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은 자가 사원(士元)이고, 양양군(襄陽郡)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는 소박하고 노둔했으므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자가 없었다.
영천의 사마휘(司馬徽)는 청아했는데, 인품을 감별할 줄 알았다. 방통은 약관의 나이 때, 사마휘를 찾아가 만났다. 사마휘는 뽕나무위에서 뽕잎을 따고 방통은 그 나무 아래 앉아서 낮부터 밤까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방통을 매우 특이한 인물로 느끼고, 방통을 남주(南州) 선비들 중에서 제일 인자가 될 만하다고 했다. 이로부터 방통의 명성은 점점 빛나게 되었다. 후에 군에서 공조로 임명했다. 방통은 천성이 인물을 평가하기 좋아했고 사람을 교육시키는 일에 노력했다. 그는 매번 말할 때마다 칭찬만 해서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재능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질문했다. 방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혼란스러우며, 정도(正道)는 파괴되었고,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사람은 많습니다. 지금 풍속을 일으키고 도덕적 행위를 드날리게 하려고 하면서 명성을 높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우러를 가치가 충분치 못하게 될 것이고, 우러를 가치가 충분하지 못하면 착한 일을하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현재 칭찬한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은 잃어도 그 절반을 얻어 세상의 교화를 높일 수 있으며, 뜻있는 선비로 하여금 노력하게 하니, 또한 옳지 않습니까?"
오나라 장수 주유는 유비를 도와 형주를 얻었으므로 남군태수를 겸임하게 되었다. 주유가 죽자, 방통이 그의 유해를 가지고 오나라로 갔다. 오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방통의 명성을 듣고 있었다. 방통이 서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를 전송하기 위해 모두 창문(昌門)에 모였는데, 육적(陸績), 고소(顧邵), 전종(全琮)이 모두 참가했다. 방통이 말했다.
"육 선생은 노둔한 말이니 빠른 발의 힘을 갖고 있고, 고선생은 노둔한 소니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수 있겠지요."
전종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펴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므로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비록 지혜의 힘은 많지 않지만,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인물입니다."
육적과 고소가 방통에 대하여 말했다.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면, 그대와 함께 사해의 인사들을 평가해야 할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방통과 깊이 사귀고 돌아갔다.
유비는 형주를 다스리게 되자, 방통에게 종사(從事)의 신분으로 뇌양현(뇌양현)의 현령을 대행하도록 했다. 방통은 현에 재임하여 치적을 쌓지 못했으므로 면직되었다. 오의 장수 노숙이 유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방사원(龐士元)은 백리(百里 : 현을 가리킴)를 다스릴 재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치중, 별가의 임무를 맡도록 해야만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펴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 역시 방통을 유비에게 추천했다. 유비는 방통을 만나 깊은 예기를 하고 유능한 인물로 평가하여 치중종사로 임명했다. 그에 대한 유비의 신임은 제갈양에 버금갔다. 그래서 방통을 제갈양과 함께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제갈양이 형주에 남아 지킬 때, 방통이 유비를 수행하여 촉으로 들어갔다.
익주목 유장이 유비와 부성에서 회견했는데, 방통이 계책을 진언했다.
"현재 이번 회담을 이용하여 유장을 잡을 수 있다면, 장군께서는 병사를 사용하는 수고로움이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들어왔으므로 은혜나 신의는 아직 빛나지 않으니,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이후, 유비는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을 정벌해야 했다. 방통은 또 진언했다.
"은밀히 저예병사를 선발하여 밤낮으로 가서 성도를 직접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본래 무용이 없으며 또 평소 미리 방비하지 않으니, 대군이 갑작스럽게 이르게 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양회(楊懷), 고패(高沛)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력한 병사를 갖고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습니다. 듣건대 이들은 유장에게 여러 차례 간언하여 장군을 형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장군은 아직 도착하기 전에 사자를 보내 그들에게 통보하여 형주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돌아와 구원을 바란다고 설명하고, 아울러 군대가 행장을 꾸려 외견상 돌아가는 형세를 만들도록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의 영명(英名)에 감복하고 있으며, 또 장군이 가는 것을 좋아하니, 틀림없이 날쌘 말을 타고 만나러 올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기회에 그들을 붙잡아 놓고, 진군하여 그들의 병사를 배앗아 성도로 향하십시오. 이것이 다음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물러나 백제성으로 돌아가 형주까지 연결하여 서서히 일을 강구하십시오. 이것이 맨 마지막 계책입니다. 만일 깊이 생각만 하다가 가지 못한다면, 장차 큰 곤경에 처하게 되어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비는 두 번째 계책을 채용하여 즉시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 군사를 돌려 성도로 향해 가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는 부성에서 대연회를 개최하여 술을 차리고 음악을 울렸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연회는 즐겁다고 할 만합니다."
방통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나라를 토벌하고 즐겁다고 여기는 것은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
유비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노여워하며 말했다.
"무왕이 주를 토벌할 때, 앞에는 노래부르는 자가 있었고, 뒤에는 춤추는 자가 있었으니, 어진 사람이 아니었겠군요? 그대의 말은 맞지 않소. 빨리 일어나 나가시오."
그래서 방통은 머뭇거리다 물러났다. 유비는 곧바로 후회하고 돌아올것을 요청했다. 방통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돌아보고 사과하지 않고 태연하게 음식만 먹었다. 유비가 말했다.
"방금 했던 논쟁에서는 누가 잘못한 것입니까?"
방통이 대답했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한 것입니다."
유비는 크게 웃었고, 처음처럼 연회를 즐겼다.
진군하여 낙현을 포위했다.
방통은 병력을 인솔하여 성을 공격할 때,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유비는 애통해 했으며, 그의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유비는 방통의 부친을 의랑으로 임명하고, 간의대부로 승진시켰으며, 제갈양이 직접 사령을 주었다. 방통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추증했으며, 시호를 정후(靖候)라고 했다.
방통의 아들 방굉(龐宏)은 자가 거사(巨師)이며, 강직하고 솔직하며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상서령 진지를 경시하면서 오만하게 보여 진지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며, 부릉태수의 직책에서 세상을 떠났다.
방통의 동생 방림(龐林)은 형주치중종사의 신분으로 진북장군 황권(黃權)을 따라 오를 정벌하러 갔다가 패배하게 되자 황권을 따라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에서 열후에 봉해졌고, 관직은 거록태수(巨鹿太守)까지 이르렀다.
**군신이 함께 잘못한 것입니다... 에 대한 주석
유장의 습격하려는 계획, 그 책략은 방통이 제기한 것인데, 도의에 어긋나게 하여 고업을 성취하였으므로 사악한 방법이다. 그러나 유비는 이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만하다고 했다. 또한 주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마땅함을 잃어 마치 재화를 즐기는 걱과 같은 태도였으며, 더욱이 자신을 무왕에게 비교하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비의 잘못이며 방통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방통이 "군신이 함께 잘못한 것입니다." 라고 한 것은 유비에게 전가될 비난을 분담한 것이다.
첫댓글 에고.............영웅이 너무 일찍 죽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