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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Humanities/22, 2015, 12, 1.
- 김득중(1965-) 국사편찬위원회, 공무원, 한국현대사, 성균관대 박사.
역사에서는 가정으로 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가정은 아마도 우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역사에는 사건들이 이어져 있고 변곡점이 있다. 변곡점의 하나인 38도 선으로 갈라치기가 누구의 것이냐. 이에 더하여, 참, 공상에 빠지는 사람도 많았지만, 사건 속에 요인들도 많다. 이 논문은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1918-1996)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그에게 줄서기 한 인간들이 일제의 잔재들이잖아. 현대사의 적폐는 일제이다. 해방전후사에서 변곡점의 요인으로 이승만이 있고, 그와 하우스만이 사건들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철학사적 관점에서도 적폐의 청산에는 앵글로색슨 철학과 상층 사고에서 벗어나는 철학교육도 필요하다.
해방 이후 정국에서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미정보국보다 방첩대가 우리나라에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한 것 같다. 그리스의 식민지 개척에서도 이런 권력행사를 시행했을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지 지배 방식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독일계로 알려진 미국 군인인 하우스만이 독일 스팔타쿠스단(Spartakusbund)에 대해 알았을까? 그의 가계가 언제쯤 미국으로 이민 왔을까? 자국민이 아닌 한 외적 등장인물이 당대의 시대사를 바꾼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식민지이다. 자치, 자주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저항일 것이다. 아페이론의 성격에 플라노네메 아이티아는 방황이라 하지만 저항이 아닐까?
1. 머리말
2. 한국 부임 이전의 하우스만
3. 한국군 형성과 하우스만 - '국군의 아버지'
4. 여순사건 진압의 계획자 - 학살의 말뚝
5. 한국정치사와 하우스만의 개입
6. 맺음말
#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2015)
1. 머리말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으며, 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2. 한국 부임 이전의 하우스만
춘천 8연대에 배치.
3. 한국군 형성과 하우스만- '국군의 아버지'
1946년 춘천 8연대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배로스(Russel D. Barros) 휘하에서 조선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자 고문관으로 근무
여순사건 발발 초기에 이범석국무총리는 이 사건이 김구와 군대내 반이승만 세력이라는 극우세력과 남로당 극좌세력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했고,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였다. ... 광복군보다 일군․만군 출신을 우대하는 것에서 나타나듯 하우스만의 철저한 반공주의는 인사정책을 통해 구현되었다.
김종석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하우스만은 김종석의 군사적 능력과 군인의 자질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장차 한국군을 이끌어갈 대들보로 생각하였다. 하우스만은 그를 조선경비대 내의 작전교육과에서 초대 과장으로 일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순사건 뒤 숙군 바람이 몰아치면서, 김종석은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1949년 9월 서울 부근 수색에서 처형당했다. 이 때 하우스만은 이 처형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16밀리 무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이 필름을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로 활용했다.
4. 여순사건 진압의 계획자 - 학살의 말뚝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는 제주도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지창수(池昌洙, 1906-1950) 상사가 지도한 14연대는 이날 저녁 여수로 진입하여 경찰서와 철도경찰, 관공서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통근기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북향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즉시 관계자로 구성된 회의를 주최했다. 이 회의에는 미군측에서 하우스만(미 군사고문단 G-3), 존 리드(미 군사고문단 G-2), 트레드웰대위(전 5여단 고문), 프라이 대위(현 5여단 고문)가 참석했고, 국군측에서는 채병덕 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5. 한국정치사와 하우스만의 개입
하우스만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하우스만은 장관들만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미국인의 신분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 들어앉아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6. 맺음말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테임즈 텔레비젼과의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꺼지자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 나쁜' '야비한 놈(brutal bastard)'이라고 하였다. 그가 몇 십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종주의적 편견이 백인의 카메라 앞에서 솔직하게 발설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야비한 한국인에게 "처형된 시체에 가솔린을 뿌리는 방법과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 처형방법과 비난을 은폐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긍지를 느꼈다. 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 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 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 10월에 죽었다.
(lu 2:34, 53UKA, UKC)
# 년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제주도 주둔 제9연대의 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은 토벌보다 선무공작을 우선해야 한다고 보고 강경한 진압에 반대했다. 그러나 5월 6일에 열린 대책회의 결과 김익렬은 경질되고, 후임으로 5월 15일 박진경 중령이 부임하였다.
1948 6월 18일 박진경암살사건(朴珍經暗殺事件) 1948년 6월 18일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9연대의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은 대원들에게 살해당한 사건
1948년 9월 23일 '제주도 폭동 진압 총 지휘관인 경비대 육군 대령 박경진을 살해한 육군 중위 문상길 등 4명을 23일 총살했다' /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1950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퇴역을 맞아 한국을 떠나 있었고, 라이트(Wright)부단장은 일본에 있었다. / 하우스만은 김백일이 폭파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 한강교는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측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짚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1960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에게 "당신이 가서 미국 정부는 경무대의 탱크를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라"라고 말했다.
1960 3월 1일 하우스만은 1960년 3월 1일, 한국 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했으며, 이런 정보는 "나 이외에 누구도 그런 정보를 입수할 수가 없다"라고 증언했다. / CIA 지부장 피어드 실버는 장도영을 만나 쿠데타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타진한 적이 있다.
CIA(정보국) 피어드 실버 - 박병권 이범석 - 광복군
CIC(군방첩) 하우스만 - 박정희 김종필 - 친일 부역자.
1961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18일 박정희는 미8군에 있는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왔다. 박정희는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을 해명하려 했으나, 하우스만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얘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와 만난 뒤 바로 자진해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 하우스만은 "그 당시 나는 한국전문가였고, 하우스만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다고 나를 믿고 신뢰"했었기 때문에 미국 정․관계에 박정희를 신임하도록 얘기할 수 있었다. 하우스만은 한국 상황과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수여 받았다.
1961 8. 장도영 체포는 노태우 대위였다.
1979 [김재규, 정승화 -]
전두환 노태우, 미 방첩대, 미 국방 – 카터(레이건)
1981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 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1981년 6월 24일, 하우스만을 불러 두 명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하우스만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일"
1987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테임즈 텔레비젼과의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꺼지자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 나쁜' '야비한 놈(brutal bastard)'이라고 하였다.
# 인명록
1875 이승만(李承晩, 1875-1965) 한국 대통령.
1876 김구(金九, 1876-1949)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1889 송호성(宋虎聲, 1889-1959)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군인. 정부 수립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의 한 사람이다. 김구의 측근으로, 김구의 암살과 함께 권력에서 밀려나며 1950년 5월 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남하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그는 1959년 3월 7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은 그를 기려 조국해방 45돐이 되는 때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1893 김석원(金錫源, 일본식 이름: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1893-1978) 일본군 장교를 지낸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 군인이다.
1899 임영신(任永信, 1899-1977) 호는 승당(承堂). 전라북도 금산 출신이다. 영어 이름은 루이즈 임(Luise Yim)이다.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900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일제 독립운동가, 광복군, 제1대 국방부장관과 자유당 부당수를 지냈다.
1906 지창수(池昌洙, 1906-1950)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의 주동자로 당시 14연대의 인사계 육군 상사로 있었다.
1916 채병덕(蔡秉德, 大島秉徳 오시마 헤이도쿠, 1916-1950)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37년 6월 49기로 졸업
1917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만주국 육군사관학교.
1917 정일권(丁一權, 1917-1994) 지난날 터키 주재 대한민국 대사,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제5기, 대한민국 국무총리,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
1918 김종석(金鍾碩, 1918-1949)[서른하나] 건국 초기의 군인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6기 졸업,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졸업(1946년). 1948년에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조선로동당 계열 군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해맑게 웃으면서 미군정 소속 장교들과 악수하면서 농담을 주고받았고 총살당하기 직전에도 웃으며 인민공화국의 적기가를 불렀다. [사형 집행 전에 웃으며 걸어가는 장면의 사진을 본적이 있다. 그 사진을 영상으로 남긴 자가 하우스만이었구나.]
1918 김완룡(金完龍 1918-2013) 함남 함흥(咸興), 1945년 6월 학병항쟁계획으로 9년형, 1945년 풀려남. / 송호성 경비대사령관이 법무처장 김완룡대위를 불렀다. [이지형?-?]
1918 송요찬(宋堯讚, 1918-1980) 충남 청양 출생. 대한민국 제13대 국방부 장관·대한민국 제9대 외무부 장관 등을 지냈으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장 출신이다.
1920 고정훈(高貞勳, 1920-1988)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특별보좌관·초선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 군인, 정치가, 언론기업가이다. 광복군, 육사 7기.
1920 이형근(李亨根, 1920-2002) 일본군 육군 포병 대위로 복무하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영어실력이 뛰어나다. 대한민국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예비역, 1959년 8월 6일). 육군참모총장·합동참모총장·외무부 본부 대사.
1920 백선엽(白善燁, 1920-2020)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합동참모의장. 만주군육군사관학교9기. 간도특설대 장교.
1920 김창룡(金昌龍, 1920-1956) 일본군 헌병, 대한민국의 군인. 헌병 출신으로 일제하 공산주의 계열 항일조직을 무너뜨리고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0 허태영(許泰榮, 1920-1957: 사형집행) 군인, 육군 대령 출신이다. 김창룡 암살.
1920 박병권(朴炳權, 1920-2005) 제14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군인 겸 정치인.
1923 장도영(張都暎, 1923-2012) 군인이자 정치가. 장면 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5·16 군사 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지냈다
1925 문상길(1925k-1948) '제주도 폭동 진압 총 지휘관인 경비대 육군 대령 박경진을 살해한 육군 중위 문상길 등 4명을 23일 총살했다' 1948년 9월 23일 / 박경진(朴景鎭)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다.
1931 전두환(全斗煥, 1931-)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대한민국 제 11·12대 대통령이다.
1932 노태우(盧泰愚, 1932-)는 17년만에 치뤄진 대통령 직선제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1973 박노자(朴露子, 티코노프블라디미르, 1973-) 소련 출신의 교육인·언론인·사회운동가·역사학자 ·한국학자로, 반파시즘을 대표하는 지식인.
1965 김득중(1965-) 국사편찬위원회, 공무원, 한국현대사, 성균관대 박사.
제주도 주둔 제9연대의 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은 토벌보다 선무공작을 우선해야 한다고 보고 강경한 진압에 반대했다.
박진경암살사건(朴珍經暗殺事件) 1948년 6월 18일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9연대의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은 대원들에게 살해당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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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 1899-1981) 미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한국의 군정기 당시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의 군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00 존 조지프 무초(John Joseph Muccio, 1900-1989)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초대 주한 미국 대사를 지냈다.
1908 에드워드 란즈데일(Edward Geary Lansdale, 1908–1987), 미공군 소장 베트남 공화국 성립인물 [CIA]
1912k 배로스(Russel D. Barros)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배로스(Russel D. Barros) 대령
1918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1918-1996) 미육군 대위로서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 [CIA]. 춘천 8연대에 배치 1946년 춘천 8연대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배로스 휘하에서 조선경비대 집행국장(Executive Officer)이자 고문관으로 근무
1943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시카고 대학의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역, <한국전쟁의 기원>, 1986.
도널드 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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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체계
사령관 존 리드 하지 (1945년 9월 8일 ~ 1947년 2월 5일)
장관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1945년 9월 11일 ~ 1945년 12월 17일)
아서 러치(1945년 12월 18일 ~ 1947년 9월 11일)
윌리엄 프리시 딘(1947년 10월 30일 ~ 1948년 8월 15일)
찰스 헬믹(1948년 8월 15일 ~ 1949년 1월 11일)
프라이스 대령 – 국내 보안부서 담당 즉 방첩대(또는 CIA) 구축 담당
경비대 총사령관, 배로스(Russel D. Barros) 대령에게 보고서를 쓰다. 수석보좌관이 되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로버츠 고문단장은 즉시 관계자로 구성된 회의를 주최했다. 이 회의에는 미군측에서 하우스만(미 군사고문단 G-3), 존 리드(Reed, 미 군사고문단 G-2), 트레드웰대위(전 5여단 고문), 프라이 대위(현 5여단 고문)가 참석했고, 국군측에서는 채병덕 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
(6:01, 53UKA) (6:12, 53UKC)
첫댓글 [제임스 하스만의 주한미군방첩대(CIC)와 계열이 다른 미군 정보계통의 조지 실리 소령.
조지 E 실리 (George Emerson Cilley) 소령의 소개는 다음과 같다.
- GSC Offic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Department of the Army.]
위키백과: 김달삼
김달삼(金達三, 1923년 8월 4일~1950년 3월 20일)은 본명은 이승진(李承晉)이며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겸 유격대 사령관으로서 4·3 사건을 주도하였다. 1948년 8월에 월북하여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및 주석단에 선출되어 북한의 인민공화국 창건에 참여하였고,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1] 1949년 8월에는 유격대원 300여명을 이끌고 38선을 침투하여 경북 보현산 일대에서 대한민국 전복활동을 하다가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3월20일에 국군에게 사살되었다. 현재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그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참조*
[사실은] 태영호의 4.3 발언, 사료로 검증했습니다
이경원 기자 이메일 보내기 작성 2023.02.20 11:07 수정 2023.02.20 11:44 조회 6,354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085862&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