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동요를 찾아서 41]
자전거 (1933년)
작사·목일신 / 작곡·김대현
찌르릉 찌르릉 비켜나셔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찌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짜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
울아버지 장에 갔다 돌아오실 때
오불랑 꼬불랑 고개를 넘어
비탈길로 스스로 타고 온다오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
울 아버지 사오신 자전거라오
머나 먼 시골길 돌아오실 제
간들간들 타고 오는 자전거라오
*이 가사는 초기 원문 그대로 소개한 것입니다.
[들어가는 글]
국민동요인 ‘자전거’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되는 국민동요인 ‘자전거’는 목일신이 보통학교 재학시절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부친 목홍석 목사가 선교사로부터 기증받은 자전거를 목회가 없을 때 아들에게 양보하면 그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던 보통학교 5학년인 소년 목일신이 만든 ‘동시’였다.
우리말과 글의 사용이 금지된 일제강점기에 부친 목흥석 목사는 아들인 일신에게 우리말로 글을 지어 보라고 지도하셨고 소년 목일신은 아버지의 격려와 지도 아래 수백편의 아름다운 동시를 탄생시켰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동시 ‘자전거’는 김대현의 곡과 만나 동요로 다시 태어났고 암흑하던 그 시절 전 국민이 즐겨 부르는 동요로서,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의 노래로서도 큰 사랑을 받아왔다.
‘자전거’는 목일신이 13세 되던 1926년 소학교 시절, 즉 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때 쓴 동요인데, 1931년 5월에 발표되어 이듬해 곡으로 만들어졌다.
4분의 2박자, 다장조의 단조로운 리듬이지만, 동심의 표출이 아기자기하다.
아버지 자전거로 통학하다 지은 것으로 ‘자전거’는 민족의 넋 잠재우고 깨우는 요람역할 감달했다고 평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용으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는 이 동요는 국정음악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찌르릉은 따르릉으로, 영감은 사람 등으로 바뀌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셔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사람 조심하셔요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따르릉 따르릉 이 자전거는
울아버지 장에 갔다 돌아오실 때
꼬부랑 꼬부랑 고개를 넘어
비탈길로 스르르르 타고온다오
목일신은 ‘자전거’를 작사한 동기를 배화여중고 교지에 실린 ‘나의 습작시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보통학교 5학년 때 미국 선교회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아주 멋진 자전거 한 대를 기증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그 자전거로 각 처의 교회를 순회하시며 교역의 일을 보셨는데, 쉬시는 날에는 나에게 양보해 주셔서 나는 시오리나 되는 보통학교를 그 자전거를 타고서 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그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와서 지어본 것이 동요 ‘자전거’‘다.
그것을 <아이생활>에 발표했는데, 1년 후에 김대현 씨가 작곡하였다.”
작사·목일신 (睦一信, 1913~1986)
목일신은 1913년 전남 고흥군 고흥읍에서 출샌한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이며 호는 은성(隱星)이다.
고흥 흥양공립보통학교(현 고흥동초)에 다니면서 5학년 때 <동아일보>에 동시 ‘산시내’를 발표(1926년)했다.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한 해 ‘누가 누가 잠자나’를 지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개월간 복역했다.
1943년 순천 매산고, 1948년 목포여중·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이후 195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1958년 배화여자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78년 퇴직하였다.
퇴직 후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에 26년 간 살면서 동요와 민요 400여 편을 작사하였다.
이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역임하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 역임하였다.
1986년 10월 12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현 일신초등학교 뒤편)에서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목일신이 남긴 수많은 동시 중 ‘자전거’, ‘자장가’, ‘비누방울’, ‘아롱다롱 나비야’, ‘산비둘기’, ‘참새’, ‘시냇물’, ‘물결은 출렁출렁’ 등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다.
1960년 이후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해 주로 수필을 썼다.
그의 고향 고흥과 그가 살았던 부천에서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여 <목일신 전국 동요제 및 동시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또 도심에 목일신공원을 조성하여 그의 시비(詩碑)와 노래비가 세워져 목일신의 삶과 작품을 기리고 있다.
작곡·김대현 (金大賢, 1917~1985)
김대현은 대한민국의 음악가 겸 작곡가이자 서양 고전 클래식 음악인으로 1917년 함경남도 흥남 서호진에서 태어났다.
일본 데이코쿠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오오키(大木正夫), 쓰가와(津川主一)에게 사사하였다.
일본제국음악학교(日本帝國音樂學校) 수학 후 만주에서 윤용하 등과 함께 창작활동을 하였다.
관북(關北)관현악단과 원산실내악단을 지휘하였고, 해군정훈음악대 창작부 차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경희대 강사, 서라벌 예술대학 음악과장을 역임하였다.[
주로 민족적인 서사시와 민속가극 등에서 착상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함흥 영생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6·25 때 월남하였다.
1951년 피난시절 민속설화에 기초를 둔 가극 <콩쥐 팥쥐>를 부산·대구 등지에서 공연하여 민족가극 창작의 기선을 잡았다.
이어서 오페레타 <사랑의 신곡(神曲), 1951>, 교향시곡 <광복 10년, 1955>, 칸타타 <그로리아, 1961>, <8월의 태양, 1963>, <새해여 솟아라, 1964>, <성웅 이순신, 1969> 등 합창과 관현악을 중심으로 한 큰 작품을 남겼다.
1974년에는 관현악 조곡 <개선가>를 발표하였다.
작품은 서정적인 경향을 중시하였고, 조성에 기반을 두었다.
특히, <고향의 노래> 등 40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하여 영화음악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김대현은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55년부터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2년 서라벌예대가 중앙대학교에 합병된 이후에도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중앙대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1967년에는 작곡가 금수현과 함께 ‘새음악연구원’을 만들어 국악을 현대화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1970년대에는 북한산 자락의 정릉동 양옥집으로 이사하였고, 말년에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를 처음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기독교 음악으로 관심을 돌려 많은 성가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1985년 68세의 나이에 정릉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 가운데 ‘자장가’, ‘들국화’가 가장 많이 불린다.
악단활동에도 헌신하여 한국음악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고,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 교수가 되어 그 뒤 합병된 중앙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특히 친구인 작곡가 윤용하의 가곡집을 출판, 그를 평가 받게 한 장본인이다.
저서로는 <김대현작곡집>이 있다.
동요 ‘자전거’, ‘누가누가 잠자나’ 부천시 가볼만한 곳 목일신 공원
‘따르릉 따르릉 비켜 나셔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노인 조심하셔요.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는 동요 자전거의 1절 가사이다.
‘넓고 넓은 밤 하늘에 누가 누가 잠자나 하늘 나라 아기 별이 깜박깜박 잠자지 / 깊고 깊은 숲속에선 누가 누가 잠자나 산새 들새 모여 앉아 꼬박꼬박 잠자지 / 포근 포근 엄마 품엔 누가 누가 잠자나 우리 아기 예쁜 아기 새근새근 잠자지’는 동요 ‘누가 누가 잠자나’의 전체 가사이다.
경기 부천시 범안로 58번길 11(괴안동 산14-3)에 있는 목일신공원은 동요 자전거와 누가 누가 잠자나 등의 노랫말을 지은 목일신 선생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1913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고, 35년간 국어교사로 목포여중, 이화여고, 배화여중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퇴직 후 부천시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 지금의 부천시 범박동으로 이주하고 여기서 26년을 살고 새상을 떠났다.
이 공원에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어린이 조각 작품과 악보와 가사를 적은 철판으로 제작한 조형물이 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해서 불렀던 ‘자전거’, ‘누가 누가 잠자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그대로 부를 수 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익힌 노래라서 긴 세월 아득한 추억을 간직한 노래이기도 하다.
목일신 전국 동요제 및 동시대회
고흥군에서는 고흥 출신 천재 동요작가인 목일신 선생을 재조명하고 동심이 깃든 동요부르기 사회적분위기 확산을 위해 <목일신 전국 동요제 및 동시대회>를 2010년부터 개최하고 있다.
2025년 9월에 전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12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셔요>를 편찬한 김광묵 씨는 “1920년대 우리 문학사는 시대적 우울을 노래하던 암울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어린 나이의 목일신이 작사한 동요는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순수한 동심이 담겨 있어 더 소중하다.”고 했다.
<재미있는 부천 이야기>를 쓴 최현수씨는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상업주의의 영향으로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으며, 동요의 빛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어린이들은 대중가요의 심한 노출로 인해 어른들의 노래에 익숙해져 있다. 이
러한 시대에 만인이 오가는 공원에 건립된 목일신의 동심을 새긴 노래비는 어른들에게는 어린이의 순수를 돌아보게 하고, 어린이들에게는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썼다.
<리뷰 1>
그에게 동요는 ‘민족의 무기’였다
동요 ‘자전거’를 쓴, 아동문학가 목일신
아주 어릴 적 일이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었고, 동네의 거의 모든 부모들은 버스비라도 아낄 요량으로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자전거를 사줬다. 당시 아이들은 자전거를 배우면 으레 재잘거리며 음악시간에 배운 동요 하나를 불렀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 나세요’로 시작하는 ‘자전거’였다. 부르면 흥이 나고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 동요는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았다.
때로 아이가 세상을 바꾼다. 아동문학가였으며 교사였던 목일신 선생이 동요 ‘자전거’를 썼던 때가 고흥 흥양보통학교(현 고흥동초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1927년이었고, 한글로 글을 쓰는 행위도 금지됐던 시대였다. 목일신 선생은 5년이 지난 1932년 동요 ‘자전거’를 기독교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에 발표했고, 1년 뒤 김대현 선생이 곡을 붙였다. 무려 87여 년의 시간 동안 전 국민의 애창동요로 손꼽힌 ‘자전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하늘에 서 본 고흥읍. 한 가운데가 목일신 선생의 모교 고흥동초등학교(옛 고흥 흥양보통학교)다. 선생은 이곳에서 5학년 때 동요 ‘자전거’를 썼다.
목일신 동요의 고향, 고흥동초등학교
고흥동초등학교는 목일신 선생이 졸업한 학교다. 지금은 낮게 가라앉은 시골의 작은 학교이지만 어린 천재 아동문학가였던 목일신은 그곳에서 동요를 통해 세상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선생의 동요를 통한 삶의 여정을 기록하듯 고흥동초등학교 교정에는 1977년 제막된 ‘목일신 선생 노래비’가 서 있다. 노래비에 담긴 동요는 ‘누가 누가 잠자나’이다. 이 동요 역시 고흥동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썼다.
넓고 넓은 밤하늘엔 / 누가 누가 잠자나
하늘나라 아기별이 / 깜박깜박 잠자지
깊고 깊은 숲 속에선 / 누가 누가 잠자나
산새 들새 모여 앉아 / 꼬박꼬박 잠자지
어린 막내 여동생이 잠자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쓴 작품이다. 선생은 아이의 눈으로 아이들의 세상을 기록했다.
목일신 선생을 기리는 두 개의 노래비. 고흥동초에 있는 노래비(좌)에는 '누가 누가 잠자나'가, 고흥문화회관 뜰에 있는 노래비(우)에는 '자전거'가 실려 있다.
목일신 선생이 어린 나이에 동요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아버지 목치숙은 동요 쓰기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어린 아들에게 한글 공부를 시켰다. 당시 일제는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문인들의 한글 작품 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하지만 정치색이 거의 담기지 않는 동시나 동요 작품은 통제가 매우 느슨했다. 그런 이유로 1930년대 어린이잡지 창간이 붐을 이뤘다. 동시나 동요 쓰기는 민족적 울분을 표출하는 일이었으며, 민족혼을 깨우는 행위였다.
동요 ‘자전거’의 탄생도 아버지와 연관이 깊다. 당시 아버지는 고흥 인근 교회들의 순회목사 활동을 하며 선교를 했다. 미국 선교회가 아버지에게 자전거 한 대를 선물하면서 순회목사 활동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가끔 아버지가 쉬는 날은 아들에게 자전거를 양보해 줬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목일신 선생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고흥동초등학교까지 6km의 길을 신나게 내달렸다. 자전거 위에 오르면 세상을 모두 얻는 기분이었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
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
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
오불랑 꼬불랑 고개를 넘어
비탈길을 스스륵 지나갑니다 //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
울 아버지 사오신 자전거라오
머나먼 시골길을 돌아오실제
간들간들 타고 오는 자전거라오
- 1932년 ‘아이생활’에 발표한 동요 ‘자전거’ 전문
그 시절 자전거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최고급 승용차쯤 된다. 귀한 자전거를 타면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일신은 시적 영감을 얻어 동요 ‘자전거’를 썼다. 전 국민의 애창동요 ‘자전거’는 그렇게 우리에게로 왔다.
고흥에서는 매년 목일신 선생을 기념하는 동요제가 열린다. ⓒ고흥군
민족을 버리느니 동요를 쓰지 않겠다!
목일신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동요를 쓰는 행위를 통해 소극적 민족운동을 했던 그는 전주 신흥학교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고, 학생들의 분노와 독립을 향한 의지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1930년 전주 신흥학교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목일신 선생은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격문을 쓰고, 주도적으로 시위를 이끌었다. 선생은 결국 일경에게 체포됐고,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동요를 향한 열정은 감옥에서도 계속했다. 하루에 한 장씩 주는 휴지를 아껴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 ‘하늘’, ‘구름’, ‘꿈나라’ 등이 감옥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1930년대까지 지치지 않고 동요 창작을 하던 선생은 어느 순간 글을 아주 버렸다. 당시 일제는 전시동원 체제를 선포했고, 이름난 작가들은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는 일에 대규모로 동원됐다. 민족을 버리기 싫었던 목일신 선생은 절필을 선언하고, 더 이상 동요를 쓰지 않았다.
목일신 선생은 살아서 4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 글의 대부분은 10대에 썼다. 선생의 동요는 우리 문학사에 매우 특별한 선물이었다. 일제가 조선어를 금지했던 시대, 그의 동요는 순수한 동심으로 민족의 슬픔을 달래고, 지쳐 엎드린 조선인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줬다. 그에게 언어는 민족의 무기였다.
---------------
글 한경숙 / 전남교육소식 (2020.06.26.)
첫댓글 KPM 이정건: 그리운 동요 감사합니다 ☺️
이정록: 이 동요 원래 가사가 대박이네요 ㅋㅋ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장덕상: 어릴 때부터 늘 귀에 들리고 부르던 노래였는데,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은경: 그립습니다.
저 노래를 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
추억소환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