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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의 큐피트화살로 맺어진
영원한 부부의 삶의 여정
손기문 • 주문자 가정
1 아름다운 내 고향 2. 나의 탄생과 어머니의 아픔 3. 이 사람들도 사람이다. 4. 유구한 세월은 하나님 눈물 5. 당신은 성화 몇 회요? 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7. 참아버님과의 만남 8. 입회원서를 쓰다 9. 통일산업 기숙사생활 10. 축복을 받겠다고 다짐 11. 손상병! 꼼짝 말고 그대로 서 있어! 12. 눈물어린 어머니의 정성 13. 어머니의 통일교회 입교 14. 뜻을 위해 나는 살고 뜻을 위해 죽고 15. 나를 향하여 다가오는 큐피트의 화살 16. 아내의 탄생과 가족 17. 꿈속에서 만난 참부모님 18. 마하반야밀다심경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손기문, 고향 자랑, 입교 과정, 군대 생활, 통일산업 근무, 약혼식 에피소드, 반야심경으로 불교 신자 할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음
1. 아름다운 내 고향
서울 도심지의 중심지인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동해 바다의 비경 정동진이 나오고, 남쪽으로 쭉 내려오면 어디가 나올까? 바로 남해 바다 푸른물이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내고향 정남진 장흥이 나온다.
장흥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지역이다. 소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서 찬바람을 막아 주고, 울창하게 우거진 숲속에서 뿜어내는 맑은 공기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특히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넓은 들을 적시며 해마다 풍요로운 황금벌판을 만든다. 맑은 물은 시내를 이루어 넓은 강변을 만들고, 그 속에는 다슬기도 살고 온갖 물고기들이 산다. 강변 위 하늘에는 종달새가 날아다니고, 물떼새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아름다운 장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멀리 산 넘어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장이 바로 장흥이다.
2. 나의 탄생과 어머니의 아픔
나는 손순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삼국유사 효선편에 ‘하늘이 내려준 돌종’이라는 이야기로 효의 근본을 깨우쳐준 교훈적 가르침이 잘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손영찬 아버지와 문세님 어머니 사이에 7남매 중 5번째로 1954년 음력 4월16일 전남 장흥군 장평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이 큰형님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회사를 다니셨다. 살기 힘든 조선보다 취업이 잘 되는 일본으로 가셨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점점 심하여지니까 경제보다 불안한 정세가 확산되었다. 부모님께서는 큰형과 그곳에 태어난 둘째형을 데리고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한국에 들어오셨다. 그런데 정리한 돈을 어머니께서 허리에 꽁꽁 동여 매여 가지고 오다가 그만 소매치기에 몽땅 털려버렸다. 허탈하고 텅 빈 마음, 도둑에 대한 야속한 마음과 분노가 가득히 찼다. 현기증이 일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였다. 마음도 비고, 두 손도 비고, 빈털터리 모습으로 털석털썩 무거운 발자국을 내딛으면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귀향했으나 누구 하나 선뜻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주민들이 보기에 일본에서 입주해 온 새댁이 낯설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둘 여지가 없었다. 각자의 삶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빠듯했다. 소매치기를 당하여 재산 전부를 몽땅 잃어버린 어머니는 가난의 고통이 자기 탓이라는 이유로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누나들을 낳은 후 이틀 만에 돈을 벌기 위해 모내기 하러 다녔다. 산후조리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그런 극빈의 상태에서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서도 어김없이 곧장 일을 하러 나가셨다. 생존 자체가 급선무였다.
언젠가 어머니는 우리 식구들에게 밥을 퍼주고 부엌에서 가마솥 바닥에 있는 누룽지를 물과 함께 드시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엄마, 나도 먹고 싶어.”하니까 내게 그 누룽지를 몽땅 주셨다. 사실은 그 누룽지는 어머니의 한 끼 식사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식사를 내게 주시고 굶으셨던 것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일을 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늘 그 생각만하면 내 눈에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여자는 연약하나 어머니는 강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나는 우리 어머니의 생애를 통하여 뼛속깊이 체험하였다.
3. 이 사람들도 사람이다.
아버지께서는 정이 많으시고 풍류를 즐기며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셨다. 모내기를 할 때는 모내기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기 위해서 뒤에서 북을 치며 소리를 하셨다. 특히 농부가를 잘하셨고,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쑥대머리를 잘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노동요(勞動謠) 가수이셨다. 가난했지만 착한 본성으로 이웃을 돕기를 좋아했고, 신명나는 흥겨운 분위기 창출에 주인공이 되셨다.
어머니는 자녀들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5일만에 서는 장터에 가서 국밥집을 내셨다. 국밥집은 막걸리와 함께 곁들어 팔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퍼주기를 좋아해서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불러서 막걸리를 공짜로 마구 퍼주었다. 게다가 막걸리를 마신 상태가 되면 아예 경제관념은 사라졌고 수다를 떨면서 술을 퍼주셨다. 신명나는 착한 천국 백성이 되셨다. 그러나 그만큼 한 푼이라도 남겨서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악착같이 전투처럼 살아야 하는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가진 것도 없이 풍류를 즐기는 속없는 신선처럼 여겨졌다.
또 그때는 거지가 많아서 밥 먹을 때가 되면 밥을 얻어먹으려 집을 찾아왔다. 거지가 들고 오는 밥그릇인 바가지에 밥만 조금 퍼주면 될 텐데, 아버지께서는 굳이 거지를 꼭 밥상에 앉게 하여 우리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게 했다. 우리는 냄새가 나서 온 인상을 찌부렸고,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사람들도 사람이다. 싫어하지 말고 잘 대접해야 복이 온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이의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웠기에 우리들의 얼굴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내가 축복가정이 되어서 복을 받은 것도 아버지의 이웃사랑과 묵묵히 참아주신 어머니의 은덕(恩德)이 큰 배경이 된 것 같다. 참아버님의 가족들이 거지나 길손에게 차별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접을 하셨기에 참아버님 같이 위대하신 인물이 탄생하셨던 것을 늘 떠올리면서 나는 아버지의 행적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물론 어머니의 처절할 정도로 노동과 헌신을 하신 것 역시 내 마음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부모님의 생애는 나에게 늘 등대처럼 빛나고 있다.
4. 선생님이 되고 싶은 꿈
우리 집에서 조그만 가면 냇가가 나오는데, 그 물은 흘러 흘러서 섬진강으로 간다. 냇가의 넓은 강변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강변 풀밭에 소를 메어두고 바로 물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치면서 물속으로 잠수해 큰돌 밑에 숨어있는 붕어를 잡았다. 상당히 큰 것도 잡혔다. 때로는 물가 풀숲을 더듬다가 메기인줄 알고 잡아보면 물뱀이었다. 물뱀은 독이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꼬리를 잡아 빙빙 돌리다가 친구들에게 던지면 기겁을 하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배꼽을 잡고 깔깔 웃었다. 그런 개구쟁이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면 강변 건너편 고구마 밭이 무너지면서 고구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채로 물에 떠내려갔다. 나는 그것을 따먹기 위해서 친구들과 겁도 없이 급류의 흙탕물속에 뛰어 들어가 고구마를 갖고 와서 먹었다.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아마도 우리들의 모습을 아버지 어머니께서 보셨다면 기절초풍을 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은 공부를 잘해서 반장도 하고, 항상 반에서 상위권에 들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자기 꿈이 무엇인지 글로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우리 선생님이 멋있어 보여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기왕이면 시골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앞으로 시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써서 제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꿈이 이루어 진 것 같다. 고향에 와서 목회를 하고 있으니 꿈은 실현된 것이다. 목사는 식구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목회는 선생님 보다 더 멋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가르치고, 치유하고, 생명을 중생 부활시키는 것은 어떤 직종보다도 더 의미가 거룩한 직업이다. 참부모님께서는 내 꿈을 이루어주셨다.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재림주님을 따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꿈이 실현되었고 큰 보람을 갖는다. 이 큰 은혜에 그저 감사, 감사할 뿐이다.
4. 유구한 세월은 하나님 눈물
내 고향 장평 땅에 원리 말씀이 뿌려진 것은 1961년 12월이었다. 장흥교회 김경임집사가 40일 동계 전도기간에 장평면 양촌리 문한칠씨 댁에서 숙소를 정하고 활동을 하였다. 그때 우리 집 옆집에 살았던 문평래 회장이 전도가 되었고, 또 이듬해에는 문평래 회장 친구였던 나의 둘째형이 전도가 되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 큰 누나는 7살 된 내손을 잡고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으로 갔다. 방문을 여니까 많은 사람들이 앉아 노래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왜 노래하면서 울고 있을까? 노래를 하면 좋아서 춤을 추어야지? 지금도 그 노래 가사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유구한 세월은 하나님 눈물’이라고 했다. 왜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 물음은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신앙에 철이 들고서 하늘부모님의 한 많은 사연을 알고서 통곡하였다. 원리말씀을 듣거나, 성가를 찬양할 때에 눈물이 흘렀다. 성가 17장 ‘복귀의 심정’에서 “유구한 세월은 하나님 눈물, 이 땅위에 인간들 허다하건만 하나님의 심정을 알 자 없어라”는 가사를 부를 때마다 어릴 적에 받았던 눈물 흘리는 예배 장면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내가 부족하지만 하늘부모님의 심정에 맺힌 슬픔을 치유해드리는 아들이 되고자 다짐하고 노력한다.
5. 당신은 성화 몇 회요?
내가 통일교회에 들어온 이후로 자주 나에게 던져진 질문은 “당신은 성화 몇 회요?”라는 물음이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참 난감하다. 왜냐하면 나는 중학교 때는 장로교회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몸이 아파서 늦게 다녔기 때문에 성화활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7살 때에 가 보았던 탱자나무 울타리집이 통일교회가 되었더라면, 나는 통일교회를 다녔을 것이고 성화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평 땅에 통일교회는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문평래 회장님은 목회자로 나가시고, 우리 형님은 수택리 통일산업으로 가셨다. 그리고 우리 큰누나는 서울로 가시더니 교회하고 멀어지고 말았다. 나머지 식구들도 인도자의 부재와 지속적인 식구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흩어져 버렸다.
이런 사연으로 인하여 고향에는 통일교회가 원리말씀의 씨만 뿌려졌고 결실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경임 집사님의 발자취는 지나가는 바람처럼 우리 마을을 휙 스치고 갔을 뿐이었다. 정착이 되었다면 ‘장평 통일교회’가 세워졌을 것이고, 나는 자랑스러운 성화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각종 성화학생과 관련한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이 늘 아쉽다.
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를 따라서 우리 마을에 있는 예수교 장로교회를 다녔다. 70여명이 예배를 보는 작은 교회였지만, 우리 마을이 면소재지에 있었기 때문에 면장, 보건소 소장, 농협조합장 등 장평의 유명한 유지들이 다녔다. 그런 중심인물들과 같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크리마스 이브에 여자 집사님들이 준비한 닭죽을 먹으면서 선물교환이 있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받을 줄 알고 군침을 삼키면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내가 받은 선물은 달랑 봉투 한 개였다. 나는 용돈을 털어 선물을 사서 주었는데, 받을 때에는 빈 봉투만 받으니 조금 서운했다. 그런데 그 봉투 속에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는 요한복음 14장 1절의 구절이 적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그 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데, 나중에 한 친구가 쫓아와서 나에게 사과를 했다. 그 친구가 봉투를 준비한 주인이었다. 그는 어떤 선물을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어떤 선물보다 더 이 성구가 귀할 것 같아서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아 앞으로 내 삶에 좌우명으로 삼을께!”라고 하며 감사하다고 격려해주었다. 그 친구는 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광주에서 상당히 큰 장로교회에서 목사를 하고 있다. 그를 전도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고 세월만 흘러서 가끔 초조함을 느낀다.
누구나 인생살이에 굴곡이 있듯이, 내가 살아오면서 왜 근심 걱정이 없었겠는가! 그때마다 그 성구가 도움이 되었다. 하늘부모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평온한 상태에서,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살도록 짓지 않으셨다. 모든 고해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나의 인생이란 바다에도 자주 파도가 일고 태풍의 풍랑이 거세게 몰아닥치기도 하였다. 나는 통일교회의 목회자가 된 이후에도 그 친구가 준 크리스마스 선물 성구에 힘입어서 일어선 때가 많았다. 또한 참부모님께서 내 근심을 툴툴 털어주시는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다.
7. 참아버님과의 만남
1969년 여름방학 때, 430가정 축복을 받고 경기도 수택리 통일산업에 다니고 있는 둘째 형님댁에 놀러갔다. 형님은 나에게 “수련소를 짓는 데 봉사를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하였다. 나는 작업복을 입고 작업현장에 갔다. 언덕에 있는 흙을 파서 낮은 곳으로 메꾸는 작업이었다. 나는 어떤 형님과 한조가 되어서 리어카로 흙을 퍼다 날랐다.
그런데 그 작업장에서, 장화를 신고 덩치가 크신 분이 단 위에 오르셔서 큰 소리로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계셨다. 일하는 모든 분들이 그분 앞을 지날 때 마다 고개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궁금하여서 같이 일을 하고 있는 형에게 물어보았다. “저분은 누구신데 모두 인사를 해요?” “너 몰랐니? 저분이 문선명 선생님이시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장로교회에서 들었던 이단의 교주! 그 당사자를 내가 직접 바로 앞에서 목격하고 있고, 그의 지시를 따르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니? 나 자신이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떠한 힘에 이끌리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수수하신 모습과 열정적인 목소리로 지휘하시는 모습에 매료되어 지나갈 때마다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점점 내 마음은 존경의 마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신 분 중에 누구 한사람도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동을 했다. 나도 역사적인 중앙수련소를 짓는데 일조를 하였다. 하늘부모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참부모님의 용안을 뵐 수 있고, 작업 지시를 따르는 영광을 갖도록 인도하셨다. 그 장면은 내 생애에서 영광스런 추억으로 남아 있다.
8. 입회원서를 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택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려고 했는데 갑자기 몸이 아파서 집으로 내려와 치료하면서 요양하고 있었다.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병이었다. 그냥 세월을 보내는 입장이었다.
그동안 잘 다녔던 장로교회는 참아버님을 뵌 뒤로는 나가기가 싫어졌다. 그런데 1973년 1월에 장로교회 중심성도인 문지순 부인회장과 집사들이 문평래 회장의 인도로 통일교회로 우루루 넘어와 자기 집에서 교회를 하도록 방을 내주었다. 장로교회는 발칵 뒤집혀서 철저하게 신도들을 단속했다. “이단이 출현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마을에 가득했다. 마치 북한 지령을 받는 간첩이 마을에 느닷없이 출현하여 주민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소동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나도 집사님들의 권유로 교회를 갔더니 작은 방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장평교회 초대 교회장으로 오신 이영호 청년 교회장이 열정적으로 말씀하고 있었지만 7살 때 가슴에 품었던 그 ‘하나님의 눈물’에 대한 의문점은 해소가 되지 않았다. 장평교회는 식구가 점점 늘어나고 방이 비좁아 앉을 자리가 없어 마루까지 앉아야 했다. “이젠 나도 결단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1973년 9월에 나는 정식으로 입회원서를 쓰고 통일교인이 되었다.
9. 통일산업 기숙사생활
통일산업에 입사하라는 둘째형의 간곡한 권유에 수택리 통일산업에 입사했다. 통일산업은 선배님들의 땀과 정성으로 이루어진 회사였다. 형님을 포함한 선배님들은 그동안 월급도 없이 봉사를 많이 했다. 참부모님을 모시면서 뜻을 위한 전적인 헌신의 자세가 있었기에 통일산업은 우뚝 성장세를 탈 수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인하여 통일산업은 한국의 경제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 그래도 내가 입사 할 무렵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월급을 주었다. 선배들에 비하면 큰 혜택이었다.
이전에 내가 참아버님 지시로 통일산업 언덕을 파냈던 자리에는 일화제약이 들어서 있었고, 통일산업과 일화제약이 공동으로 쓰고 있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 통일산업 기숙사가 있었다. 기숙사의 우리 방장은 이화여대 양윤영 교수의 둘째 아들인 이두림 형이였다. 양윤영 교수님은 통일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이화여대를 강제 퇴직 당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양윤영 교수를 순회사로 임명하셔서 전국을 순회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자녀들을 어디다 맡길 곳이 없었던 교수님은 큰아들만 두고 3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맡기고 참부모님 말씀에 순종을 하셨다. 그런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의 아들과 같이 기숙사를 쓴 것도 나만의 자랑이며 추억이다.
이두림 형은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반듯하게 자랐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들이 일요일 새벽기도회에 가기 싫어서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으면, “이놈들, 얼른 일어나라!”라고 호통을 치고는 우리를 새벽기도회에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일일이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가르쳤다. 개인 심령을 파악하고 개인에 맞게 상담을 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 그처럼 참부모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양윤영 순회사님 가정에 하늘이 큰 복을 주셨다. 4남매가 모두 축복을 받고 잘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두림 형은 미국에서 부자로 잘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과 다시 연락을 하여서 상봉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10. 축복을 받겠다고 다짐
통일산업에 다닐 때 1800가정 형님들의 약혼식이 있었다. 호기심에 청파동 구본부교회까지 따라가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다. 참부모님께서 형님들에게 예쁜 형수들과 짝을 맺어 주실 때마다 무척 부러웠다. 하늘에서 내려 온 선남선녀들이 부부의 인연을 맺는 멋진 모습이었다. 내 아내가 될 여성도 저렇게 천생연분의 인연을 갖고서 온 예쁜 선녀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꼭 축복을 받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통일산업 회사는 경기도 수택리에서 경남 창원공단으로 이사를 했다. 모든 기계와 시설들이 최신식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공단 주변에는 아직 상업 시설들이 들어서지 않아 인근 마산시로 자주 놀러 갔다. 마산에는 한일합섬과 자유지역 수출공단에 다니는 아가씨들이 많아서 총각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꽃이 피면 벌 나비가 다가오듯이, 아가씨들이 있는 곳에는 총각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다. 이는 천지대자연의 이치이고 하늘부모님의 창조섭리이다. 자연히 주말이면 마산에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어서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꽃과 벌 나비들의 축제거리가 형성되었다. 사람을 한자(漢字)로 표기하면 인간(人間)인데, 이 뜻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누구나 대중 속에서 끼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에 안심을 하고 함께 행복의 시너지 효과를 보게 된다.
주말에 자주 마산으로 가는 나를 본 1800가정 형님들이 “너는 잘 생겼으니 여자를 조심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내가 지금은 뚱뚱하고 볼품이 없지만, 그 당시 20대에는 내가 보기에도 날씬하고 핸섬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사귀자고 한 아가씨들이 많았다. 남성은 예쁜 여성을 좋아하고, 여성은 강하고 훤칠한 남성을 좋아한다. 따라서 청년기에는 외모지상주의(外貌至上主義)에 빠지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마산에는 화장품 가게들이 인기가 좋았다.
나도 예쁜 꽃을 바라보고 따라가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나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국의 교회 목사님들의 추천을 받고 통일산업 회사에 입사한 친구들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갔다. 결국 축복을 받지 못하고 사회로 흘러 가버리고 말았다. 그들도 그 유혹의 순간에 내면에는 갈등이 많았을 것이다. 인간을 두고서 하늘부모님과 사탄이 서로 취해가기 위한 치열한 영적 투쟁을 벌이기 때문에, 그들이 원리권을 벗어나서 성적인 일탈을 하려고 할 때에 양심과 내면의 소리가 크게 울렸을 것이다. 그들은 심리적 영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 갈등의 상황에서 회사 친구들은 하늘부모님의 음성을 듣고 원리를 따라야 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비원리적인 힘에 끌려가고 말았다.
11. 손상병! 꼼짝 말고 그대로 서 있어!
나도 때가 되어서 1976년 8월에 조국의 부름을 받아 군대에 입대를 했다. 논산 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받고 배속된 부대는 3사단 병기대였다. 그런데 각자 배속된 부대로 가기 전에 신병들은 사단 훈련소에서 2주간 훈련을 다시 받아야 했다. 이는 세상의 습관과 자세를 단기 훈련을 통하여 언행을 수정하여서 군인의 생활과 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일반 시민이 늠름한 군인으로 변화하는 것이 결코 쉽거나 단순할 리가 없었다. 또한 그만큼 고통이 따랐다.
어느 날 훈련 중에 가슴에 박쥐마크를 달고 머리에는 공수마크가 있는 팔각모자를 쓰고 까만 안경을 낀 멋진 사나이들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수색부대 특별 군인으로서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군인이었다. 나는 그들의 설득 작전에 넘어가 수색대에 지원하고 말았다. 지원서에 묻힌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하였다. 상상을 초월한 힘든 훈련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훈련은 사격훈련이었다. 총을 지급 받아 영점사격을 하고 바로 사선(射線)에 올라가 250m 실거리 사격을 했다. 그런데 타켓을 확인해보니 한발도 안 맞고 다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런 실적을 본 중대장이 화가 난 목소리로 “전원 팬티 차림에 집합하라!”고 호통을 쳤다. 아직 민간인의 때가 묻어있는 나는“이 추운 겨울날에 설마 팬티만 입고 나오라고 하겠어?”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중대장은 지휘봉으로 내 철모를 꽝 치면서 “뭐 하는 거냐? 빨리 동작을 취해!”라고 다시 한번 호통을 쳤다. 그때서야 우리들은 깜짝 놀라 후다닥 팬티만 입고 낮은 포복으로 사격장 밑에 꽁꽁 얼어 있는 논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하면서 정신없이 뒹굴었다. 얼음이 깨어졌고, 눈, 코, 입으로 흙탕물이 들어가 숨을 쉴 수 없었다. 온 몸이 논흙으로 범벅이 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모습으로 다시 실탄을 받아서 사선에 가서 사격을 했다. 신기하게도 다 명중이었다. 차가운 날씨에 팬티만 입고서 쏜 총일이 백발백중했다니, 믿기 힘들었으나 기분 좋은 현실이었다.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군인 정신의 위력이 어떤 것이지를 체험하였다.
두 번째 훈련은 12kg군장을 등에 메고 뛰는 10km 구보(驅步)였다. 고참들은 웃으면서 뛰는데 신참인 우리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반환점이 보이는 곳에 다리가 있었는데, 숨도 안 쉬어 지고 너무 힘들어 뛰어내려 죽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나 생겼다. 그러나 군대 생활에 적응하면서 콩나물을 많이 먹다보니 나도 웃으며 구보를 할 수 있었다. 반복 훈련의 효과였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좋은 신앙 훈련은 영인체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하늘을 공경하며 위하여 사는 것도 어려서부터 훈련이 필요하고 생활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참사랑실천의 경지에 이르러 천일국 백성이 되어야 한다. 지상생활은 시의생활(侍義生活)의 훈련장이고, 이 과정을 거친 생령체가 영계에서 영원히 하늘부모님을 모시면서 행복한 영생을 누릴 수 있다.
기초훈련을 끝낸 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색대는 유사시에 북한에 넘어가 북한의 부대시설을 폭파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폭파해야 될 막사와 탄약고 진지 모형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침투훈련, 폭파훈련, 낙하산훈련, 산악훈련을 한다. 이런 강인한 체력단련훈련과 태권도의 연마로 내 몸은 단단한 근육질의 사나이로 변모해갔다. 자랑스런 대한의 군인, 수색대의 모습에 어울리는 내 자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북이 보이는 최전방 수색대에 근무하다 보니 죽음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비무장지대(DMZ)는 발목만 절단되는 폭풍지뢰가 풀숲에 무수히 살포되어 있었고, 밟으면 온 몸이 가루가 되는 대인 지뢰가 구석구석에 묻혀 있었다. 한번은 DMZ 안으로 화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초긴장 상태로 한발짝 한발짝 조심스럽게 가고 있었다. 갑자기 “손상병 꼼짝 말고 그대로 서 있어!”선임하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가만히 서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군화 앞쪽에 바늘모양의 3개의 대인지뢰 뿔이 올라와 있었다. 한 발자국 더 움직여 그것을 밟았다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었다. 온 몸에 소름이 좍 끼쳤다. 지금도 그 당시의 생각을 떠올리면 등골이 오싹한다.
또 수색대는 간첩이 침투하면 특정 지역을 차단하는 작전을 한다. 하루는 우리 분대가 이 작전에 참가 했다. 작전시간 내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방탄복을 입고, 총을 들고 죽어라고 뛰어야 한다. 그런데 내 뒤에 따라오던 선임병이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본 뒤에 오는 분대장이 “내가 주워 갈테니까 빨리 뛰어가라.”고 했고, 떨어뜨린 선임병은 자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줍기 위해 몸을 굽혔다. 그런데 그 수류탄은 방탄복 고리에 걸려서 안전핀이 빠진 상태였다. 순간 그 선임병은 위험을 직감하고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쳤다. 꽝! 하고 수류탄이 터지면서 선임병은 그 자리에서 순직했고, 분대장은 팔목이 날아가는 심한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서 있었던 나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았다. 기적이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군대 3년 동안 죽음이 넘나드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날마다 생사를 판가름하는 생활이었다. 그런 환경 가운데 무사하게 제대한 것은 내가 하늘의 인도하심과 함께 운이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의 어머니의 지극한 기도와 정성이 또한 나를 지켜주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정성은 하늘과 땅, 양쪽에서 드려지고, 그것이 합해질 때에 기적과 같은 사건이 생기게 됨을 나는 알게 되었다.
12. 눈물어린 어머니의 정성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 사후에 7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등을 제대로 한번 못 펴시고 열심히 일을 하셨다. 그러면서 사는 것이 하도 힘드니까 굿하고 점치는 것에 의지하였다. 안방에 이상하게 생긴 부적을 많이 붙여놓고, 그 앞에서 날마다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자세히는 몰랐으나 어머니께서 지극한 정성을 드리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삶이 힘들어서 초월적인 존재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어느 날 430가정 형수님이 4살짜리 첫째를 형님한테 맡겨놓고 둘째 갓난아기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동원 임지를 나오셨다. 지금 같으면 어린이집이 있기 때문에 아기를 맡길 수가 있지만 그때는 그러한 곳이 없었다. 형님은 4살짜리 아이를 밥 한그릇 놓고 홀로 방에 가두고 일을 나갔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그 아이는 두려움에 울다가 지쳐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형님도 같이 울었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를 떼어놓고 온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눈물로 하늘 앞에 간절히 기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통곡할 사연을 통일교회 축복가정들 마다 갖고 있다. 이런 비상식적 비합리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복귀가 안 되는 실정을 바라보시는 하늘부모님께서도 통곡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물의 하나님이시다. 참부모님 또한 이런 사연을 들어시면서 얼마나 속으로 통곡을 하셨을 것인가!
그런데 하늘은 의인의 길을 반드시 지켜주시고 역사한다는 사실을 조카들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부모의 보살핌이 결핍된 상태에서 비뚤어지게 자랄 것으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조카들이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잘 자라 주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덧 그들이 축복을 받고 아들, 딸 낳아서 잘 살고 있다. 감사! 은혜! 아주!
13. 어머니의 통일교회 입교
어머니는 며느리가 남편과 아이를 떼어놓고 올 수밖에 없는 하늘의 심정을 몰랐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라고 야단을 치셨다. 형수님은 야단을 맞으면서 어머님을 설득하여 교회로 인도하였다. 물론 형수님의 정성도 지극했을 것이다. 점, 굿, 부적에 의존하여 힘든 육체생활을 이기는 동력을 얻고, 불안한 미래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위안을 받고 사셨던 시어머니를 형수님이 설득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를 떼어놓고 나와서 전도활동을 하는 형수님의 그 강인한 영적인 힘에 어머니의 심정이 녹아들었다.
어머니는 형수님을 따라서 통일교회를 방문했다. 처음 교회를 나오신 날 저녁부터 갑자기 몸이 아팠다. 3일간 몹시 고통을 당하셨다. 아마도 육신의 고통과 함께 내적인 신앙의 투쟁도 컸을 것이다. 3일간의 성별기간이 지나고, 마침내 어머니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셨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방에 붙여 둔 온갖 이상한 것들을 다 떼어서 불태워 버렸다.
우리 집에서 통일교회까지 가려면 꽤 험한 고개를 넘어 한참을 가야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입교 이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렸다. 특히 군대에서 복무 중인 내가 무사히 제대하게 해달라고 지극 정성을 드렸다. 돌이켜보니 내가 건강한 몸으로 제대를 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어머님의 정성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어머니의 정성을 조건으로 하여 하늘이 나를 안전하게 인도하셨을 것이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나와 함께 6000가정 축복식장에 참여했다. 어머니는 독신 축복을 받으셨다. 어머니는 장평교회 권사로서 중심식구가 되셔서 교회를 짓는데도 크게 일조를 했다. 어머니는 정성을 드리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일반인이 훈련을 통하여 군인으로 변화하듯이, 어머니는 그 동안의 정성을 드리던 자세가 되어 있었기에 보다 쉽게 통일교회로 입교하셨고, 그 이후에도 어떤 식구들보다 더욱 정성을 많이 들이는 자세를 유지하셨다.
내가 목회자로서 갈현교회장 시절에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장평으로 갔다. 어머니는 치매가 있어서 교회 식구들을 못 알아보았는데, 나와 아내를 보고는 금방 알아보시고 무척 반가워하셨다. 그런데 그날부터 영계에 갈 준비를 하셨는지 밥을 드시지 않았다. 드시고 싶어도 숟가락을 깨물고 음식을 거절하셨다. 이슬처럼 청정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셨다.
의식이 점점 혼미해 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영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머니께서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시며 한 많은 삶을 마감하시고, 목회자 아들의 품에 안겨서 영계로 떠나셨다. 어머님은 축복을 받으셨고 권사로서 신앙을 잘 하셨고, 헌신과 봉사도 많이 하셨기에 영계에서는 하늘부모님과 참아버님을 모시면서 잘 살고 계실 것이다.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나서 축복가정으로서 영계에 당당히 입성하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께서는 그 영광스런 축복의 주인공이 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또 그런 어머니의 아들로서 천일국 안착을 위해서 더 공적을 쌓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14. 뜻을 위해 나는 살고 뜻을 위해 죽고
1979년 5월 군에서 제대를 하고 창원에 있는 통일산업에 복직을 하려고 했는데, 둘째형님이 조그만 사업체를 차려놓고 도와달라고 해서 할 수없이 서울에 살면서 중구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중구교회는 김명대 목사님의 지도아래 청년들이 참 많았다. 청년들 중에는 조규조, 이승일, 조육현, 마승배, 유왕영 등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교구장들과 목회자들이 되어서 큰 활동을 하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도 모르게 목회자로서의 비전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나는 축복을 준비하기 위하여 수택리 중앙수련소로 21일 수련을 받으러 갔다. 수련을 받으면서 7살 때 탱자나무집에서 가슴에 담고 있었던 우는 교회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그때 울고 있었던 식구들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유구한 세월은 하나님의 눈물처럼 나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성가13장 ‘맹세’를 부르면서 뜻을 위해 나는 살고 뜻을 위해 또 죽으리라 다짐을 했다.
약혼식장이 있는 수택리로 떠나는 날 김명대 목사님은 우리들을 앉혀놓고 “곰보를 해주시던 째보를 해주시던 참부모님께서 정해 주시면 100% 절대 복종하라!”며 다짐을 시키고 보내셨다. 모두들 절대복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갔다.
15. 나를 향하여 다가오는 큐피트의 화살
아카시아 꽃 향 내음이 물씬 풍기는 1981년 5월, 수택리 수련소 강당은 전국에서 모여든 선남선녀들이 영원한 짝을 찾으려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말끔하게 단장을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강당 한 켠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참아버님의 천둥같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한 아가씨를 세워놓으시고 ‘너’라고 지목하셨다. 참아버님께서 쏘신 큐피트의 화살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내 주위에 있던 몇 명의 남자들이 일어났다. 그럴 때 마다 참아버님께서는 “아니야, 아니야” 라고 하셨다. 창문가 구석진 곳에 앉아 있었던 내가 벌떡 일어서니 “그래, 빨리 나와!” 라고 소리를 치셨다. 나는 너무 당황에서 신발을 어디다 벗어 놓은지 모르고 신발을 찾고 있는데 “안 나오고 뭐하고 있어!” 두 번째 호통이었다. 혼비백산한 상태에서 앞으로 나갔다. “둘이 나가서 만나봐!”라고 하셨다.
참부모님이 지명하면 일단 밖으로 나와 둘이 만나서 대화를 해보고 서로 마음에 들면 참부모님께 경배를 드리면 한 쌍의 부부로서 맺어 지는 것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진생업을 사서 뚜껑을 따서 마시라고 권하였다. 긴장하여서 너무나 목이 말랐던 아내에게 일단 매너 점수를 땄다. 그리고 아내에게 “어머님이 계시는데 모실 수 있겠느냐?” 질문을 했더니, “당연한 일 아니에요?”라고 흔쾌히 대답을 했다. 그것으로서 서로를 알아보는 문답은 끝이 났다.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아내가 부모님을 모시려는 효도의 심정을 가졌기에 더 이상 따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갑시다.” 하고 아내를 인도하여 참부모님 앞으로 나아갔다. 둘이 난생 처음으로 함께 경배를 드림으로써 전라도 장흥의 농부의 아들과 경상도 김해의 과수원집 딸이 영원한 짝으로 맺어지는 운명적인 순간이 심플하게 끝났다. 이미 절대복종을 하라는 교육도 받았고,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는 데 망설임이 없었기에 나는 활짝 열려진 마음으로 내 평생의 반려자를 아내로 영접하였다.
16. 아내의 탄생과 가족
아내의 고향 김해는 가락국의 도읍지로서 김수로왕이 서기 42년에 건국하여 10대 491년까지 잘 이어 갔다. 김씨 가족들이 바다를 끼고 많이 살아서 김해(金海)였다. 그러나 그 후에 신라에 투항해 합병이 되고 말았다. 김해는 주변에 아름다운 산들이 많고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 넓은 평야지대로 모든 것이 풍요로워서 인심이 후했다.
아내는 1957년 음력 7월18일에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에서 주성식 아버지와 정차순 어머니 사이에 2남 3녀중 4번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와 오빠2명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다.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할아버지 대까지 근동에 보이는 논은 전부 할아버지 논으로 24명의 일꾼을 거느리고 사는 부자였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도와주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 시절에 아들과 사위들을 징용에 안 보내기 위하셔 그 많은 전답을 팔았다.
아버지 때는 장모님의 수고로 언덕 위에는 5,000여 평의 단감나무가 심어져 있고, 과수원 입구에는 아름다운 양옥집을 지어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과수원집이었다. 아내는 그런 복을 받은 집안의 둘째 딸이었다. 처가는 할머니를 비롯하여 독실한 불교를 믿은 집안이었다. 아내도 어릴 적부터 할머니를 따라 절에 많이 다녔다. 장모님은 매일 새벽마다 근처의 절에 나가 불공을 드렸다. 신심이 깊었다.
아내의 큰 언니(777가정)가 원리말씀을 듣고 부모님 몰래 통일교회를 다녔다. 아내도 언니 따라 김해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1974년도에 정식으로 입회원서를 내고 이 길을 가기로 다짐을 했다. 아내 역시 부모님 몰래 다니며 열심히 신앙을 했다. 그러나 시련이 찾아 왔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선택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회의가 와서 교회를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유독 아내를 사랑했던 할머니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시집을 가라고 중매도 들어왔지만, 아내는 축복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집은 절대로 안 간다.”고 선포를 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장모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내 손을 잡고 어디를 가자고 해서 따라 갔다. 도착한 장소는 점을 치는 곳이었다. 점장이는 아내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는 절대 시집을 못 간다. 아가씨의 가는 길이 있다. 그길로 가야 잘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아는 점장이였다. 점집을 다녀온 뒤로 장모님은 적극적으로 교회에 다니라고 후원을 해주었다. 아내도 마음이 안정이 되어 불신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신앙을 했다.
17. 꿈속에서 만난 참부모님
축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정성을 드렸는데 어느 날 꿈에 참아버님께서 높은 광장에 나를 불러 세우시고 “너는 국제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참어머님께서도 “그러면 좋겠다.”고 하시며 두 분이 활짝 웃으시는 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81년 5월 수택리 강당에서 꿈에서 하셨던 것처럼 나를 불러 세우시고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여러 나를 남자들 앞에 세워놓고 “색시는 참 참한 색시인데 키가 조그만 컸더라면 좋겠구먼.”하는 여운을 남기시며 아내와 인연을 맺어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국제축복가정일까? 아내는 한국 사람인데?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가야국의 첫 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온 여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김수로왕은 국제결혼을 한 셈이다. 따라서 김해 김씨의 혈통을 이은 아내와의 부부 인연을 맺은 것은 국제축복결혼을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참아버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18. 마하반야밀다심경
약혼을 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몹시 아프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손주사위를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 천리먼길을 달려 처갓집에 도착 하니 할머니께서는 멀쩡하시고 나를 반겨 주셨다. 아프신 분이 멀쩡하니 이게 무슨 까닭인가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우리들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물어 보셨다. 나는 교회에서 만나 참부모님께서 맺어 주셨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뭐 교회!” 하며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였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 우리교회는 모든 종교를 좋아합니다.”라고 하면서 평소에 알고 있었던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마하반야밀다심경 시작으로 해서 아제 아제 발아제 발아 승아제 모지 사바하 끝을 맺었다. 그러자 할머니의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내 손을 꽉 잡으시고 “내 손주 사위!” 하면서 나를 안아 주셨다. 그때부터 홍시를 비롯하여 각종 맛있는 것을 챙겨주셨다. “우리 손서방, 많이 먹어라.” 라고 하면서 좋아하셨다.
반야심경 하나로 처갓집에서 가장 사랑받은 사위가 된 것이다. 종교간의 어색한 만남이 될 뻔한 위기를 반야심경으로 깨끗이 종결하였다.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줄인 말이다. 반야(般若)는 ‘지혜’라는 의미이고,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완성’을 뜻한다. 심(心)은 ‘심장’, ‘본질’, ‘핵심’이라는 의미이다. 즉, 반야심경은 ‘지혜의 완성에 대한 핵심을 설한 책’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공(空)에 입각해서 불(不)과 무(無) 자를 반복 사용하여, 온갖 분별이 끊겨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지혜의 완성을 설한 경(經)이다. 따라서 온갖 분별이 소멸된 상태에서 설파한 ‘깨달음의 찬가’이다. 반야심경은 내가 아내를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게 해 준 것이다. 할머니의 불교와 우리 부부의 통일교회를 연결지어준 고리가 반야심경이었다. 종교간의 대화에는 역시 공통점이 많아야 성사가 잘 된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세계종교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많은 종교들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효과적으로 달성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시작된 처가 식구들과의 인연은 끈끈해졌고, 처가 식구들에게 통일교회의 사상과 축복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저들의 혈통을 하늘편으로 전환하는 복을 준 것이 되었다. 10년 동안 우리 부부가 정성을 드린 결과,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1992년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3만쌍 기성축복을 받으셨다. 우리의 정성이 축복가정 탄생이라는 결실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