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옹, 애~~~옹”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채 의미 없는 영상 앞에서 멍때리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울리는 호출 벨. 문득 정신을 차리고 “왜?” 쳐다보면 영리하게 응시하는 땅꼬와 눈이 마주친다. 눈동자 너머 또록또록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굴러가는 소리.
‘오늘 집사의 상태가...보자.. 음...과연 원하는 응답이 올 것인가 말 것인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를 이끌고 총총 앞서 달려간 걸음이 침대 밑을 향할 때는... 놀아달라는 것이다. 그런 땅꼬 맘을 뻔히 알면서도 난 짐짓 모른 척을 한다.
“아니야, 아니야... 언니 바빠.”
외면하고 멀어지는 내 매정한 발걸음을 돌아보는 땅꼬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실망감. 이런 저녁이 반복되다 보니 요즘 땅꼬 표정은 욕구불만에 가득하고 뻑하면 “하~~악”거린다. 땅꼬의 욕구가 뭔지 잘 알면서도 번번이 외면하는 이유는 땅꼬랑 만족스럽게 놀아주는 일이 너무 고단하기 때문이다. 점점 저질이 되어가는 내 체력 탓이기도 하지만 까다로운 연출자인 땅꼬 탓이기도 하다.
영리한 고양이랑 사는 일은 경이롭지만 때론 피곤하다. 가장 피곤할 때는 땅꼬와 놀이를 할 때. 장군이와 노는 일은 단순하다. 장군이는 새로운 물건에 흥분하고 흔드는 대로 덤벼들고 물어댄다.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온전히 몰입하지 않아도 괜찮고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도 있다. 장군이를 보고 있자면 왜 그 많은 고양이 놀이 상품들이 팔리는지 알 것 같다. 장군이는 그냥 표준형 집냥이인 것이다.
하지만 땅꼬의 경우는 다르다. 구입하는 장난감은 단번에 놀이 방식을 터득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땅꼬의 영리함을 알기 전, 입양 초기에 3단으로 된 공굴리기 탑을 사준 적이 있었다. 어이없게도 땅꼬는 몇 번 굴려보더니 단박에 놀이 방법을 알아내고는 점점 과격하게 팍팍 때려서 굴려댄다. ‘뭐야? 고작 이게 다야?’ 하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원,투쓰리, 포 잽을 파파바박 날려 엎어버리곤 쌩하니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대부분 상품들은 땅꼬의 흥미를 끌기에는 너무 단순했다. 땅꼬같은 고양이만 있으면 고양이용품 쇼핑몰은 망해버릴 것이다.
땅꼬가 오래 흥미를 보였던 장난감은 레이저 포인트와 유리나 나무 구슬이었다. 하지만 레이저 포인트는 허망한 놀이감이다. 그 허망함에 지쳤는지 1년 반의 열광은 급작스레 끝났다. 유리나 나무 구슬은 털 구슬과 달리 묵직한 중량감, 경쾌한 속도와 마찰음으로 흥을 돋우지만 아파트의 층간 소음 민원이 쇄도하는 바람에 금지 용품이 되어 버렸다.
땅꼬의 취향은 단연 비닐이다. 여러 놀이감을 거쳐 지속적으로 최애 놀이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장난감. 택배가 배달되면 나는 포장용 비닐을 면밀히 살피고 땅꼬에게 제공한다. 일단 소리가 경쾌해야 하고 질감도 적당한 중간 재질이어야 하고 사이즈도 용도에 맞게 여러 종이 필요하다. 땅꼬의 면밀한 실험 끝에 선택된 비닐은 우리 퍼포먼스의 소품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종량제 비닐 봉투는 그 중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다.
땅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버라이어티한 퍼포먼스가 조화를 이룬 일련의 시리즈다.
땅꼬는 흔들림에 단박에 현혹되지 않는다. 놀면서 오래오래 생각을 한다. 내가 들고 있는 놀이감과 집안의 공간과 지형지물을 번갈아 살피면서 어떻게 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때는 기다려야 한다. 노는 일의 반은 구상하는 땅꼬를 기다려 주는 일이다. 결정하고 나면 원하는 공간으로 나를 이끌어 가서 내 자극을 기다린다. 어떤 자극은 무시당하고 어떤 자극은 열광한다. 땅꼬의 반응에 따라 우리 퍼포먼스의 요소가 첨가되거나 기각된다. 집에 새 박스나 가구가 들어오면 그에 따라 조금씩 변형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오랜 과정을 거쳐 요즘 정착된 놀이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땅꼬가 침대 밑을 향하는 싸인을 보내면 나는 싱크대로 향한다. 서랍에 보관되어 있는 낡은 종량제 비닐을 꺼내 크게 한번 휘둘러 차르륵~~~ 소리를 낸다. ‘놀아볼까?’ 하는 신호에 땅꼬와 장군이는 눈이 번뜩 뜨이면서 각자 포지션으로 재빨리 흩어진다. 장군이는 캣타워로, 땅꼬는 침대 밑으로... 먼저 장군이랑 놀아주는 게 효율적이다. 빨리 끝나니까...캣타워를 긁어대는 장군이를 따라 캣타워 기둥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 다양한 빠르기로 비닐을 흔들어 장군이 앞발과 숨바꼭질을 한다. 이때만은 뚱냥이 장군이가 고양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전광석화같은 반사신경으로 기어코 비밀을 발톱과 송곳니로 물고 나와 힘겨루기를 하는 장군이. 몇 분 후 장군이가 시들해진다. 그동안 땅꼬는 침대 밑에서 나와 소파 뒤에서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땅꼬 차례다.
① 놀이공간 셋팅 : 먼저 아파트 실내의 모든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모든 방문과 베란다를 향한 유리문도 열어둔다. 동선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② 추격 놀이 : 땅꼬를 향해 비닐을 흔들며 달려가면 땅꼬 신나게 달린다. 장군이도 덩달아 뛰다 침대 밑으로 숨어버린다, 땅꼬와 나는 이방 저방, 이문, 저문을 넘나들며 맹렬하게 쫓고 쫓긴다. 침대 밑으로 피신하면 다음 단계,
③ 숨바꼭질과 추격의 콜라보: 나는 침실 옆 부엌 냉장고 옆으로 몸을 숨긴다. 잠시 후 땅꼬가 침대 밑에서 나와 베란다 문으로 살금살금 이동하면 이때다 비닐을 흔들며 달려들면 또 쫓고 쫓기기. 집 어딘가 숨어 있는 땅꼬를 찾아 발견하면 비닐을 크게 흔들어 위협한다. 옷방 문 뒤로 몸을 감추면 이번엔 땅꼬가 나를 찾아 집안을 헤메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면 다시 쫓긴다. 번갈아 술래를 하며 숨고 찾아내고 도망치기를 반복한다.
④ 벌칙 : 지친 땅꼬가 공기청정기 뒷 편 거실 커튼 뒤로 몸을 숨기고 한 숨 돌리고 있다. 지친 것이다. 나는 굳이 파고들어가 땅꼬를 낚아챈다. 잡히면 벌칙 타임이다. 저항하는 땅꼬를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가 위로 힘껏 던져 한 바퀴 돌려 침대로 내동댕이 친다. 이 벌칙을 피할 곳은 높은 책장 위. 침대 밑으로 빠져나온 땅꼬가 책장에 걸쳐둔 경사진 스크레쳐 이동로를 맹렬하게 달려 올라가 다음 놀이를 기다린다.
⑤ 사냥 놀이 : 이제 본격적인 사냥놀이다. 여러개의 책장이 연결된 상부, 기다란 공간을 오가며 노는 땅꼬를 위해 나는 땅꼬가 옮겨다니는 곳으로 의자를 오르락 내리락 옮겨가며 비닐을 흔들어 댄다. 이때 흔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강약의 조화로 리듬감을 만들어 내야 환상적인 비닐의 자태를 연출할 수 있다. 수평의 움직임만으론 부족하다. 땅꼬가 좋아하는 방식은 위, 아래. 책장 한 구석 주먹 하나 들어갈 빈 공간에 비닐을 대고 숨바꼭질하듯 살곰살곰 기어올라가는 비닐. 살짝 살짝 노출해주면 땅꼬는 흥분한다. 틈새 절벽으로 몸을 기울여 앞발로 그러잡으려 애를 쓴다. 그러다 비닐을 잡아채면...
⑥ 줄다리기 : 잡아 챈 비닐을 발 밑에 깔고 앉아 입으로 물면서 버티는 땅꼬와 그걸 잡아 끄는 나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오랜 놀이 끝에 땅꼬의 버티기 기술은 놀랍게 발전했다. 체중을 싣는 법을 깨우친 땅꼬는 필사적으로 비닐을 끌어안고 몸으로 버틴다. 물론 나는 힘든 척 연기를 한다.
⑦ 박스와 비닐의 질감 놀이 : 책장에서 뛰어내린 땅꼬가 최근 캣휠을 구입하면서 득템한 커다란 박스 속으로 몸을 감춘다. 땅꼬는 박스 한쪽 뚜껑 밑으로 몸을 감추고 온갖 체위로 박스의 어둠 속에서 뒹굴고 박스를 긁어대면서 앞발만 노출시켜 비닐을 낚아챈다. 나는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한 자극을 주기 위해 박스의 네 귀퉁이에서 가능한 은폐와 노출의 경우의 수를 탐색해야 한다.
⑧ 틈새 사냥 : 이번엔 옷 방 문 뒤로 이동한다. 나는 문을 살짝 당겨 문 뒤로 이동한 땅꼬가 구를 수 있는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을 만든다. 문 아래 틈새 이곳 저곳으로 비닐 한쪽을 밀어 넣고 빼기를 반복하면 땅꼬는 문의 너비를 다 장악하기 위해 좁은 틈새에서 온갖 체위를 구사하며 잡아채느라 정신이 없다. 문틈은 장군이도 좋아한다. 땅꼬를 기다리기에 지친 장군이가 문 뒤로 밀고 들어가면 땅꼬는 에잇~~~ 하면서 나와 버린다.
⑨ 미끄럼타기 : 이제 대망의 마무리다. 언제부턴가 땅꼬는 비닐 미끄럼타기를 터득했다. 침대 밑으로 향하는 이유도 미끄럼타는 비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주 큰 비닐봉지. 땅꼬는 비닐봉지 입구를 용케도 찾아 비닐 틈새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비닐봉지 여기저기 뚫어둔 구멍 사이로 흔드는 비닐의 조각을 밀어 넣으면 사냥이 시작된다. 이제 막바지다. 큰 비닐봉지에서 멀찍이 떨어져 미끄러질 거리를 확보한 후 비닐을 흔들어 대면 땅꼬는 비닐봉투 밖으로 나갔다가 봉지 입구를 향해 슬라이딩~~~ 미끄럼을 타는 것이다. 쭈르르르륵----미끄럼이 만족스러우면 한 번에 끝난다. 그렇지 않으면 몇 차례 반복된다.
침대 위로 장군이를 이끌어 사냥놀이를 한 번 더 하고 놀이는 끝난다. 당연한 수순으로 씽크대를 향하면 간식타임이다. 이렇게 길고 긴 놀이가 끝이 난다. 나는 녹초가 되고 땅꼬는 행복하다.
...
실용적 사물의 슬픔. 일회적 쓰임을 끝으로 폐기되는 사물의 뒷모습. 비닐은 비닐의 실용성에 무관심한 고양이 땅꼬를 만나 구원을 받는다. 땅꼬는 슬픈 사물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탐구하고 실현하는 예술가다. 낡아가면서 다채로와지는 우아한 움직임, 반투명한 구김이 반사해 내는 물결치는 영롱한 빛의 잔영들, 다양한 움직임과 동반하는 경쾌하고 신비로운 소리.
춤추는 악기.
노래하는 미끄럼틀...
땅꼬의 까다로운 연출 라인에 부응하는 고단한 배우의 길. 덕분에 나도 평범한 속의 비범함을 탐색하는 동반자가 된다. 길냥이도 그렇고 비닐도 그렇다.
...
너희는 인간의 도시 으슥한 곳에서 참으로 어울리는 동병상련의 한쌍이 아닐 수 없구나.
오늘 밤엔 힘을 내서 놀아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