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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납공파 안기종(安起宗, 1556∼1633) 의 지헌실기(止軒實記) / 安邦老 編 : 1925년간행 [국립중앙도서관 온라인 열람가]
(국역) 지헌실기(止軒實記) / 안방로 編 ; 정석태 譯 [서울 : 경인디앤피, 2018]
조정상(趙貞相,1727~?)이 지은 안기종(安起宗)의 행장(行狀)과, 윤필병(尹弼秉,1730∼1810)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안원린을 탐진시조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런 글을 지을 당시에는 다른 문헌에 안원린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으므로, 1925년 실기를 간행할 당시에 가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
강진안씨세보(康津安氏世譜) : 탐진안씨(耽津安氏) 경인보(庚寅譜, 1830) 純祖 30(1830) : 원문 이미지 보기
탐진안씨 상장군공파와 헌납공파가 계보가 연결되지 않은채 합보로 간행.
탐진군 안원린은 나오지 않으며 순흥분파라는 말도 없다.
[이 서문은 합천 두방리 탐진세고 책판(陜川頭方里耽津世稿冊版)에 들어 있음.]
안원린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는 않으나 죽성군, 탐진군의 순흥 이봉이 나옴. 탐진이 순흥분파라는 말은 1849년 이전에 나온 것으로 보임.
1883년 강진(탐진)안씨족보(康津安氏族譜) : 안원형, 안원린을 순흥 안목의 아들로 등재
아래 오성군파 족보 서문에는 오성군을 비조로 하고 있으나, 기정진의 서문에만 후일 주석을 달아 안원린을 기입하였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 탐진안씨족보서(耽津安氏族譜序), 이재유고(頤齋遺藁) 卷之十一 序
기정진(奇正鎭, 1798~1879), 탐진안씨족보서(耽津安氏族譜序, 1845년),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卷之十七 序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탐진안씨족보서(耽津安氏族譜序, 1905년),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卷之十九 序
기정진의 족보서문은 1906년(병오) 간행 탐진안씨 족보에, 최익현의 족보서문은 1908년(무신) 간행 탐진안씨 족보에 실려 있다. 최익현의 서문은 永曆五周乙巳(1905)에 썼다고 하였다.
아래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글에 오성군파 상계 계보 "안우(安祐) - 안현(安顯) - 안윤기(安允基) - 안사종(安士宗) - 안기(安起), 안지(安止)"가 나오나, 안원린은 없다.
有明朝鮮國故宣敎郞活人署別提勿齋安公行狀(1765년), 이재유고(頤齋遺藁) 卷之十七 / 行狀
오성군파 안의(安義,1529~1596)의 행장(行狀)
三槐堂安公墓表 丁酉 (1777년), 이재유고(頤齋遺藁) 卷之十五 / 墓表
오성군파 안전(安壂, 1627~ ?)의 묘표
송환기(宋煥箕, 1728-1807), 鰲城君安公傳 : 性潭先生集卷之三十 / 傳
오성군 안우(安祐) 장군의 전기이나, 안원린은 나오지 않고, 아들과 현손에 대한 언급만 있음.
[아래 글도 egloos 블로그에 있던 것이나 사이트의 폐쇄로 링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탐진 시조 안원린(安元璘)이 처음 나온 시기는 경인보(1830) 이후 1849년경 [퍼옴] http://botw.egloos.com/10912418 씨족원류(1680)에는 탐진안씨 시조로 전공총랑(典工摠郞) 안덕린(安德璘), 안우(安祐, ?∼1362), 안지(安止, 1377∼1464) 등을 따로 적고 있고, 안원린(安元璘)은 보이지 않는다. [안기(安起)는 안지(安止)의 형이고, 안석손(安石孫)은 그 증손자임.] 후손은 안덕린(安德璘) 계열만 주로 적어 놓았는데, 그 아들로 기록된 안복(安福)은 오늘날 탐진보에 안원린(安元璘)의 아들로도 기록되어 있지만 헌납공 안도(安堵)와 동일인이라고 하였다. 안복의 후손은 씨족원류와 탐진보가 전혀 다르므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조선말 실제의 탐진안씨는 경인보(1830년)에 나온대로 씨족원류와 달리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 ?∼1362), 상장공(上將公) 안례(安禮), 헌납공(獻納公) 안도(安堵)를 시조로 하는 계보가 연결되지 않는 3개파가 있었다. 오늘날 탐진안씨 족보는 이 3인을 모두 이전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던 안원린(安元璘)이라는 인물의 아들로 하고 있고, 나아가 순흥 안목(安牧, 1290-1360)의 손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800년 이전 기록으로 이 3인을 형제로 볼만한 근거는 사실상 없는 것 같다. 안도(安堵)는 1388년, 안례(安禮)의 아들 안홍기(安鴻起)는 141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로보아 안례와 안도는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안우 장군이 졸한 1362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어린 아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안우 장군과 조부라는 안목의 졸년이 거의 같은 것도 넌센스다. 오늘날 탐진보에 실린 전에 없던 인물 안원린(安元璘)의 행적이나 관직 기록은 어디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 기록에 전해오지 않던 인물이 500년 후에 새로 나타나려면 묘지명 같은 신뢰도 높은 새로운 기록이 발굴되어야 힌다.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은 전혀 없는데.... 씨족원류 탐진안씨 / 순죽탐 족보(1980) 탐진안씨 탐진안씨 계보 고증 탐진안씨 역대 문집 / 문집의 세계도(世系圖) 탐진안씨 여말 선초 문과 급제자 방목 보기 ===================================================== 성균관대학에서 운영하는 한국족보자료시스템에 탐진안씨(耽津安氏) 경인보(庚寅譜, 1830)가 올라 있다. 검색은 되지 않고, 이미지로만 볼 수 있다. 강진안씨세보(康津安氏世譜) : 탐진안씨(耽津安氏) 경인보(庚寅譜, 1830) 純祖 30(1830) 이 족보의 범례에는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 경인보(庚寅譜, 1830) 범례(凡例) 一. 今此刊譜 續成先世之草譜 則雖不敢擅自增刪 上將公獻納公以上 有所未詳 故別爲疑系 書于卷首 이번에 간행하는 족보는 선세의 초보를 이어 만든 것으로, 감히 마음대로 덧붙이거나 삭제할 수 없고, 상장공이나 헌납공 이상이 있는 곳은 미상이라서, 의문이 있는 계보는 책의 첫머리에 써둔다. ................ 一. 同貫之宗 分居嶺湖 而世系相失 文獻無徵 未能合譜 以俟後日 같은 관향의 종파가 영호남에 나뉘어 사는데, 세계(世系)를 서로 잃어 증거로 할 문헌이 없어서 합보할 수 없으므로 후일을 기다린다. ----------------------- 범례에서 말하는 상장공(上將公, 安禮), 헌납공(獻納公, 安堵) 이상의 의심이 있는 계보라는 것은 이어 나오는 안씨성관총록(安氏姓貫總錄)에 우리나라 안씨들이 모두 중국서 온 이원의 아들 3형제가 여러 본관으로 분봉했다는 설을 말한다. 상장공이나 헌납공이 이원 후손으로 연결되는 계보는 아직 나와 있지 않다. 이 족보에서 특기할 것은 오늘날 탐진안씨 모두의 시조로 하고 있는 안원린(安元璘)이 나오지 않으며, 주로 호남에 거주하는 안우장군 후손 계열은 제외하고, 영남에 거주하는 상장공파와 헌납공파만 계보가 연결되지 않은채로 합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장공(上將公, 安禮)은 1권 p.15에, 헌납공(獻納公, 安堵)은 1권 p.19에 각각 나온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순흥 안목(安牧)의 셋째 아들이라는 안원린이 탐진안씨 모두의 시조라는 주장은 1830년에도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며, 영남의 상장공(安禮)파, 헌납공(安堵)파와 호남의 오성군(鰲城君 安祐)파의 3개파가 계보가 연결되지 않은 채로 병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성군(鰲城君 安祐)파는 1845년에 따로 족보를 간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1845(을사)년에 지은 탐진안씨족보서(耽津安氏族譜序)에는 안우 장군 이상의 계보는 모른다고 하며 안우장군을 탐진안씨의 비조라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에 실린 서문 말미의 주석에 안원린(安元璘)이 탐진안씨 시조이고, 안우(安祐) 장군의 부친이라 했다. 그러나 이 주석은 1902년 노사선생문집을 간행할 때 후손들이 추가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서문은 1845년에 안원린이 처음 나오는 기록이라기 보다는 1845년 당시에도 안우 장군의 부친은 알지 못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883년 강진(탐진)안씨족보(康津安氏族譜)의 안씨분봉총록(安氏分封總錄)에는 오늘날처럼 탐진안씨 시조를 안원린으로 하고, 신죽산안씨 시조 안원형과 같이 순흥 안목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어지는 안환(安環)이 지은 상계도발(上系圖跋)의 내용으로 보아 탐진안씨는 1883년 족보에서 처음으로 공통의 시조 안원린과, 순흥분파설을 공식화하여 족보에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죽산안씨가 순흥분파라는 주장은 신유보(1801년)에 처음 기록되었지만, 탐진안씨 시조가 안원린(安元璘)이고 순흥분파라는 주장은 1830년 경인보(상장군퐈와 헌납공파)나 1845년 을사보(오성군파) 이후 1883년 이전 어느 시기에 처음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인보(1830) 김시찬의 서문 다음에는 후손(後孫) 석형(碩衡)의 지(識)가 있는데, 거기에 탐진안씨 선조에 대해 .....若典工郞之勳封爵邑 鰲城君之祔享崇義 何其懿也 惟我上將公之隱遯守節 獻納公之孝行蒙旌吁亦盛矣......... 라고 하였다. 처음에 언급된 전공랑(典工郞)은 씨족원류(1680)에 탐진안씨 시조로 나오는 전공총랑(典工摠郞) 안덕린(安德璘)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오성군(鰲城君)은 안우(安祐, ?∼1362) 장군이고, 상장공과 헌납공까지 별도로 언급하고 있다. 이로 보아 1830년까지도 안원린(安元璘)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씨족원류의 안덕린(安德璘)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 나온 안덕린 후손 계보는 오늘날의 탐진안씨 3개파에는 들어있지 않으므로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아래에서는 1883년 탐진보에서 시조 안원린과 순흥분파설을 공식화 하기 이전에 그런 설을 기록한 초기 문헌들을 살펴본다. ------------------------------------------------- 탐진안씨 시조로 안원린(安元璘)이 나오는 최초 기록은? 헌납공파 안기종(安起宗, 1556∼1633)의 행적 기록을 모아 편집하여 1925년 간행한 지헌실기(止軒實記)에 조정상(趙貞相,1727~?)이 지은 안기종(安起宗)의 행장(行狀)과, 윤필병(尹弼秉,1730∼1810)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수록되어 있다. 조정상의 행장(行狀)에는 안원린(安元璘)이 문성공 증손이라 하고, 윤필병(尹弼秉,1730∼1810)의 묘갈명(墓碣銘)에는 탐진안씨 시조 안원린(安元璘)이 분봉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헌납공파가 주도한 1830년 경인보에도 안원린(安元璘)이 나오지 않고, 신죽산 시조 안원형(安元衡)을 순흥 안목(安牧, 1290-1360)의 아들로 기록한 순흥 안씨 경인보(1830년)에도 탐진안씨 시조 안원린(安元璘)은 나오지 않는다. 여러 문헌을 볼 때 탐진 안원린보다는 신죽산 안원형이 안목의 아들이라는 주장(1801년 신죽산 신유보)이 먼저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탐진 경인보(1830) 이전에 지은 행장이나 비문에 그러한 설이 나오기는 어려우므로 1925년 실기를 간행할 때 행장이나 묘갈명에 가필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같은 1925년에 간행된 안응창(安應昌, 1603-1680)의 백암집(柏巖集)에 실린 안목(安牧) 묘지명에 원문에 없던 신죽산 안원형과 탐진 안원린을 안목의 둘째 및 셋째 아들로 첨가하여 기록한 것을 볼 때 지헌실기의 행장이나 묘갈명도 간행시의 가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조정상(趙貞相,1727~?)이나 윤필병(尹弼秉,1730∼1810)과 비슷한 시기에 송환기(宋煥箕, 1728-1807)가 지은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 ?∼1362) 장군전과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지은 물재공(勿齋公) 안의(安義, 1529∼1596)의 행장에는 탐진안씨가 순흥분파라는 말도 없고, 시조가 안원린(安元璘)이라는 말도 없으며, 안우(安祐, ?∼1362) 장군 이상의 선계는 모른다고 나온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1774년에 지은 탐진안씨족보서(耽津安氏族譜序)나 1777년에 지은 탐진 안전(安 壂, 1627~1670)의 묘표(墓表)나 행장(行狀)에도 안우(安祐) 장군 이상의 선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안명옥(安命玉, 1797-1849)이 지은 탐진안씨 구보(舊譜) 서문이 있는데, 여기에 신죽산, 탐진 안씨를 순흥분파로 하였다. 여기에는 안원린(安元璘)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으나 탐진군(耽津君)으로 칭하는 사람이 안원린으로 볼 수 있다. 안명옥이 족보 서문을 지은 연대는 1849년 이전으로, 탐진세고 서문(1849년)과 비슷한 때인 것같다. 안명옥에게 족보 서문을 청탁한 안석기(安碩璣)·안사흡(安思翕)은 탐진세고를 편집한 사람들이기도 하므로 이들이 안명옥에게 보여준 탐진안씨 세계도는 탐진세고 (耽津世稿)의 세계도(世系圖)와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즉 1849년 이전에 탐진안씨 시조로 안원린이 처음 등장하고, 순흥 안목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함께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볼때 기록에 없던 안원린(安元璘)이 탐진안씨 3개파 모두의 시조라는 주장과, 순흥 분파라고 하는 주장은 거의 동시에 나온 것으로, 그 시기는 1830년 경인보 이후인 1849년 이전으로 판단된다. 안원린이라는 인물이 처음 나타나면서 탐진이 순흥분파라는 주장도 같이 나온 것이 그런 인물이 나오게 된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 아닌지? 허전(許傳, 1797-1886)이 1865년경 지은 탐진 안잠(安潛, 1764-1815) 묘지명(1865년)에는 오늘날 탐진보와 같이 안원린을 시조로하고, 문성공 후손으로 하였다. 강진(탐진)안씨의 간행된 족보는 경인보(1830년). 을사보(1845) 다음은 1883년 간행 뿐인 것 같다. 안명옥(安命玉, 1797-?)의 서문은 1845년 이후 1849년 이전에 쓴 것으로 보이며, 간행을 준비하다 실제는 간행하지 못한 족보의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 고전적 종합 목록 시스템] 검색 : http://www.nl.go.kr/korc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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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글들 중에 탐진 안씨와 관련돤 글들을 https:/cafe.dum.net/ahnwoomemory (안우장군기념사업회)에 한번 더 올려도 되겠습니다까? 주옥 같은 글들인데 더 많은 분들이 보았으면 합니다. 자료들을 보고 많은 분들이 깨어 났으면 합니다. 안병태
물론입니다.
참고가 될만한 글이 있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서 올리셔도 됩니다.
혹시 틀린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내용 체크를 미리 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