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전(思政殿)
근정전이 국가의 대사나 국가의 의식을 치르는 곳이었다면 사정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정사를 보살피는 편전입니다.
근정전 뒤 사정문을 들어서면 한 가운데 있는 건물이며 사정전 동쪽에는 만춘전이 서쪽으로는 천추전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으나 명종 때인 1553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재건하였는데 이후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탄 것을 고종 때인 1867년 경복궁 중건 때 함께 중건하였습니다.
비극의 현장이 되었던 사정전(思政殿) 앞 마당
이곳 사정전 마당에서는 세종이 상왕이었던 태종과 함께 요즘의 골프와 비슷한 타구를 치며 즐거운 여가를 보낸 곳이기도 하지만 한때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였는데 바로 1456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던 박팽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세조에게 친국을 당하기도 한 현장이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왕이 사정전으로 나가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 들이고 다시 박팽년을 잡아와 일당에 대해 물으니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 성승, 박쟁, 유응부,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와 박팽년의 아비였다고 말했다.
또한 연려기술에는 세조가 성삼문과 박팽년을 친국하는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조에게 받은 녹을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는가하면 세조에게 나으리라고 불러 세조의 화를 돋구었으며 박팽년은 장기에 신(臣)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신(臣)대신 비슷한 글자인 거(巨)자로 대신 썼다고 한다.
그렇게 복위 운동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13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6명만 사육신으로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으며 이들로 인해 단종은 일찍 죽고 말았는데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를 수는 있는 것인지....
사정(思政)이란 『선정(善政)을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전각의 이름을 지었는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여 정치 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라 합니다.
사정전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어전회의를 비롯한 최고 통치자로서 행하는 모든 공식 업무는 이곳 사정전에서 처리되었으며 임금이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일상 업무를 보는 공간이었습니다.
고종 때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 사정전은 그 규모가 매우 큰 전각임에도 불구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건물로 전각의 사방은 벽체가 없이 창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의 형태 로 되어있어 조금도 숨겨짐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정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정전 운룡도
경복궁 사정전의 운룡도는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용은 머리는 탁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를 닮은 상상속의 동물입니다. 도양에서는 9라는 숫자가 길한 숫자인데 용 비늘의 수가 9*9로 81개라고 합니다.
용은 곧 왕을 상징합니다. 왕의 얼굴을 용안, 왕이 앉는 자리를 용상, 왕이 입은 옷을 용포라 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운룡도에 나오는 용과 구름은 '역경'에 "구름은 용을 따르며,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 "용이 기운을 내뿜어 구름을 이룬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구름이 용을 따르며, 용이 용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것은 바로 구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용과 구름은 곧 사정전에서 국사를 논할 때 왕과 신사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국가의 태평성대는 왕과 신하가 서로 지혜를 모으고 도울 때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단청(丹靑)은 근엄한 느낌을 주는 색깔 대신, 붉은 색을 위주로 사용하여 따듯하고 정감 있는 느낌이 들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사정전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조석우가 썼습니다.
<전면우측>
<전면좌측>
전면의비교---삼장법사는 모양은 다르지만 같음, 2번째 우측은 손오공인데 좌측은 아닌듯 함, 3번째 동일, 네번째 동일, 다섯번째 ,여섯번째, 일곱번째는 서로 틀리는 잡상으로 보입니다.---
<후면우측>
<후면좌측>
후면비교---첫번째 삼장법사는 동일,2번째손오공은 2번과 3번이 서로 바뀌었으며, 4번째는 서로 다르며 전면마지막 것과 후면 4번째가 동일,5~7번 서로 다름---
◎하나의 건물에 서로 다른 잡상을 다르게 배열할 수는 없지 않나요? 정말 문제가 아닙니까?
사정전의 잡상이며 7개가 올려 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전의 잡상을 보며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에 대해 실망을 하였습니다.
전자에도 잡상에 대해 논한 적이 있지만 잡상은 연산 때 문신인 유몽인의 여우야담과 장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상와도에 의하면 그리고 중국의 서유기의 등장인물과 토속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그 순서로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화상, 이구룡, 마화상, 삼살보살, 천간갑, 나토두라는 이름이 나오고 상와도에는 나토두가 빠졌는데 모두 땅의 신으로 살(煞)을 막아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삼장법사와 손오공은 삿갓을 쓰고 있으며 저팔계는 돼지얼굴 형상이고 사화상은 사오정으로 사자의 머리 형상입니다.
그런데 4곳 모두 삼장법사가 맨 앞에 배치되었고 두 번째 손오공은 3곳은 2번째로 배치했으나 후면 좌측에서는 3번째로 배치되어 있으며 3번째 저팔계의 배치에서는 전면에서는 3번째에 배치했는데 후면에서는 저팔계가 없는 것인지 잘 구별되지 않다는 점이며 이하 순서가 뒤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다섯번째부터는 서로다른 잡상을 세웠는데 한 건물에 이렇게 다르게 배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으로 외국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물어 본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 고 이해 할까요? 아니면 서울관광에서 제일 우선으로 찾는 경복궁의 사정전이 이러하다면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에 대해서는 아직 멀었다고 비판을 할까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사정문(思政門)
사정전의 남쪽에 있는 문으로 사실상 사정전의 정문인 셈으로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들었으며
3칸으로 되어 있는데 임금은 가운데 문으로 통행을 하였으며 신하들은 좌우문을 이용했습니다.
사현문(思賢門)
사정전 동쪽에 있는 문으로 언제 만들어 졌는지 알 수가 없으며 경복궁 중건 시 동쪽 행랑 전각문을 득영문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현재는 사현문으로 되어 있는 까닭이나 이유에 대해 아는 사실이 없는데 사현문은 동궐도에는 나와 있는데 19세기말 작성된 북궐도형에는 나와 있지 않다고 합니다.
사현(思賢)이란 『군주가 현자를 얻기를 생각한다.』라는 의미로 군주의 정치란 독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 져야 한다는 유교의 일반적 사고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춘전(萬春殿)
만이란 만년의 봄으로 만(萬)은 오래오래 영원하다는 의를 가지며 춘(春)은 오행에서 동쪽을 의미하므로 오랜기간 국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으며 서쪽의 천추전과 상대하여 이름 지은 것입니다.
사정전 동쪽이 있는 건물로 만춘전이 만들어진 시기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데 세종19년인 1437년에 만춘전이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주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88년 복원한 것입니다.
사정전 동쪽의 만춘전과 서쪽의 천추전은 사정전의 보조적 기능을 가진 건물로 사정전에서의 정무는 공식성이 강한 반면에 만춘전과 천추전은 임금이 편하게 신하들과 만나 나랏일을 의논할 때 주로 이용하는 소편전(小便殿)의 역할을 하였는가 하면 임금이 책이나 서류를 읽을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습니다.
또한 만춘전 과 천추전은 독립된 건물처럼 보이나 원래는 복도를 통해 사정전과 모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복도가 없어진 상태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만춘전의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좌승지였던 송희정이 썼습니다.
천추전(千秋殿)
천추란 천년의 가을로 천(千)은 오래오래 영원하다는 의를 가지며 추(秋)는 오행에서 서쪽을 의미하므로 오랜 기간 국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으며 동쪽의 만춘전과 상대하여 이름 지은 것입니다.
사정전 서쪽이 있는 건물로 천추전이 만들어진 시기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며 경복궁 중건 때 함께 중건되었으며 사정전 동쪽의 만춘전과 서쪽의 천추전은 사정전의 보조적 기능을 가진 건물로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사정전은 온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추운 겨울에는 이곳에서 정사를 돌보고 경연을 했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특히 천추전은 세종 임금이 집현전 학사들과 훈민정음을 창제하느라 고심하던 곳이며 과학자들이 천체의 현상을 관찰하는 간의(簡儀)와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그리고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을 이용하여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 비의 양을 측정하는 측우기(測雨器) 등을 만든 곳이기도 합니다.
천추전의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정범조가 썼는데 정범조는 훗날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용신당(用申堂)
사정전 서쪽에 있는 행각에 있으며 고종5년인 1868년에 만들었으며 용신(用申)이란 『써서 펼친디.』는 뜻으로 경서가운데서는 그 전거를 찾을 수 없는데 사정전의 성격으로 보아 재능있고 어진 신하들의 힘을 활용하여 선정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협선당(協善堂)
사정전 서쪽에 속해있으며 용신당 북측에 있으며 고종5년인 1868년에 만들었으며 1893년에는 이곳을 강학정으로 삼아 완자의 교육에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협선(協善)이란『임금과 신하가 서로 선(善)을 돕는다.』는 의미로 선이 정치의 중요한 바탕이 됨은 대학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연태문(延泰門)
사정전 동쪽행각의 북쪽에 난 문으로 문이 만들어진 시기는 알 수가 없으며 연태(延泰) 란『태평을 맞이한다.』라는 뜻입니다.
천자고(天字庫)~월자고(月字庫)
사정전 남측 행각에 사정문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 현판인데 서쪽부터 천자문의 순서대로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현자고(玄字庫), 황자고(黃字庫), 우자고(宇字庫), 주자고(宙字庫), 홍자고(洪字庫), 황자고(荒字庫), 일자고(日字庫), 월자고(月字庫)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대해서 활자를 보관하던 곳, 임금의 귀중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 등등의 소문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궁중의 창고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