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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는 우리 안에 있다
(민수기 11:1-4; 10 : 15, 13:30-33)
요즘 여행이 참 편리해진 덕에 여행을 가는 경우가 부쩍 많아 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다른로 갈 때에는 넘어야 할 장벽들이 많습니다.
중국이나 동남아로 동남아로 여행할 때
향채 때문에 여행 내내 음식을 도무지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처럼 여행에는 여행에는 음식이라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문화라는 걸림돌도 있고, 언어라는 장벽도 높습니다.
우리는 민수기를 통해, 애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이
군대조직과 제사장 조직을 갖추고
시내산에서 유월절을 지킨 후에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한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여행이 편리한 시대에도 여러 가지 장벽들이 있다면,
그 시대에 광야를 순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어 움들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에 들어갔을까요?
안타깝게도 출애굽을 경험한 첫 세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무슨 장애물 때문에 그들은 그들은 광야를통과하지 못한 것일까요?
핵심적 문제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인생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계속 걸어가는 데도 안식의 삶은 요원하고 도리어
광야의 길은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광야의 길이 그치지 않는 것일까요?
오래 전 광야의 길을 걸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광야는 그들 속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이르기 위해 통과해야만 했던
그 광야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조성된 도시와는 달랐습니다.
비록 그들이 애굽에서 오랜 세월 노예 신분으로 살았지만,
그래도 그곳은 삶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적 조건은 광야보다는 나았습니다.
광야를 텐트로 이동하며 생활하려면 적지 않은 불편함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작년, 고등부 단기선교팀이 피지를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더운 날씨에도 제대로 씻을 수 없었던 점과
제대로 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었던 점을 가장 먼저 꼽았습니다.
편한 도시 아파트에 익숙한 아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가장 힘들었던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광야 길 도중에 이들은 광야 생활의 불편함을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수기 11 장 1절에 기록된 “악한 말로 원망 ”했다는 말은
단순히 나쁜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에 대해 불평했다’는 뜻입니다.
사기가 충일해서 가도 쉽지 않은 순례의 길을 투덜 거리면서 가게 되니,
자연히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불평의 소리가 퍼져가자
그들이 행진하는 진영 끝에 여호와의 불이 임했습니다.
불평을 그치라는 엄중한 경고가 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불편케 하는 삶의 악조건들을 적어도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불편함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는 이곳이 천국이 아님을
확인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릭 워렌 목사님이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강 문제이든지, 주변 환경 문제이든지,
자녀 문제든지, 나를 불편케 하는 뭔가가 꼭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불평을 쏟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광야 길을 가기가 정말 힘들어집니다.
불평이라는 내적 광야는불편함이라는
외적 광야를 참을 수 없는 무거운짐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과해야 할 과정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런 불평을 하나님께서는 자제시키십니다.
정신적 바이러스
이렇게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된 백성들은대오를 갖추어 계속 행진을 합니다.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어 한 장소에 머물게 됩니다.
그 곳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데,
함께 가나안 순례에 참여한 이방인 무리들 속에서 이런 말들이 흘러 나옵니다.
“식사가 이게 뭐야. 고기가 없잖아. 애굽에 있었을 때는
가끔 생선도 오이도 파도 마늘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 11:4-5)
진영의 한 구석에서 반찬 타령이 터져 나오는데,
이 작은 반찬타령이 금새 온 백성들 사이로 펴 져나갑니다.
10 절에서 보는대로 급기야 모든 가정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민 11:10).
병균 바이러스나 컴퓨터 바이러스만이 급속히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 바이러스도 강력한 전염성을 가집니다.
한 무리의 불만 섞인 말이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백성들 온 가정의 식탁에서 불만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게 만드는 것을 보십시오.
사실 이들은 애굽의 노예를 벗어나 자유민이 되었고,
가나안을 향하고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웃어야 하는 상황인데,
고작 고기 없는 음식 때문에 모든 백성의 가정에 ‘울음’이 터져나 옵니다.
이들은 머지 않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의 풍성한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삭막한 광야 같은 마음이 결국 곧 지나갈
음식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광야를 딜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이 품어야 하는 마음은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
그 약속을 바라보는 마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무너지는 지도자
이런 백성들의 불평과 울음소리가 모세에게 들립니다.
그러자 지도자 모세가 화를 냅니다.
11 장 10 절은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불쾌함은 내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불평에 마음이 상한 모세가 이제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토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민 11:11).
14절에는 절에는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마침내 모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말하는지 보십시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민 11:15).
급기야 지도자 모세가 자살충동을 느끼는 지점에까지 이릅니다.
이 점이 상상이 되십니까 ?
하나님께서 칠 십 명의 장로를 세워서 모세를 도와주게 하시고 그를 위로하시지만,
어쨌든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 때문에 이 지경까지 이릅니다.
이처럼 무리의 작은 불평은 지도자를 내적으로 탈진하게 만듭니다.
실로 지도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문제 상황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 상황 앞에서 자기 이익이나 일차적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불만을 표출하는 대중들의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어 지도자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광야 순례의 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주 미국의 시사주간지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Bloomberg Businessweek)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임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4년 후 모습을 가상해서 만든 사진을 잡지의 표지에 실었습니다.
그 모습은 검은 머리가 백색이 되고 주름살이 깊이 패인, 아주 폭싹 늙은 노인 모습이었습니다.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만큼 고된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시대 속에서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라는 자리도 쉽지 않습니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직장에서 겪는
오늘의 스트레스와 미래의 불안을 모두 어깨에 지고 살아가는 고독이 있습니다.
삶의 짐이 너무도 무겁습니다.
이런 짐을 느끼지 않은 대한민국의 가장이 있을까요?
이런 가장의 마음이 때로 는 작은 말 한 마디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위로 하나로 광야의 길을 힘을 내서 통과하게 격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가정의 리더인 가장의 옆에서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정탐꾼의 보고
이렇게 무리들 무리들 사이에 음식에 대한 불만이 식사 때마다 나오고,
사소한 불편에 대한 백성들의 불평이 터져 나오면서 지도자 모세는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모세와 가장 가까운 지도자인 아론과 미리암마저
모세의 권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일이 일어났습 니다.
아론과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최고 지도부의 구조에 금이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모세의 리더십을 보호하기는 하셨지만,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위기를 초래한것은 늘 이처럼
마음 속에서 자라난 사소한 불평과 불만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마침내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바라다 보이는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점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12 지파의 지도자들을 정탐꾼으로 세워 가나안 지역을 정탐하게 합니다.
비로소 정탐을 마친 이들이 회중 앞에서 결과를 보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갈렙은 가나안 땅이 실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가서 그 땅을 취하기만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명의 정탐꾼은 나와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것이라.”( 민 13:32-33)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최고의땅을 최악의 땅이라 악평합니다.
나아가 자신들은 그 땅 거주민에 거주민에 비해 ‘메뚜기’와 같이 약하고 초라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땅을 나쁜 땅으로, 그 땅의 거민들 전부를 엄청난 거인이라고 확대하고,
자기들은 모두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축소하는 이런 과장과 왜곡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그들의 ‘불신앙’이라는 안경 때문입니다.
그 안경이 현실을 뒤틀리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안경을 끼고 있는 한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의 길에는 가나안 땅의 성읍과 원주민이라는 장애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과 원주민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선을 교정하지 않고서는,
불신앙적 안목이라는 자신들 속의 장애물을 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외적인 장애물들은 결코 통과할 통수 없습니다.
이렇게 10 명의 정탐꾼으로부터 과장되고 왜곡된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 보고는 백성들 내면의 광야와 마주쳐 울려 그들의 상상을 점점 더 나쁜 쪽으로 확장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상상이 거쳐간 지점 들은 이렇습니다.
가나안의 땅이 거민을 삼키는 삼키는 땅이라,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이 사실 가장 나쁜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
그렇다면 그들은 속아서 애굽을 나왔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땅 거민 들이 모두 다 거인들이고
그 땅은 정복할 수 없는 곳임을 알고 있으시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으로 인도하셨다면,
결국 그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려고 데려 나온 것이 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회중들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불신앙과 어리석음에서 재구성된 가상의 현실 때문에 밤새 통곡합니다.
우리도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염려에만 깊이 빠져들면
현실은 무너져 내리고 부정적 상상이 만드는 가상의 세계가 나를 둘러싸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더 염려하고 절망합니다.
부정적 가상세계는 점점 더 커지고어두워집니다.
그래서 백성 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 민 14:1-2).
하나님을 따라나선 것을 이처럼 후회한 이들은 결국 그들의 말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광야의 방황이 시작되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1세대는 40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모두 다 죽고 맙니다.
그들 안의 광야
시내산을 힘차게 출발했던 이들은 이처럼 결국 광야 길을 통과하지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실패하게 만들었을까요?
어떤 장애물이 가나안 땅을 향한 그들의 여정을 가로 막은 것일까요?
그들 앞에는광야 길에서 겪기 마련인 생활상의 불편함이라는 장애물도 있었고,
가나안 땅의 성읍과 거민들이라는 위협적인 장애물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을 실제로 좌절시킨 것은 그들의 내 면에 놓인 장애물이었습니다.
잠시의 불편함도 견디기 싫어하는 마음,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못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사실상 더 큰 장애물로 작용했습니다.
사실 광야는 그들 안에 있었고, 그들 안의 광야가 삶을 견딜 수 없는 광야로만든 것입니다.
그들 안의 광야는 사막화에 의해 목초지가 사막으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점점 더 확장되어 결국 그들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처음 에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불평 (11:4-10))이었던 것이
모세의 권 위에 대한 도전으로 도전으로 (16:1-35),
나중에는 약속의 땅에 대한 지도자들의 부정적 평가로,
마지막에는 결국 모든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며 절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불평이 아래서 위로, 주변에서 주중앙으로 향하다가,
마침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만으로 격발하게 됩니다.
그들 안의 광야가 밖으로 표출되었다가, 안으로 심화되고,
다시 밖으로확대 재생산되면서, 결국 이들 안의 광야가 인생 전체를 광야로 만듭니다.
결국 그들은 40 년간 광야를 방황하면서 그것이 그들의 삶 전부가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며 출애굽 1세대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광야는 우리 속에도 속에도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이야기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인생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광야 길에도 장애물 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런 장애물들 때문에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고, 때로는 불평합니다.
때로 내 삶의 조건들을 악평하기도 합니다.
광야적인 조건들 때 에 내 삶은 광야일 수 밖에 없다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우리의 삶을 광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외적 조건만일까요?
아니면 우리 삶을 광야로 생각하 게 만드는, 우리 삶에 주어진 축복을 발견치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으로 점철된 점철된 황량하고도 척박한 내 마음일까요?
온 국민들이 광야 처럼 느끼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십시오.
어쩌다 이런 상황에 오게 된 것일까요?
외적 장애물들이 그 한 원인입니다.
세계적 세계적 불황과 성장과 복지의 관계, 북한문제,
미국, 중국, 일본과의 복잡한 함수관계며, 독도문제며,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견딜 수 없는 광야와 같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국민들 속에 있는 부정과 부패, 부정직, 과도한 욕망, 배타적 이기주의, 지역주의,
그릇된 이념 등등, 이런 내면적 광야가 아닐까요?
내 안의 광야를 발견하여 치료하지 않고서는 광야를 벗어날 해답은 없습니다.
내 안의 광야
우리는 인생 순례 길을 걷을 때 주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나에게 이런 광야를 걷게 하시는 거지 ?’ ‘ 왜 이런 광야가 여기 놓인 거지 ?’
우리는 광야스러운 삶의 외적 조건에만 집착하면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늘 원망조로 던지는 것은 오히려 광야를 통과하기가 더 힘들게 합니다.
또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언제 이 광야의 길이 끝나는 끝나는가?’ 늘 ‘언제?’ 란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주저 앉아 광야길이 끝나지 않음을 타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삶을 더 황량하게 만듭니다.
이때 우리가 더 자주 던져야 할 적절한 질문은 이런 겁니다.
‘왜?’, ‘언제?’가 아니라 ‘무엇을?’이라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해야 광야의 길에서 한 발짝이라도더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잘못된 운명의식과 피해의식과 불평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을 과장하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질문하고 발견한 대답을 실행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광야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무엇보다 광야의 길을 갈 때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 ?’ 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이 광야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광야를 지나면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사람간의 갈등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야 하는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야 하는 그 ‘누구 ’는 바로 ‘나’입니다.
내 안의 광야를봐야 참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포장된 내가 아니라 적나라한 나를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내 안의 광야가 내 삶을 더욱 광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안의 성숙치 못한 언 , 남의 흉을 보는 말투,
남의 감싸 주지 못하는 속 좁음, 이런 내 안의 광야를 봐야 합니다.
이런 것이 인간관계라는 삶의 땅을 삭막한 광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 안의 광야가 해결되지 않으면 내 삶은 여전히 광야에 있을 뿐입니다.
힐링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억압을 피해서 떠났습니다.
애굽을 벗어나기만 하면 곧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인생의 광야를 벗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애굽을 벗어난 그들의 삶은 여전히 광야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속에 남은 애굽, 즉 그들 속의 광야 때문이었습니다.
이 것이 애굽 밖에서도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광야를 살게 한 것입니다.
요즘 ‘힐링캠프’라는 TV 프로그 램이 인기 입니다.
들어보면 사람들 사속에 가슴에 시린 사연들, 퍼렇게 멍이 맺힌 사연들이 많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울면서 말합니다.
무뚝뚝한 남편 때문에, 말 안 듣는 아들 때문에 내 삶이 불행하다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점 점 ’그들 ’ 때문이 아니라 ‘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내 생각’ 바로 그것 때문에 내 삶이 이렇게 행복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
바로 이 때 힐링이일어납니다.
자신의 내면의 광야를 발견하지 못하면 광야의 삶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 중요합니다.
그러나 광야의 길을 가면서 내 안의 광야를 발견하면 비로소 광야 길의 끝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을 광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내 안의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안의 광야가 무엇인지, 어떤 습관, 어떤 태도가 내 삶을 광야로 만드는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마음의 광야에 말씀의 나무를 심다
그 광야가 발견되었다면 그것이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외적 광야는 금방 확장되지 않지만 내적 광야는 금방 넓어집니다.
작은 불만, 작은 불평이 삶에 부정적 영향을 금방 미치게되어,
그 작은 것이 온 삶을 광야로만들고 사막화시킵니다.
동기회에 갔던 아내가 잘나간다는 친구에게 받은 불편함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들어왔습니다.
그 콧대 높은 동창과 내 안의 시기심이 스파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게 집에 들어온 아내의 눈에 갑자기 남편이 변변찮게 보입니다.
“왜 저것 밖에 못돼 !” 그리고는 별 것 아닌 일에 바가지를 긁습니다.
남편은“당신, 오늘 따라 왜 그래!”하고 싸우고는, 상한 기분을 안고서 직장에 출근합니다.
남편은 직장에서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내다가 직장 상사의 눈에 납니다.
그래서 저녁에 집에 빨리 들어오지 않고 포장마차에 들릅니다.
왜 늦게 술 먹고 오느냐고 아내가 다시 바가지를 긁습니다.
이처럼 작은 광야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광야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우리는 광야가 확산되지 않도록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 안의 광야에 계속 좋은 것을 심어야 합니다.
황사를 만드는 만드는 사막에 나무를 심어야 황사가 해결되는 것처럼,
광야라는 부정적 파급효과를 막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긍정적 나비효과를 이루어야 합니다.
며칠 전 ‘빼빼로 데이’가 있었습니다.
‘빼빼로’는 막대 모양의 과자인데,
11 월 11 일에 이 과자를 주고 받는 것이 지금 하나의 명절처럼 되었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은 광복절이나 삼일절은 몰라도 빼빼로 데이는알고, 더 열광합니다.
정말 아주 작은 것이 전국적 문화를 만들었으니,
이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나비효과의 구체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내 안의 광야에다 믿음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심으십시오.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의 씨앗을 내 마음의 광야에 심고, 감사의 씨를 마음의 광야에다 심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하나 만한 믿음 이 산을 옮긴다고했습니다.
아주 작은 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것이 자라서 광야를 푸른 초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광야를 말씀의 씨가 자란 푸른 숲으로 만듦으로 광야의 삶이 드디어 끝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변화를 통해 다른 사람의 광야도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는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을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매일 말씀의 생각을 내 마음의 황량한 광야에, 내 마음의 외로운 광야에 심으십시오.
그것이 자라게 하십시오. 열매를 맺게 하십시오.
매월 함께 외우는 외우는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암송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인생의 광야 길에서 외적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장애물은 우리 안의 광야입니다.
광야를 찾아내십시오. 그 광야에 말씀을 심어, 그 광야가 푸른 숲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고 해도,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르게 될 것 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