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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사이펀문학토크 |강은교 시인
토크대담-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정가을> 두 분 선생님. 건강히 잘 계셨는지요? 저희 사이펀문학토크에 강은교 선생님을 지난해부터 모시고자 예정은 하였습니다만 코로나의 장기화로 두 차례나 연기를 하다 부득불 이렇게 지면토크를 열게 되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과 남포문고에서 강은교 선생님을 만나고자 했던 독자 분들에게도 깊은 송구함을 먼저 전합니다. 오늘 토크는 김경복 선생님이 사전 준비한 질문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김경복> 네. 반갑습니다. 먼저 강은교 선생님,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휘청거리는 이때 잘 지내고 계시겠죠?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불러온 참사에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아연함과 무참함을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인간의 오만, 또는 무지에 대한 신의 징벌이 내리는 형국이라 할지 마음이 참담하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 정화의 빛을 밝히는 시, 그 시를 쓰는 시인들의 안녕을 깊이 빌어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선생님께 드려보고자 합니다. 이번 시집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를 내기까지 선생님의 시력이 무려 52년이나 되더라고요.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선생님이 시를 쓴 계기와 그 오랜 시를 써 오는 동안 ‘나에게 시는 그 무엇이었다’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말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강은교> 네. 오늘 함께 하게 되어 무척 반가워요. 먼저 시를 쓴 계기를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하네요. 그런데 갈수록 어려워져요. 대학교수가 되면 잘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그것. 대학교수가 되어도 모르겠더라구요. 석사...박사 이렇게 하면 잘 알게 되겠지 했지만 더 모르겠더라구요. 정년을 하면, 그렇게 늙으면 아주 좋은 답이 내 자신에게 주어지리라 생각했지만 모르겠네요. 정년한지 10년이 넘었건만, 시집을 15권이나 냈지만 모르겠네요.....아니예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공간을 확장하면, ’생의 한 가운데‘에 이를 줄 알았어요. 거기서 진짜 시가 나올 줄 알았어요. 그동안 생은 나를 비켜가기만 했죠. 나는 그 웅덩이 속에서 정체되었었고.........
아무튼 시는 아직도 나에게 “이끄는 실”이에요. 현상학에선 그걸 초월론적인 지향적 대상이라고 한다지만, 나에게도 그런 어떤, 나도 모르는 지향이 시였나 보죠.
그냥 나를 이끈 거예요. 엘리옷 사진을, 옛날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셰계문학전집인 가에 있던 엘리옷 선집에서 엘리옷 사진을 잘라내어 책상 앞에 붙여 놓았던 그 시절부터........누가 시킨 건 분명히 아니었죠. 엘리옷이 대표하는 그 무엇이 나를 이끌었다고 해야겠죠. 책상 앞 벽에서 이국의 그는 나의 지향적, 초월적 대상이 되었죠. 나도 모르는 나의 이끄는 실이 되었죠. 아니에요, 아니에요. 시집을 내면 거기엔 시가 없었어요. 나의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고 또 답은 없었어요..........그래서 또 시집을 내었고.............^^^^^
<김경복>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시집 전체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계절적 테마를 바탕으로 나누어져 있는 점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점은 보는 독자에게 계절적 상징과 함께 시간의 흐름, 또는 시간의 순환성 등 여러 의미를 발생시키고 있어 어떤 심원함과 함께 신선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각 계절에 배치된 시를 통해 삶의 과정과 ‘현재’라는 시간 속에 내가 살고 있다는 현존감에 대한 감각을 많이 받았는데, 선생님께서 이러한 시집 배치를 한 까닭과 계절을 시집 각 부 제목으로 한 연유가 있다면 무엇인지를 말해 주실 수 있는지요?
<강은교> 그런 순환성의 배치는 가끔 해왔어요. 특히 『어느 별에서의 하루』에서는 ’제1부 정오 그리고 낮의 시들‘, ’제2부 저녁 그리고 밤의 시들‘, ’제3부 새벽 그리고 아침의 시들‘, 하는 식으로 분류했었어요. 14시집 『바리연가집』에서는 아예 ---1부, 2부하는 부를 없애버렸고.........그러다 이번에는 봄 편, 여름 편.....식으로 했어요. 그러면 답이, 무엇인가 답이 나올 것 같아서............
<김경복>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시집 상당 부분이 주술적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지요. 선생님이 일찍부터 써 오신 ‘비리데기’ 시편처럼 이번 시집에서는 ‘당고마기고모’로 호칭된 여성적 대상에게 어떤 존재의 운명, 신비, 고통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 시 곳곳에 “시간을 주랴/추억을 주랴/주사이다 추억을/주사이다 지금을” 등으로 제시되고 있는 무가적(巫歌的)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선생님의 시는 약간의 ‘신기’를 풍기고 있고, 어쩌면 시 자체가 하나의 주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와 주술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당고마기고모’는 어떤 상징입니까?
<강은교> 시와 주술의 관계는 시와 호명의 관계가 아닐까요? 나에게 그 관계는 呪術이라기 보다 呪文이예요.
첫 시집 『허무집』에서부터 등장한 비리데기는 ’제14시집‘에 와서 아예 바리연가-사실 바리연가는 나의 오랜 꿈이었어요-로 나에게 다가왔고........ 그 비리데기의 범위를 좀 더 넓힌 것이 이번의 당금애기죠. 당금애기의 내 시적 이름-암시스러운, 더 적당한 것이 없을까 하다가 당금애기-당고마기를 발견했지요. 당금애기는 비리데기처럼 지방마다 독특하게 불리는 전국에 분포된 무속신화죠?, 강릉지방의 당금애기는 당고마기로 불리우고 있었어요. 이거다, 라고 혼자 의기양양 소리치면서 집어 들었죠. 거기에 고모가 가서 붙었습니다. 당금애기는 당고마기가 됨으로써 인간의 피붙이인 고모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되었어요.
아마 고모가 거기 가 붙은 이유는 실향민인 나에게는 고모가 없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고모 있는 아이들이 늘 부러웠거든요. 더구나 고모는.........어미 모가 들어가는, ’큰 어머니’잖아요. 나에게는 그리운 이름, 고모.
그리고 ’시간을 주랴/주사이다, 하는 것은 주로 채록집에서 가져온 무가의 사설이에요. 그걸 자꾸 쓰고 하다 보니까, 패러디하게도 되고 그랬어요..........단순한 표현은 아니고 내 속의 소리-출렁거림 같은 거죠... 우리의 밑바닥에 흐르는, 전통이라는 것의 흐름 같은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당고마기 고모는 그리운, 나에게는 없는 ‘고모’이기도 하고, ‘운조’(이번 시집의 또 하나의 인물)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다른 ‘어떤 여인’이기도 하고...........나에게 가을이면 무화과 몇 알과 왕대추 몇 알을 가져다주는, 광대뼈가 많이 나온 ‘앞집 여인’이기도 하고.........아니에요.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이렇게 간단히 말 할 수 없는 나의 당고마기.........생의 대명사 당고마기, 아니 ‘현실’ ‘실재’의 대명사? 아니, ‘무엇이든지 척척 하는’(이번 시집의 105쪽을 참조바람) 구원자?,
<김경복> 이번 시집을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 어떤 일관된 이미지의 흐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인데, “핼쑥한 달”(「핼쑥한 달」), “저문 등꽃 잎 한장”(「등꽃, 범어사」), “시든 양파”(「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개구리 우는 진흙길”(「아라홍련, 저물녘의 연못」), “무덤가 검은 덧창”(「덧창 -무덤마을에서」), “때가 많이 탄 도홧빛 방석들”(「시골보리밥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품”(「아주아주 작은 창」), “등뼈를 잔뜩 구부린 채”(「그 소녀」), “가끔 너무 목이 말라”(「내가 나에게 보낸 초대장」), “그 좁은 틈에서 숨도 쉴 수 없고”(「내가 나에게 보낸 초대장」), “나는 숨에 매달린다. 기를 쓰고 매달린다”(「코」), “구불 길로 가는 한 사람”(「시월, 궁남지」), “검은 바람들의 혀”(「푸르스름한 치마」), “가을비, 흰”(「가을비, 흰」), “모서리 다 닳은 등불”(「한용운 옛집」) 등이 그것들입니다. 이 이미지들의 공통점을 다시 추려보면 ‘약해지고, 저물고, 닳고, 바래지고, 시들고, 때가 타고, 구부러지고, 목이 마르고, 숨쉬기 어렵고’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바로 ‘소멸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계열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선생님의 나이와 심정을 반영하는 이미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런 소멸, 혹은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초기 시에도 많이 보여 어쩌면 선생님 시의 본질적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이번 시집에 보이는 소멸의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그러면서 맑은 슬픔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최근 시를 쓸 때 이런 이미지들이 주가 됨을 의식하고 쓰시는지요? 이런 이미지들을 쓸 때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노년에 든 선생님 자신의 운명이나 존재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강은교> 모르겠어요. 그런 이미지들이 자꾸 써지네요.
아무튼 나는 화가가 물감을 캔버스에 던지듯이...........이미지를 나의 A4 용지에 던지는 수가 많아요. 그러면 나도 생각 못한 구체적인 그림이 나올 때가 있죠.......이번 시집에선 특히 많이 던졌어요, 주로 새벽녘에^^^^.......그러다보니 시는 ‘우연’이라고 요즘은 자꾸 생각하게 되네요. ‘필연이 되고자 하는 우연’이라고. 아니에요. ‘literary fortune’,즉 ‘운運’이라고. ‘우연인, 문학적 운’.
<김경복> 이번 시집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앞의 이미지들과 연동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초월’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아야아, 렌마스비 호수」란 시를 보면 “렌마스비 호수에 가고 싶네/거기엔 아마 곤(鯤)이 울고 있으리/그 소리 들으러 한 팔십에 비행기를 타고 싶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운 것은」이란 시에서 “그리운 것은 멀리 있네”라고 하고 있고, 「먼 곳」이란 시에서는 “돌아서는 길목마다 먼 곳은 남아 있어”, 또 「한 밤에 마당으로 나가」란 시에서는 “너도 나도 별이 되면 어쩔까, 세계처럼 한밤처럼/그렇게 아득하면 어쩔까, 어쩔까”라고 읊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들의 공통점은 ‘멀고, 아득하고, 신비로 가득 차 있어 인간에게 끝내 그리운 대상이 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곧 현실적 삶의 결핍을 뛰어넘어 영원하면서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꿈을 보여줍니다. 이런 시들을 볼 때마다 원형적 심상의 차원에서 심원한 느낌을 받으면서 어떤 본질적인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데, 선생님의 이번 시들은 이런 느낌을 더 애잔하게 그려내는 것 같아 마음 한 편 쓸쓸함은 지니게 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초월의 세계라면 어떤 곳이라 설명할 수 있겠는지요? 늘 꿈꾸는 그리운 공간은 어떤 이미지로 많이 떠오르는지요?
<강은교> 요즘 와선 특히 나의 지향적 대상들은 어떤 공간속에 잘 테두리 지어지는 군요... 그 공간은 그리움으로 아득한 공간들이기 쉬워요, 그렇게 많이 만진 하늘, 허공에서부터 별, 그리고 내 앞에 굴러다니는 연필-종-연필심에 이르기까지..........어디선가 만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____, 나는 그들의 이미지를 나의 캔버스에 던지죠.
그런데 닿을 수 없으니까 갈수록 그곳들이 참 아름다워 지는군요. ........갈수록 나는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원토록 변방-인 영원토록 구원-인’(시집 『바리연가집』 참조바람) 그곳, 나를 자꾸 밀어내는 거기, 그래서 나는 미친 듯 ’끼어들기‘를 하고, .............
<김경복> 이번 시집에서 특이한 표현의 하나는 ‘아야아’라는 감탄사입니다. 이 표현은 「아야아, 렌마스비 호수」, 「이 세상의 시간은」, 「우표」, 「시월, 궁남지」, 「먼 곳」, 「바늘꽃 기침소리」, 「누가 문을 두드리네」에 나오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픔을 내지르는 소리로 보여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 여기 있소!’라고 알리는 외침 소리로 보여진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누가 문을 두드리네」에서 “아야아 심장 소리에 젖어 젖어”라는 표현을 통해 ‘심장 소리’, 즉 생명의 실존에 대한 소리로 그 의미 부여를 해주고 있습니다. 매우 적절하고 탁월한 의미부여로 생각되는데,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읽어가는 독자 입장에 볼 때는 정말 아픈 사람이 나 여기 아직 살아 있다는 외침 소리 같이 느껴진다는 점이 더 문제적인 부분으로 보여집니다. 이번 시집에서 굳이 이렇게 의성어를 넣어 자신의 실존과 고통을 표현하게 된 까닭이 있으신지요? 시적 표현으로 볼 때 매우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상태로 독자의 마음을 울리고 있어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강은교> 아주 잘 읽어주셨네요. ’생명의 실존에 대한 의미부여’......라, 잘 외워둬야겠어요.
아무튼 ‘아야아’는 향가의 ‘아야’라는 어미와 감탄사 ‘아’를 한데 합성한 나의 감탄사예요.
나는 어느 날인가부터 이 조어를 감탄사이면서 아픔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주 쓰곤 하는데....특히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 속에서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가야소리’에서. 아무튼 나로서는 ‘아’보다 더 아픈, 결코 소리 내지 않는, 지독한 아픔 같은 걸 느끼게 하지 않을까 싶은 희망을 품으면서......
<김경복> 이번 시집에서 재미난 부분은 형식적 발랄성입니다. 우선 시집 감상에 있어 시 본문이 대체로 다양하게 배열되어 있고, 시 제목도 끝에 배치됨으로써 본문을 읽고 난 뒤 제목을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독자들은 본문이 다양한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음으로 인해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를 감상할 수 있게 한다는 특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상당수 작품들이 ‘시극(詩劇)’처럼 행동과 대사, 합창, 지문 등의 내용으로 시가 제시되어 어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도 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시세계로 볼 때 상당한 파격으로 보여 지는데, 이번에 이렇게 형식적 변형을 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강은교> 발랄이 좀 지나친가요?^^^^
이번 시집의 제목의 배치는 원고를 이메일로 ‘날려 보내려는 순간’ 꿈꾸어졌어요. 꿈 이었죠.나의 몇 이미지로서 시의 공간을 넓혀보려는, 어찌 보면 불가능한 꿈이라고 할까요? 그리운 공간에 ‘슬쩍 끼어들기’를 하려는 것이라고 할까요?........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상투성에 빠진 내가 슬프게 답답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제목을 먼저 주는 등 규정 나아가 감옥화 하려고만 하는가, 싶기도 하고, 『허무집』 이래로 『소리집』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늘 꿈꿔온 ’해방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또 꿈을 꿔보자, 하면서 제목에 갇힌 나의 시들을 풀어주었어요. 제목을 아예 없앨까 하다가 그건 너무 불친절한 일이고 오해의 소지가 많을 것 같아서, 시 맨 뒤로 보내기로 했어요.
그리고 뮤지칼 말씀을 하셨는데.........
한 때 나는 시 뮤지컬 같은 걸 생각했어요........이번 시집 중의 여름 편 『운조의 현」 때 특히 그랬어요.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시 뮤지컬은 엘리옷의 ”캐츠“같은 것과는 달리, 스토리가 없는, 이미지만 있는 그런 거였지요.
...........언젠가 ’아름다운 소녀 바리‘가 스크린 뒤에서 맨몸으로 춤추고 그 한 곁엔 당고마기고모가 장대하게 서있고, 그 옆 계단엔 운조가 턱을 괴고 앉아있는 그런 뮤지컬 아닌 뮤지컬-이미지 뮤지컬(스토리가 없는),을 시로써 만들고 싶어요. 나도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 그런 형식,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러다 다시 노래, 주문, 기도(내 첫 시집 『허무집』의 ’연도‘로 가지 않을까 싶어요. 아니 벌써 그러고 있군요. 이번 시집이 나온 날부터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쓰고 있으니, 아홉째 가락까지 썼어요......답을 찾아서...........치유인기도 해방인 기도............
<김경복> 네. 선생님. 오늘 이번 시집을 보면서 궁금한 점들을 해소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가을> 두 분 선생님 대화를 듣고 잇다보니 시간이 훌쩍 가버리는군요. 이곳 남지의 선생님 댁에서 지면토크를 가지게 되어 무척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사이펀 독자들에게 아주 요긴한 문학토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