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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경험에서 발견으로 抱樸의 문예미
-유병근 유고수필집 『횡포가 나를 키운다』
김종희(꿈꾸는 미학자. 수필가)
1.열면서
모든 길의 시작은 물음표다. 물음표는 길의 끄트머리에서 새로 밟는 지도이다. 좋은 삶을 살아봐야 좋은 죽음을 안다는 니체의 자유 의지처럼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독자가 되어봐야 한다. 좋은 글은 작가의 언어 너머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유병근 수필은 문학이자 철학이다. 아니 세계를 인식하는 자기 인식이자 의식의 흐름이다. 밀도 높은 언어 유착으로 빚어낸 상상력은 능동적 사유를 이끌어간다. 삶이 깃든 상상력은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유병근 수필의 특징은 독자를 한시도 그냥 두지 않는데 있다. 사유가 시접되는 과정, 시접된 사유가 문장으로 세워지는 과정, 문장으로 선 사유가 만드는 그림들이 숨은 그림처럼 꿈틀거린다. 그림으로 파닥거리는 언어들이 결구되어 구조화하고 마침내 의미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독자는 그의 언어가 풀어내는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첫 번째 물음표는 어리둥절이다. 무심하게 툭 터져 나온 언어, 혹은 명제를 들고 비틀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1차적 경험의 세계에서 만난 대상을 관찰하고 질문하며 비틀어 상상하는 끝에 인식의 발견을 이끌어낸다. 그런 까닭으로 처음으로 돌아간 언어는, 처음의 언어와 다르다. 비틀기라는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언어는 이미 세간과 출세간을 오고간 포월의 언어가 되어 자리 잡는다. 상상력을 통해 의미를 확장하고, 주제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한편, 독자들의 어리둥절에 이정표를 세워주기 위해 누구나 마주했을 경험을 버무려 슬쩍 끼워 넣는다. 비틀기에 길을 상실한 독자를 위한 배려다. 그것은 수필에게 향했던 눈을 독자 자신에게 돌려보라는 메세지와 같다. 독자는 작가의 상상력에 자신의 상상력을 접속시키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에 전도된 독자는 그 순간 세계를 인식하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의 효용성은 작품을 통해 만들어 가는 세계의 발견이지 않는가. 이처럼 유병근은 독자의 세계를 열어갈 수밖에 없도록 횡포를 놓는다.
2. ‘경험에서 발견으로’ 인식의 4단계
유병근 수필의 지향은 사유의 형상화이다. 그것은 의식의 흐름으로, 언어가 가지는 사전적 의미와 그 너머에 있는 시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언어 너머의 언어, 때로는 언어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간다. 말하자면 언어를 쪼개고 쪼개어 원형의 바닥으로 닿았다가 다시 원형을 빠져나오는 방식이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치열하게 오가며 질문이 전개되고 사유로 이어지며 마침내 문장으로 일어선다. 경계를 오가는 동안의 언어 유착이 시적 상상력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사유가 형상화되는 경험에서 발견으로 인식의 4단계는 <경험 -비틀어 보기 – 상상(의미 부여) -발견>과 같이 구조화된다. 이것은 청원선사의 인식론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현실 대긍정’의 변증법처럼 유병근 수필 또한 ‘현실 대긍정의 인식론’을 열어간다.
유병근 인식의 단계 | 청원선사 인식의 전개 | 인식의 발견 |
1단계 : 경험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 일차적으로 마주하는 대상 혹은 사물 |
2단계 : 비틀어 보기 |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 대상을 관찰하고 질문하며 해체 시도 |
3단계 : 상상 (의미 부여) |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 | 해체된 대상에 상상력을 입힌다. 대상의 이미지화 |
4단계 : 발견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 일차적 세계로 사유. 새로운 의미로 대상을 발견 |
일차적 단계인 경험으로써 말 걸기는 누구나 마주하는 일상의 경험이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한 경험이 수필 언어로 승화되는 동안 독자를 그의 맥락으로 끌어들인다. 주목할 것은 매 단계를 지날 때마다 뒷받침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문장이 낯설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억지스럽지 않게 지류를 받아들이는 강물의 흐름과 같다. 경험에서 발견에 이르는 인식의 4단계로 유병근 수필 「지각한 비」를 들여다보자
★1단계 - 경험
비를 잔뜩 품에 안은 듯 무거운 하늘이다. 먹장구름이 빈틈없이 하늘을 더 무겁게 하고 있다. 비가 온다고 했으니 비는 예정대로 올 것이다. 우산을 챙긴다.
오전부터 내린다던 비는 정오가 지나도 소식이 없다. 우산이 무겁고 성가시다. 오후 세 시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일을 마친 나는 집에 닿는다. 비가 오는 날의 우산은 성가신 군더더기다. 그 군더더기를 신발장 안에 도로 집어넣는다.
일기예보를 떠받쳐 주느라 비는 다른 지방에서 오고 있을 것이다.
- 「지각한 비」 p.71
비의 본성은 내리는 것이고, 일기예보의 본질은 미리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예보에도 불구하고 비가 올 시간 비가 오지 않는다. 비가 올 것 같아 우산을 챙겨 길을 나섰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비가 오지 않는 서사로 글의 시작을 연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서는 일기예보를 떠받쳐 주느라 비가 올 것이기에 비도, 일기예보도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1차적 경험에 대한 서사다. 이러한 서사로부터 출발한 비는 悲와 喜로 비틀어진다.
★2단계 – 비틀어 보기
비를 비悲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딸이 결혼식을 올리던 날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이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를 뿌렸다. 비를 맞고 찾아올 하객들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딸의 결혼을 못 보고 떠난 사람의 아픈 눈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지각한 비」 p.71
비틀어 본다는 것은 비에 대한 관념의 파격이다. 파격은 해체의 시작이다. 비라는 언어로 뭉쳐지기 전의 혹은, 비라는 언어로 뭉쳐지고 난 뒤 그 언어가 작가의 대상으로 오는 과정에서의 의식적 경험을 새로운 언어로 대치시킨다. 동시에 어떤 ‘어리둥절’을 유발시킨다. ‘어리둥절’ 이란 그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호기심의 시작이다. 유병근의 ‘어리둥절’은 경험에서 발견으로 인식의 4단계 중 두 번째 <비틀어 보기>에 해당된다. 그것은 대상을 관찰하는 일이다. 자세히 보고 뒤집어 보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끼워넣기
도시에서도 모처럼 오는 비는 반갑다. 오늘 비를 보고자 일부러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간다. 비는 반가운 손님이다. 토닥토닥 우산을 적시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는 길을 걷는 젊은 감상주의자도 있다. 나는 아파트 단지 안의 화단에 떨어지는 비를 모른다. 18층 실내에서는 비 오는 눈치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 「지각한 비」 p.72
비틀어 보기에서 유도된 어리둥절의 합리화를 위해 유병근은 슬쩍 일상의 경험을 뒷받침으로 끼워 넣는다. 대상과 나, 실재와 상상, 언어의 저쪽과 이쪽을 그의 의식은 자유로이 넘나든다. 독자로 하여금 상상 세계로 안내하기 위한 장치로써 끼워 넣기는 비는 비가 아닌 것으로 가기 위한 전조인 것이다.
★ 3단계 - 상상하기
이제 비는 비가 아니고 그 무엇이어야 한다. 여기에 이르면 유병근의 상상은 독자를 도발한다. 도발은 낯설게 하기보다 의외성이다. 낯설게 하기는 이미 전단계인 비틀어 보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산은 물이다’는 것은 인식의 발견을 끌어가기 위한 의도된 장치라 할 수 있다. 산이 산이 아닐 때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비는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에야 살금살금 내린다. 낮에 온다던 비는 약속을 어긴 일이 무안하여 사람들이 저녁 밥상에 앉을 시간을 보아 내리는 것 같다. (중략) 비는 갈 곳을 잃고 우두커니 길바닥에 머문다. 땅에 내려도 땅속에 스며들지 못하는 비는 우왕좌왕이다.
갈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은 비만이 아니다. (중략) 허름한 노숙자 차림의 중노가 우산도 없이 비 오는 바깥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 하수구는 그런 비를 받아 어디론지 보낸다. 인생이 하수구만도 못하구나 하는 생각을 그 중노는 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지각한 비」 p.72 ~ p.73
물이 된 비는 스며들거나 흘러야 한다. 하지만 도시의 시멘트 바닥에 빗물은 스며들지 못한다. 비를 품어주지 못하는 시멘트 바닥, 스며들지 못하는 비가 하수구로 흘러드는 모습에 노숙인 이미지를 병치시킨다. 스며들 곳 없고, 받아줄 곳 없는 한 인생의 좌표를 빗물로 찍는다. 비는 이제 비가 아니라 생生이다.
비가 계속 오는지 어쩌는지 바깥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훌렁 덮어쓰고 있다. 어둠은 아까보다 더 짙은 어둠이라는 캄캄한 물감을 둘러쓰고 있다. (중략) 불빛과 불빛 틈새로 저녁 무렵의 비가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오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끌린다. 발을 잘못 디딜까 봐 조심하는 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비도 있지 않겠는가.
- 「지각한 비」 p.73
지각한 비는 지각한 인생이다. 지각한 비는 혹여 들킬세라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다. 밤에 도착한 비는 캄캄한 물감을 뒤집어쓴 채 불빛의 틈새를 서서 온다. 언어 이전 세계로의 탐색은 의식의 핵분열이 일으킨다. 의식의 핵분열이란 화학반응과 달리 환원제라는 외부 조건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언어의 형태를 쪼개는 것이다. 물리적 형태를 최소화한 본질 탐구, 그것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가는 길이다.
<경험-비틀어 보기-상상>의 과정을 거치면서 구상을 추상화하고, 때로 추상을 구상화하는 의식 작용을 통해 유병근의 수필은 인식의 발견 단계로 나아간다. 이때 발견이란 다른 지형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발견이다. 그러나 처음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리로 돌아온다.
★4단계 - 발견
비는 늦었다고 쑤군대면서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딛을 지도 모른다. 그걸 아파트 화단의 씨씨티브이cctv가 괜찮니 괜찮니 염려하는 목소리로 찍고 있을 것이다.
- 「지각한 비」, p.73
맥락을 따라 걸어보면 「지각한 비」는 어떤 위로이다. 지각한 비가 가졌을 난처함과 무안함을 보듬어 주는cctv의 언어는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곳임을, 늦었다고 기죽지 마라는 경구로 들어앉는다. 그런 까닭으로 「지각한 비」는 외롭지 않다. 지독하게 외로운 듯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도 나를 지켜보는 단 한 사람이 존재하니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지각한 비는 말한다.
보편적 인간의 문제를 특수한 언어를 버무려 내는 의식의 흐름을 관조하면서 유병근은 스스로 문장으로부터 객관화한다. 늦게라도 오고야 만 비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cctv가 되어 걸어온 길에 대한 위안을 건네는 자기 고백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수필 <하늘 천 따지>에는 인식의 4단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인식의 단계 | 인식의 전개 |
1단계 : 경험 | 이번 역에서 내려야 한다. 2번 출구로 나가야 한다. 이번과 2번 출구에서 자칫 헷갈린다 -p.54- |
2단계 : 비틀어 보기 | 알 수 있다는 말 뒤에는 모를 수 있다는 말이 따라 붙는다. 나뭇잎의 전면과 후면처럼 아는 듯 모르고 모르는 듯 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안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p.55- |
3단계 : 상상하기 | 신념은 날카로운 칼날임을 알아야 한다. -p.55- |
4단계 : 발견 | 하늘 천 따지를 읊고 있는 세상, 나도 그 세상을 알고자 2번 출구를 찾아 헤매는지도 모른다. -p.57- |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본다. 본다는 것은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유병근 수필에서 본다는 것은 단지 본다는 행위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대상과 나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몰입이다. 물아무간物我無間의 상태에 들어서는 일이다.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되어 나무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다. 돌이 되어 돌이 굴러온 태초를 만나 미처 풀어내지 못하고 뭉쳐둔 어떤 암호를 해독하고 발견하는 ‘발견자’이다.
3. 포박, 언어 너머에 있는 사유로 가는 길
유병근 수필의 인식은 감성과 이성의 교직이다. 그 사이를 결구하는 힘은 물음표다. 물음표와 쪼개기로 결구된 수필은 의식의 흐름을 좇는다. 의식은 자칫 관념이 되기 싶다. 그런 까닭으로 유병근은 언어가 갇힌 사전적 의미를 철저하게 깨부순다. 통나무로부터 쪼개지는 결처럼 봄날의 꽃망울처럼 터진 언어들이 원형으로 박혀 있다. 원형에서 박리된 언어는 새로운 파편들을 끊임없이 내보낸다.
유병근의 수필은 언어의 파편을 한 땀 한 땀 의미를 부여하며 대상을 발견한다. 언어를 모서리를 붙잡고 의식의 혁명을 일으킨다. 외부의 어떠한 예시도 빌려오지 않고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오직 유병근의 철학으로 완결된 그의 수필은 독자들로 하여금 물음표를 던지도록 만든다.
물음표란 접속에서 접촉으로 이르는 문이다. 독자는 그의 수필에 접속하여 사유로 끌려 들어간다. 의식의 모서리에서 언어의 끄트머리를 잡고 그의 상상하기에 동참한다. 그 순간 독자는 작가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햇빛 바라기를 하고자 돌담 아래 기대선다. 봄 햇빛 모이는 곳은 양지바른 돌담 아래다. 돌에 눌어붙은 햇빛을 긁어볼 셈으로 손톱으로 돌을 긁는다.
돌에 자라는 것이 있다. 보나마나 돌이끼인데 햇빛이 쌓여 이끼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지 싶다. 추상화 같기도 한 이끼 속에는 햇빛만이 아닌 달빛이 고여 있고 밤마다 반짝이는 별빛도 고여 있을 것이다. 비와 바람인들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고 돌이끼를 키우는 일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돌담 아래 서서 햇빛 바라기를 하던 이야기도 고스란히 이끼 깊숙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 「횡포가 나를 키운다」, p.74
「횡포가 나를 키운다」는 사라져가는 돌담을 읽는 설명서 같은 수필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유가 있다.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돌담은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에 대한 사유이다. 그런데 그 돌담의 횡포는 뜻밖에 자신을 키우는 존재가 된다. 나와 세계가 따로 있지 않음을, 수필은 결국 나를 발견하는 것임을 유병근은 돌담에 대한 사유로 풀어낸다.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면서 또한 의식적 존재이다. 그러나 육체가 없으면 의식은 세계로 드러나지 못한다. 또한 의식이 없는 육체는 그냥 물질일 뿐이다. 의식적 존재인 내가, 육체적 존재인 ‘나를 읽는 설명서’처럼 명징하게 다가온다.
돌에 자라는 이끼를 보는 것은 세월이 그린 그림을 보는 일이다. 그런 점 사람의 얼굴에도 그림이 뜬다. 나이를 말하는 저승꽃이다. 돌담 이끼 같은 얼굴이 아닌가. 얼굴 속에 살아온 세월이 있다. 뒷산 부엉이 우는 소리가 있다. 밤중에 우는 여우 울음소리가 있다. 멧돼지가 논밭에 내려와 다 자란 곡식을 쑥밭으로 만든다는 안타까운 소리도 있다. 누구네 집에서 밤새 굿을 한 징소리 꽹과리며 물밥 치던 소리도 줄 음과 줄 음 틈에 끼여 있다. 상여 놀이 소리도 있지 않겠는가. 저승이 소리를 이승에서 미리 보고 듣는 저숭꽃이라면 어떨까.
- 「횡포가 나를 키운다」 p.74~p.75
살아있다는 것은 부지런히 걷는 것이다. 삶이란 추상명사로부터 돌담에 앉은 햇살처럼 한 생이 걸어 나온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 모든 생은 또 죽음을 향하여 걸어간다. ‘생’의 과정에서 마주한 경험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는 늙어간다. 어쩌면 늙음은 우울한 정경으로 밀려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꾸만 허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이끼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이끼란 생의 그윽함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퇴적 위에 움 터는 생동이기 때문이다. 수필에서의 허구는 시적 상상력과 같다. 그것은 주제의 명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라져가는 돌담을 자신에게로 치환하고, 돌담에 핀 이끼에 생의 이력을 뽑아 올리는 유병근 문장은 곡경통유曲徑通幽의 미의식을 담아낸다.
돌담에 새겨진 추상화를 보는 일 또한 즐겁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나날이 사라지고 있다. 개발이라는 명분에 힘입어 어느 날은 불도저가 돌담을 왕창 밀어붙인다. 어느 날은 철골 기둥이 우뚝우뚝 들어선다. 돌담은 더 이상 돌담이 아니다. 햇빛 바라기를 하던 이야기도 사라지고 봄의 전령사도 뿌리째 뽑혀 옛날이야기의 블로그 blog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 「횡포가 나를 키운다」, p.75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이글에서 따돌리는 신세로 떠밀릴지 모른다. 또 다른 참신한 언어 세력이 나타나서 글의 격을 더 높이거나 글의 아귀를 확 틀어버리는 횡포에 시달릴 수도 있다.
- 「횡포가 나를 키운다」, p.76
세월에 흐름을 비껴갈 수 없는 한 생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은 딱딱하다, 그럼에도 의식은 유연해야 한다. 어쩌면 잘 사는 길이란 말랑한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랑하게 사는 것이란 날마다 참신한 언어를 찾는 일이다. 선지식을 찾아 나선 선재동자처럼, 별의 사막을 건너 바다의 사막을 걸어간 어린왕자처럼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밖으로 향했던 눈을 안으로 돌려 스멀거리며 몸을 비트는 사유의 창에 온음표를 찍어야 한다. 온음표로부터 쪼개져 나온 음표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일이다.
4. 닫으며
일찍이 수필가 유병근은 수필에 있어서 시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 한 잔에도 굽이진 곳이 있으며 돌 한 조각에도 깊은 곳 있듯이 시절이 흐릿할 때일지라도 맑고 그윽함은 있는 법이다.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면 밝은 때에 미처 보이지 않았던 모서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모서리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이다.
유병근 수필은 경계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지도이다. 경계에 서면 이쪽과 저쪽을 조감도처럼 볼 수 있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는 흰 종이 면에서도 만난다. 시적 상상력은 흰 공간을 헤아려 글자를 쓴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곳이 모두 오묘한 경계가 된다. 이럴 때 경계는 언어가 된다. 언어의 주인은 그것을 부려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의 언어를 만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순간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물길이 된다.
유병근 수필은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심미안이다. 수필 「일억 사천만 년 전」부터 속울음으로 자라는 가시연처럼, 세상도 사람도 저마다의 깊이로 뿌리내리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위대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유일자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창이 수필이며, 의미 부여를 통한 세계 발견이 수필이라고 유병근은 말한다. 그 결과 통념은 파괴되고, 파괴는 새로운 언어로 터져 나온다.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했다 하여 많은 수필가들이 분기한다. 그것은 1차 적 경험의 글쓰기로 왜곡되고 오인된 결과이다. 시의 형태를 벗어난 글들이 곧 수필이라는 잘못된 인식 속에 수필의 본질과 그 가치가 폄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자신의 철학과 사유로 충만된 때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다시 말해 <경험-비틀어보기-상상하기(의미 부여) -발견>이라는 인식의 단계를 통해 비로소 탄생 된 글이 수필이다.
<경험에서 발견으로> 유병근 수필의 인식론은 결국 내 안에 있는 나를 드러내는 일, 현학으로서의 관념을 털어내고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유병근 수필은 수필의 전형이다. 경험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파고드는 언어와 밀고 당긴다. 통나무를 쪼개듯 언어를 쪼개며 깊이 파고들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며 사유의 바닥을 탐구한다. 그 사이사이 때로는 역설로, 때로는 밀착된 언어로 소멸에 대한 변증법으로 자신을 세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지 않고, 어두운 것은 어둡지 않다는 유병근의 횡포. 그는 가고 없어도 그의 문장은 여전히 횡포로 남아 숱한 독자를 깨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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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199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되었다. 「빈빈문화원」을 운영 중인 미학자이며 《사이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으로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 있다』가 있으며 그림글 『사랑도 기적처럼 올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