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왜관 중심가 단독 주택에서 7형제 자매들과 함께 어머니집에서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대구쪽으로 8km 떨어진 금남동 과수원에서 일주머니(작은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사과를 수확하여 왜관 사과협동조합에 출하할 때면 우리가 사는 집에 들려 생활비를 내 주었으며 가끔 늦으면 밤에 자고 가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두 달이 넘도록 들리지도 않을 때도 있었다. 생활비가 떨어진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금남동 과수원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본인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가기 싫은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자식들의 끼니거리를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설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참담한 심정을 내색도 않았지만 먼 훗날 장성한 나에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나를 데려고 간 것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장차 나를 양자로 들이고자 하는 일주머니의 희망을 의식해서일 것으로 생각 되어 진다.
1950년 6월, 6.25사변이 발발하여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일이 발생했다.
7월에 들어 전황은 더욱 불리해져서 왜관도 위험해 졌다. 그래서 모든 식구가 대구에 있는 큰 이모 집으로 피난을 갔다. 칠성동 소재 이모 집은 일식 적산가옥 2층집이어서 넓은 마당에 방이 4개에 큰 다다미가 깔린 널찍한 응접실이 있었다. 그러나 이모 집에는 예전부터 이모 큰딸이 홀로 되어 자녀 아들3명과 딸 하나가 친정에 와서 살고 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응접실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지냈다. 밤에는 팔공산에서 인민군이 쏘아대는 박격포가 머리 위를 휘이윙하며 날아가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먹거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이종 사촌 형이 대구경찰청에서 경리담당으로 근무 중이었고 또 어머님이 가져온 금붙이를 팔아서 생활비에 보탰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50대 장년이었기에 보국대에 징발될 수도 있었다. 마침 종전에 영주 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고 당시 발급 받은 경찰 공무원 증을 반납하지 않았기에 보국대 징집을 면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 보낸 3개월 동안 충효 형님들과 같이 대구역에 나가서 신문팔이 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덟 살 어린 나이였지만 심심풀이로 알바이트를 한 셈이었다. 일찍이 경제관념을 몸으로 체득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된다.
9월이 되어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셔 후퇴한 이후 왜관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집은 모두 불타버렸고 집터만이 잿더미에 덮여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금남동 일주머니 과수원으로 가서 신세지게 되었다.
과수원은 영국 군인들이 참호를 파고 전투를 한 흔적이 있었으며 철수할 때 남겨둔 C-레이선을 찾아 쨈이며 커피, 비스켓, 초콜랫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어머니와 나는 금남동에서 24km 떨어진 인동 할머니 집을 방문하고자 길을 떠났다. 낙동 강변 신작로를 따라 길을 가노라면 논둑과 산비탈에 군인들 시체가 널려 있었다. 논바닥에 엎어진 인민군이며 산비탈 참호에 기대 앉은 채 죽어 있는 흑인 미군도 여럿 보였다. 그 당시에는 무서움과 전쟁의 참상을 느끼기보다 다만 배가 고프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산에 자생하는 밤나무 열매를 주워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지울 수가 없다. 이런 경험을 한 이후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를 항상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 때 먼 길을 다녀온 것은 금남동을 떠나 인동 큰어머니 집에 식구들을 데리고 가서 살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간 모양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소작농으로 할아버지내외와 큰어머니 식구들이 사는 초가집에는 잠시도 기거할 수 있을 곳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어머니가 판단한 모양이다.
결국에는 우리 가족들의 생활근거지로 왜관에서 8km 떨어진 석적면 포남1동 낙동강가에 위치한 막걸리 양조장을 아버지가 구매하였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포남1동은 대대로 조씨와 이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 촌으로 자존심들이 강한 동네였다. 강가 사람이라는 명칭은 자기들과 구분하기 위해 우리 가족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당시 전기 수도도 없었으며 교통편은 하루에 한번 왜관을 거쳐 대구까지 가는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인 오지 마을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국민학교 건물도 모두 파손되어 학교 수업은 야외 버드나무 그늘에서 가마니를 깔아놓고 하였으며 비 오는 날에는 마을 제실에 가서 칠판을 벽에 걸어놓고 엎드려서 공부하였다. 학교 교실을 짓기 위해 지푸라기를 작두로 썰어서 진흙에 개어 진흙 벽돌을 만들었고 폭격으로 파진 운동장 물 구덩이는 매일 학교 등교 길에 돌맹이를 가방에 넣어 가져가서 6개월 동안 메웠다.
학교 뒷마당에는 교장선생님 사택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운동장 일부를 텃밭으로 조성하여 채소류를 재배하였으며 귀여운 토끼도 키우고 알을 낳는 닭을 위해 풀들을 뜯어 주면서 키웠다.
어머니가 양조장 관리를 총 책임지고 있었으며 큰 형님은 양조장 회계 장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회계장부가 제대로 기재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세무서에서 압수해 가져 가면 아버지가 대구에 가셔서 서류들을 되 찾아오기도 하였다. 형님이 출장을 가거나 집을 비울 때는 그 동안 거래되는 외상술값을 어머니가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형님이 돌아오면 장부에 기록하곤 하였다. 어떤 때는 그 기간이 한 주일이 넘어 수십 건이 되어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글을 배우지 못해 한글도 읽지 못하는 어머님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정확하고 틀림 없으셨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어머니 머리를 닮아 공부를 다들 잘 하였는지 모르겠다.
양조장에서 번 돈은 포남동 논들을 조금씩 사 들여 나중에는 포남1동 앞뜰의 1/3 정도 되는 3,000평을 모두 사들였고. 남율동 소재 5천평 되는 과수원도 사 들였다.
방학 때는 과수원에서 발동기를 돌려 병충해 약재를 뿌리는데 참여하기도 하고 수확기에는 동네 처녀들과 같이 하싯고(사다리의 일본말)를 메고 다니면서 잘 익은 사과를 따고 포장하기도 하였다. 나무 상자 안에 쌀겨를 담고 그 속에 사과를 넣어 산더미 같이 쌓아 놓으면 큰 트럭이 와서 왜관 능금조합이나 서울 남대문 사과 공판장으로 실어 날랐다. 당시에는 트럭 운전사가 못 미더워서 그랬는지 아버지가 트럭운전석 옆에 않아서 서울까지 동행하는 것을 본적도 있었다. 비포장 국도를 따라 20여 시간을 달려야 하는 먼 길이었다. 무척 힘든 일을 감당해낸 것으로 생각된다.
국민학교도 다니시지 못한 어머님이셨지만 석적에 계실 동안 보여준 어머님의 살림살이 솜씨는 과히 경제학 교본에 실릴만큼 모범적이었다. 양조장이 딸린 500평 집터에는 닭장은 물론 돼지우리도 있었고, 소 마구간에는 암소 황소 모두 있었다. 매일 수거하는 계란은 가족 식탁에 항상 올랐으며 돼지는 주기적으로 출하되어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다. 소는 송아지를 낳으면 동네 이웃들에 장래(사육 위임)을 주어 기르게 하였다. 위임된 소는 주인을 위해 논과 밭일을 대신해 주었으며 소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는 위임 받은 사람이 가지고 어른 소는 우리 집에 돌려준다. 돌려받은 소는 다시 장래를 주어 마리 수를 늘려 나갔다. 한때 수십 마리까지 불어난 소는 7남매 학비와 등록금에 큰 보탬이 되었다. 항상 저축하고 미래에 대비하시는 어머님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뭉칫돈을 내어 해결하시곤 하였다. 양조장에 화재가 났을 때, 막걸리용 원자재를 대량 구입할 때, 새로 농토를 매입해 달라는 제안을 이웃으로부터 받았을 때는 어김없이 어머님의 비자금이 동원되었다. 1980년 내가 잠시 실직하였을 때 어머님이 이불 속에 감추어 두신 현금을 여기 저기서 꺼내서 아들네 살림을 걱정해 주시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그 고마운 마음 씀에 가슴이 저려온다.
어머님 말씀은 “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에 가져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대이, 죽을 힘을 다해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직장을 다닐 때 힘들다고 하면 항상 조언해 주시던 말씀이었다.
어머님은 봄에 춘궁기를 맞은 어려운 이웃들도 많이 도우셨다. 끼니를 위한 보리쌀과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 찌기미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한편 아버님을 통해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학비가 없어 진학하지 못하는 얘기를 들으면 이들을 도와주었다. 이렇게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아버님을 보면 깍뜻이 인사를 하곤 하였다. 그 당시에는 우리 아버지에게 동네 학생들이 왜 그렇게 폴더 인사를 하는지를 몰랐다. 나중에 이런 사실들을 듣고는 이해가 되었다.
석적국민학교에서는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었으며 남녀 합하여 30명이었다. 시설로는 풍금 한대가 있었고 체육시설은 전무였다. 농구공, 축구공, 탁구공은 구경도 못하고 졸업했다. 추운 겨울에는 나무 난로에 불을 피우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하여 산에서 고자배기(나무뿌리)를 캐어 오게 하였다. 나는 학교 가까이 집이 있었기에 산에는 가지 않고 대신 장작을 몇 개 가져가기도 하였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학교 수업은 없었다. 최장 8km 먼 길을 오는 학생들이 다리가 없는 개울을 건너지 못해 등교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산에 널려있는 진달래 꽃잎을 따 먹기도 하고 버려진 인민군 탱크에서 빼어낸 베아링으로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다. 또 6.25전쟁 중에 버리고 간 총알들을 바위 위에 모아 놓고 건초에 불을 붙여 던지는 놀이도 하였다. 바위 밑에서 날아가는 총알들이 내는 불꽃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동급생 중 한 명은 이런 놀이를 하다가 사망한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 천만한 짓이었다.
한편 여름에는 낙동강가에서 멱 감으면서 놀기도 하였다. 낙동강은 여러 얼굴을 가진 요술장이 강이었다. 평소에 생활 용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고마운 강이었으나 홍수가 났을 때는 붉은 황토 물로 모든 논 밭을 덮어버리는 무서운 강이었다. 당시 강물을 조절하는 댐이 없었기에 연 중 한번씩 치르는 홍역이었다. 홍수에 떠 내려오는 돼지며 부서진 초가집들을 매년 볼 수 있었다. 이런 비극적인 얘기들은 지금은 다 지나간 아련한 추억으로 최근 서울에서 모이는 동기생들의 회고담 거리가 되었다.
일곱 살 때에는 두 살 위 형님들이 한자 공부를 할 때 뒤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도 어느새 천자문을 다 외웠다고 한다. 이는 사촌인 재학이 형님이 지금도 나만 보면 회고하는 얘기 거리이다.
방과 후 집에서 혼자 공부할 때는 전기가 없었기에 처음에 석유 호롱불로 공부하였으나 나중에는 남포불로 바꾸었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하였으나 딸만 여덟 가지신 피난오신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키신 덕분에 대구에 있는 경북중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날 아버지는 어머님이 마련해 주신 현금다발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다. 혹시 성적이 차점으로 아깝게 떨어지면 보결로 합격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모든 학교 재정이 어려워 교육부에서 관행으로 인정하는 제도였었다. 그러나 다행히 합격한 것을 보고 아버지도 무척 좋아하셨다. “ 이제 됐다 “ 하시면서 이 돈으로 이번 가을에 너희 큰형 장가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셨다. 어머님이 몸소 보여주신 모범적인 생활태도 덕분에 7남매 모두가 견실한 경제활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2024년 1월 11일 글쓴이 : 윤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