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읍 마을의 유래 (임실문협 자료실)
- 김여화 -
임실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청웅현에 속하였다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운수현으로 고려시대에 남원부 임실현, 조선시대에는 일도면으로 불리었다. 조선시대 일도(一道)면일 때에 상성,중성,기동,중동,이도,신기,향교,식산,약암,용은,두곡,남성,오정,부등,신촌 등 1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안,이인,대곡,면을 통합하여 임실면이라고 칭하고 성가,이도,오정,두곡,장재,신안,현곡리등 법정리가 13개 였다가 화성리와 신정리가 편입 16개리다.
해발 240미터내외의 고원성 소분지를 이루고 있어 주변의 산으로 둘러 싸이는 등 지세가 험한 편이며 오수지역보다 평균 1백미터 이상 높다. 두만, 정월, 대곡리 일대에서 발원한 소하천은 읍내를 관통하고 관촌 용산을 거쳐 신평 창인리 앞으로 흘러 섬진강 상류를 이룬다. 1979년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임실읍의 면적은 66평방 키로미터로 임실군의 10.5%를 차지하고 밭이 521헥타 논이 945헥타 산지가 4,735헥타이다. 해발 240미터의 고원성 소분지의 형태이며 둘레는 높은산 두만,정월, 두곡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이 임실읍을 관통하고 관촌의 오원천과 어울려 옥정호로 흘러든다.
★상성마을 (上城) 조선말 남원진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왜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주민300 여명이 두달동안 돌을 날라다 성을 쌓은 결과 왜침을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성의 윗쪽에 있다고 하여 상성(上城)이라고 한다. 이곳 상성 앞으로 두곡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현재는 포장이 되었고 상성마을 중간부분에서 죽림암으로 올라가는 초입이다. 뒤쪽 산은 운수봉 옆으로 봉황산이 있으며 골짜기에 논들이 지금은 삿갓배미가 되었다.
★하성마을(下城) 이곳도 남원진씨가 터잡은 일부이며 운수봉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 마을 터가 좋다고 또 양반들이 모여산다고 성가리라고 했는데 운수봉 능선에는 저느이 이씨 11대손 이정승의 모친의 묘가 있다한다. 이정승 모친의 방례시에 아홉고을의 원님이 모여들었다고 해서 아우고을 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중동마을 (中洞) 조선시대에는 반상의 구별이 심하여 양반들이 아전을 몰아내어 변두리 한쪽에서 집단으로 살게 하였는데 아전들의 자손이 태어나기만 하면 훌흉한 인물이 나와 양반들이 난처해지자 마을 사람들을 몰아내고 양반들의 말을 키우는 말터로 사용케 하여 마을이름을 "말이들"이라고 했다하며 그 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을의 중심이 되어 중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도마을(二道) 조선시대 남원진씨의 12대손이 정착했는데 하루는 봉황산 상봉에서 온 산신령이 자칭하는 여자 도승이 나타나 이마을은 도로가 두 번 나야지 부락이 윤택해 진다고 했나는데 당시에는 압골로 통하는 도로가 임실로 들어오는 진입로 였는데 현재는 두곡리 앞으로 통하는 남원간 국도가 나면서 수정리 앞으로는 순창선 도로가 났고 이도(二道) 마을 앞으로 길이 트였다고 한다. 옛 도승의 말대로 임실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두 개라 하여 이도리라 칭하였다고 한다. 임실읍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청웅현, 백제시대에도 운수현으로 불리웠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향교가 1413년에 이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변에 마을들이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정확한 고증 자료가 없고 가장 최근에 터잡은 것이 진씨가 아닌가 사료되며 이러한 고증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향교마을(鄕敎) 조선 태종13년 (1413년) 에 임실향교가 이전 해 와 학생 30명과 훈도 1명이 배치되어 교육이 시작되었으므로 향교가 생기면서 향교마을이라고 불럿다고 전한다. 고종(1894)년에 향교 폐지령이 내려 지금은 봄가을 두차례식 석전제를 지내고 매월초 하루와 보름에 삭망제를 지내며 이곳을 지날때마다 망배를 올렸다는 망도가 있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향교에는 수령 700여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경술국치 이후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을 이웃 노인에게 들은바 있다. ( 참고: 예전에 필자가 어려서 (1960년대로 기억) 향교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10여미터 들어와 봉황산 아래쪽으로 골목이 있었는데 그곳이 시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그때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판자때기로 지은 까대기가 붙은 건물을 확인 할수 있다. 그 골목에서 장을 보고 시외 버스를 현 농협군지부 앞에서 탔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르는데 아마도 압골 상성마을 앞으로 난 현재 두곡으로 나오는 길목으로 버스가 다녔던 기억이다. 당시 필자는 10~12살 정도로 타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임실장에 올 수 있는건 두어번 이었던 기억이다. 기차를 남관역에서 타고 임실역에 내리면 현재 치즈공장 앞으로 길이 있어서 그 개울가를 걸어서 장터로 왔다.)
★수정마을(樹亭) 150여년부터 수정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마을앞에서 동쪽으로 성수면 고덕산(高德山)이 보이는데 산세가 바위로 되어있는바 이 마을에서는 고독산으로(高獨山) 알려져 이 악산이라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 하였다. 신성들이 이르기를 재난을 막기위해서는 고독산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막았다고 하는데 마을사람들이 석달이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루는 도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워낙 숲이 좋고 뒷산 혈맥과 앞의 냇물이 흐르는 중간에 마을이 위치한 것을 보고 이곳에 사찰을 지으면 인가느이 도덕을 깨우치려 했다고 전하며 숲이 좋은 이곳을 수정리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운수사는 창건연대가 미상이나 백제시대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수정리를 숲정이라 불러왔는데 예전에 운수사에 높이 2,5미터, 어깨폭 81센티의 석불이 있었다는데 이또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산세의 액막이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합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숲과 합도는 없어지고 석불만 남아있다고 전한다.
합도(蛤島)- 고덕산이 풍기는 예기 살기를 꺽기위해 숲정이앞에 임실천에 인공으로 섬을 만들고 섬을 합도라 칭하였다. 이 함도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고 석불을 세웠는데 운수 팔경에 합도취적(蛤島吹笛)은 이곳 합도에 풍류객들이 석양이면 나와 피리를 불고 풍류를 즐겼기 때문에 합도취적이라 하였다.(1675년 만든 운수지에 합도가 있었다는 기록이있다)
★오정마을(五亭) 300여년전 신촌,세모실,화개촌,무등실 남성골 등 다섯 개의 촌락을 이우었는데 각 마을마다 정자가 하나씩 있었다고 전한다. 하루는 화개촌에서 산불이 나서 알지못할 산짐승이 죽어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주워다가 먹었는데 이틑날부터 난데없이 이상한 소리가 나면 오린아이가 하나씩 없어지곤 했는데 매일저녁 반복되었다고 한다. 결국 화개촌이 없어질 만끔 인구가 줄어 걱정에 빠져 있을 때 전주최씨 득진씨의 13대조가 여러 촌락이 어울려 모여 살아야 한다고 인근마을에 알려 제일 중심지로 옮겨 합쳐서 촌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에 5개마을이 정자가 있었음을 상기하여 오정리라 칭하였으며 현재도 오정리는 전주최씨가 하다고 한다. 현재 이곳이 초등학교 근처이다. 화개촌 뒷산이 어디?
★무등마을 (無等) 이 마을은 현재 우회도로 청웅쪽 임실천 교각 아래로 통하여 들어간다. 최초에 남평문씨만 터잡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극락산 중간에 남평문씨의 묘가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 일대를 파보니 숯을 묻어서 산의 줄기를 끊었더라 것이며 그 후 마을이 점차 쇠퇴해지고 문씨 집안은 흩어지고 각성받이가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숯을 파서 무덤을 만들었다 하여 이곳을 무덤실이라고도 하였으며 한편은 잘살거나 못살거나 하지 않고 모두 고루 산다고 하여 무등실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극락사에서 청웅쪽으로 모여있다. 운수팔경의 하나인 극락 청하(極樂淸霞) 극락봉에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면 봄을 실감케하고 때로는 안개가 띠처럼 산허리를 감돈다고 해서 극락청하라 일컫는다.
★두곡마을(杜谷) 200여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데 들이 넓고 물이 좋으며 당초에는 집들이 띄엄띄엄 있어서 띄엄 바위라고 했다한다. 하루는 말을 탄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말의 먹이는 주었으나 말에게 물을 안줘서 이틑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말이 죽어 있엇다고 한다. 이선비는 하도 어이가 없어 죽은 말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죽은 말이라도 물을 마실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골짜기를 막아 연못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며 두곡(杜谷) 막을 두, 골 곡 골짜기를 막았다는 뜻으로 이후에 두곡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두실마을(杜實) 마을 앞 산이 용의 형체를 학도 있다고 하여 용날이라고 부르며 그 밑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용우치 라고 했다 한다. 땅이 기름지고 주민들이 넉넉하게 살고 있었는데. 뜻 밖에 용날을 끊어 철길과 도로가 나게되자 3일만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다가 떨어져 죽었다하며 지금도 떨어진 바위위에 붉은 ㅍ;가 묻어있다고 전하고 그 후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궁피보해 지기 시작했다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용날을 끊은 것을 맥을 막기위해 마을 앞에 나무를 심엇는데 열매가 많이 열려 막을 두 열매실 두실(杜實) 이라 했다고 한다.
★갈마마을(葛馬) 조선 중기부터 강화노씨들이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고 한다. 산세가 좋고 마을바로 앞으로 맑은 냇물이 흘러 신선들이 이곳을 지나가다 쉬어가는 곳이라고하였으며 마을 뒷산이 마치 말의 모습을 닮아 말마자를 붙였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 갈마(渴馬) 말이 물은 만났다는 뜻이다.
★해평마을(海平) 옛이름 구치(九雉) 300여년전부터 장씨 형제가 살았는데 형제간에 의의가 두터웠다. 형제는 집안 어려워 날마다 산에올라 풀잎과 산짐승을 잡아 연명하였는데 하루는 산에 올라 깊은 골짜기에서 산짐승을 쫓다가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형은 동생이 먼저 집으로 내려간 것으로 알고 그냥 왔으나 동생은 집에 오지 않았다. 동생은 꿩 아홉 마리를 쫓던 중 여덞마리가 날아가 버리고 한 마리를 잡으려 했으나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지못한채 해가 저물어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단다. 동생이 새벽에 눈을 떠 보니 바로 눈앞에 꿩한마리가 죽어있어 동생은 산짐승을 잡은 것을 죄가 된 것으로 뉘우치고 이 꿩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근처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궝 아홉 마리가 날아간 자리라 하여 아홉구, 꿩치 구치리라 하였으며 차차 인가가 늘어났다고 한다. 한편 형은 동생을 기르며 안타깝게 살아가다가 하루는 번개가 치고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한달동안 계ㅛ속 비가 내려 온 들판이 물에 잠기면서 바다같이 되어버렸다. 그후 형은 그곳에서 갑부가 되었는데 그곳을 일러 바다거리로 불리다가 훗날 형제간의 의의가 두텁다하여 바다거리와 구치리를 합해서 해평(海平) 이라고 했다 한다.
★감성마을(甘城) 감천(甘泉)이 감성으로 변한 것 같다. 골짜기가 깊어 창원황씨들이 터잡았다고 전한다. 의지가 굳은 황병기라는 분의 8대선조가 3년이상 앓고 있엇는데 며느리가 날마다 약초를 캐어 구완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백호산에 올라 약초를 찾던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바위밑에 은신하는데 건너편 개울에서 세자세치나 되는 잉어 한 마리가 펄쩍펄쩍 뛰는 것이 보였더란다. 며느리는 잉어를 안고 돌아와 물을 석동이를 붓고 작장불로 하룻동안 고와서 기름을 내어 환자에게 드리니 노인의 병이 완쾌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노인의 나이 예순 한살이었다는데 이때부터 황노인은 힘이솟고 무슨일이든지 솔선수범하자 하루는 산신령이 나타나 우물을 파도록 시켰다고 한다. 이마을은 산중턱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물을 얻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다. 이튿날부터 황노인은 신령이 알려준 장소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물기가 비치지 않아 실망했으나 노인은 지칠때까지 계속 파고 들어가니 석달 사흘만에 분수처럼 물이 솟았다는 것이다. 기쁨에 넘친 노인은 쉬지 않고 우물 파기를 계속 한결과 6개월만에 쉼없이 솟는 우물을 완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양바위 속에서 나오는 이 우물을 신령이 가져다 준 샘물이라하여 산약샘이라고 불렀고 여름에는 물이 차가워 삼복더위에도 그냥 목욕을 하지 못했으며 씻기만 해도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 한 물맛이 감초 맛같이 달다하여 감천(甘泉) 이라고도 했으며 마을 이름도 감천이라고 불렀으나 후에 감성리 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군부대가 있다. ★정월마을-(程月) 정월리는 고산마을 독산,양지뜸,음지뜸으로 되어있다. 300여년전부터 마을 형성되었으며 터가 좋기로 이름난 고장으로 윤택한 생왈을 했다고 한다. 특히 산세가 빼어나 풍수설에 따라 지관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남원진씨가 이곳 옥두망정 이란 동네 앞산에 묘를 썼는데 토끼가 달을 바라보고 있는 명당이라고 하여 이마을 이름을 옥두망월리라 불렀는데 묘를 쓴 후 부터는 마을의 산림이 점점 줄어들어 빈곤하게 되었다고 한다. 급기야 마을 이름을 고쳐 내정(內程) 외정(外程) 으로 부르다가 다시 정월리로 했다 한다. 현재는 양지뜸으로 불리고 예전에는 오정리앞 꽃가들(꽃밭정이)을 지나양지뜸으로 바로 갈수 잇었다고 한다.
★고산마을(高山) 이 마을은 1660년 함양 박씨 8대손 박응부(朴應富)가 터를 잡아다고 하며 박응부의 5대손 승요(承堯)가 병절 교위 부사과를(秉節校尉 副司果) 역임한 후 관직을 그만두고 남원덕과로 이거한후 그 후손들이 부락을 지키며 살고 있다 높은 산이 빙 둘러쌓여 있으며 높은 벼슬하는 사람이 자주 태어난다 하여 고산(高山) 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현재 芝山堤 위쪽 몇 가호가 있다)
★독산마을(獨山) 고산마을에서 이인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양돈장이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그곳 양돈장 알을 질러 넘어가면 두만산아래 옴팍한 곳에 집 너댓호 있다. 양돈장에서 넘어가는 길목은 겨우 자동차 한 대 지날정도이며 앞뒤로 산이 꽉막힌곳에 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며 예전에는 피난처로 은거중인 사람들이 모였던 곳으로 보인다. 60년대 전형적인 산골마을 같고 장작을 쌓아놓은 산중턱의 집들이 어린시절을 보는듯했다. 그래도 새마을사업으로 마을에 농기계 보관창고가 조립식 건물로 있고 마을로 넘어가는 앞산 길은 달구지한대 지날정도로 가파르고 구불거려 앞에서 차가 온다면 비켜가기 어려운 정도.
★상리마을(上里) 임실현을 청웅에 자리 할 때 이천 서씨가 살고 있었는데 현이 임실로 옮기게 되자 조용한 곳을 찾아 대곡에 자리를 정해 오늘에 이르렀는데 서씨들이 오기전에는 조씨들이 대성을 이루었으나 차차 이들이 떠나자 서씨들이 득세를 하였다고 전한다. 그후에 타성이 들어오고 이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재물을 모으기는 하나 떠날때는 빈손이었다고 하며 현재도 마을 입구에 300여년된 정자나무가 두그루가 있는데 마을에 흉년이 들게되면 밤낮없이 이주일동안 이 정자나무가 소리를 낸다는 전설이 전한다.
★하리마을(下里) 조선말 남원양씨 13대손이 처음 정착햇다고 전하는데 애초에는 골짝이 크고 넓다하여 대곡(大谷)이라고 하였으며 부락 앞에 봉화산이 있는데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봉화로써 적의 침입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봉화산 상봉에 올라보면 관촌면 ,둔남면,강진면,등 임실군을 다 관망할수 있다고 하며 적의 침입등을 막기위해 보화불을 피웠던 이곳을 봉화산이라 하였다. 훗날 행정구역 개편시 골짜기 아래 마을이 있다고 해서 하리라 불렀다고 전한다. * 이곳 봉화대는 예전에는 통신수단의 한몫으로 전북 체신청 산하 봉수대의 명단에도 올라 있으며 인터넷상에도 임실지역의 유일한 봉화대로 소개되어있다.
★노전마을(盧田) 조선말 이 마을은 이인면에 속하였다고 한다. 이때 인자라고 자칭한 노(盧)씨 노인이 있었는데 이 노인의 말이 마을 중심지까지 길게 뻗은 당산 줄기가 숲으로 쌓여야 마을이 부자가 된다 하였단다. 이 말을 듣고 전주민들이 나서서 한달여 동안 나무를 심은 결과 오늘날은 당산이 보이지 않으며 1백년이 넘는 참나무 소나무 등 고목이 울창하게 들어섰다고 한다. 나무를 심기전에는 이 당산에 갈대가 무성하엿으며 그래서 옛날에는 한때 갓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한다. 마을의 명칭이 노전(盧田)이 된 것은 옛날 당산줄기 때문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노씨 노인의 성씨를 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망정마을(望亭) 임진왜란 당시 피난터로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단양우씨가 산골로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이주변 골자기에는 망전(望田) 망정(望亭) 망동(望洞)세개의 망지 (望地)가 있는데 이 안에 1만호가 피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 앞에는 백년이 넘는 정자나무 12그루가 서 있어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하며 그 정자나무 밑에는 망현대가 있어 임진왜란 당시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달래엇으며 망정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마을 뒷산을 사장치라(射場峙)라 부르고 있는데 당시 활을 쏘며 무술을 익혔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가동마을(佳洞) 이곳에서 동남쪽 표고 420미터쯤에 가동마을, 아름다울 가 마을 동 이곳역시 병자호란때쯤으로 당시에는 권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권장자로 알려졌고 예전에는 30여호쯤 살다가 현재는 14호가 지난해 19헥타를 경지정리 햇다고 한다. 특히 예전에는 이 마을에는 모기가 없어 삼계의 박우터 사람들이 이곳에 제각이 있었는데 거기서 여름이면 잠을 자고 아침에 내려갔다고 하며 청주한씨 12,11대조를 가동에 모시고 한씨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오수는 6키로미터,삼계는 5키로미터, 임실 10키로미터로 오랜 옛날 남원에서 석정암을 지나 이곳 가동에서 강진으로 태인 곰소까지 지나가는 소금 받으러가는 길이었다고 하며,정월리 사람들이 됫재를 넘어이곳 가동으로 석정암으로 내려갔다고 전한다. 마을앞에 우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특히 왜정시 (1937~8년) 한발에도 이곳은 샘이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본시는 건개울-개울이 없다고 해서, 또는 권가울 권씨가 살았대서 그렇게 불리웠다고 하며 마을 아래쪽에 권씨 선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권씨들이 서당을 지어 학문을 익힌 것으로 보여지는 서당골이 있고 산정임에도 수렁논이 있어 쌀을 주로오수장에 내다 팔아 자녀들의 학비로 썼다고 한다. 또 오수로 가는길목에 500여미터의 산 정상에 능선을 닦아 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말을 달렸다고 전하며 현재 지도상에는 옛 길로 오수-석정암-가동-가랑굴-청웅강진--태인-정읍-곰소로 표시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일설에는 권장자가 살면서 그세를 누렸는데 시주하러 다니는 스님에게 인색하였던 모양으로 그 스님이 가동마을 아래에 돌거북이 마을을 올려다보고 있어 거북을 목을 자르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자 권장자가 그말에 가북의 머리를 쳐 없앴는데 그후로 권씨가 자시라 졌다고도 한다. 마을에 주막이 있어 이 길을 지나는 장사꾼들이 묵고 가거나 우물을 이용했다고 하며 현재 이 우물은 단기 4292년 을해에 준공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한동환씨 증언) 석정암 뒤편에 큰바위에 부처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불공을 들렸다고 전해오며 바위 앞(현재 밭)을 절터로 본다고 하였다.
★신기마을(新基) 조선말 형산 마씨가 터 잡고 살았는데 하루는 걸인내외가 구걸하러와서 마씨노인이 자기 식구 대하듯 안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진수성찬에 밥을 배불리 먹게해주고 노자까지 주어 후한 인심을 베풀다고 한다. 이걸인 내외는 너무 고마워서 가는곳마다 이야기를 퍼뜨렸고 소식을 들은 다른 걸인들은 매일같이 마씨집에 백여명씩 드나들어 매일 잔치하듯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마씨는 불평 한마디 없이 이들을 따뜻하게 대했으며 그러다보니 넉넉했던 살림이 10여년만에 파산이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관아에서 새 마음이 움트는 부락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신기(新基)리라고 불럿다고 한다. 이때부터 관에서 인심좋은 마을로 불리어 임실이 양곡 창고를 제일 처음 신기부락에 지어 곡식을 보관하다가 일제때 창고를 부숴버렸다고 하며 지금은 양곡 창고 터를 사당터라고 부른다. 사당터 앞에 고봉산에는 사람의 형체의 바위가 있는데 마씨의 3세손 영효가 이곳에서 3년 3개월을 단식기도하여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와 인출정으(仁出井)로 불렀으며 마을 주민들은 백중날 이곳에서 약수제를 지내고 농악으로 터를 울린다고 한다.
★정촌마을(亭村) 조선 (1455년) 단종무렵 함양오씨가 이곳에 처음 와서 터를 잡았다는데 오씨는 전라도 해남 현감을 역임했으나 단종이 왕위를 잃자 벼슬을 그만두고 이 마을에 들어와 나무를 심고 가꾸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마을의 다른 이름은 정잔으로 불리운다. 마을앞에 노거수가 있어 항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금동마을(琴洞) 조선 (1470년) 청주 한씨 14세손 한전이 이마을에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엇다고 전한다. 마을이 거문고 같이 아름답다해서 인근 주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때 한호겸이란 학자가 주민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재를 들여 강당을 짓고 제자 21명에게 글을 가르쳤다. 한호겸 선생은 제자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다가 병석에 지쳐 누웠는데 제자들이 선생의 은헤를 아쉬워 하며 보답한다는 뜻에서 금동서원을 건립하고 매년 춘추로 선생의 뜻을 기리며 향제를 올린다. 금동이란 마을 이름은 서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지산마을(芝山) 화전민들이 처음 들어와서 정착한 이 마을은 산 봉우리가 모두 다섯 개가 있는데 바위하나 없이 숲이 울창하게 들어차 매우 경치가 좋았다고 한다. 도한 토질이 좋아 농사가 잘되어 사람들이 모여들어 차츰 촌락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 다섯 봉우리가 꽃같이 아름답다하여 지산(芝山)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두만마을(斗滿) 약 300여년전 화전민들이 들어와 산을 일궈 곡식을 심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논 한뙈기 없이 산으로 둘러쌓인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고생이 막심했으나 토질이 좋아 농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사를 지어 생활이 넉넉해지자 옛날 고생하던 때를 생각해서 인심이 후하게 되었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웃 주민들이 곡식을 사러 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곡식을 사러 온사람들에게 말(斗)을 넉넉하게 가득히(滿) 담아주는 미덕을 보여서 이런 사실들이 널리 알려지며 두만이라고 했다고 한다. * 이곳 두만리는 신안팔경의 하나로 두만 낙조(斗滿落照) 구고 팔경에서는 두만명월(斗滿明月) 로 유명하다.
★장재마을(藏財) 200여년전 경상도 함양땅에 박씨 3형재가 살고 있었는데 가세가 워낙 곤궁하여 문전걸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큰아들이 울(蔚) 이 정처없이 구걸하며 떠돌다가 이곳에 당도하여 산의 혈맥을 보고 정착하게 되었으며 인가가 전혀 없던 이곳에 차츰 촌락을 이루고 주민전체가 넉넉치 못한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주민들이 산을 개간하는것에 눈뜨게 되었고 나무를 심고 곡식을 심어 차차 살림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산에서 부를 얻었다 하여 산장재(山藏財)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함양 박씨 3형재중 장자(長子)가 산이 좋다하여 처음 정착한 점을 들어 장재울(長財蔚) 이라고 했으나 행정구역 개편때 장재마을로 바뀌었다.
★낙촌마을(洛村) 한말 한낙천 이란 사람의 3세손 지호(地號)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으며 부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의 우물물이 좋아 여름에는 매우 차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생활하는데 도움이 컷다고 한다. 그래서 물이 좋은 마을이라 하여 낙촌(洛村) 이라고 하였다.
★현곡마을(玄谷) 5백여년전 여산 송씨가 제일 처음 터를 잡고 정착했으며 산세가 좋은 고장으로 마을앞 산이 거북이 형체로 뻗어있어 산이름을 거북사으로 부르며 마을 이름을 거묵굴이라고 했다한다. 그후 골짝이 크다해서 행정구역 개편때 현곡(玄谷)이라 칭하게 되엇다고 한다. *이곳은 운수 팔경에 광암단풍(光巖丹風)이라하여 현곡에서 운암으로 향하는 길목에 광석바위와 단풍이 아름답다한다.
★연화마을(蓮花) 400여년전 김해김시가 이마을 산세를 보고 정착했다고 한다.마을 뒤로 뻗은 산이 꽃봉오리같이 아름답다하여 마을 이름을 연화리라 하였다고 하며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이 마을은 화전을 개간하여 살고 잇는데 토질이 좋아서 심어먼 놓으면 곡식이 잘된다고 한다. 또한 산이 크고 물이 좋아서 주민들의 인심이 좋다고 전한다.
★화성마을(花城) 마을 뒷산 이름이 국화봉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화성리라고 하였다고 전한다.500여년전 장씨 일족이 살다가 천재지변으로 몰락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고증이 된바 없고 임진왜란직전 충청도 공중서 전주이씨 이기(李錡)라는 사람이 들어와 마을를 아루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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