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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직 안 열려서 그래
문수선원에는 봄다운 신선한 공기가 있었다. 화엄전에 매화가 피었는지 보고 오겠다고 보살님들께 인사드리고 익숙해진 범어사 등산길에 올랐다.
바람이 찼지만 노란 햇빛이 등이 굽거나 등이 곧았거나 거기 있는 모든 나무들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나무처럼 고개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범어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을 때 작은 승용차 한 대가 서고 창문이 열렸다. 큰스님이시다.
화엄전에 아직 매화가 안 피었으니 그냥 차에 타라고 하셨다.
운전해 주신 스님께서 원래 금정산 겨울은 춥다고 하셨다.
그동안 문수법공양회 팀원이 바뀌고, 염화실 서버를 관리하는 회사가 디도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모두들 아주 어려웠다고 하셨다.
“그래도 겨울이 지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마침 선원 앞에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이신 이진두거사님이 계셨다. 큰스님께서 설날 선물로 모두에게 법공양 해주신 책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를 통해 먼저 뵈었었다.
책 읽을 때의 상상과 달리 ‘소박하시다’고 말씀드리자 “그게 이 사람의 인품이야” 라고 큰스님께서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못생겼다는 소리지요. 뭐.” 거사님이 웃으셨다.
큰스님은 현관옆의 공양을 준비하는 방이며, 테이프를 판매하는 테이블이며, 선원 곳곳을 꼼꼼하게 돌아보셨다. 방에 오셔서 숨을 돌리시고는 “갸는 어딨나” 하고 문수법공양회를 돕는 청년을 찾으셨다. 집안 행사로 부산에 내려왔다가 어머니 명령으로 갑자기 밀린 업무를 돕고 있다고 했다.
“마음 내 가지고 하자 일. 마음 자꾸 그래 쌌지 말고” 큰스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시고는 조금 생각해 보시다가 “여기 있으면 예쁜 처녀들도 많이 온다.”하셨다.
“아직 안보이던데요? 여기서 제일 예쁜 분들 모였다고 해서 가봤는데 별로.”
요즘 청년답게 태도는 예의바르면서도 내용은 정직한 대답에 함께 있던 보살님들이 하하 웃었다.
큰스님께서 “아니야 니 눈이 아직도 안 열려서 그렇지”하셨다.
“부처님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지. 그걸 알아야 되는데”
큰스님 내려오시기 전에 궁금해하는 보살님들에게 청년은
‘좀 더 제 일을 하고 나중에 더 큰 사람이 되어서 큰스님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었다. 아마 그 마음을 큰스님께서 알고 계신 모양이었다.
학무거사님이 오셔서 오늘 진도를 어디까지 하실 건지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깔끔하게’ ‘오늘은 세주묘엄품까지만 하겠다’고 ‘그렇지 않아도 진도 짜느라 고민을 많이 했다’고 녹음하여 음반만드시는 ‘학무처사하고 내하고만 고민했다’ 하셨다.
두 분이 마주보고 웃으셨다.
“덥지? 여기 오면 다 덥게 돼 있어. 아무리 인생이 춥더라도 여기 오면 덥게 돼 있어.”
아까 큰스님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셨었다. ‘여기’라는 에너지는 정말 있는 모양이어서 모든 분들의 얼굴이 다 빛났다.
힘들었지만 씩씩하게 겨울을 넘기고, 문수선원의 열 세번째 새로운 화엄산림이 시작되었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유인물>
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 6(제13강, 11년 3월 7일)
唐 清涼山 大華嚴寺沙門 澄觀(淸涼國師)撰
제8門, 광대하고 깊음을 결론지어 찬탄하다[結歎宏遠]
真可謂常恒之妙說이며 通方之洪規며 稱性之極談이며 一乘之要軌也로다
참으로 항상하는 미묘한 설법이며, 시방에 통하는 드넓은 법규며, 성품에 칭합하는 지극한 말씀이며, 일승의 요긴한 궤범이로다.
尋斯玄旨하고 卻覽餘經하면 其猶杲日麗天에 奪眾景之耀요 須彌橫海에 落群峰之高로다
이 현묘한 뜻을 찾고 나서 다시 다른 경전을 보니 마치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에서 빛남에 온갖 빛의 빛남을 다 빼앗은 것과 같고, 수미산이 바다에 가로 놓임에 온갖 봉우리의 높음도 다 떨어짐과 같도다.
제9門, 만남을 감사하고 기뻐하다[感慶逢遇]
1, 널리 펼치게 된 근본 이유[弘闡源由]
是以로 菩薩이 搜祕於龍宮하시고 大賢이 闡揚於東夏하시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비전을 용궁에서 찾아냈으며, 대현이 동하에 크게 드날렸다.
2, 만난 것을 감격함을 밝히다[正明感遇]
顧惟正法之代에도 尚匿清輝러니 幸哉라 像季之時에 偶斯玄化하고 況逢聖主하며 得在靈山하야 竭思幽宗하니 豈無慶躍이리요
돌아보니 정법 시대에도 오히려 맑은 빛이 숨었으니 다행하여라. 상법과 계법의 시대에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으며 더욱이 성주를 만났으며 영산에 있으면서 생각이 그윽한 종지에 다하였으니 어찌 경사스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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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작 전에 우리가 왕복서를 합송하는 것은 입에 익숙하게 하고 마음에 깊게 새기기 위해서다. 절에 돌아가서도 각자 읽어서 왕복서의 뜻을 폭넓게 이해하고 깊이 이해하시기 바란다. 그물을 걷을 때 벼리를 잡는 것과 같이, 또 옷을 드는데 옷깃을 잡는 것과 같이 이 왕복서를 통해서 화엄경 전체가 다 딸려오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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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왕복서(往復序) 여섯 번째 유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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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문(門) 결탄굉원(結歎宏遠) : 광대하고 깊음을 결론지어 찬탄하다.
왕복서를 10문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데 그 중 제8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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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가위상항지묘설(眞可謂常恒之妙說)이요: 항상 하는, 늘 있는 미묘한 설법이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21일 동안 설한 것으로 되어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21일간, 그 깨달으신 내용에 도취하고, 환희심을 느끼고, 낱낱이 새롭게 점검하고, 깨달음의 궁극적 세계 속에서 법락을 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편집되고 표현된 것이 이 화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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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말씀 드렸지만 소동파가 상총스님을 만나서 ‘왜 자꾸 유정설법만 들으려고 하는가, 무정설법도 듣는 귀를 가져라’ 하는 말을 듣고는 그만 꽉 막혀서 ‘무엇이 무정설법일까’ 하는 것이 화두가 되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상설변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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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광장 설법이다.[계성변시 광장설 (溪聲便是廣長舌)]
그러한 물소리를 자아내는 이 산천초목인들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아니겠는가.[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가]
하루 동안 8만 4천 게송을 설하고 있는데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다른 날 누구에게 가서 이 소식을 서로 나눌 수 있겠는가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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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 차원에서 볼 때 이 화엄의 도리는 특별한 때에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 항상 설하고 있다. 부처님 이전에도 설하고 있고 앞으로 수 억만 년 이후에도 설하고 있으며 현재도 설하고 있다. 보리수하에서만 설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문수경전연구회 이 자리에서만 설하는 것이 아니다. 지옥에서도 설하고 천상에서도 설하고 어디든지 설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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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방지홍규(通方之洪規)며 : 이것은 어떤 지역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방, 시방에 통하는 드넓은 법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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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인 때도 그러했지만, 불교에서는 흔히 ‘이 말씀이 진리냐 아니냐’는 것을 가지고 논할 때가 많다.
불교 안에서 비진리라고 함은 방편을 말한다.
참다운 이치와 방편을 분별하는 방법이 있다.
진리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국가 어떤 민족에게도 다 통하는 이치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출가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든지, 한국에서만, 혹은 인도에서만 해당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방편이다.
예를 들어서, 소소한 계율이긴 하지만 옛날 계율에는 사시가 넘어가면 식사를 못하게 되어 있었다.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햇빛 그림자가 손가락 한마디만 넘어가면 규율로 정한 시간이 벌써 지난다. 먼 데서 탁발해서 사찰까지 돌아오는 동안에 그 시간을 놓치면 배는 고프고 탁발은 해왔고 시간은 지났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표현으로 ‘계율 근본주의자’는 계율에 정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탁발한 음식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가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이야기이다. 농사도 못 짓게 되어 있고 밥도 직접 손으로 지어먹지 못하게 되어 있는 계율도 지금 생각해 보면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이다. 이런 것은 비진리이며 방편이다. 상황에 맞춰서 이야기 해놓은 것일 뿐이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서든지 다 통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리이다. 그렇지 않고 어딘가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방편이다. 그런 것은 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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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도 이런저런 방편의 이야기가 없지 않다. 소승의 교리도 있다. 설사 방편이 있고, 소승의 교리가 있어도 화엄경은 그 소승교리를 뛰어 넘는다.
뒤에 보면 계율에 관하여 ‘여기 모인 대중은 다 청정한가?’라고 묻는 것이 계율인가, ‘예’ 라고 대답하는 것이 계율인가, 화상이 계율인가, 아사리가 계율인가, 삼사칠증이 계율인가 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화엄경의 관점에서 계율이란 철저히 잘 지키되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고 구애받지 아니하면서도 또 철저히 지킬 줄 아는 것이다.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제대로 불교 이치를 알게 되면 이것이 하나도 모순이 아니고 이치에 맞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칭성지극담(稱性之極談)이며: 우리 본성에 칭합하는 지극한 말씀이다. 지극한 우리 마음의 이치에 어긋나면 진리가 아니다. 그런 것은 불설(佛說)일 수도 없고, 불교일 수도 없다.
일승지요궤야(一乘之要軌也)로다 :일불승의 가르침이 일승지요궤다. 불교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다. 그중에서도 일불승은 대승의 가르침이고 나는 그것을 ‘인불사상(人佛思想)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라고 표현한다.
화엄경으로 치면 만물이 다 부처님이다. 삼라만상이 다 부처님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화엄경에만 있다. 그래서 일불승의 아주 요긴한 궤범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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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현지(心斯玄旨)하고 : 이 현묘한 뜻을 찾고 나서
각람여경(却覽餘經)하니 : 청량스님께서 다시 다른 경전을 살펴보니
기유고일려천(其猶杲日麗天)에 : 마치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에서 빛남에
탈중경지요(奪衆景之耀)오 :온갖 다른 빛의 빛남을 다 빼앗아 버린 것과 같다.
태양이 밝게 비출 때 수 만촉짜리 형광등을 켠다 한들 크게 밝을 리가 없다. 화엄경과 다른 경의 격차가 그와 같다. 청량스님 같은 분이 화엄경만 보았을 리가 없다. 청량스님이 화엄경 현담에 인용한 서적이 유교서 도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 경전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는다. 청량스님이라고 하는 인물 자체가 그대로 대장경이다. 그러한 안목을 가지고 화엄경과 다른 경전을 비교하여 이런 표현을 한 것이다.
수미횡해(須彌橫海)에 :예컨대 저 태평양 바다에 수미산이 우뚝 솟았다고 하자.
낙군봉지고(落羣峯之高)로다 : 그랬을 때 다른 작은 시시한 산봉우리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다 떨어짐과 같다. 화엄경을 이렇게까지 표현하고 있다.
화엄경의 수준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평생 불교에 귀의하고 출가사문이 되었어도 화엄경과 깊은 인연을 맺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화엄경을 공부 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러한 계기로 각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셔서 여기에서 다 설명 드리지 못한 화엄경의 드넓고도 깊은 내용들을 잘 이해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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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문(門) 감경봉우(感慶逢遇) :만남을 감사하고 기뻐하다. 화엄경 만난 것을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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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이 참 중요한 대목이다. 나는 평생 스님들 교육에 몸담고 살아왔지만, 이쯤 와서 아직 말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많은 스님들을 모시고 다시 화엄경 공부를 같이 할 수 있게 되어서 온 힘을 여기에 다 쏟고 있다. 나는 정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여기 청양스님께서도 화엄경 만난 것을 너무 기뻐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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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천원유(弘闡源由) : 널리 펼치게 된 근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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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是以)로 :그러므로
보살(菩薩)이 수비어용궁(搜秘於龍宮)이요 : 보살이 용궁에 비장되어 있는 것을 찾아왔다.
불법대해라는 큰 바다가 있다면 총본산이라고 할까 그 중심, 중앙에서 화엄경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화엄경은 용수보살이 부처님 열반 5백년 내지 6백년 경에 이 세상에 드러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화엄경 약찬게’도 ‘용수보살 약찬게’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바다 속에는 그 바다를 주지하는 용궁이 있다. 바다 속 용궁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용왕을 데려오듯이, 불법의 큰 바다 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가장 요긴하고 가장 중요한 화엄경을 찾아냈다는 이야기이다.
대현(大賢)이 천양어동하(闡揚於東夏)로다 : 큰 현인이 중국에 크게 날렸다. 큰 현인들이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쪽으로 화엄경을 크게 날리게 되었다.
화엄경을 중국에 처음 번역하신 스님은 불타발타라[覺賢]스님이고 지엄(智儼)스님, 법업(法業)스님, 일조삼장 (日照三藏)스님 이런 분들이 화엄경을 많이 드날렸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 80화엄은 측천무후의 명에 의해 서역에 가서 구해온 화엄경 완질이다. 이것을 실차난타라고 하는 스님이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이 80화엄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기 전에는 신라시대 스님들은 60화엄 밖에 보지 못했다. 후대에 이 80화엄경 완질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후로는 모두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80화엄경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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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명감우(正明感遇) : 만난 것을 감격함을 밝히다
화엄경 만난 것을 감격해 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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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법지대(顧惟政法之代)에도 : 돌아보건대 정법시대에도
상닉청휘(尙匿淸輝)러니 :오히려 맑은 빛이 숨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용수보살이 불멸 500년 내지 600년경에 화엄경을 세상에 펼치게 되었다. 그러니 정법 시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었다. 화엄의 도리가 제대로 이해가 안됐기 때문에 세상에 크게 드날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행재(幸哉)라 상계지시(像季之時)에 : 상법, 계법이라고도 해석하는데 상법의 끝자락이라는 뜻이다.
세존의 열반 후 불교가 어떻게 행해지는가에 따라서 정법(正法)시대, 상법(像法)시대, 말법(末法)시대로 나눈다.
또 금강경에서는 오오백년이라고 해서 해탈견고(解脫堅固) 선정견고(禪定堅固) 다문견고(多聞堅固) 탑사견고(塔寺堅固) 투쟁견고(鬪諍堅固) 등으로 오백년씩을 잘라서 이야기 하는 설도 있다.
청량스님이 이 글을 지을 당시의 년대를 보아서 이 화엄경을 만나고 서문을 쓰고, 화엄경의 주서(註序)를 쓰게 된 시기가 상법의 끝자락이라는 뜻이다.
우사현화(偶斯玄化)하고 : 이 현묘한 교화를 만났다.
현화라고 하는 뜻도 아주 깊은 의미가 있다.
어째서 현묘한 교화인가. 보통 망상과 번뇌를 없애고 선한 일과 복덕을 많이 쌓아서 얻어진 것이 성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차원이 낮은 가르침이다. 현화라고 할 수가 없다. 화엄경의 입장에서는 참선을 해야 된다, 삼 아승지겁을 닦아야 된다, 번뇌를 제거해야 된다, 육도만행을 닦아야 된다 등등의 조건에 의한 성불이 아니다. 지음이 없이 짓는 것, 수행을 하되 수행하는 것이 전혀 없는 성불의 법이다. 그래서 현묘한 교화다. 본래 성불을 드날리고 드러내는 것이다. 현묘한 교화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차라리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쉽다. 그런데 본성불을 말하고, 사람만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두두물물 삼라만상이 모두 다 성불을 이뤘다고 하는 것이 화엄경의 도리이다.
물론 이런 이치를 선종에서도 많이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원 높은 가르침을 만나게 됐다.
지금 우리 역시 이러한 말법시대에 기기묘묘한 이 가르침을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이 청량스님의 시대를 이야기 한다면
황봉성주(況逢聖主)하며 : 하물며 성주를 만났다. 성주라고 하면 성스럽고 밝은 천자를 말한다. 물론 측천무후도 포함이 된다. 나라의 천자가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를 이해하고 뒷받침 해줘야 출가해서 도를 닦을 사람들이 마음 놓고 수행하고 전법하고 포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청량스님은 천자가 불교를 아주 좋아하고 보호하는 시대를 만나 정치적 환경, 사회적 환경이 불교 공부하기에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득재영산(得在靈山)하야 : 게다가 청량스님이 어디에 계셨는가 하면 청량산에 계셨다. 여기 영산이라고 함은 영축산이 아니라 청량산 즉 다른 이름으로 오대산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오대산이 있지만, 여러분들은 중국 오대산을 많이 가보셨을 것이다. 중국 오대산에 가면 그 중심 되는 사찰법당에 화엄회상이 열린 칠처구회의 편액이 죽 붙어 있다.
나는 문마다 붙어있는 칠처구회의 명칭을 보고 ‘여기가 청량국사가 화엄경의 소초를 집필하던 곳이구나. 그래서 이 오대산으로부터 화엄경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구나. 바로 그 도량이구나’하고 감동하였다.
산의 다섯 봉우리가 유사한 데가 있어서 우리나라 오대산은 중국 오대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곳엔 문수보살이 산다. 그래서 중국의 청량산이나 우리나라 오대산을 문수도량이라고 한다. 사실 산만 가지고 비교하면 우리나라 오대산이 훨씬 수려하고 좋다. 덕산이고 나무도 많고 개울물도 훨씬 맑고 좋다.
아무튼 이 청량국사는 자신이 그 좋은 신령스러운 산, 청량산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화엄경 소초를 집필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갈사유종(竭思幽宗)하니 : 그윽한 종지, 이 화엄경의 깊은 도리에 내 생각을 다 바칠 수가 있었다.
기무경약(豈無慶躍)이리요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내 생각을 그윽한 종지에 다 바칠 수 있으니 내가 얼마나 복이 많고 다행한 사람이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교를 펴고 화엄경을 공부하기 너무 좋다. 내가 있는 이 도량도 너무 좋다. 나는 이 세상에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
‘어찌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기무경약(豈無慶躍)]’ 하는 이 대목에 청량스님이 스스로 부연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소에 쓰신 그 부연설명이 너무나도 감동스러워서 내가 스님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근본저택이 바로 이 화엄경이다. :화엄경 안에 들어가면 비로자나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보현보살의 심장이다. :이 화엄경이 보현보살의 심장이라고 하였다.
화엄경은 일체 제불이 증득한 것이다. : 모든 깨달은 분들의 그 깨달음의 내용은 모두 다 화엄경의 도리다.
일체보살이 수지한다. :모든 보살들은 전부 화엄경을 수지한다.
이 화엄경의 도리는 우리 본성과 눈에 보이는 현상을 다 남김없이 포함하고 있다. :화엄경은 세상의 이치, 인생의 이치와 그 이치를 꿰뚫는 지혜가 다 원융하게 무르녹아 있다. 이치와 지혜는 다르다. 이치가 나의 인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지혜가 된다.
아무 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강원에서 화엄경을 끝까지 다 봤었다. 뒤에 스님들은 현담만 본다든지 나중에는 입법계품만 본다든지, 그것마저도 안 하고 그냥 화엄경을 구경도 안 하고 강원을 졸업하기도 한다. 설사 화엄경을 끝까지 다 봤다한들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이런 것을 우리에게 이끌어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무슨 행운으로 이렇게 화엄경을 받들어 지니고, 비록 서툴지만 강의를 듣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는지, 이것은 너무 다행이다. 서문에도 ‘적행보살(積行菩薩)도 폭시린어용문(曝鰓鱗於龍門)이요’하는 표현이 있었다.
수행을 상당히 쌓았다 하는 보살도 화엄경의 도리는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상덕성문(上德聲聞)도 두시청어가회(杜視聽於嘉會)’라는 말도 있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같은 아주 덕이 높은 성문들도 화엄경법회가 있다, 그런 근사한 법회가 이 세상에 있단다 하는 소문만 들었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봉사와 같았고 귀머거리와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량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무슨 행운으로 이 그윽한 깊은 지취를 찾게 되었는가 : 그러면서 아주 감동할 만한 내용이 나온다.
내가 이 몸을 바쳐서 죽을 곳을 얻었다. :사실은 내가 청량스님의 이 이야기 한마디를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었다.
청량스님이 ‘내가 이 몸을 바쳐서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한 것은 그동안 ‘내가 어디서 죽을까? 어디서 죽을까?’ 수십 년 생각하다가 화엄경을 보고 비로소 ‘화엄경에서 죽어야 되겠다, 이 목숨 바쳐 기꺼이 내가 이 화엄경을 공부하다 죽겠다.’ 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에 대한 청량스님의 연구서가 제일 많다. 얼마나 화엄경에 감동 했으면 ‘그 죽을 곳을 내가 얻었다.[득기사소(得其死所)]’라고 했겠는가. 근사한 표현이다. 그 속에는 모든 의미가 다 포함 되어 있다.
우리나라 고려 때 보조 지눌스님도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지눌스님이 화엄합론(華嚴合論)을 요약한 책이 세 권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눌스님을 보조국사로 부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화엄학자라고 부른다. 화엄경에 대한 연구서가 양적으로 제일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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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 바쳐 죽을 곳을 얻었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청량스님답다. 여기에서 우리가 청량스님이 그토록 오랫동안 화엄경에 심취하고 그 많은 저술을 남긴 이유를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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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난 김에 덧붙인다면 나는 청량스님의 소초 속에 있는 글을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탄허스님께서 화엄합론을 다 번역을 하고나서 원고를 교정할 때 여기 부산에 삼덕사라고 하는 곳에서 교정을 봤는데 그 때 각성스님 통광스님과 같이 교정을 볼 때였다. 나도 숱한 경전을 보았지만 다른 경전을 보다가는 그렇게 눈물 흘린 일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내가 무슨 운명인가 싶은 것이 그 옛날 청량스님이 오대산에서 화엄경을 연구할 때 부목으로 군불이라도 때었던 인연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화엄경 본문, 법화경 본문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데 깨알같이 쓴 청량스님의 화엄소초를 읽다가 눈물을 흘린 것이 신기하다. 그런데 사실 조금 엉뚱한 데서 내가 눈물을 흘렸다.
무슨 내용인가 하니, 청량스님이 ‘중생무변서원도’ 하는 사홍서원을 가지고 상(相) 공(空) 성(性)이라고 하는 삼관(三觀)에 배대를 한 내용이다. 삼관은 다른 말로 삼종(三宗)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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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 ‘미혹한 중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꼭 제도해야 한다’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것을 상식적인 가관(假觀)적인 안목이라고 한다. 상종(相宗)의 안목이다.
그런데 한 차원 높이 올라가면 중생은 본래 공한 것이고 부처도 공하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입장이 있다.
‘중생을 제도하되 본래 공하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관(空觀)적인 안목, 공종(空宗)의 안목이다. 반야심경이 그렇고 금강경이니 600부 반야가 그런 입장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공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중생을 제도를 한다면 상당히 가볍다. 이렇게 가벼운 공의 견해에서 더 나아가 중도관(中道觀)적인 견해가 있다. 이것은 성종(性宗)의 견해다.
‘본래 중생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삼관과 사홍서원을 배대해서 청량스님이 낱낱이 설명해 놓은 내용이었다.
*
우리들은 모든 것을 상으로 본다. 그래서 번뇌 역시 무거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미혹하고 번뇌 많고 업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려면 참 힘이 들고 그 번뇌가 끊어질 수가 없다.
번뇌가 공한 줄을 알고 끊어야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번뇌가 곧 보리인 줄 알고 번뇌를 끊어야 된다.
궁극적으로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뚜렷이 알고 또 열심히 중생제도를 하는 것이다.
청량스님이 뛰어난 솜씨로 그렇게 써놓은 것을 보고 나는 ‘정말 이런 이치구나.’ 하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 것이다.
*
오늘 말씀드린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는 청량스님의 말씀도 감동이다. 다른 사람의 뜻이나 사회적 상황에 밀려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로 자기의 능력과 자기 생명을 완전히 연소시킬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참으로 멋진 삶이고 잘 사는 삶이다.
우리는 그렇지 못해서 이런 저런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인생을 소진해 버리고 세월에 떠밀려 죽는다.
*
청량스님은 ‘내가 이런 좋은 상황에서 이렇게 깊은 종지를 마음껏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경사스럽고 다행하지 아니한가. 내가 이 몸 바쳐 죽을 곳을 얻었다.’라고 말씀한다. 자기 의지로 자기인생을 완전히 연소시키겠다는 의미로써 ‘내 생명을 연소시킬 장소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화엄경에 대한 애착이고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에 대한 환희심이다. 화엄경에 대한 청량스님의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
다음 시간에 한 번만 더 하면 왕복서가 끝나게 되겠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106쪽을 보겠다.
(7) 金焰菩薩의 讚歎
爾時에 金焰圓滿光菩薩摩訶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一切道場衆海하고 卽說頌言하사대
佛昔修習菩提行하사 於諸境界解明了일새
處與非處淨無疑하시니 此是如來初智力이로다
如昔等觀諸法性하사 一切業海皆明徹일새
如是今於光網中에 普遍十方能具演이로다
往劫修治大方便하사 隨衆生根而化誘하야
普使衆會心淸淨일새 故佛能成根智力이로다
如諸衆生解不同하야 欲樂諸行各差別이어늘
隨其所應爲說法하시니 佛以智力能如是로다
普盡十方諸刹海의 所有一切衆生界를
佛智平等如虛空하사 悉能顯現毛孔中이로다
一切處行佛盡知하사대 一念三世畢無餘하사
十方刹劫衆生時를 悉能開示令現了로다
禪定解脫力無邊이요 三昧方便亦復然이어늘
佛爲示現令歡喜하사 普使滌除煩惱闇이로다
佛智無碍包三世라 刹那悉現毛孔中하시니
佛法國土及衆生의 所現皆由隨念力이로다
佛眼廣大如虛空하사 普見法界盡無餘하시니
無碍地中無等用이여 彼眼無量佛能演이로다
一切衆生具諸結하며 所有隨眠與習氣를
如來出現遍世間하사 悉以方便令除滅이로다
그때 금염원만광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모든 도량의 대중바다를 널리 살피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부처님이 옛적에 보리행을 닦으사
모든 경계에 이해가 밝아서
옳은 곳과 옳지 않은 곳에 의심이 없으니
이것은 여래의 첫 지혜의 힘이로다
옛적에 모든 법의 성품을 평등하게 관찰하고
온갖 업의 바다를 밝게 안 것과 같이
지금도 그와 같이 광명그물 속에서
온 시방에 두루 갖추어 연설하네
지난 겁에 큰 방편을 닦으사
중생들의 근기 따라 교화하여
널리 대중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할새
그러므로 부처님은 근기 아는 지혜의 힘을 이루시었네
모든 중생들의 이해가 같지 않으며
욕락과 행이 각각 달라도
그들의 편의 따라 설법하시니
부처님의 지혜 힘이 이와 같도다
온 시방 모든 세계에 있는
일체중생들의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는 평등하기가 허공 같아서
털구멍 속에 다 나타내도다
부처님은 처소와 행을 다 아시되
한 생각에 삼세를 남김없이 다 아시며
시방의 세계와 겁과 중생의 시간을
다 열어 보여 알게 하시네
선정과 해탈의 힘 끝이 없고
삼매와 방편도 그러하거늘
부처님이 나타내 보여 환희케 하며
널리 번뇌의 어두움을 씻어 없어지게 하네
부처님의 지혜는 걸림 없어 삼세를 포함하고
찰나 동안에 털구멍에 다 나타내되
불법과 국토와 중생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가 마음 따라 생각하는 힘 때문일세
부처님의 눈은 허공처럼 광대하여
법계를 남김없이 다 보시니
걸림 없는 지위에 짝 없는 작용을
한량없는 저 눈을 부처님이 연설하시네
일체중생의 모든 번뇌와
수면혹(睡眠惑)과 습기(習氣)들을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여
방편으로 다 소멸케 하시네
*
금염(金焰)보살이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을 찬탄하다
*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의 힘, 십력(十力)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이 나온다.
부처님의 무엇이 위대하고 왜 위대한가를 물었을 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을 수 있다.
여래10호도 부처님의 능력과 공덕을 표현한 내용이다.
그런데 법화경이나 화엄경 유마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는 모두 구체적으로 십력(十力)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을 제일 많이 거론한다. 사실 부처님을 표현하고자 할 때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의 십력을 빼면 할 이야기가 없다.
금염보살의 찬탄에서는 십력이 나오고 또 다음 보살에게서는 십바라밀, 십지가 나오므로 한 데 모아 유인물을 준비해 왔다.
<유인물2>
십력(十力)--부처님의 지혜의 힘을 표현하는 열 가지
①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여러 가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⑤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중생의 여러 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지혜의 힘.
⑥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⑦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⑧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⑨ 사생지력(死生智力),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다 아는 지혜의 힘.
⑩ 누진지력(漏盡智力),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
十度(10바라밀)
1, 布施 2, 持戒 3, 忍辱 4, 精進 5, 禪定 6, 般若.Prajna
7, 方便,Upaya 8, 願,Pranidhana 9, 力,Bala 10, 智,Jnana
十地
一, 歡喜地。二, 離垢地。三, 發光地。四, 燄慧地。五, 難勝地。
六, 現前地。七, 遠行地。八, 不動地。九, 善慧地。十, 法雲地。
*
그 때에 금염원만광보살마하살(金焰圓滿光菩薩摩訶薩)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일체도량중해(一切道場衆海)를 널리 관찰하고 곧 게송을 설하사대
*1
불석수습보리행(佛昔修習菩提行)하사 : 옛날에 부처님께서 보리행을 잘 수습했다. 그동안 우리가 공부하면서 보리행은 지혜와 자비라고 늘 말씀드려왔다.
5, 6년간 티벳에서 공부를 하신 스님이 그저께 나를 찾아왔길래 달라이라마가 자주 강조하시는 보리행, 자비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또 물었다.
사전적인 해석이야 우리가 다 알지만,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보리행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 스님이 답하기를 티벳 불교에서 보리행이라고 할 때는 자비를 우선한다고 하였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자비심이 있어야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도 보리행이 나온다.
어제경계해명료(於諸境界解明了)일새 : 모든 경계에 대해서 그 이해하는 것이 명료하다. 모든 경계라고 하는 것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처여비처(處與非處)이다.
처여비처정무의(處與非處淨無疑)하시니 :모든 경계 즉 어떤 일이나 어떤 사건이든지 우리가 마주쳤을 때 이것이 정말 도리에 맞는가, 이치에 맞는가를 먼저 떠올릴 필요가 있다. 사실은 뻔히 알면서도 나에게 알량한 이해관계가 걸려있으면 그만 눈 감고 슬쩍 넘어가 버린다. 그런 사람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부처님은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 이치와 이치가 아닌 것에 청정하게 환하게 밝아서 의심이 없으시니
차시여래초지력(此是如來初智力)이로다: 이것이 여래의
첫 번째 지혜의 힘이다.
*
유인물의 십력을 보자.
십력① 處非處智力(처비처지력) :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우리는 그냥 무턱대고 산다. 그러다가 간혹 불교공부를 했으니까 ‘이것은 이치에 맞다 안 맞다’ ‘진리다 비진리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만 해도사실은 아주 큰 다행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이것만을 가지고 저울질을 한다. 절대 ‘이치에 맞는가, 안 맞는가’ 하는 것으로써 저울질을 하지 않는다. 국회가 그렇고 모든 시시비비가 벌어진 상황들을 보면 전부가 그렇다. 이번에 국회에서 졸속 처리된 법안 하나도 역시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이라고 후다닥 처리한 법안이라고 신문에서 계속 떠들고 있다.
이치게 맞는가, 진리인가, 도리에 맞는 것인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도리에 맞는 일인가’ 하고 앉아서 가슴을 치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지만, 그래도 알려고 하는 마음만으로도 장하다.
부처님은 그것을 환히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힘이다.
*2
여석등관제법성(如昔等觀諸法性)하사 : 옛날에 모든 법성을 동등하게 관찰한 바와 같이. 등(等)자가 자주 나온다. 함께, 동등하게, 같이 라는 뜻이다.
법성은 전체의 성품이다. 개개인의 성품을 말할 때는 자성이라고 한다. 모든 법성을 평등하게 동등하게 관찰하여
일체업해개명철(一切業海皆明徹)일새 : 일체 업의 바다를 다 밝게 사무쳐 안다.
여시금어광망중(如是今於光網中)에 : 지금 이와 같이 광명의 그물에서. 부처님이 광명을 놓고, 그 광명의 그물 가운데서
보변시방능구연(普遍十方能具演)이로다 : 널리 능히 갖추어서 연설하더라.
여기 업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십력의 두 번째는 일체 중생의 삼세업보를 다 아는 힘이다.
*
십력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업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지금 같은 시간에 같은 경전을 가지고 같이 공부를 한다. 그러나 받아들이고 익히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그것은 각자의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부처님은 다 아는 지혜를 가졌다. 그것도 한순간 뿐만 아니라 중생의 삼세의 업보를 다 안다. 제대로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위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것이다.
*3
왕겁수치대방편(往劫修治大方便)하사 : 과거 세월에 큰 방편을 열심히 잘 닦았을 새
수중생근이화유(隨衆生根而化誘)하야 : 중생들의 근기를 따라서 교화하고 유혹하고 달랜다.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므로 뭔가 이익 될 것을 가지고 달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誘)자가 많다.
보사중회심청정(普使衆會心淸淨)일새 :널리 대중들로 하여금 마음이 청정하게 할 새
고불능성근지력(故佛能成根智力)이로다 :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능히 근본이 되는 선정과 해탈로써 지혜의 힘을 이룬다.
예불을 할 때도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라고 한다. 요약하면 선정과 해탈이다. 이 두 가지가 근본지혜의 힘이다.
*
십력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 여러 가지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정려(靜慮) 가 바로 선정이다. 그것을 해탈과 함께 가져서[等持] 똑같이 최상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지혜의 힘이 부처님의 십력 중 세 번째 힘이다.
*4
여제중생해부동(如諸衆生解不同)하야 : 모든 중생들의 그 이해가 같지 않은 것과 같이
욕락제행각차별(欲樂諸行各差別)이어늘 : 욕락과 모든 행이 각각 차별하다. 중생은 욕심도 다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반응하는 행동도 다 다르다.
수기소응위설법(隨其所應爲說法)하시니 : 그 맞는 바에 따라서 그들을 위해 설법하시니.
불이지력능여시(佛以智力能如是)로다 :부처님은 지혜의 힘이 능히 이와 같도다.
*
십력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근기가 높은지 낮은지 이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이다.
부처님을 표현할 때 무엇이 위대한가, 뒤에 나올 사무소외(四無所畏)나 사섭법(四攝法) 사무량심(四無量心)등도 다 부처님의 위대한 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십력을 제일 앞에 두었기 때문에 오늘 조금 야무지게 십력에 대해 설명한다.
*5
보진시방제찰해(普盡十方諸刹海)의 : 시방에 있는 모든 세계
소유일체중생계(所有一切衆生界)를 : 그곳에 있는 일체 중생 세계를 모두 다 안다.
불지평등여허공(佛智平等如虛空)하사: 부처님의 지혜는 평등한 것이 허공과 같다. 허공은 차별하는 데가 없이 평등하다.
실능현현모공중(悉能顯現毛孔中)이로다 : 다 능히 모공중에까지 다 나타난다.
*
십력⑤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 여러 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의 힘. 부처님의 지혜는 그 넓은 중생계에 허공처럼 다 펼쳐져서 중생의 여러 가지를 다 남김없이 알고 이해한다.
*6
일체처행불진지(一切處行佛盡知)하사대: 일체 처에 모든 행을 부처님이 다 안다.
일념삼세필무여(一念三世畢無餘)하사 : 한 순간에 삼세를 아는데 마침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안다.
시방찰겁중생시(十方刹劫衆生時)를 :시방이라고 하는 넓은 공간과 찰겁이라고 하는 오랜 시간, 그 모든 중생의 공간과 시간을
실능개시령현료(悉能開示令現了)로다 : 다 능히 열어 보여서 환하게 알게 한다.
*
십력⑥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다 아는 지혜의 힘. 계(界)는 중생의 시간적, 공간적 세계를 말한다.
*7
선정해탈력무변(禪定解脫力無邊)이요 : 선정과 해탈과 그 힘이 가없다. 여기에도 팔해탈(八解脫) 팔선정(八禪定) 십력(十力)등 숫자를 부여할 수 있다.
부처님은 선정과 해탈과 그 힘이 가없음이여.
삼매방편역부연(三昧方便亦復然)이어늘 : 삼매와 방편도 또한 가히 없다.
불위시현령환희(佛爲示現令歡喜)하사 : (선정 해탈 힘 삼매 방편) 이런 것을 부처님이 전부 중생들을 위해서 나타내 보이고 기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보사척제번뇌암(普使滌除煩惱闇)이로다 : 번뇌의 어둠을 깨끗이 씻어버리도록 해준다.
청량스님이 화엄경을 만나고 얼마나 환희로왔으면 ‘내가 진정 죽을 곳을 얻었구나’ 라고까지 표현했겠는가.
*
십력⑦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육취(六趣)에 나아가든, 어디에 태어나든, 인간이 두루두루 어디에 가서 나는가를 다 안다. 그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가 부처님의 일곱 번째 힘이다.
*8
불지무애포삼세(佛智無碍包三世)라 : 부처님의 지혜는 걸림이 없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만 알고 내일은 전혀 모른다. 과거의 일도 백 가지 가운데 한두 가지를 알까말까다. 그런데 부처님의 지혜는 그렇지 않다.
찰나실현모공중(刹那悉現毛孔中)하시니 : 그 삼세의 일을 한 순간, 찰라 동안에 모공 중에 다 나타낸다. 아주 작은 부분에 그것을 다 나타낼 수가 있다.
불법국토급중생(佛法國土及衆生)의 : 불법과 국토 그리고 그 위에 사는 중생들의
소현개유수념력(所現皆由隨念力)이로다 : 나타나는 바가 다 수념력을 의지한다. 수념력이라고 하는 것은 상기하는 힘, 기억하는 힘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따라서 무엇이든 떠오르는데 그것이 수념력이다.
*
십력⑧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다 아는 지혜의 힘.
실제인지 사기인지 간혹 전생을 안다거나 숙명통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전에 어떤 큰스님은 연령 소급을 하는 최면술에 관심이 많으셨다. 최면을 통해서 연령을 소급해 나가면 과거 생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는 것인데 이러한 기술도 상당히 발달해 있다.
그런 것들 제외하고 평범한 우리의 기억은 4,5세나 5,6세 정도까지를 겨우 기억하다가 그나마도 나이가 더 들면 모두 잊어버린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숙명통으로써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다 안다.
*9
불안광대여허공(佛眼廣大如虛空)하사 : 부처님의 눈은 넓고 크기가 허공과 같다. 얼른 떠올리는 형상을 갖춘 눈 육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심안(心眼)이다. 금강경에서 익히 알고 있는 오안(五眼) 중에 불안(佛眼) 즉 부처님만 가지고 있는 눈이다.
보견법계진무여(普見法界盡無餘)하시니: 온 법계를 다 보아서 조금도 남음이 없다.
무애지중무등용(無碍地中無等用)이여 : 걸림이 없는 경지에서 등등함이 없는 용이다. 이때 등용(等用)은 함께 쓴다는 뜻이다.
피안무량불능연(彼眼無量佛能演)이로다 : 피안은 부처의 눈이다. 부처의 눈이 한량없는 것을 능히 연설하도다.
*
십력⑨ 사생지력(死生智力) :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다 아는 지혜의 힘.
*10
일체중생구제결(一切衆生具諸結)하며: 일체 중생은 온갖 속박을 다 갖추었다. 여기 걸리고 저기 걸리고 온갖 번뇌에 속박되고 인연에 속박되고 인과 관계에 속박되는 모든 것을 제결(諸結)이라고 한다.
인연이나 인과 관계에 속박되면 그것 또한 피할 수가 없다. 여기 스님들처럼 집을 뛰쳐나와 출가한 사람들은 그 인연이 다 했는지 아니면 용기가 있는지 인연의 그물을 단칼에 끊고 뛰어나왔다고 봐야겠다.
*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인연의 속박을 끊는 것은 참 어렵고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근래에 어떤 큰스님의 일화에서 나는 경전을 한 권 읽은 것 같은 깨우침을 받았다.
옛날부터 절집 안에 ‘상좌 하나가 지옥 하나다’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고,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다.
그 큰스님은 상좌가 되겠다는 사람들을 물리고 물리다가
50대 중반에 들어서 겨우 상좌를 뒀다. 큰스님의 상좌가 되려고 목을 맨 사람이 여럿 있었으니 얼마나 고르고 골랐겠는가. 물론 목을 매어도 죽지는 않았다. 아무튼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또 평생 주지를 안 맡겠다고 했는데 마지막에 근사한 절을 하나 맡았다. 한 가지 더 절대 단체장이고 총무원이고 동국대고 아무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국은 마지막에 무슨 이름을 하나 맡았다.
세 가지를 안 한다고 탈탈 털었는데 상좌에게 걸리고 절에 걸리고 단체장에 걸리고 모두 다 걸려버렸다. 그래서 사실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돌아가시고 말았다. 신문에 너무 많이 난 이야기라서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 스님이 근래에 깨우쳐 준 것이 경전을 한 권 읽은 것보다 더 가슴에 깊이 박히고 나를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스님들도 한 번 잘 점검해 보기 바란다.
제결(諸結)이라고 할 때 이 결(結)은 인연의 속박이고 번뇌의 속박이다.
소유수면여습기(所有隨眠與習氣)를 : 가지고 있는바 수면과 늘 익힌 습관들을. 수면(隨眠)은 번뇌의 일종이다. 따를 수(隨)자 잠잘 면(眠)자를 썼는데 이런 글자를 쓴 이유는 내면에 숨어있는 악한 기질이나 성향은 잠들어 있는 것과 같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에 도반으로 만나면 아주 좋은 사람이었어도, 어떤 이해관계나 자기와 긴밀한 문제가 생기면 숨어있던 악한 기질, 좋지 아니한 성향이 드러난다. 일 년 내내 한 곳에서 같이 살았어도 평소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던 성향이다. 그런 것이 수면이다.
습기(習氣)는 우리가 익힌 습관들이다.
여래출현변세간(如來出現遍世間)하사 : 여래가 출현하셔서 세간에 두루하시사
실이방편령제멸(悉以方便令除滅)이로다 : 방편으로 하여금 다 멸하게 한다.
*
십력⑩ 누진지력(漏盡智力) :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
중생들은 온갖 속박을 가지고 있고, 내면에 깊이 숨어서 평소에는 하나도 표현되지 않던 발톱도 가지고 있는데 부처님은 그런 것을 다 꿰뚫고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무슨 습기가 있는지 무슨 악습이 있는지 모르고 산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다 보면 그 습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간에 두루 하사 온갖 방편으로써 그런 것을 전부 다 알고, 없애도록 해준다. 그런 것이 부처님의 역할이다.
*
이렇게 해서 이 열 개의 게송은 부처님을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열 가지 힘을 표현하였다. 이것을 굳이 유인물로 다시 준비한 것은 마음에 아주 깊이 새기고 유의하라는 뜻이다.
첫댓글 비로자나부처님의 근본저택이 바로 이 화엄경이며/ 또 보현보살의 심장이다/화엄경은 일체 제불이 증득한 거이며/ 화엄경의 도리는 우리 본성과 눈에 보이는 현상을 다 남김없이 포함하고 있다.감경봉우(感慶逢遇) :만남을 감사하고 기뻐하다 혜명화 님, 진수성찬을 차리시느라 욕 보셨습니다_()()()_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화엄경의 도리는 우리 본성과 눈에 보이는 현상을 다 남김없이 포함하고 있다...고맙습니다._()()()_
_()()()_
고맙습니다..._()()()_
자기 의지로 자기의 능력과 자기 생명을 완전히 연소시킬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참으로 멋진 삶이고 잘 사는 삶이다..._()()()_
_()()()_마음이 환해지는듯 기쁩니다.
혜명화님 수고 많으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화엄의 도리는 특별한 때에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 항상 설하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고맙습니다._()()()_
시작하는 글에서 항상 혜명화님의 따뜻한 마음을 봅니다. 잔잔하게 그려지는 일상의 일들이 크게 다가오거든요... _()()()_
이렇게 힘들게 태어나는 화엄경 노트를 앉아서 그냥 읽기만 해도 힘든데...혜명화 님!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정진이 따로 없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는 청량스님의 말씀도 감동이다. 다른 사람의 뜻이나 사회적 상황에 밀려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로 자기의 능력과 자기 생명을 완전히 연소시킬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참으로 멋진 삶이고 잘 사는 삶이다.
,,,_()()()_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혜명화님, 염화실지를 읽을 때마다,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대략 머리속에 그려지는데요, 수고와 헌신으로 나오는 결과물들에 대해 너무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스케치는 그 내용이 더욱 마음을 뛰게 하였습니다. 과거 미래 현재 언제나 설해지는 화엄경, 청량스님의 득기사소, 내 의지로 내 생명을 연소시킬 곳을 얻었다 하신 그 표현이 마음에 와서 꽉 박혔습니다. 마치 제 삶의 길이 환하게 밝아지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3월의 화엄 스케치, 세주묘엄의 세상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_()()()_
선정과 해탈이다. 이 두 가지가 근본지혜의 힘이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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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은 일체 제불이 증득한 것이다... 모든 깨달은 분들의 그 깨달음의 내용은 모두 다 화엄경의 도리다." ..._()()()_
"보리행.... 지혜 자비."..._()()()_
"자비가 우선... 남을 배려하고, 남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자비심이 있어야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다." .._()()()_ 고맙습니다.
혜명화님 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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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영상강의에서놓친부분을 확인할수있어 감사합니다 삼관과 사홍서원과의 배대에
부처님이신중생을 제도한다 이런 아이러니컬적인표현이 그어디 또있습니까?? ?
감사합니다 이렇게 불경을 읽게끔 해주셔서ㆍㆍㆍ 감사합니다 () () ()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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