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초보시절
찌 낚시를 처음 접하는 입문자들은 궁금한 점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복잡하고 난해한 용어들 때문에 낯 선 용어 익히랴, 겸손한 척 하랴, 선배들에게 눈치껏 물어가며 낚시 배우랴 그 고충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다.
필자 역시 그런 고생(?)을 숱하게 해가며 낚시를 배웠다.
필자가 83년도 쯤 바다낚시를 배울 때 모시고 다니던 선배님들에 대한 기억은, 그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무뚝뚝하고 무서웠다는 것이다.
낚시점이나 대포집 혹은 민박집에서는 우스개 소리도 잘 하고 가끔 술도 따라주시던 다정한 선배님들이, 어찌된 일인지 갯바위에만 올랐다 하면 갑자기 무서운 호랑이로 돌변하곤 했다.
내 딴에는 나름대로 눈치를 보아가며 찌나 채비 등의 궁금한 점에 대해 물어보면, 어제의 다정한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낚시에만 몰두한 채 대꾸도 안 할뿐더러, 어쩌다 기껏 대답이라고 나오는 것은 눈을 부릅뜬 채 ‘아직 그것도 모르냐?’는 호통뿐이었다.
물론 그 호통 뒤에는 몇 가지의 장비나 채비에 대한 설명이 뒤따르곤 했다.
마치 군대시절 내무반의 고참들 같은 분위기를 풍겼던 것 같다.
지금이야 인터넷이며 낚시잡지 등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때는 그저 낚시선배님들의 말씀이 교과서이고 정석이었으니, 그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아가면서라도 한 마디의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 당시는 그런 일이 약간은 섭섭하기도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얻어 들었던 선배님들의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까지 낚시를 좋아하며 즐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 한 토막을 소개해 드리겠다.
필자가 열심히 따라다니던 한 선배님이 있었다.
그 선배님은 재일동포 부인을 둔 덕분에, 그 당시에는 정말 구하기 힘든 일본 유명제품의 카본 낚싯대를 자그마치 열 대나 넘게 가지고 있었다.
그 낚싯대 중,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일본제 1.5호 낚싯대 하나를 얻기 위해, 필자는 고향인 강원도 춘천까지 선배님을 모시고 가서, 그 귀하다는 소양강 댐에서 잡히는 ‘자연산 민물장어’까지 구해다가 바치는 결사적인(?) 아부와 선배님에게 술을 잔뜩 먹여 만취상태로 만들어 놓은끝에, 결국 목표로 했던 그 1.5호 낚싯대와 덤으로 2호 낚싯대, 릴도 하나 그리고 구멍 찌 몇 개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선배님은 술이 깬 다음에 그런 약속을 한적이 없다고 벅벅 우겼으나 어쩌랴? 이미 떠나간 버스였으니....낚싯대와 릴 그리고 약간의 소품은 이미 필자의 수중으로 넘어와 버린 다음이었으니...)
어쨋건 그때의 세상을 모두 얻은듯했던 그 기쁨을 아직도 잊을 수 없고, 그 낚싯대를 사용해 고기를 낚았을 때의 감동이 지금껏 가슴에 생생하다.
그 후 낚시터에서 몇 번의 분실위기와 그 낚싯대들을 호시탐탐 노리던 주변의 낚시친구들 에게 강탈당할(?)뻔 했던 위기의 순간도 몇 번 있었으나 가까스로 그 위기들을 극복하고, 그때 얻었던 장비들 중 유일하게 남은 그 1.5호 낚싯대는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많은 영광의 상처를 간직한 채, 이제 필자의 낚시장식장 한 구석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직도 그 선배님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갯바위를 누비고 계신다는 반가운 소식을 가끔씩 주신다.
또 필자가 초보시절에 멋모르고 회를 뜬다고 회칼을 잡았다가 ‘건방지게 초보가 회칼을 잡고 설친다’는 호통과 함께, 회칼을 잡으려면 어느 정도의 경력을 가진 중고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설교와 잔소리까지 된통 들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낚시회는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약간의 나이와 재력 혹은 경력이 좀 있으신 어른들을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모시고, 낚시회의 온갖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일명 ‘낚시회의 꽃’으로 불리는 ‘총무’라는 직책이 있었다.
필자도 어느 정도의 경력이 붙은 다음에 낚시회의 총무를 거쳤다.
말이 좋아 ‘낚시회의 꽃’이지 사실은 머슴처럼 온갖 힘든 일과 고참들 심부름만 하고 월 1회의 출조계획을 짜랴, 회비 걷으러 다니랴 등등 일이 정말 많았다.
더구나 출조지에서 고기라도 나오지 않으면 철수하는 배속에서부터 욕이란 욕은 몽땅 총무 차지가 되니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그때는 낚시회의 살림살이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지출이 ‘회식비’였던 것 같다.
즉 술 값으로 대부분의 낚시회 재정을 바닥내는 게 다반사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외상으로 술을 먹을 수 있는 단골 술집을 여기저기 몇 군데 정도는 확보해 놓는 것 또한 총무의 중요한 임무(?)중 하나였다.
가끔은 필자의 주머니 돈까지 써야 하는 고달프고 힘든 직책이었지만 선배님들의 ‘수고했다’는 한마디면 모든 피로가 봄눈 녹듯 사라지곤 했었다.
그 맛에 힘든 줄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2년간의 낚시회 총무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필자는 결혼을 하게 되는데, 지금의 아내가 된 예비신부에게 결혼 예물로 흔히 주고 받던 시계대신, ‘일본제 LB 릴을 사주지 않으면 결혼을 취소하겠다’는 32살 노총각 주제에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하다가 들통나 부모님과 처가 쪽의 어른들에게 또 한번 된통 욕을 얻어먹는다.
필자의 초보생활은 그때쯤 끝났던 것 같다.
(결국 LB 릴은 물론 시계까지 받아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낚시터에서의 술 한잔!! 이 맛에 낚시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