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도시의 상징, 진주교육대학교
지난 2023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했던 진주교육대학교는 교육도시 진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다. 경남 유일의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대학교로 지금까지 2만 3000여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지역의 초등교원 양성이라는 역할을 다해 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진주교육대학교는 이 또한 전통과 역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류현아 기획처장은 “오랜 전통과 역사 못지않게 미래 교육에 특화된 초등교원을 양성하겠다는 교육 이념이 캠퍼스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 100년 역사… 경남 초등교사 양성의 요람
진주교대의 개교 역사는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모든 교사를 일본인으로 채울 수 없었기에 조선인 교사들의 수요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20년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는 보통학교의 교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 도에 임시 교원양성강습회를 설치하고 6개월 또는 1년간 교육을 시행한 후 보조교원(부훈도) 또는 촉탁교원으로 채용했다.
이때 진주에도 임시교원강습회가 마련돼 이곳에서 6개월간 수업을 받은 17명이 그해 9월 교사로 임명됐다. 이듬해 1921년에는 임시 교원양성소로 이름을 바꾸고 수업 연한도 1년으로 늘렸다. 임시 교원양성소에서 1922년 3월 1회, 1923년 3월에는 2회 과정의 졸업자가 배출됐다.
다만 임시 교원양성소는 상설 기관이라기보다는 기구에 가까웠다. 일제는 안정적인 교원 수급을 위해 1922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1923년에는 전국 13개 도에 공립사범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경남도청이 있었던 진주에도 공립사범학교(일명 도립사범학교)가 설치됐고 처음으로 입학생을 받았다.
1년 과정의 강습과와 2, 3년 과정의 특과를 두었지만 마땅한 교육 환경을 갖추지 못해 개교 후 2년여 동안 진주수비대 병영을 빌려 사용했다.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옆에 있던 도청 건물을 학교 건물로 삼고 그 아래 기숙사 2개 동을 지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개교한 공립사범학교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강습과는 4회, 특과는 1925년부터 1931년까지 6회 등 총 47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교원 양성의 소임을 다했다. 공립사범학교 학생들은 일제에 맞서 지역에서 학생 항일운동에 동참하고 한글 교육과 민족의 교재에 앞장서며 저항정신을 불태웠다.
이에 일제는 1931년 전국의 사범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성과 대구, 평양에 관립(국립) 사범학교를 신설하고, 진주 사범학교를 비롯한 전국 13도에 설치한 공립사범학교를 폐쇄했다. 시간이 흐르자 3곳의 관립 사범학교만으로 늘어나는 교원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일제는 1935년부터 전국의 도별로 관립(국립) 사범학교를 하나씩 신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40년 3월 사범학교가 9년 만에 다시 진주에 설립됐다. 개교 당시 칠암동 진주 농업학교 임시 교사를 사용하다가 1942년 지금의 장소인 신안동으로 옮겨졌다.
해방 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진주사범학교 학생 24명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학도병으로 지원해 참전했다.
◇도청 떠난 진주에 다시 사범학교 설치
도청이 1925년 부산으로 떠난 진주에 다시 사범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기성회까지 조직하며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펼친 진주 사람들의 지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낙진 진주교대 교수는 “진주교대가 오늘날 진주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늘 교대와 함께 해준 지역민의 애정 어린 사랑 덕분”이라고 말했다.
진주 사람들의 진주교대에 관한 관심과 사랑은 ‘가정 정환기 장학재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출향인사인 정환기 이사장은 “어릴 적 떠난 진주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고향 후학을 위해 보탬이 되고자 한다“ 며 1998년 진주교대에 그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장학재단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2300여 명의 교대생에게 50억 원이 넘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진주교대는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의 사범학교와 구분해 ‘신제 사범학교’라 불렸으며, 연이은 6·25전쟁을 거르면서 일제의 교육 잔재 청산과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실천하며 교원 양성의 역할을 이어갔다.
5·16군사정변 이후 당시 대구사범 출신인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 혁명 정부는 교육에 관한 이특 특별법을 통해 교육대학을 1도 1개교씩 설립하고 초등교원 양성기관을 전문학교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이어 1962년 12월 국무회의에서 ‘진주교육대학’을 설치하기로 의결하고 1963년 1월 2년제 진주교육대학 설치인가가 법령으로 공포됐다.
그해 진주 사범학교의 마지막 졸업생 179명이 배출되고 3월에는 진주교육대학의 개교식과 입학식이 동시에 진행됐다.
1960년대 중반 베이비붐으로 초등교원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1966년 진주교육대학 부설 초등학교교원 양성소 단기과정이 개설됐다가 1971년 폐지됐다.
진주교대에서 배출되는 교원만으로는 경남 교원의 충원이 부족해 1969년 2월 문교부 공고 제1121호에 의거 1969년 마산교육대학이 새로 개교함에 따라 한때 경남에 2개의 교육대학이 병존하게 됐으나, 이후 70년대 교대 정원의 과잉으로 인해 1도 1교대 정책으로 마산교육대학교는 1978년에 마산대학(현 창원대학교)으로 개편되면서 다시 도내 유일의 교육대학의 위상을 되찾았다.
진주교대는 1983년 교육법 개정에 따라 4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학령인구 감소 직격타…위기를 기회로
진주교대는 1993년 ‘국립학교 설치령’에 따라 진주교육대학에서 지금의 ‘진주교육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1995년부터는 대학원 과정이 설치됐다.
현재 진주교대는 교육대학원 1개, 심화 과정 12개 전공(도덕, 국어, 사회, 수학, 과학, 체육, 음악, 미술, 실과, 교육학, 영어, 컴퓨터)으로 구성돼 있다. 학부생 1203명, 대학원생 199명이 재학 중이다.
오랜 학교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빼어난 동문도 다수 배출됐다. 대표적으로 진주사범 출신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 정홍원 제42대 국무총리가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군사정권 등 숱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온 진주교대는 오늘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다. 저출산 현상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교원 임용 규모가 크게 줄어들면서 교원을 양성하는 진주교대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진주교대는 지난 100여 년간 온갖 시련과 역경을 묵묵히 이겨낸 온 저력을 바탕으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김성규 총장은 “진주교육대학교는 1923년 공립사범학교로 시작해 지난 100년 동안 대한민국 초등교육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면서 “인구 감소라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초등교육의 중요성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선진 교원 양성 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초등교육의 미래를 주도하는 대학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