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그린 그림은 일반적으로 아주 평범하게 여겨지거나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처럼 생각 되는데, 실제로는 발생 시기가 구분될 정도로 동양의 산수화, 또는 서양의 풍경화란 것이 일상적으로 있어 온 것은 아니다. 살펴보면, 서양은 근대적 시각의 핵심 중 하나로 논의할 만큼 1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였고, 동양은 산수에서 인격을 보고 도를 논할 수 있게 된 중세기에 융성하여 근대에 와서 문인들의 산수 유람이 유행하면서 활성화되었다. 그러고 나서 일상적으로 있어 온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현대의 회화는 풍경을 전통적인, 또는 고루한 소재로 여기게 된 것 같다.
진성근 작가는 산수화를 그린다. 평면의 화폭에 색으로 칠해져 있는 회화이기 때문에 그린다는 표현이 맞지만, 실제로는 나무를 파서 채색한 그림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을 칼로 그린 풍경이라고 일컫는다. 천이나 종이여야 할 화폭은 나무로 대체되었고, 붓으로 그려져야 할 형상들은 조각도로 파놓은 선을 통해 나타나는, 그러한 그림이다. 다만 채색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풍경화와 같을 뿐이다. 물론 나무판에다 직접 그린 그림들도 있다지만 색으로 온통 덮여지는 지지체로서 있는 것이라서 기법의 측면에서 채색만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진성근 작가에게 나무판은 지지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산수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있다. 왜냐하면 그의 풍경화에는 나뭇결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고, 그가 그렇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정자, 그리고 숲 사이의 여백들은 하늘이던, 물이던 간에 굴곡진 나뭇결로 채워져 있다. 아니, 화판의 나뭇결이 그대로 있거나, 작가의 조각도에 의해 적절히 강도있게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이 점이 진성근의 칼로 그린 풍경을 근사하게 만드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자칫 고루할 수 있는 풍경이라는 주제를 그 풍경의 고즈넉함을 간직하면서도 현대예술이 요구하는 소위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배경은 항상 그래왔듯이 어려운 문제이다. 고전적으로 볼 때, 서양은 배경을 객관화된 공간으로 만들었고, 동양은 여백으로 남겨놓았다. 말하자면 빈 공간으로 고정시켰는데, 현대에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떤 감각적인 질이 가득 차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배경을 단지 비워두거나 빈 것으로 고정시키지 않으려는 화가들의 노력이 시작된다. 브라크는 입체파의 매력을 “내가 감각한 새로운 공간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전히 객관적인 회화를 고집하는 화가들에게야 배경이란 곧 공간이겠지만, 진성근 작가의 풍경에선 객관적인 공간이 허용되질 않았다. 동양의 산수화에는 굳이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그의 산수화에는 나뭇결 모양 그대로 굴곡들이 굴곡진 파장처럼 가득 채워져 있어서, 마치 산수-풍경의 요소들이 서로 주고받는 영향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동양에서 공간개념은 ‘空卽是色’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간은 색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즉 감각적인 질로 채워져 있어서 감촉할 수 있는 공간이 동양의 사상을 지배해 온 공간 개념이다. 서양에서는 18세기에 와서야 유구의 시간을 지배해 왔던 유클리드 기하학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아니 본래적인 공간개념이 시작된다. 클리퍼드(William Clifford)는 공간을 만곡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휘어있는 혹은 비틀려 있는 이러한 속성은 마치 파도가 그러하듯이 공간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연속적으로 흘러간다”고 주장하였다. 산수화에서 여백으로 채워져있던 여백이 진성근 작가의 화면에서 나뭇결로 채워진 이유는 서양의 변화된 공간개념에 연관시켜 볼 수 있다. 화판위에 칼로 세겨진 풍경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나뭇결이 어떤 역동적인 방향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바로 그 만곡의 힘으로 소나무가 솟아나고, 수풀이 흩날리고, 폭포가 흐르고, 바위들이 일렁이는 듯하다. 옛 문인화가가, 명산은 유람을 허락해도 그리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작가는 자연의 원리인 만곡을 굳이 동양의 수묵이나 서양의 재료로 그려 넣기보다 그러한 곡선이 평면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뭇결을 선택한 것 같다.
일찍이 산수화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나 감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화가는 경험에서 비롯된 이러한 정서를 이상적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산수화는 경외감에 중점을 두면서 경험한 산수를 이상화시키거나, 경험에 중점을 두면서 흥이나 쾌를 담아 서정적이면서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예술이라는 것이 표현이다 보니 자연은 그대로 인데 화가가 치중하는 관점, 또는 화가의 몸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드러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화가가 산수를 그린다는 것은 만곡의 풍경 속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각인시키는 산수의 만곡에 감흥하여 몸소 화폭에 옮기는 것은 공통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산수화에는 신체의 리듬처럼 곡선의 리듬이 살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풍경이나 산수화가 일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전통적이거나 고루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진성근 작가는 이를 나뭇결에 빗대어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는 만곡위에 칼로 그려진 그 풍경을 마주하면서 자연의 리듬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 박순영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