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운동에서 깊이 고려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명망성과 민중성의 관계다. 명망 있고 대중성이 있는, 즉 유명한 작가나 예술가가 그 지역문화운동에서 어떤 지위와 역할을 해야 하는가는 아주 미묘하고 또 중요한 과제다. 한 지역에서 문화예술 운동을 할 때 일의 주체는 어떤 예술가의 명망성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예술이 대중성의 반석(盤石) 위에 놓이지 못한다면 한갓 도락(道樂)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명망성이란 검증된 신뢰성을 말한다. 단지 유명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속에 단단히 검증된 명망은 즉각 신뢰성과 대중성이라는 의미를 확보한다. 그래서 지역문화운동에서 명망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비단 지역문화운동만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에도 어떤 사람의 명망성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덕목이다. 물론 지역문화운동은 명망성 있는 예술가의 자기인정이나 명망을 높이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망가의 명망성을 해체하고 민중성의 낮은 자리로 임하려는 것이 지역문화운동의 원리이자 본질이다. 왜냐하면 지역문화운동은 예술의 패권(覇權)과 중심의 독점을 해체하고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기본 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충북의 문화예술운동은 1980년대에 바로 이 명망성의 자기희생과 민중성의 자기확산과 대중성의 자기생산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출발했다. 도종환, 강혜숙, 이철수라는 민족적 명망성과 김창규, 박종관, 김희식, 김기현, 유순웅, 오세란과 같은 민중적 현장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상승작용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데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과정과 결과가 예술분야에서 투영되고 실현된 것이 충북문화운동연합이라는 예술가 조직이었다.1) 그 이후 1990년대 초에 윤석위, 신동인, 김승환, 송찬호, 채길순, 이홍원, 홍창식, 김준권, 정다미, 손순옥 등의 많은 예술가들이 본래의 자신들의 지향목표에 따라서 진보적 예술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충북에서의 이러한 흐름은 일종의 경향적 방향성을 가진 운동이었는데 진보적 예술운동의 주체들은 조합주의가 아닌 투쟁조직으로써 대중을 선도하고 감동시킨다는 방법을 택했다. 운동은 실천일 수밖에 없다. 실천의 결과가 없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낭만적 문화혁명주의에 불과하다. 운동은 반드시 목표가 있어야 하며 그 목표의 결과가 분명해야 한다. 충북의 진보적 예술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결코 앞서거나 나은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초기인 1980년대 예술운동의 진실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진실성이라는 것이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일 뿐이어서 사명감이라는 것도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어느 지역이나 명망가들은 있다. 그런데 대체로 명망가들은 고귀한 인품이나 현실의 예술권력을 신사적으로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여간해서 몸의 노동으로 복무해야 하는 예술운동에 편입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운동의 대중성은 이 명망가들의 지지를 통해서 확보되는 경우가 많다. 그 명망가가 다행히 문예운동에 지지를 하고 적극적으로 가담을 해 준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간극(間隙)이 발생한다. 안정감의 인력(引力)이 예술운동의 역동성을 저해하는 간극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역문화운동은 운동으로서 존재해야 할 운명이기 때문에 운동을 이끌 명망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때 명망가들의 자기희생과 견고한 의지가 견인의 원동력이 된다. 충북의 경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도종환, 이철수, 강혜숙 등의 명망가들의 자기희생과 예술운동에 대한 의지 그리고 김창규 시인의 헌신적인 노력, 박종관 노창호 김시천 김성장 박명구 김희식 유순웅 등의 기획실천력 등이 동시에 작동했다. 나는 지금 명망성이 예술운동에 제일 덕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민중성과 소박한 희생정신이야말로 조직이나 운동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징적 주체가 필요하고 또 그 주체를 표상화하지 않으면서 내면의 힘들이 강력하게 분출되는 계기로써의 명망성을 말하는 것뿐이다. 앞에서 말한 이분들은 처음부터 명망성을 가지고 예술운동을 했던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그런 개념 없이 순수하고 희생적으로 민족의 미래에 헌신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분석을 한다면 이분들은 예술운동을 통해서 명망성을 확보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충북의 예술운동은 명망성과 운동성의 상호교호 속에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나간 셈이다. 그 예가 1980년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춤이었다. 강혜숙 교수와 오세란 남인숙 등이 헌신하여 만든 이 작품은 남한의 모순을 매우 극명하게 표현한 문제작이었다. 자본의 수탈과 교육의 모순을 대중성으로 풀어내면서 피지배 민중들의 애환을 재미있게 연출한 이 작품은 충북예술운동사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한편 대중성의 확보가 예술운동의 제일 목표여야 한다. 대중성은 대중적 지지와 아울러서 예술 향수자인 시민들에 대한 예술의 자기확인 기능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술가들은 근원적으로 엘리트 지향적이다. 예술 행위 자체의 자기완결성과 소비나 소통의 특이성으로 말미암아서 예술가들의 생존형태는 특별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이 특수성을 어떻게 민중성으로 담보하느냐가 관건으로 떠오른다. 이 경우의 민중성이란 대중성과 사회모순이 중첩된 역사적 개념으로 이해되었으면 하거니와,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예술가로 존재하는 터전이자 의미인 대중의 터전을 벗어날 수는 없다.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자기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희생하고 시대와 지역에 봉사하고자 할 때, 그 당대 지역예술은 더욱 진실하고 풍요로와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충북의 진보적 예술계는 민중성과 대중성과 명망성과 희생정신이 연출한 한 편의 작품이었다.
2.지역 문화예술운동의 이론
1)20세기 후반 민족 민중 민주의 이념과 조직
민예총을 포함한 진보적 예술가 조직의 이념은 한마디로 민족·민중·민주였다. 여기서 민족은 민족해방(nation liberation)과 반외세라고 할 수 있으며, 민중은 민중해방(people democracy)과 반봉건이며 민주는 이 두 지향목표의 실천 수단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찍이 단재의 민중직접혁명론의 시대적 변형으로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이라는 남한의 혁명론으로 집약할 수 있다. 여기에 일제잔재의 청산과 잘못된 봉건 유산의 철폐와 같은 큰 범주의 목표와 과정이 덧붙여질 수 있다. 이 절대목표와 방법은 예술창작에서도 그렇고 예술조직에서도 원칙으로 지켜졌다. 그렇다면 왜 예술가들이 사회현실에 대해서 이처럼 집착했던가? 예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고민이 없이 사회현실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197,80년대의 남한은 예술가들이 미학이나 순수에 머물 수는 없었다. 가혹한 현실의 압력으로 말미암아서 예술가들은 어쩔 수 없이 거리로, 투쟁으로 나서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론적으로 이것을 설명하기에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예로 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예술의 존재이유로 환원하는, 절대 끝날 수 없는 역사의 논쟁으로 이 문제를 끌어들이면 안 될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문제를 예술과 유토피아로 압축해서 되물어 보자.
우리는 먼저 예술이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술과 유토피아의 문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나 사라진 애틀랜타 유토피아와 같은 신화로 물음을 이끌고 간다. 칼 만하임의 말처럼 유토피아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상상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현실이 아름다울 수 있고 희망과 미래가 찬란한 것이니까, 우리는 그 개념의 존재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예술은 유토피아적 기능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 종교화들은 모두 천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지향한 것들이다. 종교음악 역시 그렇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산수화 역시 유토피아 지향적이다. 이렇게 예술은 이상향을 꿈꾸는 몽상을 대신해 왔다. 안견을 김홍도로 바꾸어 보자. 김홍도적 현실감각이 조선의 회화(繪畵)에 대치되는 순간 예술의 사회변혁은 깃발을 올린 셈이다. 예술은 유토피아 지향적이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므로 그 간극이 심각해질 때 반드시 예술은 강력한 현실변혁 의지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 지역문화예술이 운동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민족에 예술이 복무(服務)했던 지난 197,80년대의 남한에서 예술의 기능이 미학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남겼음을 회고(回顧)해 보자.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차라리 역설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즉, 197,80년대 미학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대부분 사회참여적인 작품이었다. 여기서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이런 경험의 교훈으로 보면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에 대한 참여는 외면할 수 없다. 자고로 위대한 작품과 예술은 언제나 현실적이었다. 분단 체제의 남한에서 이 현실인식의 칼을 가장 첨예하게 간 예술장르는 문학과 미술이었다. 특히 문학에서는 김지하의 「오적」과 양성우의 「겨울공화국」과 같은 작품으로 1970년대의 유신체제와 맞부딪쳤고, 1974년 11월 18일엔 <문학인 101인 선언>의 발표와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창립되어, '문학의 자유와 실천을 위하여' 그 활동을 전개한 것이 반독재 투쟁의 기폭제였다. 진보적 작가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결성하고 그 지역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총체로써 1995년 7월 30일,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립했다.
한편 청주를 포함한 충북 지역에서는 1980년대 초에 지역문화운동의 움직임이 강력하게 분출되었다. 특히 1987년 6·10 민중항쟁은 지역문화사의 분수령 하나를 남겼다. 청주 지역의 민중적 정신과 민족적 사상을 예술문화에서 실현하려는 민예총의 전신 충북민족문화운동연합이 생겨난 것이다. 충북도 그렇고 전남한에 걸쳐서 민예총이나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생겨난 것은 역사적 모순의 인과법칙으로써 유신의 폭압과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비인간화의 극한상황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아주 강력한 의지의 예술적 실천의 결과다. 당시 청주를 비롯한 각 지역은 서울 문화권력의 집중화로 인하여 종속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군사파시즘의 폭력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중심에 대한 종속 이전에 남한 사회의 모순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중앙과 지역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목표와 조직으로 그 모순을 철폐하는 예술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의 폭발지점인 6·10 민중항쟁은 정치와 경제의 비민주화와 지역의 종속성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눈물겨운 시도였음은 우리 모두 잘 아는 바와 같다. 그 결과가 바로 충북문화운동연합이었으며 그 재결과가 민예총 충북지회였고, 단양·제천 지부를 비롯한 충북내 다른 지역의 문화예술 조직의 결성이었다. 이처럼 수십 년간의 투쟁의 결과로 얻은 민주주의와 인간주의를 구체적인 삶의 터전에서 실현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분들은 민예총을 거칠고 전투적인 깃발을 들고 현실문제를 실현하려는 예술을 빙자한 혁명결사조직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민예총은 그러한 점들을 깊이 인식하고 문화예술 자체로서의 의미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예술의 미학적 완성을 위해서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이러한 현실인식 때문에 예술가들의 변혁지향점은 자동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어떤 현실이라도 모순은 존재한다. 이 지점의 현실모순은 저 지점의 현실모순과 상충된다. 즉,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다해도 모순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가 모순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구자다. 예술이 아무 것이나 표현하고 지향하는 것이 아니므로 예술가들은 진실이나 정의를 향한 의지가 있게 마련이다. 극단적인 미학(美學)을 추구하는 것도 예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표현주의적인 의미일 뿐이고 인간 존재의 자기실현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와 사회적 정의를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분노를 가지는 것이며 그 분노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분노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의 실천을 하며 그 결과로써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예술가의 존재가 귀중해진다. 이런 점에서 지역의 변혁운동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지역문화의 역량이 강화됨으로써 문화운동의 지역적 전개라는 두 개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는 운동양태로서의 지역문화운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현장성과 문화가 갖는 선전 선동의 결합은 그 지역 현장운동, 즉 삶의 운동에 대한 가능성을 가지게 되고, 이때부터 지역의 문화운동은 대중 조직화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이 지역변혁운동과 예술의 관계는 그 자체로 정당하기는 하지만, 연결고리의 이완(弛緩)으로 말미암아서 지속적인 운동의 형태로 존재하기가 어렵다. 계속해서 굴러가야만 존재할 수 있는 원리와 마찬가지다. 바로 이점에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이데올로기는 왜 예술가들이 운동으로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준다. 여기 민중성과 민족지향의식이 있다. 예술가가 엘리트로서 특권적 지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중성의 원리였다. 친독재 친외세 반민족의 반민중성에 대한 저항적 타자로서의 민중성은 충북지역문화운동의 이데올로기였다. 예술가들이 자기인식과 아울러서 타자에 대한 반성의 지점을 분명히 하면 자연스럽게 지역변혁운동과 민족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식도 자동 개입한다. 더 이상 설명을 줄이거니와 민중주의와 민족의식은 198,90년대 예술가들의 책무로서의 이데올로기였다.
예술이 예술로만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1990년대 중반까지 남한의 문화환경은 거꾸로 남한의 예술과 지역을 동시에 살리는 자양분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칠고 열악한 문화환경이 오히려 생명력 있고 진실한 문화예술운동을 가능케 만든 것이다. 이것은 예술로 사회를 변혁시키고 사회의 정신을 예술에 반영시킨다는 고전적 원리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역사화(historicize)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즉 모든 것은 고정성(stability)과 역사성(historicity)의 범주에 놓인다. 어떤 개념이나 상황이나 사회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데 그것은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역사의 개념으로 자리잡았을 때 의미를 얻고 또 내면에서 기능한다. 이 때 '변화한다'라는 개념과 '변화시킨다'라는 개념을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당연히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이 없으면 변화하지 않는다. 고정성의 인력으로 끌려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유인력처럼 역사의 인력은 고정과 변화라는 두 축이 있고 그 축의 균형상태에 따라서 고정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한다. 이 양상은 후레데릭 제임슨 식으로 말하자면, 계급갈등(class conflict)이나 생산양식(the mode of production in the widest sense)과 같은 부분에서 특히 첨예하게 작용한다. 만약 역사를 초월하는 명령(transhistorical imperative)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정의와 휴머니즘에 대한 방향성일 것이다. 예술운동은 몽상을 하거나 역사를 초월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진실하게 인식하고 건강하고 겸손하게 예술활동을 하자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 지역문화운동의 의의가 있다. 198,90년대 남한의 지역문화운동은 과거의 모순에 대한 해체와 재구(再構)라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역사화라는 지평을 향해 나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 때 충북지역의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은 반독재와 반외세의 민족사적 전망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지역문화운동의 자생적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1980년대의 지역문화운동은 지역에서 태동하기는 했지만, 그 근원은 민족과 국가의 모순이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지역을 위한 지역의 지역인에 의한 지역문화운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당시의 지역문화운동이 가치가 없거나 빛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과제가 있게 마련이고 그 단계와 조건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문화운동의 원리다. 당시에는 반독재 반외세 투쟁의 지역적 연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결과로써 민주화라는 결실이 있었음은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은데 그 결과와 연장선에서 1990년대 초 새로운 지역문화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지역문화운동의 방향전환이다. 1987년에 결성된 충북문화운동연합과 같은 비합법 예술조직과 1994년 결성된 민예총 충북지회와 같은 합법 예술조직으로 지위와 형식이 바뀌었다. 그리고 문화운동의 내용과 형식도 바뀌었다. 합법적인 민예총은 예술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운동의 원리를 접합시킨 형식과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 외피(外皮)는 2003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민족사의 상황변화와 세계체제의 도래로 말미암아 이제 내피(內皮)도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이다.
2)21세기의 지역예술조직의 이념 - post-colonialism
21세기, 아니 그 이전인 1990년대에 이미 남한의 문화사적 환경은 포스트모던한 사회기반과 탈식민주의적 의식이 움트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인 2003년 현재 지역문화운동에서 지역과 민족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왜냐하면, 이제 한 지역은 민족국가와 같은 근대국민국가 체제가 아닌 세계체제(world system)의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충북과 같은 지역은 이제 민족국가의 구성단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체제에 일정한 영향을 받는다. 과거처럼 민족단위 대서사적 명령은 이제 세계사적 초거대서사의 명령으로 바뀐 부분도 많아졌다. 오늘날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지역적 정체성과 국가 또는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등 세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지역에서 예술운동을 하거나 사회변혁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지역의 문제나 현황 또는 모순에 대한 인식만으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세계사적 전망과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세계체제나 세계화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예술가,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운명의 길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1980년대에 민주화운동과 반독재투쟁은 국가와 민족의 정의라는 지향목표가 있었다. 이 때에는 우선적으로 분단체제 남한의 근원적 모순인 파시즘과 군사독재 그리고 반민주성을 해소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었다. 찬란했던 지난 시절이라는 카시러의 말처럼 대략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30여 년간 대서사의 투쟁사가 남한 전체의 담론이었다. 이 때 모든 지역은 지역문제 이전에 국가문제에 집중해야 했기에 일관된 맥락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장르의 훌륭한 예술작품이 생산되었고, 또 이론들이 개발되었음은 아는 바와 같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상황과 조건이 변했다. 표면적으로 설익은 민주주의가 지배함에 따라서 문화예술적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혼종(混種)의 양식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국가나 민족문제와 같은 대서사적인 것들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향마저 보였다. 그것은 남한 문화예술의 포스트모던한 경향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생산하는 동력(動力)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간단히 말해서 성숙한 자본의 제 양상을 문화예술이 반영한 결과와 현상을 말한다. 펼쳐진 현상을 현상으로 이해하고 그 현상의 다양성과 혼종성을 중요시하는 한편, 이질성을 새로운 특징으로 삼으면서 역사현실적 감각 대신 현장의 파편화하고 소외된 삶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예술적 경향을 말한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오히려 2000년대의 지역문화운동은 탈식민적이어야 한다. 포스트모던한 사회구조 때문에 문화제국의 보이지 않은 문화적 지배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과거의 식민적 잔재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새 생명의 꽃을 피우는 새로운 문화예술운동을 해야만 한다. 탈식민의 개념에 대해서는 여기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아시리라 믿는다. 탈식민이란 간단히 말해서 식민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미래지향적 개념이고 서구중심의 제국주의 지배사가 아니라 비서구 중심의 민중사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탈식민이어야 하는가를 말해 보기로 하자.
현재 남한의 각 지역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종속적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 있다. 만약 지금이 제국주의의 시대라고 한다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실 분들이 많다. 그러나 종속의 심화가 여전히 심각하다는 점을 모르고 계시다면 그 문제점은 더욱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략 1000 년경부터 서울 경기 지역은 민족생존의 중심부였다. 이 공간적이고 지리적인 중심부는 정치적 의식적 중심으로 존재했는데, 전근대의 중심구조는 식민지적 근대의 중심구조로 고스란히 이행되었다. 특히 서울은 스스로 중심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의 중간관리자이면서 식민 영토로 이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면서 서울은 전근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이면서 근대의 정치경제적 중심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의 급속한 산업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독점을 강화하여 남한 전체에서 완전한 불평등과 불균등의 원인이면서 결과로써, 거의 모든 생존의 영역에서 독점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 모순은 서울 이외 지역의 희생과 고통을 담보로 형성된 특권과 독점이면서 동시에 서울 자신에게도 고통과 오만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계층간의 갈등이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조건 때문에 심각해지는 양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남한의 경우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불균형이 심각해져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단지 경제 정치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한마디로 서울은 식민의 공간이다. 그 자체로 식민성이 가득하고 또 식민성의 역설로써 중심독점 현상은 해결하기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그 결과 서울은 중심이고 서울 이외의 지역은 반식민지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서울 이외의 지역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 포스트콜러니얼리즘(탈식민주의)이어야 하는 이유가 도출된다. 물론 이 시대는 다양한 생존의 모습이 반영된 이론인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응당 식민의 왜곡을 해체하는 것에 최대의 의미를 두어야만 한다. 지역에 깊이 침윤(浸潤)된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따라서 반제국주의(反帝)와 같은 고전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세계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다. 그러니까 서울의 식민성을 인식시켜 주는 것과 다른 지역의 이중적 식민성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유일하고 무이(無二)한 치유(治癒)의 길이다. 그러니까 서울 이외의 지역은 제1세계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이면서 서울 중심주의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다. 바로 이 점이 현재 지역의 정체성 상실(喪失) 또는 정체성 부족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전통을 살리자'라든가, '우리 자신의 진실을 되찾자'와 같은 감상적 구호로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렵다. 그것은 식민지적 굴절과 왜곡을 거쳐서 잘못 각인된 불완전한 정체성이다. 한마디로 탈식민의식이야말로 21세기 지역의 문화운동이 가져야 하는 방법이며 목표이다.
3.진보적 예술 조직과 문예운동사
1)충북의 진보적 예술조직의 흐름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자료를 중심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대한 지난 20여 년간의 자료를 다 섭렵할 수 없기 때문에 큰 줄기만을 기술해 두기로 한다. 먼저 충북의 진보예술의 흐름은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진보적 예술가들은 당시의 예술가 조직인 예총과 예총의 예술이념인 친미분단반공 그리고 순수미학 중심의 예술정신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다. 친미 대신 반외세를, 분단체제의 인정 대신 분단체제 극복을, 반공 대신 민족을 우선하는 예술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직의 분수령은 1987년의 6월 항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촉발된 반독재 반외세 투쟁은 1986년과 1987년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남한의 민중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충북 지역에서도 도도한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굽이쳤다. 당시에는 무척 열악한 조건 속에서 비인간적인 억압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산발적으로 표출되었는데, 1986년과 1987년의 2년 간은 역사의 산발성이 일매진 단일성으로 집약되는 전기였다. 전국적으로 펼쳐진 민주화투쟁의 지역적 연대로서 충북의 전지역에서도 거대한 민주화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의식 있는 예술가들은 그 투쟁에 동참하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예술적 결과로써 충북문화운동연합이 결성된 ㄴ것이 1987년 12월이었다.2) 충문연은 반독재, 반외세를 기치로 내걸었기 때문에 당연히 비합법 조직이었고 그 만큼 투쟁적이고 목적적이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94년 2월에 충북민예총은 충북문화운동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면서 창립하였다. 창립당시 내걸은 민예총의 목표는 '서울 중심의 문화구조 속에서 대등한 충북예술, 퇴폐문화에 대항하는 건강한 삶의 예술, 외래문화에 대항하는 민족예술'을 내걸고 '대항'이 아닌 '대안'으로써의 문화를 고민하는 조직으로 창립되었다. 창립을 통해 문화운동진영의 폭을 넓혀야 했음으로 창립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결집해 나갔고 그때까지 제도권 문화단체의 비민주적인 운영에 염증을 느끼던 중도입장의 인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고 합법화가 가지는 위력으로 그동안 침묵을 지켜오던 많은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세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문학과 연극 등에 두드러져 나타났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지역화를 통하여 문화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충북 내 지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제천·단양 지부(94년 6월), 청주지부(94년 9월) 충주지부(97년 5월) 충북남부(보은옥천영동)민예총(99년 3월)등 지역민예총을 건설하여 지역화 사업을 전개했다.3) 그리고 2003년 5월 보은민예총이 독자적인 조직으로 재창립함에 따라서 옥천민에총과 영동민예총이 자동적으로 재창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3년 현재 충북민예총은 정회원 650명, 명예회원이나 후원회원 등 기타 400여명 등 1000여명의 조직으로, 다른 지역보다 진보적 예술운동이 활발한 곳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충북의 진보적 예술운동이 활발한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다.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충북은 전근대 시대 왕권의 근거지로써 우암 송시열의 예에서 보듯이 주자학적 영향력이 큰 지역이다. 사람들의 기질은 보수적이고 안정 희구적이며 급진적인 변화를 꺼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충북 지역사를 잘못 이해한 것이며 충북지역사에는 저항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이 내면에 흐르고 있었다. 근대의 단재 신채호와 벽초 홍명희가 그 예라 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보수적인 이 성향이 오히려 충북의 진보적 예술을 활성화한 계기가 되었다면 아니러니라 할 것인데, 보수의 강력한 힘에 의한 반사적인 동력이 바로 충북민예총과 같은 진보적 예술가 조직의 원천이었다. 즉 보수적인 예술의 이념과 조직이 시대적인 흐름을 수용하지 못했던 한계(限界)가 있었고 그 열악한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진보적 예술가 조직과 이념이 싹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분석이 있어야 하겠으므로 줄이거니와 역사의 흐름에 대한 조건적이고 반사적인 부분을 깊이 분석해 보아야 할 것 같다.
2)예술가조직의 문예운동사적 전망
예술이 운동으로 존재할 때, 실천과 지향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 때의 실천은 예술행위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술과 삶의 일치를 뜻하는 것이며, 지향점이란 진실하고 정의로운 목표를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현실의 모순을 척결하는 것이 지향 목표여야 하며 육체를 희생하는 노력을 가지고 현장에서 복무해야 하고 그 결과로써 예술작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개별적 실천이 아닌 집단적 조직적 실천의 형식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술운동에서는 조직문제가 늘 핵심과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조직은 집단이고 보편이다. 즉 집단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하나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조직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 생활 중에서도 조직은 모든 것의 존재 구조이기도 하다. 개인은 집과 가족이라는 조직구조를 통하여 자기존재를 인정받고 위치시킨다. 반면 어떤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와 감정을 매개로 하여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런데 지난 시절 남한의 진보적인 예술가 조직은 역사적 조건과 예술 환경으로 인하여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남한의 예술가 조직이 예총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이면서 순수미학을 지향하는 단체로 일원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예총이라는 조직이 생기는 결과를 낳았다. 즉, 예총은 예술가 조직의 성격 상 보수적이고 친정부적이며 그 때문에 진보적인 의식과 감정을 담아내기 어려웠다. 반제 반봉건은 물론이고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든가 민주화 같은 지극히 상식적인 의식도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리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비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구경적(究竟的) 영원성을 지향하는 예총이 시대적 열망을 대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진보적 예술가 단체의 존립기반이 생겨났다. 문학의 자유실천문인협회로부터 조직된 진보적 예술가 단체는 1990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가 태동함으로써, 모든 장르에 있어서 진보적 예술가 조직이 완성되었다. 그 이후에도 무척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차츰 자생의 틈새를 넓혀 나갔고 2000년을 지나면서 형태와 존립기반을 더욱 공고(鞏固)히 해 나갔다. 광역자치단체를 영토로 하는 지회와 기초자치단체를 기반으로 하는 지부가 곳곳에 결성되었다. 그런데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진보적인 인식과 감정을 전방위적으로 실험하고 담지하는 조직이 생겼다는 점이다. 민예총은 분단체제의 산물이다. 예총 역시 반공친미 이데올로기의 굴절된 반영이었거니와 민예총 역시 그 반사(反射)로써의 대타적 존재의 기능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민예총은 그 생래적 철학성이 예술적 외피로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즉,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실천행동과 예술적 표현이 제일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자연히 강력한 투쟁성과 선전선동성을 동반한다. 그리고 현실비판의 리얼리즘이 창작방법론으로 선택된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의 참여문학론쟁으로 표출된 바 있고, 또 지속적으로 논쟁의 중심에 놓이면서 지금까지 진보적 예술의 창작원리가 되었다.
3)예술가 조직의 시민사회단체적 성격과 연대(連帶)의 문제
진보적 예술가 조직은 1990년대를 전후하여 시민사회단체로 자기를 갱신해 나갔다. 이것은 반독재 투쟁의 예술적 실천이라는 지향 목표의 표면적 해소(解消)로 말미암아서 추동된 측면도 있고, 또 예술조직 내면의 자기혁신이라는 의미도 있다. 1990년 이전까지는 예술가들이 역사사회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시 말해서 현실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그는 이른바 운동권이거나 큰 개념에서 운동권의 범주에 속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서울 올림픽을 지나면서, 세계체제에 따른 제도변화와 강력한 민주화운동의 결과로써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투쟁하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예술 미학에도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책임을 포기(抛棄)한 것은 아니다. 반제 반봉건 반외세 반독점과 같은 현실사회의 모순을 직접 투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서, 그것도 지극히 간접화된 방법으로 반영하면 되는 시대가 도래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민주화투쟁과 반외세 자주화운동이 방향전화을 한 결과가 바로 시민사회단체인 셈이다.
이 민주화 시대의 도래는 예술가들에게도 크나 큰 기쁨이었거니와 투쟁의 예술에서 반영의 예술로 바뀌고, 투쟁조직에서 예술가조직으로 방향을 전환했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그렇더라도 예술가들이 가진 모순의 인식을 예술행위와 조직구조에서 반영해야 할 의무까지 폐기(廢棄)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가 시민사회단체적 성격의 예술가조직으로 나타났다. 현재 민예총 또는 문화연대와 같은 진보적인 예술가 조직은 시민사회단체적 성격이 짙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시민사회단체적 기능을 하고 있다. 조합이나 노조가 아니라 전문예술가 단체가 시민사회단체가 될 수 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하간 기능적으로 진보적 예술가 단체는 시민사회단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예술환경이 아직 정치경제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존(常存)하는 모순을 극복하는데 예술가들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충북의 경우에는 충북민예총이 시민사회단체의 정중심에 위치하면서 핵심단체로 상당히 많은 일에 관여한다. 성격상 예술가라는 전문단체이기 때문에 별다른 자격 조건이 없이 가입할 수 있는 시민사회단체와는 다른 면이 많다. 그러나 환경 문제나 경제 또는 시민사회의 제반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민예총과 같은 진보적 예술가 조직이 할 일이 많다.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은 이데올로기나 현실인식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예술문화적 감각과 표현의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 때 민예총과 같은 진보적 예술가 조직은 기능적으로도 사회변혁 운동의 한 축으로 존재하면서, 실제적으로 사회변혁운동을 하는 실천적인 일도 해야만 했다. 현재도 충북민예총은 사회변혁의 제일선에서 늘 역사와 사회의 모순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 서고 있다. 이것이 예술가 조직으로 해야할 일이라는 신념의 명령수행이지만 그로부터 예술적 자극을 얻고 소재와 주제를 얻으며 표현의 미학을 얻기도 하기 때문에 시민사회운동은 결코 예술 바깥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3)조직 원리로서의 생체문화주의(bio-culturalism)
조직을 구성하고 유지하는데는 반드시 정신과 이념이 필요하다. 어떤 조직이라도 그 조직을 생성(生成)하고 유지하고자 할 때 원리로서의 철학 즉 이념과 정신이 있어야 한다. 조직의 원리는 조직의 지도자들이 공유하며 조직원들 모두에게 침윤되었을 때 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충북민예총의 조직원리는 무엇인가? 지난 20여 년간 충북민예총의 조직원리를 분석해보면 여러 번에 걸쳐서 조직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하나의 유기체로 작동되었다는 점이다. 즉 하나의 생명체와 단일한 셀(cell) 안에서 생존을 영위하는 전체성의 단위였다. 이 전체성은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몸체를 가진 완결된 조직체를 뜻한다. 1994년 충북민예총의 합법화 즉 민예총 충북지회로 탄생한 것을 계기로 진보적 예술가 조직은 사회의 표면에 등장했는데 이것은 갑작스런 출현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흘러오던 생명의 맥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조직의 내면에 흐르던 생명력, 정신, 세계관, 이념의 종합적 완성이었다. 문화지형도로 보면 진보적 예술운동을 하기에 아주 열악했던 환경을 극복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예술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바로 이 개념, 즉 조직의 생명력과 생체적 작동원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충북민예총은 하나의 동일체로 작동되는 생명체와도 같다.
그런데 충북민예총 동일체론은 지향목표이기도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의 의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생체문화주의라는 개념을 제출하겠다.4) 생체문화주의란 문화를 하나의 몸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아니 몸의 구조처럼 생성되고 성장하며 또 작동되는 완결된 구조를 말한다. 모든 개체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 자체의 완결성과 구조를 가지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이 '생체구조에서는 하나의 원리나 보편성에 의하여 작동되지만 유연성을 가진 다양한 네트워크 형태로 존재'5)하기도 한다. 훈육과 통제라는 권력의 원리에서 이 권력을 어떻게 해체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바인데, 이와 반대로 권력을 약화시키고 분산시키는 것이 생명체적 인식이다. 문화 역시 그렇다. 어떤 존재라도 사고하고 움직이는 원리가 있으며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민족문화도 이와 같다. 하나의 완결된 생체구조를 떠올려 보자.
지역문화는 하나의 생명체인 민족문화의 한 영역이다. 여기에는 어떤 부분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고유한 의미와 가치와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뇌는 모든 것을 통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뇌가 다리보다 더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다리가 없다면 생명체는 살아 남을 수 있지만 뇌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이유 때문에 뇌가 다리보다 더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기능에 의한 분화가 생겨난다. 이 분화의 과정에서 마치 층위(層位)가 나뉘고 차별이 생기는 것처럼 잘못 인식된다. 이 구조에서 국가는 뇌, 민족은 심장으로 대비될 수 있는데 바로 이 핵심인력이 지금까지 민족을 이끌어 왔고 그것은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점과 폐해가 생겼음을 인식하고 용감한 패러다임 변화를 통하여 다양성(multiplicity)과 복수성(plurality)으로 민족문화를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역문화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중추신경과 심장이 각 부분 때문에 존재하고, 각 부분은 뇌의 중추신경과 심장의 박동에 의하여 존재한다. 각 존재는 다른 존재의 지지를 받을 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민족문화는 지역문화라는 리좀(rhizome)의 생명력으로부터 자양분을 얻고 존재의 기반을 얻는다. 민족문화는 지역문화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지역문화는 민족문화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문화라고 믿었던 사실은 국가문화에 절대적 역할을 할양해 왔다. 여러 번 강조하거니와 이제 그런 국가주의 패러다임에서 지역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때다.
4.역사의 재역사화 과정을 통한 예술운동
1)단재와 벽초, 의병과 동학
충북문화운동에서 중요한 사건적 계기는 단재와 벽초 그리고 의병이었다. 대략 1990년대부터 충북의 진보적인 문화예술계는 지역의 역사를 통하여 정체성 확보라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것은 남한의 한 지역인 충북이 올바른 지역적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원인의 반성(反省)으로부터 출발한다. 한 지역이나 국가가 인간적으로 진실한 사상과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 때문인데 그 질곡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혁명에 해당하는 대가(代價)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은 역사의 상식이다. 그 대가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거기 단재와 벽초와 의병과 동학이 있었다.
1996년 2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동상이 청주 예술의 전당에 세워졌다. 이것은 단순한 동상으로서 청동의 조형이 아니라 역사의 모순을 해체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이자 역사운동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단재 동상의 건립은 식민사관의 극복의 지역적 실천이라는 상징성을 띤다. 남한 사회 곳곳에 온존해 있는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뒤늦은 반성이었으니 이 때 비로소 청주의 지역사(地域史)는 올바른 민족사적 전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 지역이 민족사의 정의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거니와 청주가 민족의 횃불을 피운 상징적 의미를 확보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렇듯 단재 동상 건립은 처음부터 시민사회운동이면서 과거 일제잔재의 청산과 미래 민족공동체의 실현이라는 두 의미를 담고 출발한 것이었다.
1996년 12월 8일, 동상을 건립하던 그날은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아주 거짓말 같지만 청년 단재의 머리위로 정오의 무지개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영롱한 겨울 차가운 하늘로 피어난 무지개는 민족사의 정의를 상징하는 무지개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선생의 강철같은 기개만큼이나 차가운 무지개가 떴던 그날은 1996년 12월 8일,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탄생 116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고 민족의 뜻을 모아 역사정의를 실현하자는 다짐의 돛대를 올리는 날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단재 동상건립은 청주 지역문화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동상은 단순한 동상이 아니라 역사의 설움 속에서 응달의 꽃이 피워낸 민족정신의 정수(精髓)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상 건립의 과정에서 상당수의 시민들은 비협조와 비아냥으로 역사 변천에 저항하기도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재 동상 건립의 의미는 그 외적인 조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에 있음은 두 말한 나위가 없다. 사학자이며 언론이이며 문학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선생의 복합적 인물상을 상기할 때 이러한 민족정신을 우리들 마음속에 어떻게 수용해 나가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라고 하겠다. 선생의 동상 왼손에 들고 있는 동사강목처럼 우선 민족정기를 가슴에 새겨야겠다. 선생은 종래 판을 치던 식민사관을 떨치고 민족사관을 외치던 분이시다. 오늘날 펼쳐지고 있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선생께서는 일찍이 실천했던 것이다. 그 뜻을 이어받아 식민사관의 망령을 말끔히 걷어내는 일이 후학의 도리라 하겠다.
그리고 제천의 의병운동 재조명 역시 문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철수와 김시천, 권순긍 등의 진보적 예술가들은 제천민예총을 결성하고 제천지역이 의병의 중요한 근거지임을 재조명하고자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1995년 <제천의병제>를 탄생시켰다. 이를 통해서 한 지역의 역사성을 재역사화(rehistoricize)하는데 기여했다. 제천은 중앙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인데 근래에 들어서 이른바 좀 드센 지역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 드세다는 것이 결국 저항의지라는 내면의 코드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내면서 제천의병의 역사성을 주목하자 제천 지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놀라워했다. 한 지역의 역사인식과 지역사를 재구성한 예라고 할 것이다.
보은의 장내리 역시 매우 중요하다. 1893년 음력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보은에는 수만 명의 동학교도 및 일반 민중들이 '척왜양창의'의 기치를 내건 대규모 민중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보은 집회의 의미는 첫째,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 포교 공인이라는 종교운동과 척왜양창의라는 당대 민중들의 정치·사회적 요구였던 척왜양 운동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운동'이며 둘째 당시의 모든 진보세력들이 지역적·이념적 차이를 넘어 척왜양창의라는 시대적 대의 앞에 모두 뜻을 함께 했던 대동의 집회였다.6) 척왜양창의란 왜(倭) 즉 일본과 양이(洋夷) 즉 서양을 배척하고 창의(倡義) 즉 의를 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열강의 말발굽 아래 식민화 되어 가는 조선의 처지를 인식하고 반제운동과 자주(自主)의식 그리고 민족운동을 종교와 결합시킨 민족투쟁사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1990년대 김성장, 박달한, 송찬호를 중심으로 하는 보은의 진보적 예술가들은 보은동학의 역사적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자 장내리 보은 취에 대한 한 역사적·예술적 조명작업을 벌렸다. 보은 역시 제천과 마찬가지로 아주 속된 평판, '청주 감옥에 보은 사람이 가장 많다'와 같은 잘못된 담론적 소문으로 곡해(曲解)되고 있었다. 이 그릇된 역사인식을 폐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번 역사화한 담론은 다른 역사담론과의 변증법적 합의를 거쳐서 폐기되는 것이라서 그 폐기는 예술가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진보적 예술가들은 동학의 저항정신과 민족해방운동의 투쟁정신으로 재해석하면서 한 지역의 역사를 재역사화했다. ??
한편 충북민예총은 문학위원회를 중심으로 작고문인 조명사업을 전개했는데, 잘 알려진 작가로는 정지용 오장환 홍명희 권태응 홍구범 등이 있었다. 여기에 조명희와 조벽암 그리고 김기진이 있었지만 조명희와 조벽암은 지역일간지인 동양일보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김기진은 남한에서 연구에 제약이 없었고 또 전집이 출간되는 등 따로이 조명할 특별한 이유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교묘하게도 나머지 작가들은 거개가 다 사회주의자 내지 카프의 맹원이거나 동정자(sympathy)들이어서 역사에 매몰된 채 잊혀지거나 잘못 평가받고 있었다. 이들의 문화사적 복권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되니까 마치 충북민예총이 하는 일은 과거 사회주의 예술가들을 복권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착시(錯視)는 착오를 불러일으킨다. 수구주의자들은 즉각 민예총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반국가적 단체다라는 음해의 소문을 생산하여 논리화시킨 다음에 악의적으로 전파했다. 문예운동사는 항상 부당한 현실질서에 대한 항거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문예운동은 어떤 이데올로기이건, 비인간적이고 모순이라면 철폐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천하고 예술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 때 현존질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의 수구계층은 그러한 진보의 조류(潮流)를 막아보고자 각다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어 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기득권이 그대로 유지되고, 독점적 특권을 연장시키며,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명희의 경우는 좀 복잡했다. 남북한 정권 수립 후에 북한에서 두 번의 부수상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남북한이 적대적 감정을 유지하고 있던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랬지만 매우 슬프게 지금도 벽초 홍명희는 남한의 역사에 올바로 복권이 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충북민예총은 벽초의 역사화는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사의 재구(再構)를 뜻한다고 확신하면서 1996년 11월 2일, <벽초 홍명희 문학제>를 개최했다. 정보기관과 아주 긴장되는 단계를 거쳤으며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지탄과 비난 속에서 개최된 이 행사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론적으로 상명대학의 강영주 교수께서 『벽초 홍명희 연구』를 집필하여 토대를 쌓아 놓았고 또 『임꺽정』을 간행한 사계절 출판사와 풍산 홍씨의 인척들이 큰 도움을 주셨다. 그로부터 2년 후, 사계절 출판사와 문인들이 뜻을 모아 1998년 10월 17일 괴산 제월대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를 세웠다. 그런데 괴산지역의 재향군인회 등의 보수우익 인사들은 남한의 정치적 정체성을 시비(是非)하면서 문학비를 철거하겠다고 주장하는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 1년간의 대화 끝에 무리 없이 서로를 이해하면서 다시 세워진 벽초 홍명희 문학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근대민족문학사의 큰 봉우리 벽초 홍명희(1888 - 1968)는 경술국치 때 순국한 홍범식 의사(義士)의 아들로 충북 괴산 인산리(동부리 450-1 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때 괴산에서 충북 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후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하여 민족적 저항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다.
그는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 차 북한으로 넘어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
그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이곳 괴산은 민족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그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임형택 강영주 김승환 라용찬)
우리는 여기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탓할 필요는 없고 어떻게 상이한 생존의 방식을 조화할 것인가를 찾아야 하는 것. 이러한 표면 텍스트의 본질은 근대민족국가를 이룩하는 것과 그것의 장애이면서 극복해야 할 대상인 세계주의에 대한 민족적 응전(應戰)의 형식이다. 그것은 벽초의 길과 상동성(相同性)이 있다. 벽초가 명문 거족 사대부 출신으로 '비서구 식민지 근대에 대한 분명한 자기대응 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7) 우리 역시 신자유주의 분단체제에 대한 분명한 대응방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충북의 진보적 예술가들은 그것이야말로 국민국가와 민족국가를 이루는 21세기의 길이라고 믿었다. 민족국가를 이루는 것은 간단히 말해 통일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통일담론을 국가가 독점하던 시절이 있었다. 황사처럼 안개처럼 의식을 감싸고 감정마저 통제하던 그 시절, 누구든 통일을 거론하면 반국가 사범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아니 위협을 넘어서서 수감이나 조사를 받고서도 모자라 계속 감시를 당해야 했던 것이다. 국론이 분열되면 국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파시즘과 평행을 이루던 그 시절, 독점은 반공이란 유사이데올로기를 머리에 얹고서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담론의 독점은 힘의 독점보다 교묘하고 은폐적이어서 결과적으로 의식과 감정을 통제하게 된다. 정치권력자들이나 파시스트들은 그래서 항상 민중들을 통제하며 자신들이 설정한 굴레를 벗어났을 때는 감시하고 처벌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유사이데올로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우군을 만들고 나머지는 배제하고 분할하면서 권력을 배타적으로 행사한다. 그렇게 해서 정치권력과 지식권력은 야합을 하게 되며 지배담론이 종횡무진(縱橫無盡)하더라도 대항담론을 생산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랬다. 그 시절은 어두워서 통일담론은 반공을 위반한 반칙행위였고 반칙을 한 자에 대해서는 상징적으로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그 파시즘에 항거하면서 피와 땀을 흘리며 산화해 간 수많은 영령(英靈)들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이 분들께 우리는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8)
2)정춘수 동상 철거의 문화사적 의미
충북민예총은 지역변혁운동의 주체로써 다른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여 많은 사업을 했는데 그 중 이른바 4·13 총선연대와 정춘수 동상 철거를 상징적인 연대사업의 성과로 꼽을 수 있겠다. 충북지역문화운동사에서 정춘수 동상 철거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바로잡기라는 문법적으로는 도무지 이상한 형식의 운동이 결과적으로 댕겅 목을 잘라버린 충격적인 사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춘수는 원래 1919년 3·1 민족운동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의미 있는 명망가였다. 그런 그가 일제 후기에 변절하여 소극적 친일이 아닌 적극적 친일의 오점을 남겼음은 이유를 떠나서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민족독립지사를 추모하는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이 20세기까지 남한의 현실이었다.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진보적 예술가들의 주장은 어쨌거나 3·1운동의 대표가 아니냐는 항변에 묻혀버렸던 것이다. 사실 정춘수는 3·1 민족대표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독립청원을 할 의사가 없었고 그 선언을 한 것도 내 의사가 아니므로 3월 1일에 오지 않았다."라고 답을 할 정도로 반민족적이거나 반역사적인 위인이었다. 이미 친일은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정춘수는 단재의 저편 극점(極點)에 놓여 있다. 그의 부친은 동학혁명 때 참수형을 당한 바가 있고 정춘수도 처음에는 민족주의 사상으로 기미독립운동의 33인으로 정의를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변절하여 일제의 주구(走狗)로 전락한 이래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도 갖가지 친일행각을 벌렸으니 참으로 절망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민족을 배반하여 민족에 기여하겠다는 이 원대한 기만을 우리는 지금 탓하고 싶지 않다. 다만, 역사의 정의는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천명하고자 할 뿐이다. 그는 비극적 인물이었다. 청주 우암산 자락 삼일공원에 세워져 있던 정춘수 동상의 철거 과정 역시 민족문화사와 지역문화사에 큰 의미를 띠는 일대 사건이다. 비교적 형식을 중요시하고 '점잖음으로 표시되는 충북인 양반스러운 전통지향성' 때문에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냉소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청주는 친일잔재의 청산이라는 해묵은 숙제를 할 수 있었고 역사문화의 고장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그런 정춘수의 동산이 숭배되어야 할 인물로 동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왜곡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쓰는 것이 반드시 역사는 아니지 않는가? 역사의 E H 카의 말처럼 미래를 위한 거울이어야 하는 법. 3·1운동의 대표였다는 사실과 존경받아야 하는 민족독립지사라는 서로 상치하는 콘텍스트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을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더 큰 사실인 민족배반자라는 가치판단에 혼란을 초래한다면 그것이 바로 역사의 왜곡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민예총의 도종환 시인을 포함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청주의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적 인사들은 1996년 2월 8일, 그의 동상에 밧줄을 걸어 오래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정춘수 동상을 보기 좋게 철거해 버렸다. 여기서 가치의 충돌이 일어난다. 즉, 그런 것은 너무나 끔찍하다와 같이 호인(好人)의 너그러움을 빙자하여 동상 철거행위를 비난하는 분들도 계셨는데, 사실은 수구보수주의자들의 자기불안과 적대감의 표출이었을 뿐이다. 역사의 심판관은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작동된다는 그 두려운 사실을 그들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청주의 시민사회단체가 갑자기 정춘수 동상을 철거하였던가? 아니다. 대략 일년 이상의 토론을 거치고 친일파를 상상에서라도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출한 다음에 무수한 토론과 협의를 거쳐서 철거했다. 특히 관리 주체인 관청과의 대화가 여의치 않자 철거해 버린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1993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 정춘수 친일경력으로 철거문제 제기. 서명운동, 1994.10.19 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창립 및 정춘수 동상 철거 촉구, 1995.2.20 정춘수 동상에 일장기 부착, 1995.3.1 정춘수 동상 철거 및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3.1절 기념시민대회 철거시도(공무원 및 경찰저지), 1995.4.13 정춘수 동상 철거 공청회-연대회의, 1995.8.9 연대회의 정진동(목사), 도종환(시인), 이관복등 도지사 면담 - 도민의 의견을 모아 95년 말까지 해결하겠다는 도지사의 입장을 수용하며 8월 12일 동상철거식은 보류하기로 결정, 1995.10.16 동상철거 청원 반려 의결(도의회 내무위) 반려사유 -3.1공원의 재산권 및 관리권자인 청주시에서 처리, 1995.12.8 도지사 철거 지시(지사실 = 시장, 교육감, 유관기관장), 철거지시(도지사->정진동), 1995.12.9 행정 부지사실 - 청주 부시장 참석 의회 결과 96년 3월 1일까지 시에서 처리하도록 지시, 1995.12.20 정춘수 동상 연내 강제철거 시도연기(연대회의->시), 강제철거를 일시 연기하고 충북도와 청주시의 철거 추진을 살펴본 후 행동, 19961.25 정춘수 동상 철거에 대한 질의 회신 통보(동상 철거 여부 결정, 이에 따른 구체적인 처리계획을 시에서 수립시행하고 그 결과를 제출할 것), 1996.1.27 철거 시도 저지(시 공무원, 경찰), 1996.2.8 경찰과 시 공무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상은 무너지고 정춘수는 역사의 심판을 받음>9)과 같다.
해방공간 이래로 남한은 친일잔재를 청산(淸算)하지 못함으로써 장차 닥쳐올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일제의 경찰이 그대로 다시 미군정의 경찰로 자리잡으면서 마침내는 반민특위마저 해체해 버리는 일마저 생겨났다. 반공과 친미를 앞세운 이승만 정권은 국내에 정치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중간관리자 계층과 친일파를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으면서 정치 역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문학을 포함한 다른 예술 영역에서도 적극적인 친일을 한 예술가나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예술가들이 해방 남한의 중추로 자리잡으면서 문화예술 또한 친일의 얼룩진 피를 씻어내지 못했다. 교육이나 군사, 그리고 여타의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이 역사의 모순은 모순을 재생산하고 역사의 인과법칙으로 유전(遺傳)하면서 남한 사회의 총체적인 모순을 생산하는 근본원인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60년대 4·19혁명과 70년대 민중의 자각, 그리고 80년대 광주민중항쟁으로 촉발된 민족민주의 사상은 총체적 모순을 척결해야 한다는 역사의 명령을 뜻한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지역에서 반영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사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역사 전체를 조망해야만 하는 어려운 과제다.
Reference
1)충북민예총이 생긴 것은 1994년 3월 5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갑작스런 출현이 아니라 1980년대 이래로 충북 지역의 진보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노력이 맺은 결과였다. 1980년대 충북지역은 충북문화운동연합이라는 민예총의 전단계로 자생적인 예술운동의 조직이 있었다. 물론 비합법 조직이었기 때문에 충북문화운동연합이 겪은 고초와 고난은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실 이 단체는 투쟁조직이었다. 반독재, 반외세를 기치로 삼고 민주화와 인간화를 부르짖으면서 한 발짜욱씩 재겨 디디는 고난의 행군이었으니 오늘의 우리는 그 시절에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이 때 노력한 분들은 김창규 시인 이철수 판화가 도종환 시인 강혜숙 교수 김시천 시인 박종관 연출가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김희식 김성장 김기현 손순옥 등 여러 분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며 김승환 교수나 허석렬 교수처럼 직간접적으로 함께 했던 동지들이 있었다. 그 결과로써 한국민예총 충북지회가 결성되었고 덕망이 높은 이현주 목사님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던 것이다.
5)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Empire,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2001), p.23.
Power is now exercised through machines that directly organize the brain and bodies toward a state of autonomous alienation from the sense of life and the desire for creativity. The society of control might thus be characterized by an intensification and generalization of the normalizing apparatuses of disciplinarity that internally animate our common and daily practices, but in contrast to discipline, this control extends well outside the structured sites of social institutions through flexible and fluctuating networks.
6)박맹수, "보은집회의 역사적 의의", 『보은취회 110주년 기념 학술 포름』, 보은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 pp.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