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초 대전에 소재한 삼원식품은 대단한 모험을 감행했다. 지방기업이라는 굴레를 떨치고 서울 시장에 진입하기로 결정한 것. 삼원식품의 주력상품인 ‘삼원고추장’은 식당 등에 공급하는 ‘대포장’(大包裝. 소포장은 일반 소비자 대상 상품)으로 대리점을 통해 진입해 있었으나 소비자 시장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 시장 진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서울지역 대리점들이
“손해 볼 게 뻔한데 뭐 하러 진출하느냐”며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대리점들의 견해를 수용하던 경영진들이었지만 그때만은 달랐다.
“당시 유통업계에는 뭔가 일어날 듯한 조용한 움직임이 있었어요. 소비자
시장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할인점 같은 신 유통업태가 등장한 것도 그 무렵입니다. 더구나 수도권은 국내 시장의 70%를 점하는 시장이 아닙니까. 서울을 공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서울 진출 10년 만에 대기업 눌러
당시 전무였던 오정근 사장은 “단순한 진출이 아니었다”며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고 말했다. 반대하던 대리점들은 “회사 파이를 키워야 대리점도
산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사실 삼원식품의 서울 진출은 회사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아파트가 주거공간의 대세를 이루고 핵가족화·여성 취업이 일반화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시장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었다.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이 회사의 열정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보도 듣도 못한 상품을 반기는 판매업체도 없었고 판매대 위에는 이미 진미·삼화·신송 같은
경쟁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삼원식품은 서울 공략을 위해 1년 동안 준비했던 ‘태양초고추장’을 들고 지방기업으로서는 엄두도 못내던 대대적인
TV 광고전을 펼쳤다. 생존을 위한 총력전이었다. 태양초고추장은 일종의 방부제를 넣던 기존 제품과는 다른 최초의 천연 무방부제 고추장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더이상 옛날의 삼원식품은 없다. 대신 ‘해찬들’이라는 산뜻한 이름이 고추장·된장·쌈장 시장의 1위 업체로 우뚝 서 있다. 날로 커져가는 회사 규모도 예사롭지 않다. 현재 생산하는 제품은 고추장 7종을 포함한 28종. 지난해에는 1천5백4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IMF 체제였던
98년을 제외하면 매년 20∼30%의 고성장이다.
더구나 해찬들의 경쟁 상대는 대기업인 대상그룹. 대상은 얼마 전부터 신장세가 위축되고 있는 조미료 시장 대신 성장성이 높은 장류사업을 강화하고
있는 이 시장의 ‘골리앗’. 특히 해찬들의 태양초고추장과 대상의 청정원
순창고추장은 양사의 주력제품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시장 규모도 작지 않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국내 장류시장은 약 5천억원대로
소규모 거래까지 포함하면 1조원 가까운 규모를 자랑한다. 이중에서 가장 큰
시장은 고추장으로 연간 2천5백억원대이고 다음이 간장으로 1천6백억원, 된장 8백50억원, 쌈장 8백억원대이다. 해찬들은 이중 간장을 제외한 시장에서
1위에 올라 있다.
시장조사 전문업체인 AC닐슨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5∼6월 양사의 고추장
시장 점유율은 45%대 42.5%. 근소한 차로 해찬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IMF 이후 양강 체제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이같은 양상은 그동안 몇 번의 역전극이 벌어지면서 엎치락뒤치락하다 지난해 중반 이후 해찬들의 아슬아슬한 우위가 이어지고 있다. 된장과 쌈장에서도 양사의 경쟁은 치열하지만 역시 해찬들이 우위를 지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났다. 이 기간 동안 대전의 작은 지방기업 해찬들은 장독대를 기업화하면서 대한민국의 입맛을 바꾸고 있다.
‘장맛’이라면 옛날부터 한 집안을 상징할 정도로 예민하고 손이 많이 가는 식탁의 근간. 장 담글 때 외출은 당연하게 금지됐고 심지어는 장을 담그는
여인의 입을 창호지로 봉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장맛을 내고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장맛이 좋은 집은 복이 많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이런 특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30대 이상 주부들은 한번 맛을 들이면 여간해서 브랜드를 바꾸지 않는다. 90년대 중반 장류식품이 중소기업 고유업종에서 해제되자 너도나도 뛰어들었던 대기업들이 몇 년 만에 물러선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해찬들은 어떤 비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지난 73년 대전에서 광신상회를 운영하던 오광선 전 사장(작고)이 주변 군부대에 고추장을 납품하면서 설립한 삼원식품공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해찬들이 성공 1순위로 꼽는 것은 품질이다.
“(전체 인원이) 몇 십명밖에 안 되던 시절에도 연구소를 운영할 만큼 R&D를 중시해 맛에는 자신 있었다”는 박상호 생산본부장의 말처럼 성장의 초석은 탁월한 맛이었다. 박본부장은 “장류는 모두 발효식품이기 때문에 가장 예민한 식품”이라며 “고추장만 해도 매운맛과 단맛이 적절하게 조화돼야 하는데 이렇게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78년 업계 최초의 찹쌀 고추장 출시, 85년 최초의 쌈장 출시 등은 이런 연구개발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
맛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시장과 소비자보다 반걸음 앞서갔던 경영진의 앞을 내다보는 감각. 90년대 초반 시장의 흐름이 제품력에서 유통력으로 옮아가고 있을 때 새로운 제품(태양초)과 새로운
전략(TV CF)으로 과감하게 서울 시장에 진출한 것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해찬들은 지금도 TV CF를 중시해 오고 있는데, 이는 ‘안전을 먹고
브랜드를 먹는다’는 시장의 특성을 반영한 것. 지난 90년대 중반에는 마복림 할머니의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경쟁은 좋은 것이다”
96년 업계 최초로 CI(기업이미지 통합)를 통해 전열을 정비한 것도 그런 사례 중의 하나로 꼽힌다. CI를 하면서도 겉만 바꾸지 않고 내부까지 변화를
시도, 구시대적 유물을 털어내면서 경영시스템을 팀제로 바꾸었다. ‘해가
꽉 찬 들’이라는 의미의 ‘해찬들’이라는 대표 브랜드도 이때 만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노력이 IMF 체제에서도 계속됐다는 점이다. 경쟁사들이 멈칫하면서 우물쭈물하는 동안 해찬들은 그 빈 공간을 밀고 들어가는 공격적인 경영을 했다. 위기를 기회로 본 경영진은 고가전략도 그대로 고수했다. 이미지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생각했다. 결과는 성공. IMF
체제에도 불구하고 매출은 꺾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해찬들과 대상 청정원의 2강 체제. 여타 경쟁사들은
IMF를 거치면서 군소회사로 전락했다. 특히 이들 두 회사의 경쟁이 불꽃을
튀기면서 군소회사의 점유율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해찬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매출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도 성공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개가를 올렸다. 대포장이 매출의 60%를 차지하던 것을 소포장
60%로 바꾼 것. 이는 시장의 흐름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경쟁력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쟁력 향상을 위해 지난 2000년에는 CJ의 투자를 받아들여 경영권을 유지하는 대신 50%의 지분을 넘겨주는 전략적 제휴를 맺기도 했다. CJ로서는 장류식품이 없는 단점을 커버할 수 있고 해찬들로서는 대기업인 대상을 상대하는 ‘언덕’을 얻을 수 있는 윈윈(Win-Win)이었다. 회사명도 ‘해찬들’로 바꿨다.
안정된 노사관계도 경쟁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해찬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분규를 겪지 않았다. IMF 시절에는 노조에서 먼저 임금동결을 제안했을
정도. 오정근 사장은 “너무 고마워 ‘인력감축 같은 구조조정 없는 변화와
혁신’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스스로 임금을 동결했던 노조원들은 다음해 평균 15%의 임금인상 혜택을
받았다. 1백여곳에 이르는 유통망(대리점) 또한 해찬들의 자랑. 이중 60곳은
거의 20년 가까운 거래처이다. 특히 이들 대리점들은 해찬들 제품만 취급한다. 대리점 매출이 해찬들 매출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해찬들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고 있다.
오정근 사장은 “지방기업이라는 핸디캡, 작은 기업이라는 위기의식이 오늘의 해찬들을 만들었다”며 “경쟁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청정원과의 치열한 경쟁을 지켜보고 있는 이마트의 한 관계자도 “작은 기업이어서 그런지 해찬들 직원들이 훨씬 더 치열하게 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해찬들은 마치 작지만 매운 고추 같다.
*출처 : 이코노피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