:24).
그렇다면 다윗의 생각은 어떤 생각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을 한 것입니다.
시므이의 저주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은 물론 시므이의 저주까지 포함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자신의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2:10-12)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면서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저주하게 하신 것이니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이러한 신앙적 태도는 그가 지은 시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37:1~9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징계를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 살며 실수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워서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시고 성화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와 섭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히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징계와 고난 속에 있다면 그것을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반대로 범죄하였음에도 아무런 징계와 고통이 없다면 오히려 두려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세게 던집니다.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옵니다. 그러나 포수가 마치 끌어안듯이 받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이 악한 공격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나도 죄인인데, 부족한데, 혹시 하나님이 시켜서 저러나 생각하면서 너그럽게 받아들이면 견디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한마디 말을 덧붙입니다.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시므이가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일이지만, 그의 저주가 부당하다면 그것도 여호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감찰하시는 하나님, 갚아 주시는 하나님). 다윗은 자신의 억울한 형편을 정확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일정한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4, 19)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윗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묵묵해 감내한 다윗에게 다시 회복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시므이는 훗날 압살롬의 반란이 수습되자 다윗 왕을 찾아와 과거의 망령된 행실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19:16-23).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는)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왕상2:36-46).
<계속되는 시므이의 저주>
다윗과 일행이 시므이를 무시하고 그냥 내려가자 시므이는 계속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13~14절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다윗 일행은 시므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갔고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오면서 계속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며 괴롭혔습니다. 이것은 시므이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국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임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계속되는 시므이의 저주에도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결국, 다윗 일행은 바후림에서 쉬면서 물과 양식을 보급받아야 했는데, 시므이의 적대적 행동으로 인해 바후림에서 쉬지 못하고 계속 행군하였고, 결국 매우 피곤한 지경에서 마침내 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끝까지 인내했던 다윗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피뢰침을 아시지요. 피뢰침은 낙뢰를 온몸에 받지만 끄떡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죠? 땅속에 접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접지되어 있었기에 조롱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로 의도치 않게 고난을 받고, 조롱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접지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까지 넉넉히 이해하고, 또 용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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