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만난 시인, 자선시 - 정선영
배경 외 4편
부끄러워 나서지 못했습니다
쭈뼛쭈뼛 서성였습니다
스쳐가는 사람들은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아 숨도 쉬지 않고 있었습니다
안개는 비밀의 투망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눈빛에 흔들렸습니다
막 깨어난 모든 것들의 첫 향기를 맡으며
햇빛 찬란한 사람들의 뒤에서 흘러갑니다
노을이 너울대는 저물녘
기다림이라는 올가미에 걸린 나는
당신들의 의식 밖 프레임입니다
찬란한 꿈들이 원경으로 흘러갑니다
당신들의 눈에 조명되지 못한
나는
초점에서 벗어난 바탕화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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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되지 못한 말
질겅질겅 씹다가 삼켜버린
아작아작 씹다가 넘겨버린
오물오물 씹다가 꿀꺽해버린
이와 이 사이에 낀 참깨이거나
매운 고춧가루 알갱이거나
채 씹히지 못한 나물 찌꺼기거나
당신의 눈빛과 말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걸려 있는데
맑은 물로 입을 헹궈도
골똘하게 애를 써도 다 읽어낼 수 없는
미처 씹히지 않고 행간에 걸터앉은 말들
당신이 차마 하지 않은
내가 제대로 듣지 못한 말들이
가슴에 똬리 틀고 앉아 뒤척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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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인 줄 아나봐
룰루랄라 춤추며 바다로 간다. 파랑 구름이 출렁이고 노랑 파도가 철썩이는 지하도를 지나 펄쩍펄쩍 튀어 오르는 검은 바퀴를 지나 분홍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가는 거리를 지나 국립 바닷가. 구불구불 밀려가는 거품 계단을 오르는 거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물보라를 일으키지. 꼬리로 트위스트를 추는 분홍 고래가 젤리처럼 말랑한 물방울을 자꾸 낳아. 거친 파도를 건너뛰는 당신은 노래하는 고래잡이. 왼쪽 눈 감았다가 오른쪽 눈을 감았다가 손목에 힘을 줬다가 뺐다가. 꼬리가 흔들흔들 눈알이 팽이처럼 핑핑 돌아. 초록 물결 위로 힘껏 솟구치는 분홍 고래를 운전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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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소
냉장고를 비우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사진들을 불태우고 화분을 치우고 어항의 물을 비우고 텔레비전을 치우고 폰 번호를 바꾸고.
지금까지 알아 온 얼굴들과 이미 세상에 없는 얼굴들. 너무 멀리 있어 과거가 되어버린 날들. 나 또한 지나간 시간이 되리라. 창밖에 빛나는 별 차갑게 둥근 달 한낱 꿈의 잔상들이여 알 수 없는 이유로 흐르는 눈물 터지는 웃음.
시간을 접어 서랍에 착착 포개어 놓았다. 잘 개켜진 낡은 수건들. 검은 재를 몰고 가는 어둠. 숨죽인 바람이 술잔 속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마신다. 두 손을 가지런히 접어 배꼽을 덮는다. 한 겹 허물을 벗는 중이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길이 거칠고 험하다 해도 빛 뒤의 그림자가 되어 가리라 눈도 코도 귀도 없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형상 없는 어둠 닫힌 문 앞에서 천천히 갈아입은 수의 누운 자리 붉은 꽃잎이 핀다.
또르르 말린 기억이 숨죽인다. 살금살금 밀려오는 냄새도 색도 없는 무색무취의 파도에 몸을 싣는다. 늘어지는 지느러미 아가미 가득 차오르는 어둠의 물결. 달빛이 흐려진다.
너의 선택이 너의 운명이다. 오랜 불면이 끝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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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대한 사유 4
당신의 배경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나로 오롯이 존재하기 위해 한발 물러나 가만히 내려앉습니다
그늘이 그늘로 살 수 있는 것은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모호함으로 위장하기 때문이죠
힘을 빼고 창백을 숨기고 안으로 곰팡이를 키우는 일
낮도 밤도 아닙니다
낮과 밤을 품은 빛나지 않은 중간계
내가 나를 끌고 가는 날
무릎은 욱신거렸고 발가락은 저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건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늘이 내려앉는 시간입니다
한 때 찬란했던 기억들이
빛과 어둠에 희석되고 흐릿해진 약속들이 지워져 갑니다
빛 속에서 환한 당신은 가끔 그늘을 찾겠지만
당신은 그늘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당신을 빛의 방향으로 밀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