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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설원기]가 문화류씨를 조작(造作)하고 위작(僞作)한 설계를 추적합니다.
설원기 독후록 6을 올리며 그 끈질긴 생명력에 찬탄하고 놀랄뿐입니다. 가공의 소설속에 개성왕씨와 문화류씨 선조를 끌어드리는 차식 3부자의 그 놀라운 기지와 차씨 가문사랑에 혀를 휘두릅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이런 건가요? 류문에게 2,000년 초 차문에서 뜬구름의 공격을 해옵니다. 류차달은 없고 류효금이 문화류씨 시조라구요?. 허허허 그것 참입니다. 위조 위작 위서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연안차씨] 홈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972년에 이곳 평택 장안동으로 선조님의 선영을 모셔왔으며 이때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3년부터 사당건립을 시작하여 1996년 5월에 준공하고 득관조를 주벽으로 현조 명조님의 위패를 배향으로 봉사해 오다가 다시 종원의 뜻을 모아 2004년도에 득성시조님을 주벽으로 신라조의 역대 조상과 고려조의 말기까지 전조상 및 조선조(全祖上)의 명조(名祖)님 등 102위의 선조님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문화류씨 가문의 구성원으로써 차씨 문중 여러분께 한 말씀 올립니다.
가문의 전통을 성역화 함을 축하드립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으로부터 류씨(柳氏)로 모성(冒姓)하고 이름 백(栢)으로 개명(改名)하여 가성명 (假姓名) 류백(柳栢)으로 칭(稱)한 것이 가성류씨(假姓柳氏)의 시초(始初)로 그의 아들 차공숙(車恭叔)은 가성명(假姓名) 류숙(柳淑)으로 개명(改名), 그의 아들 휘 진부(諱振阜), 그의 아들 휘 무선(諱茂先), 그의 아들 휘 보림(諱 普林) 그의 아들 휘 해(諱海)까지 109년간 가성류씨(假姓柳氏)를 전(傳)하면서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시다.”
【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원파록 연안차씨의 연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미 거짓문서, 위서(僞書)로 판명 난 설원기 기사를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문화류씨가 동조이성이란 가문사를 천하에 이름도 형체도 없는 조상을 왜곡하여 모시는 우를 범하시는 것 아니신지 걱정을 드리는 바입니다.
[차원부설원기] 독후록 6.
국역 [차원부설원기]에서 문화류씨를 어떻게 조작하고 위작하였는지를 탐구하여 볼가 합니다.
1. 박은정 : [차원부 설원기 (車原頫 雪冤記)]의 줄거리
[고려시대 명문귀족의 후예인 차원부가 고려 말 염흥방, 임견미의 난리를 피해 은거하여 연안차씨의 뿌리가 문화류씨와 같은 조상이라는 차씨의 선대세계가 기록되어 있었고 동시에 족보에는 차씨 집안의 서얼(첩의 자식)인 정도전, 함부림, 하륜, 조영규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차원부는 이성계가 찾아와 요동정벌에 대해 물었을 때 위화도에서 회군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후 조선 건국을 도모하고자 이들이 찾아와 함께 하자고 하였지만 차원부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고자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태종을 지지하고 이성계의 청을 거둔 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던 중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 때에 정도전 등 車門의 사얼(四孼 첩의 자식)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해 차씨와 류씨의 유래가 기록 된 족보를 불태우고 차원부와 그 가족 70여명을 몰살하였다.
결국 차씨 가문은 서얼(첩의 자식)들에 의해 가문의 세계(世系)가 담긴 기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격변기인 조선 초기에 가문이 몰락하고 만다.
이러한 억울한 죽음을 설원해 주기 위한 움직임이 태종을 시작으로 세종, 문종, 단종으로 이어져 역대 왕들이 차원부 가문의 내력을 밝히고 후손들을 등용하도록 하였다.
태종 때부터 왕의 주도하에 시작된 차원부의 설원과정은 박팽년이 1456년(세조 2) 5월17일 왕명을 받들어 위 사실에 대한 記를 쓰고 신숙주와 성삼문이 이에 주석을 남겼고 이개 류성원 등 48명이 왕의 명에 의해 응제하여 시를 지은 후 하위지가 5월21일 서문을 작성하여 완성하였다].
박은정 : 설원기속 차원부의 죽음의 갈등구조는 적자의 차원부가 차씨 집안의 서얼인 이들의 신분적 결함을 족보에 쓴 이유로 원한을 샀으며, 절의(節義) 명목하에 충신으로 남고자 하였으나 조선건국에 동참하길 원하는 인물과의 대립구도 속에 죽임을 당해 그 가문이 멸족했다.
차원부는 정몽주, 길재등과 善人으로 묘사되고 조준 조반 등 고려를 저버린 개국공신들은 이들과 대비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의 갈등 해결방식은 계속된 왕들의 설원요청에 의해 박팽년 하위지 등 곧 처형될 운명에 놓인 자들의 왕명을 받든 글을 통해 차원부가 신원되는 방식을 통한다. 차원부가 전대 왕들의 설원되었다는 점은 사실의 신빙성이 없다.
2. 차식 3부자(차식, 차운로, 차천로) 삶의 시대적 배경
차식 3부자가 차원부설원기를 위작했다는 년도를 이수건교수는 16세기 후반으로, 류주환교수는 1580년 전후
로 산정함에 158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사건관계를 연결하여 보고자 합니다.
① 차원부 (1320년~1398년) - 설원기 출간 182년 전 졸 ② 고려멸망 1392년 설원기 출간 188년 전
③ 조선멸망 1392년 설원기 출간 188년 전 ④ 1차왕자의 난 1398년 설원기 출간 182년 전 ⑤ 세조재위 7대 1455~1468 설원기 출간 112년 전 ⑥ 박팽년 1456년 졸 설원기 출간 124년 전
⑦ 사육신 참형 1456년 설원기 출간 124년 전 ⑧ 차 식 1575년 졸 설원기 출간 5년 전 졸
⑨ 차운로 1637년 졸 설원기 출간시 57세 ⑩ 차천로 1615년 졸 설원기 출간시 35세
⑪ 임진왜란 1592~1598 설원기 출간 후 12년~18년
3. [차원부설원기]가 위서임을 조선시대와 현재의 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밝힘
① 具鳳齡(1526~1586 선조19)) : 柏潭先生文集에서 처음으로 내용이 확인 된다. 1586년 이전 필사본 유통
사육신사건 1456년 6월2일인데 100여년이 지나 세상에 등장하였다.
② 최초의 위작사실 남극관 (1689~1714) : 몽예집에서 위작되었다고 판단하였다.
③ 이익(1681~1783) : 신빙성을 의심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거짓인가를 분간 할 수 없다.
④ 홍계희(1703~1771) : 유고집을 내면서 설원기가 위작임을 언급하고 서문을 싣지 않았다.
⑤ 윤광소(1708~1786) : 선조 윤중의 문집에 실린 설원기는 위작이라 싣지 않았다.
⑥ 황윤석(1729-1791) : 차천로 형제가 위작하여 그 세보를 넓히고자 함이였다
⑦ 충남대학교 류주환교수 : 1580년 전후로 위작되었다.
⑧ 대구대학교 이수건교수 : 16세기 후반 위작되었다.(16세기에 車軾 삼부자가 중심이 되어 만든 ‘가공된 소설’로 한미한 가문인 차씨 집안에서 문중을 돋보이려는 보상심리 차원에서 만든 결과물이다. ⑨ 김난옥 : 2007 : 서울대학교 학술논문 『선조실록』 상소문이 설원기에서 정도전을 車門4孼 규정 심각한 왜곡"- 차원부에 대한 이야기의 기본적인 골격은 세종 조가 끝나기 전에 생겨났다." 대략적인 설원기의 기 본은 세조 이전에 이루어졌는데, 사육신 사건 직전에 완성된 것으로 변형되었다
⑩ 제차씨(題車氏) 설원록 : 하진현(1776~1846)이 책은 말의 조리(條理)가 추잡하고 조악하다. 사실을 속이고 기망한다. 이 책은 보면 그 거짓됨을 알 수있다. 차천로(車天輅)가 조금 문조(文藻: 글을 쓰는 재능)가 있으 나 이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대개 그 아버지 차식(車軾) 혹은 그 윗대에서 만든 것이다.
성삼문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주석하였음을 붙인 것은 대개 차씨 후손들이 거짓으로 꾸며 자신들의 족 보를 부풀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⑪ 규장학한국학연구원의 몽예집 해제 :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차원부(1320∼1398)의 사적 을 기록한 《雪寃記》에 대해 車軾 혹은 그 선대 누군가에 의한 僞作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成三問 등의 주 석도 차씨 후손들에 의한 조작이라고 단정하였다.
⑫ 박은정 : 2010, 서울대학교학술 논문에서 조선시대 현재 위서로 판명한 관계 자료를 제시하였다.
⑬ 이수건 차식 3부자의 僞作 동기와 내용은 자신들의 寒微한 家系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상 심리에서 나 왔다고 볼 수 있다.
⑭ 하진현(1776~1846)車錄(차록) : 「宣祖實錄(선조실록)」 등에 나타나는 車氏 三父子의 사람됨과 행적을 추적 해 보면 三父子가 모두 文才는 탁월하여 詩書 文章으로 一代를 風靡(풍미)할 수 있었지만, 名祖가 없고 家系가(가계) 寒微(한미)하여 士大夫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車天輅 형제는 이른 바 才勝德薄(재승덕박)하여 경박한 언행이 많았다.
『차록』에는 '사육신(死六臣)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글이 있다. 「단계하선생문집발(丹溪河先生文 跋)」을 살펴보니, "설원(雪冤)의 기사(記事)는 그 문자가 거칠고 비루하니 결코 선생이 지은 것이 아니 다. 지었다는 시기를 살펴보니 경태(景泰) 병자(丙子 1456)년 5월이다. 그 시기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피 끓는 의기와 괴로운 심사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들끓어 귀신에게 의논하고 하늘과도 맞설 때인데, 이같이 한가하고 느긋한 문자를 조금도 마음에 둘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후세에 이름을 훔쳐서 위조한 것은 잘 만들려 하다가 되레 들통이 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마침내 이것을 빼고 싣지 않는다. 라고 하였 다.
지금 차록을 보건대, 임금의 명을 받고 지은 것이 5월 그믐이고,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6월 초에 화를 당하였으니, 그 사이의 기간이 불과 사흘나흘이다. 단종이 별궁으로 내쫓긴 이때는 어떤 시기이며, 일개 원부(原頫)가 원통하건 원통하지 않건 사직의 존망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같이 장황하게 글을 지었겠는가?
4. [차원부설원기]에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
① 차원부는 누구인가? (고려말~조선초) 1320년~1398년 78세 卒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설원기, 설원록, 차문절공유사 간의대부차원부설원기 운암선생설원록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당대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성리학의 대가이다. 고려 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고, 조선이 개국한 뒤 1392년 태조의 공신녹권(功臣錄券)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을 거절하였으며 하륜(河崙) 등에 의해 가족까지 모두 살해되었다. 고려에 충성하던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이며 묵매에 뛰어났다. 시중(侍中)에 추증, 순천(順天)의 운암사(雲巖寺)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백과』
차원부설원기가 위조, 위작, 위서로 판명함에 따라 위 『네이버 백과』에 기록된 사실은 신빙할 수 없습니다.
박은정 : 서울대의 논문에서 주목되는 점 중 하나는 바로 차원부 자체에 대한 의문제기입니다. 곧, 차문에서는 차원부가 공민왕 13년에 문과급제를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공민왕 13년에는 아예 과거를 시행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p.232). 더구나 차원부의 활동 이력이 정사에서 전혀 나오지 않고 있고, 그에 붙여진 관직들(正言, 評議郎中)조차 오류라서 후대에 꾸며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p.238-239).
차원부의 행적은 학계와 보학계의 연구를 통해 일찍부터 조작되었음이 판명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차원부라는 인물 자체가 역사에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전무하여 그가 세상에 실재했었는지 조차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설원기의 조작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예측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② 차원부설원기를 위서한 차식3 부자에 관한 인적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차식(車軾 ) 1517(중종 12)~1575(선조 8) 58세로 卒
이력 : 1537년(중종 3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 급제하였다. 급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지냈다. 중앙관직으로는 성균관ㆍ호조ㆍ예조ㆍ봉상시ㆍ교서감ㆍ승문원 등의 좌랑ㆍ주부ㆍ교리ㆍ교감을, 지방관직으로는 통진ㆍ항주ㆍ해주ㆍ평해ㆍ고성의 현감ㆍ군수를 역임하였다. 1575년(선조 9) 평해군수를 지냈다.
.『네이버 백과』
인물평 : 지방직을 떠돌면서 생을 마감했고 그가 처한 배경에서 안온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하는 인물로 평하고 있습니다.
② 차운로(車雲路) 1559(명종 14) ~ 1637(인조 15) 78卒
이력 : 1580년(선조 13) 생원ㆍ진사 양시(兩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내직으로는 내자시정, 사옹원정, 공조정랑, 시강원필선, 외직으로는 개성부교수, 어천도찰방, 금성의 군수, 황간현감, 금성부사, 봉상시판관, 풍기군수, 첨정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인물평 : 장원 합격자들의 모임인 사장원계(四壯元契)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당대 사람들로부터 비록 문벌(門閥)은 미천하였으나 문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우한 처지를 드러낸 시를 많이 지었다 합니다. 행실의 부정적 면모에 대한 서술이 많이 등장한다.
③ 차천로(車天路)1556~1615 59세 卒
이력 :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1583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 명나라에까지 문명을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校理)로서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했다.
인물평 : 30세에 선조의 親試에서 여계선의 시를 대신 지어주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1586(선조 19) 유림사회의 수치라 평가 유림사회에서 부정적 평가 받는 계기 『네이버 백과』
차천로는 과거시험 응시자 문제의 답을 대신 써 주고 장원급제 시켰다가 탄로되어 그 응시자는 쫓겨나고 자신은 원지에 流配를간 적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당해 대명외교에서 막중한 외교문서 처리와 관련하여 차천로와 같은 인재가 필요하여 다시 등용했으나 고관요직은 끝내 맡지 못하였다.
이러한 車天輅의 사람됨과 문장력을 미루어 보아 車氏 三父子 가운데 그가 主役을 맡아 僞作했다고 짐작된다.
박은정 : 차식 3부자는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었다. 차식은 지방직을 맴돌면서 생을 마감했고 차천로 역시 높은 벼슬에 제수되지 않았다. 윤리상 어긋나는 행위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개성은 정치적 진출을 위해서는 지역적 한계를 가진 곳이다. 차식 등이 속한 화담학파속에는 신분이 미천하거나 불우한 서얼신분이 많았다.
차식은 안온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데 아들들은 불우한 시를 많이 짓고 행실의 부정적 면모에 대한 서술이 많이 등장. 차식부자는 신분이라는 한계를 교류관계를 통해 눈으로 직접보고 몸으로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설원기의 위작 가능성에서 차천로형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차천로는 불법행위로 파직된 전력도 있었으며 재주는 있지만 행실은 볼품없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차운로 역시 근실하지 못하며 家行도 패악하다는 탄핵을 받은바 있었다.
5. 조작, 위작, 위서의 배경과 원인의 실태분석
① 이수건 : 차식 3부자의 僞作 동기와 내용은 자신들의 寒微한 家系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상 심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선조실록」등에 나타나는 車氏 三父子의 사람됨과 행적을 추적해 보면 三父子가 모두文才는 탁월하여 詩 書 文章으로 一代를 풍미할 수 있었지만, 名祖가 없고 가계가 한미하여 사대부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車天輅 형제는 이른바 재승덕박하여 경박한 언행이 많았다.
② 독후자의 견해 : * 차식 3부자는 관리로서 상민보다는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고 생각된다. 요즈음의 일반 행 정관청의 주사, 과장 정도의 직위에 있지 않았나 예견하여 본다. 따라서 의식주는 어느 정도 해결하는 중산층에 속하는 삶을 영위 하였다고 봅니다.
* 자신들의 행정적 지식, 문장실력 등의 우월적 실력을 과신하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자신들의 학식과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주위 환경과 자신에 대한 불만족 삶을 이어 갔다고 봅니다.
6. 설원기를 위서(僞書)한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 차식 졸년시 큰아들 운로는 38세 작은아들 천로는 22세, 3부자는 차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들 의 답 답한 삶에 대한 활로에 대하여 항상 고민하던 중 차씨 가문 선계(先系)를 다른 성씨 보다 우월적 위치로 조작할 것을 3부자는 합의합니다.
* 문화류씨의 1423년 영락보와, 1565년 기사보는 1580년 [차원부설원기]를 차식 3부자가 위서할 당시 충분히 큰 자극제가 되었고, 이를 능가하는 차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다방면으로 자료수집 연구 등으로 위서가 완성 되고, 1689년 문화류씨 기사보에 원파록의 류*차동원론이 깊숙이 들어와 연안차씨 울타리가 왕씨 차씨 류씨 로 확장됩니다. 차식 3부자의 숙원이 이루어집니다. 연안차씨 족보는 1708년 최초로 간행됩니다.
7. 조작(操作), 위작(僞作)의 기본설계
언제 : ① 고려 말 조선 초 왕자의 난과 사육신의 정치적 소용돌이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를 택한다.
② 중국황제를 선조로 BC 2704에서~조선 초까지 차씨 가문은 5,0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는다.
누가 : 조선조의 사육신과 그 주변 인물들이
무엇을 : * 고려 말 충신 차원부의 설원을 위하여 (雪冤 : 원통한 일을 씻어 줌)
* 자신들의 寒微한 家系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상 심리에서 .
* 중국의 황제(헌원軒轅)가 차씨의 최초 선조→개성왕씨 王자에서 車字를 도출하고 박혁거세에게 서車 씨 사성 받고, 또 고려태조에게서→차달은 차씨로→효금(류차달)에서 車字를 갖어와→차씨로 사성 →효전 문화柳씨로 사성→王*柳*車 동조이성으로 조작하여 차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어떻게 : 박팽년이 [차원부설원기]를 짓고 시육신 등이 응제시를 지어 왕(세조)에게 설원을 요청
왜 : 차원부가 차씨 집안의 4얼인(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 첩의 자식들의 내용을 족보에 올렸다고 가족과 함께 70명이 몰살을 당함
어디서 : 차원부가 개성 지방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송원과 마원의 골짜기에서
8. 조작의 실제 : 차원부설원기 독후록 5.를 참조바랍니다.
이렇게 조작 위조 위서가 1580년경 완성되었으나 역적인 사육신을 활용하고 그들을 등장시켜 100여 년 후 필사본의 형태로 각 세상 밖으로 퍼트립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네이버 검색창] 원파록 ; 연안차씨 방에서 다음 기사를 원문 그대로 옮겼습니다.
[원파록(原派錄) 원문]
<원파록>에서는 [차원부설원기]의 모든 근거를 마련하여 두었습니다.
<문화류씨> 관계되는 부분을 여기서 인용합니다. 확인하여 보세요. <설원기> <응제시> <원파록>을 한 묶음으로 서로 상호 보완합니다. 철저하고 교묘한 저작 숫법입니다.
1. 차씨의 연원
차씨(車氏)의 연원(淵源)차씨(車氏)의 근원(根源) 원파록(源派錄)과 역대(歷代) 문헌(文獻)에 의거(依據) 정리하여 다음과 같다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으로부터 약4700년 전 BC. 2704년에 중국에서는 헌원(軒轅)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황제(黃帝)로 즉위(卽位)를 하셨는데 황제(黃帝)의 본성(本姓)은 공손씨(公孫氏)이시며 이름은 탄생하신 지명(地名)에 따라 헌원(軒轅)이라 한 것이다.
이 시대(時代)는 모계(母系)의 사회(社會)였으므로 황제(黃帝)께서는 모후(母后)에게 성(姓)을 지어 드렸는데 본래 모후(母后)께서 희수(姬水)의 강변(江邊)에 살았으므로 희씨(姬氏)라는 성(姓)을 지어 받치고 황제(黃帝)도 모후 (母后)의 성(姓)을 따라 성(姓)을 희씨(嬉氏)로 바꾸었고 토덕(土德)으로 제위(帝位)하여 황제(黃帝)라 부르도록 하였다.
황제(黃帝)께서는 희씨(姬氏)로 계승(繼承)하여 맏아들 소호(小昊), 둘째아들 창의(昌意)를 두시었고. 소호(小昊)는 아들 교현(橋玄)을 두시었고, 교현(橋玄)은 아들 제곡(帝嚳)을 두시었고, 제곡(帝嚳)은 아들 4형제를 낳으시니 페제지(廢帝址), 당제요(唐帝堯), 상조계(商祖契), 주조기(周祖棄)이시며,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 창의(昌意)는 아들 전욱(顓頊)을 두시고, 전욱(顓頊)은 아들 4형제를 낳으시니 궁선(窮蟬), 곤(鯤), 숭백(崇伯), 백익(伯益)이시며, 궁선(窮蟬)은 아들 구망(句望)을 두시었고, 구망(句望)은 아들 교우(橋牛)를 두시었고, 교우(橋牛)는 아들 고수(瞽瞍)를 두시었고, 고수(瞽瞍)는 아들 우제순(虞帝舜)을 두시었는데 이분이 순(舜)임금이시며, 전욱(顓頊)의 둘째 아들 곤(鯀)은 아들 하후씨우(夏后氏禹)를 낳으셨다.
순(舜)임금은 하후씨우(夏后氏禹)에게 선위(禪位)를 하시고 성(姓)을 사씨(姒氏)로 사성(賜姓)을 하시었고,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즉위(卽位)를 하시고 하(夏)나라를 세우시고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치수사업(治水事業)을 성공적(成功的)으로 이루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씨(姒氏)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게 되었다.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아들 계(啓)를 두시었고, 계(啓)는 아들 두 형제를 낳으시니 태강(太康), 중강(仲康)이시며, 계(啓)의 둘째 아들 중강(仲康)은 아들 상(相)을 두시었고, 상(相)은 아들 소강(少康)을 두시었고, 소강(少康)은 아들 저(抵)를 두시었고, 저(抵)는 아들 망(芒)을 두시었고, 망(芒)은 아들 설(泄)을 두시었고, 설(泄)은 아들 불강(不降)을 두시었고, 불강(不降)은 아들 3형제를 낳으시니 경(扃), 공갑(孔甲), 신갑(辛甲)이시며 이 3형제는 하후씨우(夏后氏禹)의 11세의 손자이며, 공갑(孔甲)께서는 왕이 되시었고 귀신(鬼神)을 섬기기를 지극히 좋아 하시었다.
이때에 하(夏)나라의 국운(國運)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어느 날 난데없는 용(龍) 한 쌍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공갑(孔甲) 왕께서 매우 기이하게 여기시고 도당(陶唐)의 후손인 유루(劉累)라 하는 신하에게 어용(御龍)이란 성을 하사(下賜)하시고 그 한 쌍의 용을 잘 기르도록 명(命)을 내리시었다.
유루(劉累)는 왕명(王命)을 받들고 정성껏 용을 기르는데 왕제(王弟)이신 사신갑(姒辛甲)께서 이를 신기하게 여겨 힘과 정성을 다하여 유루(劉累)와 함께 용을 길 들려서 사육을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암 용이 우연히 죽어버렸다.
유루(劉累)와 신갑(辛甲)은 용을 죽인 죄로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를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죽은 용으로 젓갈을 담구어서 왕의 수랏상에 올리었더니 왕(王)은 그 젓갈의 맛이 좋아서 맛있게 잡수었으며, 그 젓갈을 다 잡수신 왕께서는 더 젓갈을 원하여 찾으시니 유루(劉累)와 신갑(辛甲)은 더 구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왕께서 용의 젓갈인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 하였다.
이에 유루(劉累)는 노(魯)나라로 도주(逃走)해버리자 신갑(辛甲)께서는 혼자 중벌(重罰)을 받으실까 더욱 두려운 나머지 요수(遼水)를 동국(東國)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시니 이때가 BC.1878년이었다.
사신갑(姒甲)께서는 고조선(古朝鮮)의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定着)하여 사시면서 산의 이름 일토(一土)를 합하여 왕자(王字)를 만들어 성(姓)으로 정(定)하여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시었다.
왕조명(王祖明)께서는 근원(根源)의 조상(祖上)이 중국(中國) 황제(黃帝)임으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뛰어 나시어 당시(當時)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조정에서는 공(公)을 흠모(欽慕)하여 치민장(治民長)으로 추대(推戴)하시니 이에 단군조(檀君朝)를 도와 치민치정(治民治政)에 힘쓰시게 되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띠를 베어 지붕을 덮게 하고 땅을 갈아 오곡(五穀)을 재배하며 방아를 찧어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보급하였고 남녀를 구별하여 차례와 예(禮)의 범절(凡節)을 가르치시며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백성을 교화선도(敎化善導)를 하시었고, 그 후손인 왕수긍(王受兢)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원년(元年) 기묘(己卯)에 기자(箕子)가 동쪽 땅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일설(一說)에는 한씨조선(韓氏朝鮮))을 세우고 팔조교(八條敎)를 만들고자 하니 풍토(風土)가 달라 국내(國內)에서 현존자(賢尊者)를 얻고자 하니 백성들이 왕수긍(王受兢)을 천거(薦擧)하여 기자(箕子)는 왕수긍(王受兢)을 교민사사(敎民士師)로 명(命)하게 되었고 공(公)은 팔조교(八條敎)를 만들어 예락(禮樂), 문물(文物), 의관(衣冠), 법도(法道)로 백성을 교화(敎化)하고 풍속(風俗)을 이루니 기자(箕子)는) 기뻐하였다.
왕조명(王祖明)의 58세 휘 몽(諱 蒙)에 이르렀을 때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말엽(末葉)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왕검성(王儉城 : 지금의 평양성)을 버리고 남천(南遷)하여 마한(馬韓)의 도읍지(都邑地)인 금마(金馬) 지금 전라북도 익산군에 숨게 되었는데 이무렵 「일토초가자위왕(一土草家者爲王)」이란 참언(讖言)이 있었는데 이 말은 일토초가(一土草家)는 몽자(蒙字)의 파자(破字)임으로 즉(卽) 왕몽(王蒙)이 왕이 된다는 뜻이며 이러 한 참언(讖言)이 동요(童謠)로 세상에 떠도니 기자준왕(箕子準王)이 이를 두려워하여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고 있는 왕씨(王氏)들을 모두 잡아 죽이라는 어명(御命)을 내림으로 왕몽(王蒙)께서는 다급한 나머지 팔형제 아들 중에 일곱째 아드님이신 왕림(王琳)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避身)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 가 자취를 감추고. 은거(隱居)하여 10여 년의 피신(避身)의 고난(苦難)에 어느 날 신인(神人)이 감응(感應)하시어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외치며 가로대 “너의 성(姓)인 왕자(王字)를 세 번 글자를 고쳐 세 번째 글자로 성(姓)으로 정(定)하면 이 고난(苦難)을 모면(謀免)하고 자손(子孫)이 크게 번영(繁榮)할 것이다.”
라고 예시(豫示)함으로 왕몽(王蒙)께서 즉시(卽時) 왕자(王字)에 동서(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또 다시 전자(田字)에 또 다시 전자(田字)에 다시 전자(田字)에 중획(中劃)을 상하(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또 다시 신자(申字)에 천지양획(天地兩劃)을 가(加)하여 차자(車字)로 하고 이에 차자(車字)로 성(姓)으로 정(定)한 후 무(無)의 허공(許空)에서 다시 하나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무일(無一)로 개명(改名)하시고 아들 왕림(王琳)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할 때 두 번째라 하여 이름을 신을(神乙)이라 개명(改名)하신 후 지리산(智異山)에서 은둔(隱遁)의 피신생활(避身生活)을 탈피(脫皮)하고 지리산(智異山)에서 떠나 교남(嶠南)의 계림(鷄林 : 지금 慶州)으로 이거(移居)를 하였다.
주석(註釋) 위만(衛滿) : 중국 진(秦). 한(漢)의 교체기에 연(燕)나라 사람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기자조선 준왕에게 투항하였다가 그 뒤 준왕을 쫓아내고 위만 조선을 세웠으며 우거왕(右渠王) 때 3대의 88년 만에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망하였다.
BC.59년경에 부족(部族)의 6촌 촌장(村長)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함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임금으로 즉위(卽位)하시어 계림(鷄林)으로 도읍(都邑)을 천도(遷都)하시어 신라(新羅)를 개국(開國)하실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신라 태조(太祖)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에게 지리산(智異山)의 영주권(領主權)을 내어 주시고 임금으로 섬기어 큰 공훈(功勳)을 세우시니 신라 태조께서 벼슬 시중(侍中)을 제수(除授)하시고 차씨(車氏)로 사성(賜姓)하시어 차문(車門)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고 아들 차신을(車神乙)이 또한 신라조(新羅朝)에 승상(丞相)의 벼슬을 하였다.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17세 손자 차제능(車濟能)은 신라 미추왕조(味鄒王朝)에 벼슬 승상(丞相)이시며 득성시조(得姓始祖)의 21세 손자 차휘만(車徽曼)은 신라 19대 눌지왕조(訥祗王朝)에 벼슬이 승상(丞相)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부왕(父王)이신 내물왕(內勿王)의 동생인 실성왕(實聖王)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물왕(內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는 도외시(度外示)하고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人質)로 보내고 셋째아들 미사흔(米斯欣)은 왜국(倭國)으로 인질(人質)로 보내버렸다.
이에 박제상(朴提上)이 주축(主軸)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차휘만(車徽曼). 배중량(裵仲良) 등이 실성왕(實聖王)의 부당(不當)한 처사(處事)를 거론(擧論)하여 실성왕(實聖王)은 내물왕(內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에게 선위(禪位)를 하였다.눌지왕(訥祗王)이 즉위(卽位)하신 뒤에 일본(日本)에 억류(抑留)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귀환(歸還)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였다.
이에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이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건너가시어 왜왕(倭王)에게 신라조(新羅朝)의 왕제(王弟)인 미사흔(米斯欣)을 신라로 귀환(歸還)을 청(請)하였으나 왜왕(倭王)이 거절(拒絶)을 하였다.이에 승상 차휘만(車徽曼)은 승상 박제상(朴提上) 등의 사신(使臣)은 논의(論議)하고 어느 날 밤에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의 숙소(宿所)를 지키는 왜인(倭人)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은밀히 도해구출(渡海救出)을 시킨 뒤에 무사히 신라에 시간을 벌기 위하여 승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도착할 수 있는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감금(監禁)된 숙소(宿所)의 방문(房門) 앞을 지키고 앉아 있으면서 감금(監禁)의 왜인(倭人)들에게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아직 취침(就寢)하고 있다 속이며 무사히 신라로 귀환(歸還)을 시키었는데 이 사실이 밝혀져서 일본의 왜왕(倭王)이 진노(震怒)하여 문책(問責)하니 승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왜왕(倭王)에게 굴복(屈服)하지 않으시고 일본(日本)에서 순절(殉節)하시었다.
이 사실은 동사(東史)에 기록 되어 있다. 득성시조(得姓始祖)의 32세 손자 차건갑(車建甲)께서는 신라 39대 소성와조(昭聖王祖)에 원로승상(元老丞相)으로 소성왕(昭聖王)은 친(親)이 공(公)에게 중국의 주(周)나라 주공(周公 :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 무왕(武王)의 아들이며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제후(諸侯)들과 조회(朝會)를 하는 그림 족자(簇子)를 내리시면서 어린 태자(太子)를 잘 보필(輔弼)할 것을 부탁을 하였는데 이것은 종실(宗室)의 왕족(王族)이 강세(强勢)하고 12세에 어린 세자(世子)에게 선위(禪位)하는 것이 몹시 불안하여 원로승상(元老丞相)에게 유언(遺言)을 남긴 것이다.
서기800년 경진(庚辰)에 소성왕(昭聖王)이 서거(逝去)하시고 세자(世子)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卽位)하시니 신라 40대 애장왕(哀莊王)이시며 승상(丞相) 차건갑(車建甲)은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이 되시어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이 보필(輔弼)하시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섭정(攝政)을 하시며 나라에 번영(繁榮)의 대훈공(大勳功)을 세우시었다. 득성시조(得丞始祖)의 33세 손자이시고 승상 차건갑(車建甲)의 아드님 차승색(車承穡) 신라조(新羅朝)에 출사(出仕)하시니 승상공(丞相公)은 아드님에게 극진(極盡)히 애장왕(哀莊王)에 충성(忠誠)으로 보필(輔弼)할 것을 부탁하시고 어느 날 드디어 별세(別世)하시니 애장왕(哀莊王)은 만조백관(滿朝百官)에 하명(下命)하시어 승상공(丞相公)의 장례(葬禮)는 왕례(王禮)를 갖추어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측면(側面)의 산록(山錄) 자좌원(子坐原)에 장례(葬禮)를 거행(擧行)케 하였다.
왕례(王禮)에 따라 석관(石棺)과 석봉분(石封墳)을 쌓고 석의(石儀=石物)를 갖추어 세웠으며 신주(神主=位牌)는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配享)함으로 세인(世人)들이 승상공(丞相公)의 이 묘역(墓域)을 차능(車陵)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차능(車陵)으로 전(傳)하고 있다.
승상공(丞相公)의 아들이신 차승색(車承穡)은 선고(先考)이신 승상공(丞相公)의 유언(遺言)에 따라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弼)하시었고 이에 따라 서기 809년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좌승상(左丞相)으로 승진(昇進)하였으며, 이때에 병부령(兵部令: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병부의 우두머리)으로 있던 애장왕(哀莊王)의 숙부(叔父)인 김언승(金彦昇)이 섭정(攝政)함을 기화(奇貨)로 마침내 애장왕(哀莊王) 10년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을 도모(圖謀)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로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고 스스로 즉위(卽位). 헌덕왕(憲德王)이라 칭(稱)하니 이 분이 신라 41대 왕이 된 것이다.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은 헌덕왕(憲德王)을 임금으로 보지 않고 종자(從子 :조카)를 죽인 패륜아(悖倫兒)로 생각하고 애장왕(哀莊王)을 죽인 원한(怨恨)의 격분(激憤)을 참지 못하고 충의지심(忠義之心)으로 김언승(金彦昇)을 죽이고 애장왕(哀莊王)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정통적(正統的) 질서(秩序)를 이어 나라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세우기 위하여 굳은 결심으로 좌승상(左丞相)의 큰 아들 신라벼슬 사공(司空)이신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모책(謀策)을 논의(論議)하고 옛날에 예양(豫讓)의 모책(謀策)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이 수렵(獸獵)하로 나감을 틈타서 다리 밑에 궁수(弓手)의 복병(伏兵)으로 시해(弑害)하고자 하였으나 이 음모(陰謀)를 아는 자가 있어 헌덕왕(憲德王)에게 밀고(密告)함으로 모책(謀策)의 계획(計劃)이 누설(漏泄)되어 헌덕왕(憲德王)의 시해음모(弑害陰謀)는 실패(失敗)하였다.
밀고(密告)로 음모사실(陰謀事實)을 안 헌덕왕(憲德王)인 김언승(金彦昇)은 군병(軍兵)에 체포령(逮捕令)을 내려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恭叔)의 부자(父子)를 좇으니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는 국운(國運)이 따르지 못함을 한탄하시며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의 집으로 도주(逃走)하여 은닉(隱匿)하였다.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지 못한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은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놓고 전국에 수색(搜索)하여 찾으니 차승색(車承穡)의 생질(甥姪)인 김생(金生)이 현상(懸賞)을 탐하여 외숙(外叔)과 외종(外從)을 밀고(密告)하고자 하니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은 이 사실을 차승색(車承穡)에게 긴밀히 알려서 그날 밤 찰신도주(脫身逃走)하여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둔적은거 차승색(車承穡)께서 본성(本姓)을 감추고 조모(祖母)님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칭(冒稱)하시며 이름은 백(栢)으로 개명(改名)하고 피신(避身)으로 천성(天命)을 보존(保存)한 것이다.
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 서기 810년에 구월산(구월산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둔적(遁跡)하여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모성(冒姓)한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류씨(假姓柳氏)로 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몸을 깊이 감춘다는 뜻으로 백(栢)
주해(註解) 유주(儒州) : 고려8대 현종(顯宗)이 1010년에 즉위한 후 유주(儒州)를 풍주(豊州)에 예속(豫屬)하여 유주는 없어졌고 고려23대 고종왕(高宗王) 45년 1258년에 류경(柳璥)이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 그에 고향인 옛 유주(儒州) 땅을 승격(陞格)하여 문화현(文化縣)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칭(冒稱) : 모성(冒姓)과 같음, 즉 남의 성(姓)을 가칭(假稱)함. ?으로 개명(改名)한 후 에 유주(儒州)의 부두가(富荳家)에 고용살이를 하시면서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였다.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丞穡)의 차자(次子) 차공도(車恭道)는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님의 34세 차손(次孫)인데 아버지와 형을 따라 피란을 가지 못하고 혼자서 강남(江南)으로 도주하여 본성(本姓)을 감추고 옛 조상의 구성(舊姓)인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성명(姓名)을 왕공도(王恭道)라 개칭(改稱)하고 피신(避身)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시며 고려개국(高麗開國)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이시다. (開城王氏 族譜 參照)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으로부터 류씨(柳氏)로 모성(冒姓)하고 이름 백(栢)으로 개명(改名)하여 가성명 (假姓名) 류백(柳栢)으로 칭(稱)한 것이 가성류씨(假姓柳氏)의 시초(始初)로 그의 아들 차공숙(車恭叔)은 가성명(假姓名) 류숙(柳淑)으로 개명(改名), 그의 아들 휘 진부(諱振阜), 그의 아들 휘 무선(諱茂先),그의 아들 휘 보림(諱 普林) 그의 아들 휘 해(諱海)까지 109년간 가성류씨(假姓柳氏)를 전(傳)하면서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시다.
서기 1456년 세조(世祖) 2년(경태(景泰) 7년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께서 조선조(朝鮮朝)의 왕명(王命)에 의(依)하여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에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 제현(諸賢)들이 주석(註釋)을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의 48인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역은 차운암선생 설원기(車雲巖先生 雪寃記)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내사(內史)를 역임(歷任)하신 서희(徐熙)께서 찬집(撰集)한 가사(家史)와 고려 16대 예종(睿宗) 9년(서기1127년)에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이 왕명(王命)을 받아 고려왕실(高麗王室)에서 신라(新羅)의 본계(本系)를 찬술한 서경잡기(西京雜記) 또는 서경야사(西京野史) 및 고려조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기술(記述)한 초당일기(草堂日記) 등의 기록을 성삼문(成三問)과 최항(崔恒)이 입증(入證)하였다.
주해(註解)강남(江南)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보첩(譜牒)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6대 성종왕(成宗王) 14년 서기955년 7월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10도로 나누면서 대동강의 남쪽(지금의 평안남도)을 강남도(江南道) 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강남은 중국의 강남이 아니고 대동강 남쪽 강남도를 말한 것이다.
이 글의 원문(原文)은『謹근安안司사諫간院원左좌正정言언車차原원頫부文문城성人인車차達달第제一일子자大대匡광之지伯백孝효全전之지後후也야車차達달之지於어丁정麗려室실輸수勤근之지日일孝효全전之지於어當당王왕事사靡미盬고之지時시輿여興흥原원賑진貸대之지粟속樹수顯현陵능定정社사之지勞노國국以이爲위辦판出출車거乘승繼계粮량道도運운米미征정南남特특贈증其기父부以이車차爲위達달世세績적之지號호別별賜사車차氏씨以이孝효全전首수功공之지姓성而이食식邑읍千천戶호之지封봉仍잉宗종籍적延연安안之지地지正정言언者자康강獻헌大대王왕命명起기特특拜배之지意의今금此차發발現현而이使사聞문于우意의也야臣신崔최恒항臣신成성三삼問문等등奉봉敎교註주
顯현陵능者자高고麗려始시祖조墓묘號호也야定정社사者자開개國국而이定정宗종社사之지功공也야臣신崔최恒항
奉봉敎교註주
食식邑읍千천戶호者자麗려太태祖조之지於어孝효全전之지爲위王왕室실入입宗종籍적之지後후塩염州주之지地지下하賜사也야臣신崔최恒항臣신成성三삼問문奉봉敎교註주
주해(註解)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계량(繼粮) : 한 해 농사지은 곡식으로 일 년 양식을 이어감
이 글에 고려태조 왕건(王建)께서 나라를 개국(開國)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정(定)하고 남쪽 후백제(後百濟)를 정벌(征伐)할 때 가성명(假姓名) 류해(柳海)는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로 장정(壯丁)을 모집하여 고려조정에 수송하여 도우시고 그의 큰아들 휘 효전(諱 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종사(宗社)를 정할 때 공훈을 세웠고, 나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미곡(米穀) 운반(運搬)을 행 하였으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게 차씨(車氏)로 내려서 세(世)를 계승(繼承)케 하여 달(達)로 이름 하였다고 계통(系統) 차씨(車氏)로 분부하여 나타낸 것은 효전(孝全)의 수공(首功)에 성(姓)이며 식읍천호(食邑千戶)를 봉(封)하니 곧 종적(宗籍)은 연안(延安)의 땅으로 봉(封)한 것이다.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38세 손자(孫子)인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를 살펴보면
그 원문(原文)에『公공之지配배新신羅라王왕閼알智지之지孫손金김稛균之지女녀也야生생二이男남長장曰왈孝효全전次차曰왈孝효金금際제其承승蔭음授수封봉之지日일麗려祖조特특命명曰왈念염昔석車차氏씨之지弘홍烈열旣기不불可忘망也야這저間간柳류氏씨之지冒모稱칭又우不불可가廢폐也야長장子자孝효全전爲위上상祖조之지弘홍烈열承승襲습而이車차氏씨也야次차子자孝효金금爲위柳류氏씨之지命명賜사姓성也야
이 글의 뜻은 공(公)의 아내는 신라왕 알지(閼智)의 손자 김균(金稛)의 딸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효전(孝全) 둘째는 효금(孝金)이다. 그 음사(蔭仕)로 봉(封)하여 이어 주는 날에 고려 태조는 특별히 명(命)하여 가로대 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본래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저간(這間 :이 때까지)에 류씨(柳氏)로 사칭(詐稱)하여 부른 것을 또 버리는 것도 옳이 아니하다. 장자(長子) 효전(孝全)은 윗 할아버지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여 차씨(車氏)가 되고,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명(命)한 것이다.
이에 형제분(兄弟分)이 차씨(車氏)와 류씨(柳氏)로 분성(分姓)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양문(兩門)으로 계승(繼承)하고 있다.
2. 왕씨(王氏).차씨(車氏).류씨(柳氏)등의 분파도(分派圖)
得姓一世 二 世 三世 四世 五世 六世 七世 八世 九世 十世車無一 ━ 神乙(琳) ━ 夫起 ━ 惟典 ━ 茂正 ━ 介修 ━ 復 ━ 祖英 ━ 适 ━ 仁相 ┓┏━━━━━━━━━━━━━━━━━━━━━━━━━━━━━━┛┃十一世 十二世 十三世 十四世 十五世 十六世 十七世 十八世 十九世 二十世┗ 甲乘 ━ 自開 ━ 武基 ━ 升閣 ━ 公乃 ━ 輔傳 ━ 濟能 ━ 登國 ━ 殷甫 ━ 延廣┓┏━━━━━━━━━━━━━━━━━━━━━━━━━━━━━━┛┃ 二一世 二二世 二三世 二四世 二五世 二六世 二七世 二八世 二九世 三十世 三一世┗ 徽曼 ━ 智 ━ 溫伯 ━ 楯 ━ 烚 ━ 婁漢 ━ 盾階 ━ 段式 ━ 憲 ━ 渡江 ━ 儉夫 ┓┏━━━━━━━━━━━━━━━━━━━━━━━━━━━━━━┛┃ 三二世 三三世 三四世 三五世 三六世 三七世 三八世 三九世┗ 建甲 ┳ 承穡 ━ 恭叔 ━ 振阜 ━ 茂先 ━ 普林 ━ 達 ┳ 孝全(延安車氏 得貫祖)┃ ┃┃ ┗ 孝金(文化柳氏 得姓祖)┃┗ 恭道 ━ 不傳 ━ 隆 ━ 王建(高麗 太祖)
* 이상의 원문의 출처를 일찍이 위서(僞書)로 판명되어 온 [차운암선생 설원기]라고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차운암설원기], [차원부설원기]와 같은 책명입니다. 차씨 가문의 선대(先代) 기록은 모두가 [설원기] 이하도 이상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서기 1456년 세조(世祖) 2년(경태(景泰) 7년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께서 조선조(朝鮮朝)의 왕명(王命)에 의(依)하여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에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 제현(諸賢)들이 주석(註釋)을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의 48인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역은 차운암선생 설원기(車雲巖先生 雪寃記)를 살펴보면----
글을 맺으며
* 설화?, 전설? 동화? 소설? 사서(史書)? 탐정소설? 참 기묘한 글의 연속입니다.
* 문화류씨, 개성왕씨, 연안차씨 여러분!!! 윗글을 읽으니 진실을 거짓으로 꾸몄을까요? 아니면 거짓을 진실이라 하였는지요???.
* 저 현란한 문장의 흐름을, 그리고 박학다식함(博學多識)으로 허위(虛僞)를 진실로 위작한 사건의 전개와 결말, 그리고 4,700 가문사가 한 치의 빈틈없이 저렇게 또렷하답니다. 개성왕씨와 문화류씨를 조작, 위작하여 자 기들 가문사에 올리니 이런 독후 분석록을 아니 쓸 수 없습니다.
* 530여 년 전 1580년 전후 차식, 차운로. 차천로 3부자는 그들의 박식과 현란한 문장력으로 [설원기]라는 위 서를 창작하여 개성왕씨도 문화류씨도 깜빡 속아 동조이성의 생활을 500여 년 함께하여 왔던 것입니다.
개성王자는 車자로 변형시키기가 쉽고, 명문벌족 문화류씨의 시조 柳車達의 가운데 車자가 탐이 얼마나 났겠 습니까? 차씨의 車達, 발상이 뛰어 납니다. 왕씨, 류씨를 차씨 안에 동조이성(同祖異姓)으로 아우르니 무엇 이, 그리고 차씨가 얼마나 돋보여 지는 지 차식 삼부자의 발상력, 문장력, 그 인내가 놀랍습니다.
* [설원기]의 실체가 위서로 일찍이 판명되었으니 한국사회에서는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 1580년 경 차식, 차운로, 차천로 3부자에 의한 [차원부설원기]는 아래의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어 위서의 실 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밀하고 정밀하게 위조하고 위작하여 위서를 만들었습니다.
1. [차운부설원기 : (박팽년 지음)] : 경태 세조2년 1456년
여기서부터 위서로 드러납니다. 2~3일 후면 처형당할 몸이 이런 책을???
2. [응제시] : 왕명에 의한 48명의 [응제시] 칠언절구의 72수에 주석을 하여 본문의 내용을 보충, 증거하는 형식으로 위조 위작합니다.
3. [원파록] : BC 2704년 4716년 전 중국 황제 → 조선 차천로(車天路) 1615년 까지] 王씨 車씨 柳씨의 선계를 위조 위작합니다. * 원파록은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천로도 등재되었습니다.
4. 문화류씨 여러분!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거짓이 참이 될 때가지 계속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