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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요한복음(42) /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
☞ 말 씀 : 요 한 복 음 12장 20절 - 36절 (신약성경 p.168)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아멘!
여러분! 성경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역설적인 진리(paradoxical truth)란?
그냥 생각하면 모순되고 틀린 말 같은데, 깊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을 의미합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보면, 첫째로, ‘고난이 유익이다.’ -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지나놓고 보면 이해가 됩니다. 둘째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라는 진리,
이 진리를 경험해 본 사람들,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되어지는 귀한 진리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도 대부분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복이 있다.
의를 의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 -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말은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설적인 진리가 나옵니다. 23절, 24절, 25절이 다 역설적입니다.
조금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하게 먼저 생각해 보면, 먼저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께 영광을 얻을 때가 아니라, 수치를 당할 때가 온 것입니다.
곧 체포를 당할 것이고, 불의한 재판을 받을 것이고, 채찍질 당하고, 침 뱉음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결코 영광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 상황인데도,
우리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운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 인류구원의 길을 여셨기에 정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자연법칙을 통해,
보여 주고 계십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여러분! 진실로 아멘입니까?
이어 오늘 본문 25절 말씀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생명을 사랑해야 생명을 얻고 지킬 것 같은데, 예수님은 반대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역설적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진리가 다 역설적입니다.
오늘 본문 20절부터 22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가서 여쭈니” - 이 말씀은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뵈옵고 자 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유대교에 입교한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께 면담을 신청한 것입니다.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빌립에게 찾아와서 이야기했고,
제자 빌립은 다른 제자 안드레와 상의해서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사적으로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헬라인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으신 후에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헬라인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을 대표하는 민족입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시대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문화가,
보편적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말하면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헬라 사람들인 이방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 빌립을 찾았을까요?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빌립이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제자요, 헬라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던 제자였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자 빌립은 왜 다른 제자 안드레와 상의를 했을까요? 아마 친한 친구였을,
것이고, 이방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은 혼자서 결정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에 안드레와 함께 상의를 해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놀라운 말씀을 왜 헬라인이 찾아왔을 때,
하셨을까요? 이것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키 포인트(key point) 중에 하나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헬라인들이 찾아왔을 때, 십자가의 도에 대해 이야기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유대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눅 2:10-11) -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의 대속을 위한 사건임을 분명히 말씀 하시려는 것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말씀들은 성경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 하나님은 온 세상 누구든지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속에서도 이방인 구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부터 11절 말씀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아멘! - “온 백성에게” 하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대화하신 사건도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 16절 말씀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멘! 아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은 죄패에도 예수님의 죽음이 온 인류를 위한 죽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통용되었던 네 나라의 언어로 기록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0절 말씀에서 보면,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데모데전서 2장 4절 - 5절에서도 이렇게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요한계시록의 천국 환상 속에서도, 모든 민족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 구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9, 10절입니다. “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을 위한 것임으로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 사건은,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로마백부장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이 들어가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인 베드로와 이방인인 고넬료의 만남과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천사를 고넬료에게도 보내고, 또한 베드로에게도 보내서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점심시간 시장할 때, 베드로가 본 환상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그 어떤 차별도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음을 선포하신 환상입니다.
보자기에 싸여 하늘에서 내려 온 부정한 짐승을 보고 있을 때, 잡아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 세 번씩이나 들려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것은 음식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깨끗하게 되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이 아무 차별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차별 없는 구원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다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한 알의 밀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는 말씀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32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패배의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의 사건이요. 영광을 얻은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향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린 사건입니다.
상징적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놀라운 일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영광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영광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 23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호산나 찬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광을 예수님의 왕권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왕권을 차지하게 되면, 제자들도 분명히 한 자리씩은 차지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다가올 영광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오직 사람의 영광만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맥으로 볼 때, 우리 예수님은 전혀 다른 영광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 이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복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됨을 통해 예수님께서 영광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왜 큰 영광이 됩니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사건이 되기 때문에 죽음이 곧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죽음을 무기로 삼아서 사람들을 지배해 온,
사탄이 멸망을 받을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31절 말씀입니다.
“이제 이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 나리라.” 아멘!
우리 예수님은 본문에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는,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 알에, 예수님 자신을 비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너무나 당연한 원리 같지만, 이 한 알의 밀의 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잘 증거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지 않으면, 한 알의 밀알은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멀리 피하고 죽지 않고,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의 임금이 되었다면, 예수님은 아무도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는 것, 사람의 죽음에 비유하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 들어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는 것과 사람이 죽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밀이 죽어 열매 맺는 것,
자연의 현상이지만, 우리 사람이 죽어 다시 사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것이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밀이 죽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비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부활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죽음도 영광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씨앗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 - 44절 말씀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로 열매 맺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언젠가는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들릴 것” 이라는 표현을 통해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죽음 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오늘 본문 32절, 33절 말씀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아멘!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해도,
세 시간 동안 빛을 잃고, 성전휘장이 찢어지고, 성도들의 무덤문들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에서 어느 누구의 죽음에서 이런 일어난 적이 없던 일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 예수님의 죽음을 영원한 속죄 제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황소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피로써,
단 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구약의 제사들은 불완전,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의 제사는 완전한 제사,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실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써,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깨어졌던 모든 관계를 화목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직적으로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수평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물어서 십자가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당하신 십자가 죽음은, 얼마나 고통스런 죽음이었을까요?
사람을 나무에 못 박아 죽이는 처형법인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런 방법입니다.
오늘날 교수형이나 총살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입니다. 315년에 폐지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도 그 고통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강조된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의 마음이 괴로우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다른복음서는 겟세마네 기도가 자세히 나와있지만, 본문에는 아주 간략하게 전해줍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27절 말씀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개정개역 번역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아버지!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번역에서는 좀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아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해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할까?
아닙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어떻게 번역하든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십자가 죽음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엄청난 고통인 것을 아시면서도 피하려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27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오셨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만이 소명적 존재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소명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멘! - 자기실현, 자기성취를,
주장하는 시대에 자기를 부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엄청 바보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온전히 좇아야만 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해야 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한 알의 밀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도 한 알의 밀이,
될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어질 때,
우리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복음은 전파되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 중에, 문자적으로 한 알의 밀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을 때, 복음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특히 극렬한 예수 핍박자였던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사도 바울이 되어, 로마전역에 다니며 복음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흩어진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복음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생겨 났고, 그 안디옥교회 중심으로 세계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사울 왕처럼 죽지 않은 밀알처럼 열매 맺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았고,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자기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오직 자기의 유익,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다가 결국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희생하는 한 알의 밀은 선교현장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가정에도 한 알의 밀이 되어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교회에도 필요합니다.
엄마 아빠들이 한 알의 밀이 될 때, 아름다운 가정이 세워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섬기는 희생하는 밀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목자들, 찬양팀, 방송팀, 주방 등에서 헌신하는 밀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아직 어둠 가운데 사는 분이 있다면, 빛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서, 빛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한 알의 밀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우리도 한 알의 밀이 되어 복음사역을 통해 많은 영혼들을 살려 내는 사명자들이 되어,
주님으로부터 잘했다 칭찬 받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