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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71m의 낙산 대불 / 유비의 임종(白帝城)
장강삼협(長江三峽) 크루즈 여행
1. 첸두(成都)와 충칭(重慶)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실크로드 기행’을 마치고 함께 패키지로 왔던 팀은 서울로 떠난 후 훌쩍 쓰촨성(四川省)의 첸두(成都)로 날아와 홀로 개인 배낭여행을 시작하였다. 비행시간은 3시간이 걸린다. 원래는 신장자치구의 커얼무(格尔木)로 가서 칭창(靑藏)열차를 타고 라싸(拉薩)로 들어가 4박 5일 정도 티베트 여행을 한 후 南部의 운남성(雲南省)과 귀주성(貴州省)을 자유여행으로 돌아볼 예정이었으나 열차표, 여행허가, 폭우로 인한 도로 붕괴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 쓰촨성(四川省)에서 여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成都 공항에 내리니 새벽 4시 반, 택시를 타고 버스(汽車)터미널로 이동했다. 시간이 너무 일러 나비처럼 생긴 만두를 5元에 사먹고 빈둥거리다 여행사를 찾아갔다. 꼭 보고 싶었던 곳은 낙산대불(樂山大佛)과 아미산(峨嵋山), 그리고 구채구(九寨溝)인데 날씨가 좋지 않고 설사가 난다. 더군다나 구채구는 산사태가 나서 도로가 붕괴되어 못 간다고 한다.
명심보감에 時來風送藤王閣 運退雷轟薦福碑 라는 구절이 있는데‘江西省 신진현에 있는 등왕각의 천복비는 당나라 명필인 구양순이 비문을 쓴 명문장이라 꼭 한번 가서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마침 보러 갈 기회가 있어 순풍을 만나 등왕각에는 쉽게 도착했지만 전날 벼락이 내려쳐 천복비가 깨어져 볼 수 없었다.’는 내용인데 지금의 내 형편이 꼭 그렇다.
가는 빗줄기를 무릅쓰고 약 2시간 거리의 낙산으로 향하였다. 버스비 60元, 입장료 160元이다. 成都는 민강(岷江), 청의강(靑衣江), 대도하(大渡河)의 세 강이 합류하는 곳인데 강가에 우뚝 솟은 산은 경관이 뛰어나고 그 강가의 절벽을 파내어 조성한 낙산대불은 앉아있는 모습의 좌불상(座佛像)으로 그 높이가 71m, 머리 높이만 14.7m로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당나라 때(8세기) 9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는 이 대불은 머리 오른쪽에서부터 아슬아슬한 절벽 통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볼 수 있는데 아래에서 쳐다보면 정말 어마어마하다.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보면 전체를 볼 수 있겠지만 아래서 쳐다보니 발톱까지가 내 키보다 높다. 이곳에는 이 낙산대불 외에도 대불사(大佛寺), 오룡사(烏龍寺), 능운사 (凌雲寺), 연심사(蓮心寺) 등 사찰도 많고, 또 석굴을 만들어 부처와 보살을 모신 곳도 많아서 볼거리가 제법 있다. 또 산 정상에는 蜀中 名樓라는 東坡樓도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岷江을 굽어보고 있다. 과연 三國時代 유비(劉備)가 세운 蜀漢의 도읍이었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비가 조금씩 계속내리고 속도 계속 좋지 않아 아미(峨嵋)산 관광을 포기하고 成都 시내로 되돌아 와서 서둘러 호텔(漢都大酒店-Economic standard room)에 짐을 풀고 지친 몸을 누였다. 호텔 1박에 188元이니 한화로 대충 3만 4천 원 정도이다. 계속 배가 아프고 설사는 심하지 않은데 꼭 먹물 같은 검은 변이 나온다. 약방에 가서 영어, 일본어, 한국어.. 약사가 모조리 머리를 흔든다. 할 수 없이 필담으로‘복통(腹痛), 설사(泄瀉), 흑변(黑便)’이라 쓰고 오만상을 찡그렸더니 두 가지 알약을 주는데 48元 8角(약 9천원)으로 꽤 비싸다. 약을 먹고 자고 났더니 신통하게도 변도 제 색깔이 나오고 말끔히 나았다.
사천성에서 좀 더 관광을 하고 싶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결국 다음날 중칭(重慶)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쾌속(快速) 일등석이 117元(2만 천 원)이고 2시간 걸린다.
중칭은 중국 남서부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대도시로 양쯔강(揚子江)과 자링강(嘉陵江)의 합류지점에 있으며 2차 大戰 중에는 국민정부의 수도로, 또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곳으로 잠시 옮기기도 했었다고 하며 인구는 약 4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오후 2시 경 중칭(重慶)에 도착하여 호텔(漫陽商務酒店)에 짐을 내려놓고 프런트 아가씨에게 시내관광을 안내해 달랬더니 남산 대 독수리상(南山大金鷹), 조천문대교(朝天門大橋), 양인가(洋人街)를 보라고 한다. 부슬거리는 비를 맞으며 택시를 잡아타고 조천문대교를 먼저 보고 남산 독수리상을 보러갔다. 남산은 두 강의 합류지점이 내려다보이는 낮으막한 산인데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산 정상의 독수리상을 보러 가느라 진땀을 흘리고 계단을 올랐는데 날씨 탓인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마 어마하게 큰 황금빛 독수리상이 볼만 했고 내부로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독수리 어깨까지 오를 수 있다는데 택시를 대기시켜 놓아 사진 몇 장만 찍고 서둘러 내려와서 洋人街를 보러 갔는데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놀이공원인데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호텔로 돌아온 다음 저녁에는 여행사에 들러 관광일정을 짜 보기로 했다. 혹시나 했지만 이곳 어디에서도 한국 사람은 물론, 조선족 한사람도 만날 수가 없다. 여행사에서 장강삼협(長江三峽) 선상유람에 관하여 계약을 했다.
충칭에서 삼협댐까지 선상유람 2박 3일, 의창(의창), 장가계(장가계) 2박3일 관광을 거쳐 우한(武漢)에 도착하기까지 총 5박 6일을 풀 옵션을 넣어 1,730元(32만 원 정도)이니 괜찮은 것 같다. 카메라의 배터리충전기를 가져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충전기(소니700)를 살 수 밖에 없었는데 몇 군데를 들러 460元(8만 2천원)을 주고 샀다. 제기럴....
여행사 직원 중 한명이 영어를 조금해서 그나마 자세한 일정을 짤수 있었는데 중국어를 모르니 매사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외마디소리 몇 개 밖에 모르니..중국어도 배워둘 껄.
2. 천하절경‘장강삼협(長江三峽)’의 선상유람
오후 3시 여행사로 오라고 하기에 이곳 어디에서 배를 타는 줄 알았더니 버스가 장장 4시간이나 남쪽으로 달려 만주(万州)라는 곳에서 배를 탄다. 지도에 보니 부근에 귀성(鬼城), 석보채(石宝寨)라는 곳이 볼만한 모양인데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쉽다.
우리가 3일 동안 머무를 유람선은 3층 객실에 식당과 휴식공간이 딸린 제법 괜찮은 큰 배였다. 내가 배정 받은 침실은 2층으로 2층 침대가 둘 놓인 4인용 방의 아래층인데 내 위에는 50대의 외톨이 남자, 맞은편은 50대의 부부가 자리를 잡았는데 여자가 위층, 남자가 아래층을 사용한다. 비좁아 침대에 걸터앉으면 무릎이 맞닿고, 특히 화장실은 좁고 지저분하였지만 그러나 어쩌랴.
같이 여행할 사람이 200여 명쯤 되는 모양인데 외국인은 60대의 부인이 교원출신이라는 프랑스인 부부, 젊은 스페인 커플, 아일랜드 커플, 영국인 커플과
내가 전부이다. 내가 중국어를 못하니 결국 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었는데 프랑스인 부인이 대만에서 대학을 다녀서 중국말을 잘하고, 나머지는 나 모양 모두 중국어를 못한다.
선상 식당에서 계란 볶음밥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10元, 갑판위에 의자 몇 개 놓고 오색 등을 몇 줄 걸어 놓은 휴식 공간 사용료가 30元.... 정말 웃긴다.
저녁 9시, 장강(揚子江)은 탁한 붉은 빛으로, 흐르는지 마는지 悠長하게 펼쳐졌는데 긴 뱃고동 소리를 내며 유람선이 미끄러지듯 어둠이 깔린 양자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가. 장비묘(張飛墓)
2시간 쯤 내려갔을까 밤 11시쯤인데 장비묘에 도착했다고 한다. 비봉(飛峰) 기슭 윈양성(雲陽城) 건너편에 장비의 묘가 있다. 강가에 면하여 우뚝 지어진 장비묘와 사당을 참배하며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장비(張飛)는 단순하고 의리 있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급함 등으로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시대극에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유비(劉備), 관우(關羽)는 좀 다가가기 어려운 숭배의 대상이지만 장비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숙한 캐릭터여서 그렇다고 한다.
사당 안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하는 장면, 장비가 탐관오리 독우(督郵)를 버드나무에 묶어놓고 매질하는 장면 등을 실물크기의 조형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또 엄청나게 큰 장비의 조형물과 함께 그 위에‘정한부력(鼎漢扶力)’이라는 글자를 새겨 장비의 힘과 용맹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곳은 과연 삼국지의 무대, 중국 역사의 한 가운데라는 느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장강삼협의 첫 번 째 협곡인 구당협(瞿塘峽) 입구의 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섬에 백제성이 있다. 후한(後漢)의 공손술이 처음 쌓았다는 이 성은 유비가 오나라에 패하고 이곳으로 피신하여 제갈공명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하며 유선에게‘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 곳이다. 원래는 白帝山 기슭에 있었으나 강의 수위가 높아져 지금은 강 가운데의 섬이 되었는데 멋진 다리를 놓아 걸어서 건너다닌다.
산 밑에서 900여 계단을 오르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성안에는 유비가 제갈량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임종을 맞는 장면이 실물 크기로 만들어져 있으며 밖에는 제갈공명이 별점을 쳤다는 관성정(觀星亭)도 있다. 또 천하의 시인묵객들이 이 영웅들을 칭송하여 지은 헌시들을 새긴 놓은 비석을 모아 놓았는데 수백 개는 되겠다.
특히 이곳 백제성에서 바라보는 구당협(瞿塘峽)이 천하절경으로 중국 10元짜리 인민폐 뒷장에 이곳 풍경이 그려져 있어 사람들마다 돈을 꺼내어 맞추어 보느라 부산하다.
다. 무산(巫山)소삼협(小三峽)과 마도하(馬渡河)소소삼협(小小三峽)
좁고 깎아지른 천하절경 구당협은 8km 정도인데 깎아지른 기암괴석에 감탄사를 쏟아내며 빠져나가면 巫山이라는 도시가 나타나고, 이곳에는 대영하(大寧河)라는 장강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나타나며 이 대영하 지류를 따라 들어가면 용문협(龍門峽), 파분협(巴雰峽), 적취협(滴翠峽)이라는 좁은 협곡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小三峽이고, 또 적취협(滴翠峽)에서 다시 오른쪽 지류인 마도하(馬渡河)를 따라 들어가면 삼장협(三掌峽), 진황협(秦王峽), 장안협(長안峽)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소소삼협(小小三峽)으로 이곳의 경치는 가히 압권이다.
무산 앞에서 소삼협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1층짜리 작은 유람선으로 갈아타고 대영하(大寧河)를 거슬러 올라간다. 머리를 젖혀야 쳐다보이는 기기묘묘한 형상들의 산과 절벽은 까마득히 하늘에 닿았고, 몇 시간을 가도 가도 인적이 없는 협곡인데 이따금 강가 바위틈에 황금빛 원숭이가 뛰어 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마침 영어를 잘하는 50대의 중국인이 있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 天險의 계곡 속 까마득하게 쳐다보이는 절벽 중간에 동굴이 보이는데 이 동굴 속에 1500여 년 전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나무로 만든 관과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소삼협 마지막 협곡인 적취협(滴翠峽)이 가까운 곳에 이르면 강가 바위절벽아래 나무가 우거진 틈새에 정자각 같은 집이 있고 맥가체(맥家寨)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그 곳에서 누군가 피리를 구슬프게 부는 소리가 협곡을 울려서 사람들이 뱃전에 몰려나와 귀를 기울인다. 또 이 부근에는 강 10여m 위 바위 절벽을 따라 나무로 매단 다리 모양의 길이 보이는데 4~5km는 족히 되겠다. 도대체 누가 다니던 길이며, 어떻게 절벽에 밧줄을 매달아 엉성한 다리모양의 길(棧道)을 만들었고 또 그 위로 다니려면 얼마나 무서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중간에 무너져 내린 곳도 보였는데 맨 끝 부분에 오자 정부 사업인지 그 다리를 처음부터 시멘트로 다시 만들고 있었다. 절벽 밑에 배를 대고 시멘트를 비벼서 올리고... 참 대단하다 싶고, 이것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려나 보다 생각된다.
소삼협을 지나 대창고진(大昌古鎭)에 들렀는데 이곳은 근처에 있던 1000여 년 전의 옛 鎭의 모습으로 삼협댐을 막으면서 수몰될 형편이 되자 이곳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재현하여 놓은 진의 모습이 어쩐지 어설프고, 기념품 가게와 간단한 요기꺼리를 파는 가게만 을씨년스럽게 벌어져 있다. 이곳 거리에서 중국 두부를 맛보았는데 먹을 만했다.
다음날 배에서 눈을 뜨자 배는 小三峽을 도로 내려오다가 小小三峽이 시작되는 마도하(馬渡河) 입구에서 내려 다시 노를 젓는 10인승 기다란 용선으로 옮겨 타고 소소삼협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중간에 잠깐 노를 젓기는 했지만 모터가 달려있어 제법 빠르게 달린다. 이곳 경관도 기가 막힌데 20여 분 달리다가 대석곡(大石谷)이라는 곳에서 배를 내리란다.
이곳에는 자그마한 공연장도 있고, 집도 몇 채 있다. 이곳에서는 걸어서 거의 맞붙을 것 같은 좁다랗고 까마득한 바위협곡 속으로 들어가는데 길이 없어 물 위에 놓은 부교(浮橋)를 따라 들어가다가 다시 계단을 놓은 절벽을 올라가 절벽 중간쯤 아슬아슬한 조도(鳥道)를 걷는 코스인데 정말 스릴 넘치고, 경치가 기가 막힌다. 나이 먹은 10여 명은 결국 부교 중간에서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 조도를 돌아 나오면 다시 선착장 부근으로 나오게 되는데 공연장에서 관광객에게 소박한 고전극(古傳劇)을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용선에서 어줍짢은 영어를 구사하는 화학선생이라는 뚱뚱한 50대의 중국인은 한국, 일본은 모두 중국이 뿌리라며 침을 튀긴다. 얼빠진 국수주의자 같으니라구...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곳의 물빛은 양쯔강 원류의 흙탕물이 아니라 너무도 푸르고 맑아서 돌아오는 길에 이태리어로‘산타루치아’를 불렀더니 멍청한 중국화학교사 놈 돼지 멱따는 소리로 따라 부른다.
장강삼협은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인데 밤에 지나쳤을 巫峽의 강가에는 춘추전국시대의 대시인 굴원(屈原)의 고향이고, 바로 근처의 향계하(香溪河) 안쪽에는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의 고향이다. 한나라 원제(기원전 1세기)의 궁녀였던 왕소군은 越나라 출신의 서시(西施), 춘추전국시대의 초선(貂嬋), 당 현종의 왕비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 고대 四大 미녀로 꼽히는데 서시는 침어(沈魚), 왕소군은 낙안(落雁), 초선은 폐월(閉月), 양귀비는 수화(羞花)라고 칭송하였다.
이들의 미모를 두고 이야기꾼들은
‘沈魚 -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에 가라앉았다.’- 西施
‘落雁 - 기러기가 날개 짓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 王昭君
‘閉月 - 달이 부끄러워 구름사이로 숨었다.’ - 貂嬋
‘羞花 -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楊貴妃
는 말을 만들어 냈다.
또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시(詩)와 술(酒)과 달(月)을 너무나 사랑했던 천재시인 이태백(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의 고향이 이곳인지 만주(万州)부근에서는‘시선 이백 지향(詩仙李白之鄕)’이라는 표지글도 보인다.
이백, 굴원과 왕소군의 고향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흔적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저녁에 옆 선실에서 누가 부는지 플륫으로 위모레스크,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연주한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분위기 탓인가 아름답게 들린다. 遊覽船에서의 2박 3일, 나름대로 멋진 여행이었고 특히 서양인들과 친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나의 어설픈 프랑스어, 스페인어(올라, 세뇨리따...),
아일랜드 노래(아일랜드 민요 Molly Malone과 Irish Lullaby) 덕분인지 한결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로 e-mail을 주고받으며 사진을 보내 주기로 하였다. 이렇게 나의 멋진 장강삼협 유람은 끝났다.
라. 삼협(三峽)댐과 의창(宜昌)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삼협댐은 1994년에 착공하여 2002년에 완공되었다고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댐이다. 발전량 22500 메가와트로 세계 1위란다.
그러나 2008년 진도 8의 강진으로 사망자 7만, 부상자 37만, 행방불명자 2만 명을 기록하였던 쓰촨성(四川省)의 대지진은 이 삼협댐에 가두어 놓은 물의 압력으로 발생하였다고 하니 인간이 만든 재앙이었다고 할 것이다. 아무튼 이 댐으로 인하여 상류지역은 엄청난 호수가 형성되었고 높은 산봉우리가 섬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만주(万州)에서 시작되었던 장강삼협 2박 3일의 크루즈 여행은 이 댐에 이르러 끝을 맺고 이곳의 전용버스로 갈아타고 댐의 관광길에 나섰는데 여기서도 안전을 위하여 철저한 소지품 검사를 한다. 댐 완공 기념공원과 전시관, 댐의 위와 아래 등 몇 군데에 차를 세우고 10여 분씩 관광시간을 준다.
댐 관광을 끝으로 크루즈 여행을 끝내고 곧바로 버스로 갈아타고 의창(宜昌)으로 행했는데 3시간 정도 걸린다. 여기서 장가계로 가는 열차표를 받았는데 3등 칸으로 11시 57분 출발이다. 분명히 계약할 때는 침대차라고 했는데 이곳 가이드가 장난질을 친 모양이다. 항의를 해서 침대차로 바꾸어 볼까 하다가 그 악명 높은 중국의 3등 열차를 경험하여 볼 작정으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중국어를 못해 따질 형편도 못되었지만.....
출발까지 3~4시간 여유가 있어 지도에 있는 옥천사(玉泉寺)를 다녀올 작정으로 사람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손짓 발짓으로 물었더니 가는 데만 택시비가 250元(5만 원)정도 되고 열차시간 전에 돌아오기도 어렵다고 하여 포기하고 시장구경을 나섰다. 꾸질꾸질하고 지저분하기 그지없었지만 중국인들 삶의 현장을 체험해 볼 겸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시장구석 가판대 옆의 좁은 나무의자에 앉아 쇠고기와 야채를 다져넣은 빵 두 개에 5元, 콩을 직접 갈아주는 두유 한 컵에 2元을 주고 사서 저녁으로 먹었는데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거리 가판대 음식점의 간판에 한국야채를 쓴다고 써 놓았다.(韓國生菜)
아무튼 중국인들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무데서나 가래침 돋구어 뱉고, 웃통 벗어던지고, 먹고 마시고, 거침없이 떠들어대고, 길거리 아무데서나 카드하고 마작하고... 심지어 식당에서 내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 쪽으로 아이의 다리를 벌려 안고 소변을 보게 한다. 또 가는 곳마다 바글거리는 중국인들을 보며 이 엄청난 인구가 무진장한 지하자원과 더불어 어쩌면 중국발전의 원동력이 되겠구나 하는 경외감도 든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