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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유동== 스크랩 처복
파크 추천 0 조회 45 09.02.04 19: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단편소설  

               처      복

  소설의 간단한 줄거리:

   소설의 배경은 중국동포 2세들이 문화대혁명의 동란의 시기에 살아 온 정형과 주인공 석준이가 위험의 고비를 넘으면서 정말 우연이 아니라 하늘 준 인연으로 산골에 혼자 사는 처녀를 만나게 되였지만 그 처녀를 다시 찾아 갔을 때는 그는 이미 아버지의 유언대로 집을 불태우고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그 처녀를 찾고 찾던 석준이는 결국 그 처녀를 만나기 위하여 그 불탄 집터에 자기가 집을 짓고 살고 기다렸다.

    자기 집터에 누가 집을 지었다는 소문을 듣고 처녀는 이러다 큰 일 나겠다며 황급한 생각에 찾아 왔고 결국 두 집 합의하에 그 집을 원주인 처녀가 돈 주고 사기로 하고 같이 살게 되였는데 얼마 안가서 두 청춘 남녀는 결혼하였다.

   세월이 흘러 아들 딸 낳고 사는데 드디여 꿈에 고대하던 한국 왕래가 실현 되면서 처녀가 5살에 갈라진 한국의 어머니와 오빠가 찾아 왔으니 그때에야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과 상당한 재산-금괴를 땅에서 파내였었다. 그런데 그 금괴를 모두 딸 사위에게 줬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오빠가 한국에서 경재적 지원 까지 했으므로 중국에 큰 사업을 성공 시키고 한중 우호관계를 촉진 시키면서 그들 생활에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가져왔으니 주인공 석준이는 자기의 처복에 대하여 재삼 감탄 안할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문학상을 받고

                                 

  내가 중국에 갔다 온지도 열흘이 넘어서야 사방 전화를 통하다보니 그동안 나에게는 한국 신문예협회에서 소설 <<처복>>을 제10회 소설부문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급기야 신문예협회 회장으로부터 통지를 받고 ?아가서 기념사진도 찍고 상패도 받아 왔었다.

  한국신문예협회는 창건 30년 전통을 갖고 많은 원노 유명 문이들로 대거 포진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한국 굴지의 문학단체로 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 소설 수필 분야별로 한명식 선발하여 원노문인에게만 주던 문학상을 이번 제10회에서는 시분야에 한국 박옥태래진과 수필은 미국 LA에 사는 한인계 강정실이고 소설부문에는 이렇다 할 이름 성명도 없는 중국동포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뜻하지 않은 영광에 깜짝 놀라기는 했으나 왜선지 감격적인 기쁨보다 마음이 한층 무겁기만 하였다. 

  왜냐면 나는 평생 시를 써왔고 소설은 작년부터 취미 삼아 몇 편 써 왔을 뿐 내 스스로도 자신이 없거니와 많은 유명 소설가들 앞에 감이 이래도 되느냐 싶어서였다.

  또 다른 하나는 나의 문학상을 진정 알아주고 기뻐할 절실한 문학친구는 다 하늘나라로 떠나갔고 돈만이 명예로 생각하고 평소 남 안하는 문학을 한다고 빈축을 주던 일가친척들이나 술친구께는 돈  한 푼 없이 상패만 달랑 받았으니 그들 앞에 큰 소리도 자랑도 못하니 말이다.

  나는 반년 전에 소설 <<처복>>과 <<돈나무>> <<후회>> 세편을 한국 당대의 유명한 소설가, 평론가, 원로심사위원들께 내 소설을 한번 봐 달라고 두루 내 놓은 적 있었다.

  당시 한 편집원은 단편소설 <<후회>>를 명작 같다며 춰 주었고 <<돈 나무>>도 만화 같은 소설이라며 잘 됐다 했고 <<처복>>은 중편 같아 좀 길어졌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아주 재미있게 잘 꾸몄다며 너무 길어 신춘문예 작품공모에는 "노"라며 다른 문학지에는 모두 발표 할 수 있다는 평을 받았다.

  나 역시 <<처복>>이 사건 발생전개가 기교 없이 순차적으로 너무 길게 써진 것을 이해는 되지만 소설의 정점인 기쁨의 폭발을 먼저 쓰고 과거사를 회상하는 것으로 쓰면 소설은 단축시킬 수 있으나 소설의 기본 핵을 미리 알게 되면 소설이 흥미가 없을 것 같아 수정 않고 그냥 두기로 하였던 것이다.

  아마 나의 <<처복>>이 언어 활용과 인물이나 사건 형상에서 부족하지만 재미있게 꾸며진 그것과 내가 재 중국 해외 동포라 특별이 예우 한 것으로 문학상을 받았다고 생각 된다.

  나는 금후 힘에 부치는 소설을 그만 쓸려고도 했으나 일련의 소설이 발표되고 문학상까지 받으니 내 몸에 새롭게 충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평생 시를 못 버리듯 이제는 소설도 못 버리게 되였으니 늙어 몸은 꼬부라져 이제 소설을 쓰기에는 때 늦었지만 어찌 하겠는가 죽는 날 까지 소설도 써서 문학상 명예를 지켜야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게 된다.

  나로서는 소설에 첫발을 내디딘 샘이지만 시에서 시적인 아름다운 영감을 포착하는데 숙련했다시피 소설도 우리 인간생활 가운데 흥미진진한 이야기 꺼리를 찾아낸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자신한다. 아마 문학상이 나를 이렇게 한 걸음 추동하는 가 본다.

  나는 엇그제 역시 나와 같이 제10기 시부문 문학상을 받은 박옥태래진님 자택에 하루 밤을 류숙하면서 뜻 깊은 날을 보냈고 철학자이고 시인인 그로부터 신비의 우주학 저서와 시집을 선물 받었었는데 그에 비해 나로서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 부끄럼을 느끼고 그래도 나와 같은 사람에게 문학상을 받은데 대하여 신문예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박유동     2008년 5월 13일 서울에서

 

 

                                          처복 (妻福) /소설

                                                                   

                                                                                                       박유동

    영숙이를 만나려 석준이는 시장거리에 나와 무었을 사려고 돌아갔다.  모든 것이 배급제라 썰렁한 시장은 뭣하나 마음대로 살수 없어 온 가정에 한달에 한 장 나오는 육표(肉標)로 삶은 돼지머리고기 한 근과 양표(糧標)로 과자 한 봉지 그리고 과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시골 할머니한테 빨갛게 익은 앵두 둬 근을 샀다. 그래도 마음이 맞갖잖아 백화상점에 들려 꽃무늬가 고운 손수건 하나와 통 크게 비싼 구리무 한통을 사 보태고야 한결 마음이 놓였다.

   석준이는 방금 준비한 선물구레미를 그날 영숙이한테 빌려 신었던 빨간 끌신과 함께 오토바이 뒤에 싣고 영숙이가 사는 산골짝을 향해 떠났다. 사실 석준이는 열흘 전에 딱 한번 만났던 그것도 말 한마디 못하고 얼핏본 영숙이였지만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가려 시도했으나 연 사흘 짓궂게 내린 비에 물 진창이 된 촌 흙길로 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없어 오늘에야 가게 되었다.

   이제 당장 영숙이를 만날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레어진다. 영숙이를 만난 것은 열흘전 비 오는 날이었다.

   그날 석준이는 하루 일과를 서둘러 마치고 오토바이를 타고 곧바로 집으로 내달렸던 것이다. 후덥지근한 날씨는 바람 한점 없었고 서남쪽 하늘에는 육지 같은 먹장구름이 드리웠는데 방금 비를 몰아올 것만 같아서였다.  석준이 집은 현성에서 탄탄한 신작로로 달리면 불과 반시간이면 도달 하겠지만 요즘 강다리 재건축바람에 교통이 두절되어 먼 산굽이까지 돌아 나와야 하무로 비 오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면 바삐 서둘러야했었다.

   석준이가 막 산굽이 울퉁불퉁한 흙길로 비틀거리며 가는데 갑자기 우주공간이 새까맣게 뒤덮이더니 천둥 번개가 연거푸 꽈르릉! 꽈르릉! 귀청을 찢었다.        시퍼런 불칼이 하늘과 땅을 갈지자로 맞찧고 방금 낙뢰가 머리꼭대기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석준이는 급히 오토바이를 길가 큰나무 밑에다 대피하였는데 장대 같은 소낙비가 골짝 황소바람에 태질치며 눈코 뜰 새 없이 마구 후려치는 판이었다. 다행이 늘 챙기고 다닌 비옷으로 머리와 발끝까지 덮어쓰고 나무 밑둥을 은신해서 바윗돌에 꼬부리고 앉았다.

   비에 가쳐 언제 그칠지 무턱대고 지루하게 기다려야하는 이런 때면 언제나 그랬듯 문학창작의 명상과 상상을 억지라도 떠올려야하는 그였다.  그는 요즘 구상 중에 있는 소설의 줄거리를 갈라 세우고 거기에 해당되는 사건과 인물을 비야 오건말건 꼼꼼히 짚어나갔다.

   그는 학창 때부터 문학을 좋아하였는데 중학교 일학년부터 고중졸업 할 때까지 교내 문학작품 현상모집에서 매번 일등으로 당선되었고 벽보와 교간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기에 학교에서는 문학애호자란 상도 동시에 주었었다.

   그가 사회에 나왔어도 아리랑, 조선 문학, 청년문학, 문학신문 등 여러 잡지를 구독해 봤고 문학개론 같은 대학교제도 구해서 더욱 열정적으로 문학공부를 하였다.

   남들은 언제나 책을 끼고 다니며 수시로 독서하는 그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청년이라 높이 보았었고 당시만하여도 고중졸업생이 흔치 않아 모두들 그를 대학생이라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김석준하고 그의 본명을 부르면 잘 몰라도 우리 마을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장장 두어 시간 한데중으로 쏟아 붓던 비는 뚝 멎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였는데 서편 하늘의 해는 매양 쨍쨍하며 풀잎마다 맺힌 구슬 같은 빗방울에는 칠색무지개가 영롱했다.

   석준이는 급히 떠나려고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 발판을 힘껏 밟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오토바이는 단 5메터도 못가서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았다. 석준이가 급히 뛰어내려보니 오토바이 앞뒤 바퀴가 흙으로 매질하였고 석준이 신발에도 함지박처럼 매달려 걸음도 옮겨 디디기 힘들었다. 어찌하랴, 나무꼬챙이로 파내야했다.  찰흙은 오토바이에 휘감겨 굳은돌 같아 웬만한 나뭇가지는 찔러도 들어가지도 않고 꺾어 만졌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손바닥이 부르트고 팔목이 아프도록 수백 번 반복적으로 악착스레 달라붙어 파고 긁어내야 했는데 꿇앉아 모가지를 틀고 올려다보느라 목줄띠가 뻣뻣하고 머리도 돌릴 수 없었다.  끝끝내 다 파낸 석준이는 오토바이를 떠밀고 길이 반반한데로 비켜나가려 했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한바퀴도 못 돌아 또 흙투성이가 되었다.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다급해진 석준이는 또다시 나무꼬챙이를 들고 죽기내기로 파기 시작했다.  자전거 같으면 둘러메고 가련만 말만한 오토바이는 움쭉달싹 어쩔 수 없었다.

   죽을힘을 다하여 간신이 다 파낸 석준이는 이번엔 풀 위로 굴려서가려고 오토바이를 길가 풀밭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나 기진맥진한 그는 풀포기를 거슬러 밀 힘이 없어서 오토바이 발동을 걸어 엔진의 힘으로 전진하려했으나 바퀴가 획 획 돌아가자 풀줄기가 바퀴살에 휘감기고 지여 풀뿌리까지 뽑혀 바퀴에 끼였으니 더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떻게 하랴 이제는 하나하나 손으로 허비고 뜯어내야했으니 억센 풀줄기에 손가락이 째지고 피까지 나서 아리고 따가웠다.

   산그늘이 어두워지면서 바빠 난 석준이는 등골에  땀투성이 되고 입천장에선 겨불냄새와 단김이 물신 거렸다. 서둘러 떠나 오다보니 점심밥도 못 먹었거니와 오늘따라 늘 어머니 주려고 떡이며 과일도 사오지 않아 배를 쫄쫄 곯고 뱃가죽이 벌써 등골에 달라붙었다.  떨어지지 않은 풀줄기를 당길 힘이 없어 끙끙 신음만 하며 매번 헛손질하다 그만 그 자리에 기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오슬오슬 한기에 깨여난 석준이는 총총한 밤하늘의 별이 꿈만 같았는데 옆에 오토바이를 보고야 제 정신이 들었다.  몸은 저온 상태에서 떨고 있었고 나른한 팔다리는 땅에 부착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인가라고는 보이지 않고 산등마루에 별이 깜박깜박 자기를 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간 자칫 남모르게 죽어서나 가는 저 천국에 갈 것 같아 겁이 덜컥 난 그는 끙! 하고 용을 쓰며 다리를 뻗디디고 일어났다.  그 바람에 길가 풀숲에서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가는데 놀란 석준이가 돌다보니 나무 잎 사이로 끊겼다 이였다 깜박이는 불빛을 보았다.  분명 사람이 사는 집이라 저기 가야만 산다는 생각에 무거운 흙투성이 신발도 벗어던지고 오토바이도 팽개친 채 산골짝으로 올라갔다.

   나뭇가지와 풀대를 붙잡으며 수도 없이 엎어지고 미끄러지고 때로는 곤두박질치면서 이를 악물고 한 발작 한 발작 기어올랐다.  간신이 산중턱에 올라서자 그 불빛이 새여 나오는 환한 집이 보였다. 드디어 석준이가 울타리 담장 나무대문을 붙잡고 절로 안도의 한숨을 푹푹 내쉬며 중국말로 주인을 불렀다. 한 참후에야 주인이 나왔는데 허옇게 치마저고리 입은 조선어머니가 나올 줄이야! 석준이는 너무 반가와 “어머니!” 하고 외마디 조선말부터 나갔다. 그리고는 사람 좀 살려 달라 애원하였다. 어머니는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생각에 문부터 덜컥 열어 주었는데 흙투성이 되고 맨발 벗은 한 사나이가 비칠대면서 들어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수도 물가에서 흙투성이 비옷을 벗기고 발을 씻게 하고 방에 들어가서 빨간 끌신을 갔다 신겼다. 그리곤 아래채방에 다리고 들어가서 호롱불을 켜고 보니 어댄가 학생 티가 나고 퍽 온후한 청년임을 알았다. “어머님 전 배가 고파요” 하고 잦아드는 소리로 간신이 말하였다.

   어머니는 두말안고 나갔는데 부엌에 들어가 장작불이 채 꺼지지 않아 아직 뜨거운 가마솥을 열고 먹다 남은 시레기강낭죽 냄비를 꺼내어 된장찌개와 전번 초상때 먹다 남은 술 한 종지를 칠반상에 얹어 들어왔다.  석준이는 이 이상 반가울 수 없었다.  연방 감사를 표시하면서 밥상의 죽을 걸탐스레 퍼먹었는데 어머니는 석준이를 측은히 바라보면서 말 몇 마디하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석준이는 한 냄비 풀죽을 한참에 다 먹어치웠고 이제는 배가 나오고 허리가 펴지는 것이 살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꿀맛처럼 맛있는 음식이 어데 있는가싶어 옛날 소설 보던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나라 대왕이 온갖 산해진미 다 먹고 배에 기름이 차 무었을 줘도 맛이 없어 먹지 못하는 병에 걸려 세상 명의와 백약이 무효하여 죽게 되었는데 젊은 날 깊은 산중에 사냥을 나갔다 길을 잃고 몇 며칠 굶었다가 한 노파를 만나 풀죽을 얻어먹은 것이 그렇게 맛있었던 생각이나 당장 그 노파를 모셔오라 불호령을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석준이도 오늘 먹은 시래기죽을 그 왕처럼 영원이 잊지않을것이다.

   이튿날 석준이가 깨여 났을 때는 해가 동산에 불숙 떠올라 문창살에 붉게 비추고 닭이 한창 울어대고 있었다. 두 팔뚝에 힘을 줘보던 석준이는 몸이 한결 거뿐하고 마음도 상쾌하였다.  어제 같아서는 골탕을 먹고 큰 병이라도 걸리는 줄 알았으나 몸에서 새힘이 솟는 걸보니 워낙 젊은 혈기였다지만 어젯밤에 한 종지 술을 마시고 잔 것이 효과를 봤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문밖에 나오니 어머니는 어젯밤 널어 말린 비옷을 빨랫줄에서 걷고 있었다. “어머님, 어제 밤 너무 패를 끼치고 신세를 졌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야겠습니다.” 어머님께 하직인사를 하는데 “아니, 아침밥도 다 됐으니 밥이나 먹고 가라오.” “아닙니다, 어젯밤 늦게 너무 많이 먹어서 배도 안고프고요, 저 산 아래 오토바이도 있고 빨리 출근도 하여야합니다.” “아니 아무리 바빠도 그럼 세수나 하고 가시게, 얼굴에 흙이 묻었잖아요, 얘야, 어서 세수수건을 가져오너라.”하고 방문 쪽으로 누군가와 말을 하였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더니 한 처녀가 수건을 들고 나왔다.

   석준이는 이집에 다른 식솔이 더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어여쁜 처녀가 있은 줄 몰랐다. “영숙아, 어서 인사를 드려라, 얘는 내 친정 조카고 나는 야 고모 된다우.” 그러자 두 청춘남녀는 동시에 머리를 갸웃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석준이는 처녀로부터 수건을 받아 목에 걸고 세수를 하고 처녀는 수돗물을 자아올리고 있었는데 푸푸하고 물방울을 시원하게 퉁기며 세수하는 준밋하고 헌걸한 청년의 뒷모습을 영숙이는 저도 모르게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야, 뭘 하니, 어사 물을 올려라” 처녀는 그제야 자기가 이 청년에게 넋을 잃고 있었다는 생각에 무참하여 얼굴에 빨긋한 장밋빛이 살짝 스쳐갔다.

   석준이는 재삼 떠나야 한다며 자기가 신고 있는 빨간 끌신을 벗으려고 망설이고 있으니 “우리 집에는 남정네가 없어 다른 신이 없으니 얘 신이지만 그냥 신고 가시오, 돌 자갈판에 발이라도 상하겠소.” 하며 그의 고모가 영숙이 동의라도 얻으려는 듯 힐긋 처다 보니 영숙이는 생끗 웃기만 하였다.

   석준이도 자못 웃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주며 그만 떠나와야 했다. 사실 오토바이만 아니더라도 하루 눌러 붙어서 아침밥도 얻어먹고 그 처녀와 사귀여보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한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산 아래로 완만한 차 길 따라 내려오며 보니 자기가 어젯밤 이 넓은 길을 바로 곁에 두고 풀숲을 헤치며 고생하던 가파른 산비탈이 보였다.

   석준이는 산 밑에 내려오자 마침 지나가는 당나귀차가 있어 돈 50전 주마하고 오토바이를 신작로까지 싣고 갈수 있었는데 차바퀴는 나무에 쇠테두리를 둘러 진흙탕 길을 칼로 베듯 잘도 굴러갔다. 석준이는 그길로 출근하였지만 그 이튿날 사흗날도 비가 와서 질퍽한 촌길은 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없어 길바닥이 마르도록 꼬박 열흘만에야 이렇게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열흘 동안 한번도 영숙이를 잊은 적 없이 매일 떠올리곤 하였다.

   그날 아침 한순간 영숙이를 모두 두어 번밖에 그것도 얼핏 봤지만 볼 적마다 눈은 생글생글 웃고 꽃망울처럼 꼭 오문 입은 웃음을 가득 물고 있었는데 아마 그는 평상시 가마니 있어도 웃는 얼굴인 것 같다.  동탕한 앞가슴에 치렁치렁 드리운 쌍태 떠꺼머리는 갸름한 얼굴을 한결 조화시키고 있었다. 참으로 풀숲에 숨어있는 한 떨기 꽃이었다. 이 꽃을 고생과 죽음의 문턱을 넘어 자기가 발견한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니고 하늘이 준 선물이고 연분인 것만 같아 저절로 빙긋이 웃는 석준이는 이 꽃을 자기가 꼭 꺾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져보았다.

   그러나 이런 날벼락이 어데 있는가? 그가 영숙이 집 산중턱에 올라서니 그의 집은 형체도 없이 불에 타고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혹시 인명 피해는 없는가하고 사방 살펴보니 벌써 재는 전번 큰 바람에 싹 날아나 말끔하였고 불길에 끄슬린 벽체와 타다 남은 기둥뿌리만 새까만 숱이 되어있었다. 화재는 비가 온 후에 발생한 것으로 미루어 봐 기껏해야 일주일전에 발생한 것이라 추측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집과 동떨어진 마당 네귀에 있는 담장의 호박 넝쿨이며 담 밑에 낡은 벌통도 탔으니 누가 일부러 불 지르지 않고야 이렇게 디염디염 돌아가면서 다 탔을까 싶었다.

   그들은 지금 어데 있단 말인가? 정말 하늘이 무어준 절호의 인연이라 생각 했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줄 몰랐다.  석준이는 절망을 느끼고 터질 것 같은 복장을 수없이 뚜들겨댔다.  그리고는 혹시나 무슨 흔적이라도 찾으려 산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래 산비탈에는 사철 푸른 소나무가 욱어지고 골짝계곡물은 크고 작은 바윗돌을 타고 넘느라 하얀 옥구슬을 퉁기며 흘러내리는데 맞은 켠 높은 벼랑바위는 구름이 비겨가느라 코앞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이쪽으로 돌아보니 펑퍼짐한 낮은 구릉은 옛날 부대밭을 일궜던 모양인데 지금은 숙부쟁이 원추리 같은 온갖 잡초가 욱어졌고 꼬불꼬불 오솔길 따라 노란 산국화가 한창 피어있었다. 야,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그들은 어데 갔을까? 그러나 석준이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를 천애지각이라도 꼭 찾으려 결심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는 산굽이를 빠져나와서 신작로 들머리 교차점의 한 대장간집에 이르자 마당에 서 있는 주인부터 찾아 물어봤다. 주인 영감은 호미 쇠시랑같은 연장을 별러서 팔고 지나는 말안장도 신기느라 늘상 마당에 나와 있었으므로 반듯이 이 길로 거쳐 가야하는 웬만한 사람은 낯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한 보름 전 그 산골짝 영감이 죽어 화장터로 실려 갔고 한 일주일전에는 어떤 조선 할머니가 그 집 처녀와 같이 이삿짐을 싣고 이 앞으로 지나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처녀애와 둘이서 살았었는데 그의 집에는 사냥총이 있어 한번은 도둑이 들었다 총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다는 일화도 들었고 그 처녀는 사격 운동선수로 현에서 성에까지 뽑혀 다녔다한다.  사격 종목은 날아가는 접시를 백발백중하는 명사수라 한다.

   그러나 그들 행방에 대하여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는데 그들은 그의 고모와 같이 어댄가 간 것은 분명했다.  그 처녀가 명사수라는 바람에 언젠가 수년전 자기가 이 산굽이를 돌아 나가다 두 강도한데 오토바이를 뺏기게 되어 결투가 벌어졌던 일이 피뜩 떠올랐다.  석준이는 오토바이를 붙잡고 섰고 두 놈이 앞뒤에서 굵은 나무 몽둥이를  처들고 석준이를 막 내려치려 할 때 난대 없는 총소리가 탕! 탕! 두 방이 울리더니 두 놈의 나무 몽둥이가 두 동강나 떨어져 나갔다.

    그 바람에 두 강도는 혼겁을 먹고 산비탈 밑에 수수밭으로 도망을 간 것이 지금 기억 속에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 총소리 나는 방향으로 올라가 봤지만 은인은 못 찾았었는데 아마 그 처녀가 자기를 구해 준 것이 틀림 없을 거라 추측되어  더욱 안타깝게 그를 찾으려 마음먹었다.

   석준이는 공장에서 그날에 도매 나간 단위마다 못 받은 돈을 받아서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인데 정심도 먹지 않고 돌아가야 하지만 그 대신 일이 끝나는 대로 퇴근하므로 오후에는 시간이 많아 가까운 마을과 동래를 찾아가 보았고 공일날에는 먼 타현 까지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가볼만한 곳은 다 찾았으나 그들의 행적에 대하여 더 이상은 알지 못하였다.

   영숙이를 찾으려 몇 달을 고심한 석준이는 어느 하루 묘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바로 영숙이 불탄 집터에 집을 짓고 사노라면 제 아버지 산소가 있으니 언제고 찾아오리라는 것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그곳에 집을 짓겠다는 집념으로 사로잡이자 그 생각은 운동장에 굴리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원래 집터에다 집을 지으니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최종 집을 짓기로 어머니까지 설득하고 결정을 하였다.

   석준이가 그 산골에 집을 지으려는 원동력은 단연 영숙이를 만나려는 목적이겠지만 평소부터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뚝 떨어져 조용한 산골에 살고픈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석준이는 원래 그의 아버지가 현성에서 평생 밧데리공장을 차려 놓고 간단한 자동차수리로 큰 걱정 없이 살았으나 수공업자 합작화바람에 타고 다니던 헌 오토바이만 남기고 공장 설비를 몽당 무대가로 들여놓고도 나이가 많다고 매달 15원의 생활 보조금을 타고 나앉게 되자 너무 화가 동한 그는 호구를 성시에 둔 채 가까운 조선마을로 이사를 갔으니 바로 석준이가 사는 지금의 조선마을이었다.       이렇게 시민호구로 식량배급을 타면서 농사를 지으면 수당은 받으나 양식은 못 탔는데 비농업호라 불렀고 생산대의 모든 집체활동에 동참하여야 했었다.

   이사 와서 삼년이 못되고 석준이가 심양에 가 고중을 다니던 이듬해 그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뇌출혈로 병원도 못가보고 사망하였었다.  석준이는 홀로 있는 어머니를 돌봐야하므로 고중을 겨우 마치고는 지금의 고향집으로 돌아왔고 다행히 성시에 호구가 있어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동란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면 어데고 불어 닥쳤다. 한번은 공일날 집에서 소설책을 보고 있자니 마을 쪼판파이(造反派)가 한 물거리 들이닥쳤는데 “아니 한가하게 황색 소설이나 보고 있구만, 이 책 압수요.” 하고 대장이라는 자가 확 낚아채었다. “어, 이건 홍암(紅岩)아라는 책인데 중국청년이면 누구나 필독 혁명소설이야.” 그중 한 약은 자가 아는 채하였다.

   “그 쟝졔(江姉)라는 주인공 말이지, 그걸 누가 몰라 그러나, 문제는 이 대낮에 소설책을 읽고 있단 말야, 우리의 위대한 혁명도사 모주석께서는 혁명은 총끝에서 생긴다 했소, 실지 계급투쟁에 뛰어들란 말이다, 오늘 대대에서 이쿠스톈대회(憶苦思甛大會)에 노소불문하고 다 참가하니 동무도 빠지지 말고 어머니와 같이 참가하시오, 이 책은 회의가 끝나면 돌려주겠소.” 하고는 대장이 모두 이끌고 가버렸다.  석준이는 혁명은 장소가 없다며 자기와 아무 상관없음에도 쥐락펴락하고 지시까지 하니 화가 벌컥 났다.  그러나 법은 그들 주먹 안에 있으니 비농업호 자녀라 이 동네 사는 이상 순순히 따라야 했다.

   그날 이쿠스톈회의는 동래 빈하중농 권덕보 노인을 모셔다 그의 쓰라린 과거사를 통하여 억울한 구사회를 비판하고 오늘의 사회주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계급교양활동이였다. 대회는 “사회주의 좋다.” 란 합창으로 시작하였고 이여 쪼판파이 대장이 나서서 위대한 혁명도사의 교시라며 모주석의 어록을 청산유수처럼 암송을 하고 계급의 고통을 잊지 말고 사회주의강산을 철저히 지키자! 하고 구호를 높이 불렀다.

   생산대 회의장 한쪽에는 낡은 학생책상 하나 놓였고 권노인은 긴 나무걸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사회자의 말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 권노인에게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갔다 책상 우에 놓았다.  권노인은 컵을 들어 코에 대보고는 이거 맹물이구만 하고 한쪽에 밀어 놓는다.  그는 평생 술을 좋아하였다. 매일 지게에는 술이 든 군대용 쇳물통을 달고 다녔는데 쉴 때마다 한모금식 마시곤 하였다.

    그의 뼈와 살은 강한 술로 굵었기 때문에 뼈는 누구보다 억세었고 얼굴은 인삼 먹은 사람처럼 언제나 벌겋게 화기가 돌았다. 그가 환갑을 지낸 노인이라도 지겟짐 하나는 천하장사라도 그를 당하지 못하였다. 아들이 그의 나무 마중을 나가 대신 받아지려 했으나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아 도로 아버지에게 벗어주고 젊은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 뒤에 빈손으로 쭈뼛쭈뼛 따라 왔다한다.

   그는 그릇에 맑은 물만 봐도 술 생각하는데 오늘 사원대회에 초청강연을 하러 나온 그에게 특별이 컵에 귀한 술을 주는 줄 알았다.

   대장이 마지막으로 빈하중농 권노인으로부터 구사회 지주에게 쓰라린 고통사를 듣자고 선포하였다.   권노인은 물었던 담뱃대를 신 뒤축에 툭툭 털고 말을 시작하였다. “내래 일곱 살에 조선서 와서 평생 여기에 살았으니 이 고장 일이야 손금 보듯 환하지라오, 여기를 당시 흥경왕천문이라는 곳인데 우리 조선 사람이 한 30호 살았고, 내남없이 모두 지주 땅을 소작 내어 살았지, 그래도 그때는 지금처럼 뎬번(澱粉)은 안 먹었지라오, 조선 사람이야 강낭떡도 안 먹고 삼시 수수 조법이라도 밥을 먹었지라오, 그때는 집집이 탁주를 담아놓고 먹었지만 고량 빼갈술도 흔 해서 나는 술로 살았다오.” 그의 말이 주제에서 빗나가고 있어 청중들이 수군거리자 대장이 나서서 권노인 보고 옛날 악독한 지주의 본질을 말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내야 평생 거짓말을 안하는 사람인줄 다 알지 않나, 사실대로 말한다오, 그때는 지주 땅을 부쳐도 3할을 지주주고 나머지는 우리가 먹었는데 그걸 퍼주고 만날 개 추렴하고 소도 잡아먹었고 우리 같이 젊은 사람이야 만날 투전판에 기생집에 드나들다보니 한해 농사도 삼동 겨울에 다 부러먹고 나앉았는데 그래도 어대고 돈이고 양식을 세 낼 수 있으니 먹을 걱정은 없었지라오, 지금처럼 7할도 더 뜯어가고 3할도 못 남으니 만날 배가 곱은 거라오, 7할만 줘보지 다 배부르지 않나? 내말이 정말인가 생각해보라고.” 이때 대장이 벌떡 일어나서 권노인의 말을 제지하였는데 원체 말상에다 메기입이 무섭게 굳어져 있고 턱이 떨고 있는 것이 대단히 격분되어 있었다.

   “여러분, 권덕호 영감은 자본주의 사탕 포알에 빈하중농 자기 계급을 배반하고 이제는 적아간의 원수로 변질 했습니다. 그는 악랄한 지주계급을 비호하고 우리 모주석께서 이루어놓은 사회주의강산을 구사회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회주의 좋습니까? 배가 고픕니까?” 하고 구호를 높이 부르자 군중들이 일제히 사회주의 좋다! 배가 안 고프다! 하고 함성을 질렀다. “여러분 이 영감태기를 우리 쪼판파이 이름으로 현행 반혁명분자라는 것을 결정 선포합니다. 이 성과를 공사(公社)에 가서 회보하러 가겠습니다. 모두들 한사람도 빠지지 말고 다 같이 갑시다.  어서 이자를 창고에 가서 꼬갈모자를 갔다 씌워!” 하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정신 저지능으로 언제나 어머니 치맛자락에 붙어 다니던 한 총각애가 창고에 뛰어 가서 헌신짝이 달린 고깔모자를 들고 왔다. “야! 이 바보야! 이거 퍼셰(破鞋)고깔모자야! 어서 바꿔와!” 하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래서 새로 바꿔 온 현행반혁명분자란 고깔모를 권노인에게 푹 씌워놓았다. 권노인은 하도 어이없고 기가 찼던지 픽 웃고나서 “야들 와카니, 내래 뭘 잘못했다는거이가?” 하고 손으로 고깔모자를 벗기려하였다.  쪼판파이들은 여기저기서 노실하지 않다고 윽박지르고 대장은 호주머니에서 오랏줄을 풀어 권노인의 손을 뒤로 결박하였다.

   “여러분 나 따라 구호를 부르고 곳 공사로 떠나겠습니다, 자, 현행반혁명분자 권덕호를 견결히 분투하자! 분투하자!!” 대장이 구호를 냅다 불렀으나 모두 조용하고 아까 그 총각애만 두 팔을 들었다 놓았다.  사실 대장도 자기가 잘못 부른 것을 인차 알아차렸다. 그는 타도하자 부르려다 너무 과한 것 같아 투쟁하자로 부른다는 것이 분투하자로 잘못 불렀던 것이다.   모두들 뒤숭숭 한 가운데 저쪽 구석에 앉아 있던 석준이도 남들이 웃음을 못 참자 따라 웃었다.

   “김석준! 동무는 날 무식하다 비웃는 거요, 지식분자가 통치하던 시기는 끝났소, 지금은 우리 공농계급이 일체를 령도하는거요, 국무부총리 천영구이(陳永貴)도 수건을 쓰고 다니는 농민이요, 유명한 중앙교육부의 짱톄성(張鐵生)도 대학입시에 빵떡을 맞고 낙방한 사람 이였소, 그들은 다 지식 분자가 아니란 걸 아시요, 동무 거 좀 서지 못해!, 동무 아버지는 합작화 불만분자였다지? 동무 본신도 엄중하오, 학교 때 만날 당과 수령은 노래 않고 문학예술만 추구했다는데 그것이 바로 자산계급의 반동성이라는 거요, 그리고 뭣? 조선 전쟁 때 중국지원군이 안 나깠으면 남조선이 통일 했고 미국이 안 나왔으면 북조선이 통일했을 거라고, 동문 남조선의 침략을 통일로 보는거요? 언어도 계급성이 있소! 엄중한 사상문제구만, 그 당시 중학생이니 마련이지 대학생 같으면 벌써 우파분자란 말이야, 우리가 다 장악하고 있소, 동무는 썩은 지식분자의 로동개조 대상이야, 쉬는 날 집에 숨어서 소설이나 보지 말고, 뭣 국제특무처럼 초슈(朝修) 잡지를 들여와 본다고 엄중하고만, 노동판에 나오란 말이야!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보기요.” 하고 엄포를 놓았다.

   고깔모자를 씌운 권노인을 앞세우고 마을 골목을 한바퀴 돈 행렬은 공사로 향하여 행진 해갔다. 붉은 완장을 두른 쪼판파이들은 산만한 마을 군중을 정돈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아이들이 난장판을 치면서 따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고깔모자 쓴 현행반혁명분자 권노인을 묶은 밧줄을 그의 손자가 낚아 쥐고 꽹! 꽹! 꽹더렁꽹! 꽹과리를 치며 몰고 갔으니 흡사 길거리에서 원숭이를 몰고 가는 것 같았다.  계급투쟁에는 부모형제도 사정 봐서는 안 된다며 공산당 입당후보인 그의 손자를 고험해본다고 대장이 일부러 그렇게 하라 지시한 것이었다.

   그날 그 후부터 석준이는 공일날이고 아닌 밤중에도 조판파이에게 호출 되여 들뽁기고 시달렸다.  썬반(深翻) 한다며 채 가을도 끝나지 않은 비옥한 흑토질을 뒤엎고 한길 깊이의 황토생땅을 파 올렸는데 이듬해 그 땅에서는 곡식이라고는 되지도 않았다. 투궈루(土鍋爐)한다며 이미 쇠로 사용하는 집집의 가마솥과 쇠붙이를 끌어 모아 조그만 황토 옹기가마를 쌓고 비산 코크스 불에 다시 쇳덩이로 녹여선 강철을 생산했다고 허위보고를 하는데 이러구러 강철 총생산량을 영국을 따라잡은들 무엇 하랴!  석준이는 밤새 코와 얼굴에 숫껌쟁이되여 새벽에야 집에 돌아오곤하였다.

    그뿐이겠는가 농민들 동삼 농한기에 집에 놀고있으면 자본주의 사상이 온양된다며 혹독한 추위에 언 땅을 파라고 들판에 내몰곤 했는데 석준이도 주일이면 어머니 대신 불려가서 아무런 실적도 없는 일에 하루 종일 떨곤 하였다.   석준이는 때때로 자기를 포함하여 모두가 로신의 아Q가 따로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러고 보니 석준이는 어머니와 타협하였는데 어머니도 세상인심이 날로 험악해지는 것 같고 아들까지 비농업호라고 시달리니는 꼴이 보기 실어서 아들의 뜻에 쾌히 응했으니 산골짝에 집을 짓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 후속처리로 1500원이 은행에 저금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빗을 안지고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고 계산되었다.

   먼저 목수 둘과 미장공 둘을 하나의 팀으로 만들고 재료값과 품값으로 총 1000원을 주고 두 달 내에 완공하기로 하고 계약을 채결하였다. 원래 담벽은 그대로 쓰고 대들보와 기둥 같은 원목과 창문을 짜는 홍송널반자만 돈 주고 구매하며 기타 잡목은 목수가 산에서 채벌하여 쓰고 모든 운송은 목수들의 자체차로 이용하며 필요한 잡부도 팀에서 해결한다고 하였다.

    주인은 집이 완공되면 빗자루만 들고 방에 올라가면 된다고 한다. 집은 쉽게 제때에 완공 되였고 반들반들한 새기와장을 올려 원래보다 더 아름다웠다. 집은 기억자형으로 직각이 되는 한 칸은 부엌으로 공동 사용하도록 서로 통했고 정남향 세 칸과 아래채 두 칸으로 도합 여섯 칸이었다. 아래위채 모두 마루가 있고 부엌문 외에는 모두 미닫이문이고 창살은 가는 만자(卍字)무늬로 짰는데 분명 영숙이 아버지가 지은 그대로 한옥집이였다.

   석준이가 이사 와서 그해 동삼을 지나고 이듬해 춘삼월 앞뒤마당 복사꽃이 한창 필 때 그토록 기다리던 영숙이가 정말 찾아왔다. 영숙이는 불탄 제 집터에 누가 집을 지였다는 소문을 듣고 이러다가는 집터까지 빼앗기면 큰일 나겠다 싶어 집을 아예 사버리던지 필요하면 법에 송사까지 하려고 돈과 집문서를 들고 왔던 것이다.

   “안에 주인 계시오? 주인 계시오?” 영숙이가 위채에서 아래채까지 돌아가며 주인을 찾았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어 아래채 방 미닫이를 열어 보았다. 방안은 세간이라고는 없고 텅 빈방이였다. 영숙이는 얼른 들어가서 방 지실바닥을 손으로 쓸고 뚜들겨 봤으나 원래 정방형세멘 벽돌이 틈 하나 버러지지 않고 다친데 없이 그대로였다.  영숙이는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위채로 걸어 나오니 마루에는 누군가 보던 책이 있고 조선글로 된 <<아리랑>>이란 잡지가 있어 세심히 들여다보는데 동쪽 집모퉁이에서 한 어머니가 돌아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까만 바지에 앞치마를 짤록 동여매고 한손엔 수건을 벗어 들었는데 귀밑이 하얗고 눈은 서글서글하여 지금도 곱상스런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조선 어머니신가 봐요?” 하고 영숙이가 인사를 하자 “아니 뉘기시여?” 하고 어머니가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예, 저는 이 집터의 임자입니다.” “아 우리 아들이 말하던 영숙이란 처녀모양인데,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그럼 저 다락에 얹힌 신 임자인 모양이네, 올아 웃는걸 보니 맞긴 맞나보네, 어서 여기 마루에라도 앉아요, 우리 걔는 좀 있으면 올걸세.”

   영숙이는 다락에 얹힌 빨간 끌신이 예전 자기신임을 알아보았다. 그때 흔쾌히 빌려주었던 그 청년이 바로 이집 아들이라 생각이 들자 왜선지 가슴부터 두근두근 뛰었다.

   오후 네 시쯤 되어 갑자기 엔진소리가 나더니 산마루로 오토바이가 불쑥 나타나 열린 대문으로 돌진해 들어와선 마당한복판 복사나무 밑에 세웠는데 석준이가 돌아온 것이었다.

    석준이는 어머니만 쳐다보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얘가 눈을 감고 다니나, 저기 누가 왔나 봐라” 그제야 머리를 돌려 마루 위 담벼락에 붙어 꼿꼿이 서있는 영숙이를 보았다. 석준이는 너무도 뜻밖이라 아무 말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너희들 모르는 사이니?” 어머니의 말에 석준이는 두 손으로 영숙의 손을 맞잡았다.

    두 청춘남녀는 할 말을 못 찾고 바라만 보았는데 한동안 일직선 공중선을 타던 두 시선은 호수같이 깊은 눈 속에 꽂히었는지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어머니가 재차 불러서야 두 손을 잡은 채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 앞에 가지런히 앉았다.

    “이분이 전에 말하던 영숙이라는 처녀입니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어머니의 이 아들은 그날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고마워라, 이 은혜 어떻게 갚나.” 아들의 말에 어머니의 진정어린 말이었다. “그날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밤에 낮선 남자가 찾아와서 겁만 먹고 숨어만 있었는걸요.” “그런데 그동안 어대가 있었고 집은 왜 불탔나요? 난 동무를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호호, 왜 절 찾았어요.” 하고 석준의 말에 영숙이가 묻자 그-건 그-건하고 떠듬거리다 “동무한테 빌려 신은 끌신을 돌려주려고요.” 라고 대답하니 “호호호 남이 들으면 웃겠어요, 그런걸 가지고, 저는 그동안 천진시 저의 고모네집에 가 있었는데 고모부가 세상을 뜨자 고모와 둘이서 살았지요, 불은 그날 부엌에서 불이나 모두 불태우고 말았지요.” 라고 영숙이가 대답하였다.

    사실 집에 불은 아버지가 사망 직전에 아버지가 죽으면 이 산속에 딸이 혼자 못사니 집에 불을 지르고 누구도 못 와서 살게 하고 고모집에 가 있다가 때가되면 여기 다시 와서 살라는 유언대로 일부로 불 지른 것이었으나 사실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동무는 여기에다 집은 왜 지였어요?” 영숙이가 물었다. “우리 애가 여기에 집을 지으면 영숙이를 꼭 찾는다고 지였다오.” 하고 어머니가 선참 나서 말하였다. “정말 웃기세요, 절 찾아 뭘 하려고요”하고 영숙이가 손을 입에 대고 돌아갔다.

   석준이는 또 한참 어물거리더니 “동무를 찾아 빌려 신었던 끌신을 주려고 했잖아요.” 그 바람에 모두들 또 한번 웃었다. “아마 동무는 집터문제로 온 것 같은데 내가 사전 허락 없이 집을 진데 대하여 사과합니다.  별 의도는 없고요, 그러나 이미 집을 지였으니 이 기초 위에서 쌍방이 토론해봅시다.  나의 생각은 이 집터를 나에게 팔던지 아니면 텃세를 내는 것도 무방합니다.” 석준이의 이와 같은 생각은 영숙에게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영숙이는 이집을 짓는데 경비가 얼마나 들었나 물어 보고서야 “이집은 아버지가 살아온 집이고 아버지 산소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팔수 없고 텃세도 안내겠고요, 이집 짓는데 경비가 천원 들었다하니 기타 비용도 있을 거고 넉넉잡아 이천원을 올리니 이집을 원래 저의 아버지 이름으로 계약을 합시다. 그리고 동무네는 어머니와 같이 계속 이 위채에서 언제고 집세도 없이 살고 저는 저의 고모님을 모셔 와서 이 아래채에 살겠습니다.” 하고 영숙이가 결정하듯 말하였다. 모두들 말이 없자 영숙이가 재차 물으니 석준이 어머니 하는 말이 우리야 좋지만 셋방살이가 안방까지 차지하고 처녀한태 너무 손해 끼치는 것 아니냐란 뜻이고 석준이도 다 동의하지만 돈은 못 받겠다는 뜻이었다.

   영숙이는 남이 돈 들고 공이든 집을 대가를 주고 사는 것은 당연하며 이 산골에 이웃동무해서 같이 살아주는데 고맙기만 하다며 법원에 송사하여 필요하면 쓸려고 가져온 돈 이천원을 선뜻 내주며 아버지 집문서도 내놓고 거기에 대한 번호와  이름을 따서 계약서를 쓰게하였다.   

   그 후 보름 만에 영숙이는 천진 고모와 다시 이 산골짝 제집에 이사를 왔다. 이불보퉁이와 버들고리짝이 보였고 그 속에서 도 기다란 가죽 캡에 든 사냥총이 산굽이 가계집 주인이 말한 것처럼 눈에 띄었다.  석준이가 이 사냥총을 보자 깜박 물어볼 일이 떠올라 그날밤 두집 식구가 한방에 모였을 때 영숙이보고 물어봤다.  몇 년 전 오토바이 강도를 총으로 쏴 도망치게한 일이 있었냐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때 파란 적삼에 밀짚모자 쓰고 오토바이 탔던 분이 동무였단 말이지요, 정말 신통하네요, 이렇게 인연이 깊을 줄 몰랐네요”하고 영숙이는 놀라워 했다. 

    그때 아버지가 노루를 발견하고 이쪽 골짝으로  몰고 갈터이니 나보고  산 중턱에 매복해 있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만 오토바이 강도를 보자 강도의 몽둥이들을 총으로 날려버리고 위험에 빠진 사람부터 구해야 했다며 그 바람에 노루는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당사자를 보니 너무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만 처녀를 끌어안고 이렇게 일일이 아들을 구해 준 은인이 어데 있나며 눈물을 쏟았다.

   이날부터 두 집은 한 부엌을 사용하면서 한 식솔처럼 재미있고 전에 없이 활기차게 살았다. 특히 석준이가 공일날 집에 있는 날이면 한방에 모여 삼시세끼 밥을 같이 먹었고 석준이와 영숙이는 책을 번가라 보았고 석준이 습작한 원고도 읽곤 하였다. 두 늙은이들은 무슨 지나간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재미있게 나누었다. 뒷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기도 하고 산에 나물 캐려도 같이 가고 개울에 빨래도 동무해서 네 것 내 것 없이 같이하였다. 영숙이는 석준이 오토바이 타고 시장에도 갔으며 영화 구경도 한번 가봤었다.

   이러구러 영숙네가 봄에 이사 와서 반년이 되고 벌써 산천초목이 울긋불긋 가을이 되었다. 그런데도 두 젊은이는 이렇다 할 동정이 없어 두 늙은이는 어느 하루 뒷밭에 나가 가을 무배추를 속아주고 있었는데 고모가 먼저 말을 뗐다. 그는 석준이 어머니 보다 몇 살 우이고 서울서 고등과를 다니었기에 보기에도 차분하고 이야기도 찬찬히 잘하셨다. “집에 아들도 어데 견주는데 없다하고 우리 조카도 말하는 곳 없으니 그들 둘을 맞춰주고 우리 그만 사돈 삼읍시다.” “아이고 듣다 좋은 소식이구만 우리 아이도 괜찮지만 집에 조카야 인물 좋고 체격 좋고 마음시도 좋으니 어데 가서 그런 며느릿감을 구하겠소, 나는 매일매일 아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중이요” 라며 두 늙은이 말이 오고 갔다. 사실 이사 오면서부터 두 청춘남녀가 서로 어울린다 생각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석준이가 영숙이를 그토록 찾을 때부터 제 색시 삼으려는 낌새를 알고 있던 터였다.

   어쩌면 부모들의 주선을 기다릴 수 있으니 오늘 저녁으로 쌍방이 집에 가서 탐문 해보기로하고 어떤 경우라도 꼭 사돈이 되자며 집에 돌아 왔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로부터 부모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과 고모도 영숙이로부터 고모의 의사에 쫓겠다는 다짐을 받았으니 저녁을 먹고 나서 고모는 영숙이를 대리고 위채 석준이 방으로 건너갔는데 여느 날과 달리 석준이는 어머니와 나란히 영숙이는 제고모와 나란히 전번 날 집 계약 쓸 때처럼 두 진영으로 갈라져 젊은이들의 인륜대사를 털어놓게 되었다. 두 부모와 결혼 당사자 간 아무런 반대가 없어 결혼은 쉽게 결정되었다.

    사실 석준이는 야박하게 집을 팔아먹고 처녀의 재물을 탐낸다는 소지가 있어 여적 말 못하는 처지라 혼자 안타까웠고 처녀는 이만한 상대면 얼마든지 된다고 벌서 점찍어놓고 언제든지 자기 것이라는 자신을 갖고 있었으나 처녀로서 쑥스럽게 나서는 것이 얌전치 못하다 여겨왔을 뿐이었다.

   이 산골에 이웃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 그들은 결혼식 같은 건 따로 하지 않고 석준이 호구가 있는 현민정국 신방을 꾸미고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두 늙은이는 벌써 사돈이라 칭하며 좋아하였고 석준이와 영숙이도 너무 좋아 밖으로 뛰쳐나왔다.

    반공에는 달이 휘영청 밝았다. 밤에 단둘이 밖에 나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석준이는 영숙의 손을 잡고 교교한 달빛에 은파가 흐르는 개울가에 징검다리를 딛고 큰 너럭바위 우에 올라가 앉았다. “내가 여기에다 집을 지은 것이 참 잘했지요, 아니면 동무를 어떻게 만났겠소.” “나도 잘했다고 싶어요, 동무를 만난 것이 꿈만 같아요, 그때 동무를 주소성명도 모르고 떠나보낸 것이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몰라요, 전 지금 행복해요”

    영숙이 얼굴은 달빛에 명암이 엇갈려 신비로울 만치 젊음이 팽배해 있었고 흑진주 같이 섬뻑이는 눈에서는 강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석준이는 만부하로 부딪치는 전류를 감당 못하여 그를 와락 가슴에 끌어안고 사랑의 첫 키스를 하였다.  때마침 달은 쑥스럽다 구름 속에 숨었으니 희뿌연 젖빛 밤의 장막에 가려 그들 두 청춘남녀의 달콤한 사랑을 아마 높은 벼랑에서 지켜보고 있던 산비둘기도 아쉽게 못 봤다한다.

   개울물은 주야장천 흘러내렸으니 봄에 봄마다 벼랑의 진달래가 낙화되어 동동 떠나려갔고 가을이면 추풍낙엽이 떨어져 물결에 굽이쳐 흘러갔다. 엄동설한에 얼음장 밑에서도 쉼 없이 흘러만 갔다.

   그들이 결혼 한지도 어제 같은데 벌써 두 남매의 엄마 아빠가 되였고 그들이 성장하여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동안 고모와 어머니가 선후로 세상을 떴다. 곰곰이 손곱아보니 인간 한평생도 그리 짧지 않고 아득히 먼 것만 같았다.

   세월은 유수라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그동안 문화대혁명 동란과 그렇


게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사인방 쪼판파이가 꺾구러 졌고  드디어 개혁개방의 등소평시대가 열렸다. 모주석이 사망하자 돌아가던 지구가 멎는 줄 알았는데 지금 봐선 천안문에 오성홍기가 매양 드높이 휘날리고 나라경재가 더 활성화되고 사람들 생활이 더 윤택하여졌다. 

   뭐니 뭐니 해도 온 거리에 밤낮 붉은 기발을 흔들며 떠들던 조판파이와 홍위병이 싹 없어지고 만날 자본가요 지주요 역사반혁명분자요 친일이요 특무요 수정주의요하며 서로 때리고 헐뜯던 계급투쟁이 없어지니 얼마나 자유롭고 마음 편한지 모르겠다.

    그동안 집체화 바람에 일년 365일 들에 나가 일만하던 농민들도 제가끔 개인농을 하면서 헐하게 놀아가며 일하고 농한기에는 장사도 할려면 하고 그렇게 귀하던 쌀도 어데서 나왔는지 밥이라고는 할 줄도 모르고 강낭떡을 주식으로 하던 중국 사람도 쌀밥을 먹으며 해물과 육류도 무진장하고 술도 흔하디흔하니 사람들 저마다 풍부하게 살게 되었다.

    아마 지금쯤 거짓말을 모르는 권덕호 노인이 살아계신다면 오늘의 개혁개방의 사회주의가 구사회 지주 밑에 살 때보다 훨씬 더 낫다고 했을 것이다.

   가난이 사회주의인줄만 알고 그때는 왜 그렇게 배곯고 못살았던지 여자들 연지곤지 바르고 파마머리 한번 할줄 몰랐다. 몇 년간 재해로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배를 채워야했고 남편이 실직 되여 헤매었고 더구나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생명은 다행히 천명으로 부지하였지만 꼬박 이년을 똥오줌을 받아내야 했으니 그들의 고통은 누구보다 더 참혹했다.

     산나물을 캐고 지여 꼴단을 배여 산 아래까지 끌어내려 팔아야 푼돈도 안 되었다.  물론 그 어려움과 고생을 인내와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하겠지만 그 시대는 누구나 가난을 밥 먹듯 했으니 사람이 아무 의욕 없이 그러구러 사라 온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개방에 사람들 정신을 뻔적 차리고 새삶의 활기를 찾았으니 석준이도 남들처럼 새벽부터 오토바이타고 성시로 올리뛰었고 영숙이도 전에는 강냉이 한폭이 심어도 자본주의길이라며 대칼로 찍어버렸으니 감히 엄두도 못했던 넓은 구릉을 갈아엎고 온갖 채소를 가꾸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한만치 소득이 되니 재미가 났다.

    그러나 돈이 만능인 시대라 없는 것 없이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벌어도 끝이 없는 것이 돈일줄이야! 영숙이네는 그 옛날 못지않게 하루도 걱정 없는 날이 없었다. 대학 간 아들과 부근에 조선족 중학교가 없어 먼 성시에 딸에를 기숙까지 시키자하니 이런 산골에서 큰 목돈을 어데서도 구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오빠가 한국에 있지만 소식도 없고 남들처럼 한국에 나가 약장사도 못하니 집안 살림이 앞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 학비 때문에 속을 석이는 어머니 영숙이는 요즘 잠을 못자며 한밤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앉곤 하였다.

   여태까지 잘 뻗혀온 아버지 유언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말한 좋은 세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남북통일은 안됐으나 한-중간 서신 왕래와 친척방문이 허용 되였고 남들은 벌써 여럿차래 고국에 가고오고 하지 않는가? 이제는 남한의 어머니와 오빠가 조선전쟁에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의심이 들었으니 이렇게 무턱대고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이든 것이다.

    공연이 시간만 끌다가는 아이들 대학공부도 못 시키고 평생 호강 한번 못하고 다 늙어 죽는가 싶었다. 큰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생각에 조급증이 가슴에서 울컥 치받쳐 올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국 KBS 사회교육방송국 이산가족 담당자에게 연거푸 편지를 보냈으니 얼마 있으면 어머니 오빠의 상봉의 기쁨이 오리라 생각되어 한번만 더 참고 기다려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정말 한 달 후 앞뒷산 단풍이 한창 짙을 때 이 산골 석준의 집 앞마당에 난데없는 택시 한대가 들이닥쳤다. 택시에서는 한복을 입은 할머니와 중년의 신사가 내려 최영숙이를 찾았다. 그들이 바로 한국에 사는 어머니와 오빠였다. 그들은 KBS 사회교육방송사에서 중국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고 편지의 주소와 명함을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영숙이가 광복되던 해 다섯 살에 어머니와 해어졌으니 영숙이는 어머니를 못 알아봤고 어머니 또한 딸을 몰라봤다. 그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사진과 집에 있던 흑백사진을 대조해보고야 서로 친자친모임을 확인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 모녀는 입모습이며 귀방울이며 많이 닮았었다.

   그날 밤 그들은 풍파만난했던 지난이야기로 잠 한잠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는 참혹한 한국전쟁 때 어린 아들 다리고 부산에서 피난살이며 봄철 보릿고개에 굶주렸던 일이며 어떻게든 아들 하나 대학공부 시키려 밤늦도록 남의 방앗간에서 먼지를 들쓰고 떨던 일을 늘여놓았고 영숙이도 나무껍질을 갈아먹으며 배곯았던 일과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고 직업 없이 헤매던 시절 산에 나물이며 꼴단을 베여 푼돈 벌어 연명하던 일과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병중에 옳게 먹지 못하고 시달리던 일들을 아마 몇 날 몇 밤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그동안 서리서리 맺힌 이산의 한을 털어 놓으며 통탄에 떨고 애절한 흐느낌으로 가슴을 찢었다.

   “어머니!” 영숙이가 그토록 불러 보고프던 이름이었다. “아 그래, 영숙아 내 어머니다 이젠 걱정마라 어머니가 여기 있다” “어머니, 이게 꿈이 아니지요” 두 모녀는 또다시 붙잡고 울었다. “어머니, 전 이날을 기다렸어요, 아버지의 유산이 저 아랫채방에 묻어두고 있어요.” 영숙이는 아버지가 세상 뜨기 이년 전 암으로 다시 살 가망이 없어 딸에게 눈으로 확인 시키고 같이 묻어 두었던 것을 어머니에게 보고하듯 이야기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임종 전에 내가 죽으면 혼자여기 못 있으니 집을 몽당 불태워 누구도 와서 못 살게 하고 고모네 집에 가 있다가 남북이 통일이 되어 어머니 오빠를 만나든가 좋은 세월이 오면 여기에 와서 찾아가라는 것과 영숙이는 여적 이와 같은 사실을 남편도 모른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어머니는 그들을 모두 불러서 땅속에 묻어둔 아버지의 유산을 파기로 하였다. 모두들 아래채 방에 모였는데 삽을 든 석준이는 시종얼굴이 벌겋게 화근 달아서 말 한마디 않고 식식대며 지실바닥을 팠다. 그는 평생 같이 살아온 아내가 여적 감쪽같이 자기를 속이고 비밀로 숨겨온 것이 불쾌하고 불만스러웠다.

   땅을 반길 남아 파니 솥뚜껑이 보였고 뚜껑을 열어보니 큰 단지 속에 제법 큰 나무상자가 보였다. 상자는 석준이 처남남매간에 받들어서야 꺼냈다. 상자 속에는 유서 같은 편지가 있었고 흰 광목으로 돌돌 말은 묵직한 덩어리가 있었는데 풀어보니 하나 같이 똑같은 열개의 황금빛이 찬란한 금괴가 쏟아졌다. 금괴 하나가1000그람이라 적혀 있었다. 정말 흥부네 집 박덩이에서 보물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유서부터 보자기에 영숙이가 읽기 시작하였다. 먹물로 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숙아 이것이 나의 유서가 되겠다. 나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죽게 된다. 영숙이는 워낙 내말을 잘 들으니 이 편지를 읽을 때는 좋은 세월에 너의 어머니오빠도 같이 읽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든 금괴는 너 어머니도 알겠지만 부모한테 상속받은 전 재산과 땅을 팔아서 중국상해시에 공장을 하나 지으러 가져 왔다가 해방이 되는 바람에 다 쓰지 못하고 남은 것이다.

    내가 공장 후속 처리하다보니 어머니와 오빠를 먼저 한국에 보내고 그때 애비를 안 떨어지려는 영숙이만 남았는데 남북길이 막혀 다시는 못 가게 되었다.       이제 나마저 죽어 없으면 어린 너만 불상 하구나 언제고 통일이 되어 좋은 세월이 되면 너희들 만나겠지만 이 금괴를 팔아서 사용 하여라. 꼭 잘살아야 한다. 아버지 1964년5월19일

   모두들 통곡을 하였다. 한동안 오열에 흐느끼던 어머니가 영숙이 손을 잡고 조용히 말을 떼였다. “영숙아, 아버지가 때가되면 찾아 가라는 것이 네가 고난할 적에 찾아 쓰라는 게다, 너희들이 그렇게 배고팠고 고생했을 때, 남편이 교통사고로 누워 있을 때, 직업이 없어 헤맬 때 왜 찾아 팔아 쓰지 않고 여적 땅에 묻어두고 있었단 말이냐. 고생을 사서 하다니, 이 사실을 저승에 너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니, 참 너들은 바보짓을 했구나”

   “아니어요, 아버지도 이 사정을 잘 아실 거예요, 화폐가 폐지되고 곧 공산주의 문턱에 들어선다고 대자보(大字報)가 나붙던 그때 그 세월에 돈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물건이 없어 살 것도 없었고요, 또 돈이 있으면 자본가, 국제 특무, 강도로 투쟁이나 받고 몰수되기 십상이지요, 이 큰 금덩이를 어디다 내놔요, 자칫 반동이란 누명을 덮어쓰고 사람까지 죽을지 몰라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문화대혁명 때 맞아 죽었다고요, 그래서 여태 애아버지한테도 안 알렸어요, 전들 그것을 찾아 남편 자식과 호강하고픈 생각이 왜 없겠어요, 전 돈 없어도 되지만 남편 없인 못 살아요, 이 모두가 아버지 유산이니 어머니와 오빠가 가져가시고 전 하나만 주면 만족해하겠어요.” 하고 영숙이가 목이 매여 울먹였다.

   “영숙아 우리 똑똑한 영숙아, 네가 고생 많았다, 너는 어머니와 이 오빠가 걱정되는가 본데 우리 걱정마라, 이것 다 너의 것이다, 우린 이걸 가지고 서울에서 아파트 하나 못 산다,우리는 이것 없어도 잘 살고 있다, 이 금괴는 모두 너희가 가져라, 내일이라도 당장 은행에 가서 저금하고 이런 걸 이렇게 둬선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와 한국에서 오기 전에 우리가 너들에게 중국돈으로 3000만원쯤 도와주려 했으니, 이제 가서 부쳐 줄게, 어제 낮에 우리 다 같이 돌아봤지만 이산골짝이 현성과 가까우니 시민공원을 만들어라, 골짝을 막아 저수지도 만들고 유람선도 띄우고 낚시터도 만들고 사슴을 위주로 동물도 사양하고, 여기가 큰 전망이 있어 보이니 현 정부와 타협을 해 보아라, 이제부터는 너들도 살길이 폈다.”

 오빠의 말이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영숙에 대한 못 다한 사랑을 한꺼번에 들어부어도 한이 풀리지 않아서하는 말이었다.

   영숙이는 그만 어머니 품에 안겨 큰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오빠도 울었고 그의 남편 석준이도 감동되어 흐느끼고 말았다.

    그날부터 석준이와 영숙이는 두 한국 손님과 같이 현성에 쫓아 다녔는데 먼저 금괴를 은행에 저금하였다. 이 금괴는 당시 국제시장에 유통했던 한국 세종대왕초상이 각인되어있는 금괴로 시중에 일반 금값보다 더 비싸게 계산되었다. 왜냐면 이 금괴는 순수도도 그렇고 국제시장에서 직접 달러와 맞바꿈으로 외화 수입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 정부도 찾아가 이 산골에 시민공원을 꾸릴 데 대하여 정식 신청한즉 대대적으로 환영한다며 앞으로 몇 차래 실무회의를 거쳐 구체적인 방안을 내고 최후 결정하자며 석준이 쪽에서도 구체적인 계획서와 자금 내원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십여 차래나 넘는 쌍방 실무급 접촉과 절충으로 이 골짝 산과 부지를 도합 20만원 주고 70년 석준이 개인 소유로 활용할 수 있는 임대권을 따내었고 정부부서와 최종 결의서를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법인 김석준이 임대한 산과 부지에 대하여 정부와 어느 단체와 개인도 간섭 못한다. 비록 중국조선족이 운영하지만 자금 내원이 외자유치에 해당하므로 외국인에게 주는 삼년간 면세와 특혜를 받을 수 있다. 이미 골짝계곡에는 도로를 신설할 국가 예산이 내려 온 터라 도로를 빠른 시일 내에 무상으로 해주며 골짝에 들어가는 고압선과 변압기시설도 무상으로 표준 급으로 해주며 필요한 설계도면을 제공하고 저수지 물막이에는 지방군부대의 장비를 연료를 자체 공급하는 조건으로 지원받을 수 있고 일체 자재는 국가 공급가로 제공되며 자료가 들어오는 날부터 상주무장공안인원을 파견한다.

   석준이 쪽에서는 한 달 안에 한국 K회사에서 달러500만 불을 중국인민은행계좌에 입금하며 조선족을 위주로 하고 기타 55개 소수민족은 각각 한집 식 포함한 민속촌을 건설하며 계곡에 땜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양안에 20개 별장과 정자를 만들며 초대형 호텔과 놀이터를 세우고 벼랑에는 삭도를 늘이고 물에는 유람선을 띄우고 낚시터도 만든다. 만3년 후에는 이윤에서 20%를 해당 세무국에 지불하며 저수지물은 상수도와 농업용으로 공급할 수 있으되 물에 대한 수입은 국가에서 책임지고 세금에서 감면해준다. 이상 체결된 계약은 한국에서 자금이 입금되는 즉시 효력을 본다. 1989년8월15일

   이와 같은 계약을 보고 국가의 지원과 혜택이 크므로 특히 한국 손님들이 더 기뻐하였다.

   계약이 완전 완미하게 끝나자 한국 손님들은 북경과 홍콩을 경유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공원이 완성될 때 구경도하고 또 공원이 조성되는 날에는 산에 무덤도 정리하므로 그때 와서 아버지의 골회도 한국 고향 선산으로 모셔가기로 하였다.

   그들이 떠나고 보름이 못 되여 현 정부에서 한번 오라는 통지가 왔다. 석준이와 영숙이가 현 정부에 달려 가보니 현장이 직접 맞아 주었는데 한국에서 돈이 입금되었으니 오늘 은행에 가서 확인해 보라는 것이며 이번 사업에 정부도 큰 기대를 갖고 있으니 잘 해보라며 격려까지 하였고 중-한간 우호 증진에 앞장 서 달라 당부도 받았다. 그리고 현장의 초대로 정심도 대접 받았고 그가 차를 파견하여 은행에 가 자금입금도 확인하고 집에까지 대려다 주었다.

   차를 돌려보낸 석준이 내외는 집에 들지 않고 곧바로 산등성이 잔디밭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흘러내리는 계곡과 양안의 산세가 손바닥 펼쳐보듯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계곡 넘어 맞은켠에는 기묘한 줄화강암 벼랑이 우뚝 솟았는데 석준이가 입에 손을 모아서 “야ㅡ호!” 하고 함성을 지르자 영숙이도 따라서 “야호! 야호!” 목청껏 불렀다.

   소리는 건넛산 벼랑을 쩌렁쩌렁 울리고 골짝 안으로 메아리쳐 갔는데 벼랑끝 하늘가에는 놀란 산비둘기가 하얗게 떠섰다. 이제 높은 벼랑으로는 고공 삭도가 날아오를 거고 꽃단장한 유람선이 비취 같은 벽파를 가르며 산굽이 돌아 이웃 현에도 갈수 있고 전국 방방곳곳에서 민속촌 관광을 올 것을 눈앞에 그리는, 아니 하늘땅을 진감하는 천지개벽의 전경을 바라보는 그들의 희망찬 마음이 가슴속에서 막 터져 나온 것이었다.

   “여보, 당신 갑자기 왜 나만 쳐다봐요.” 영숙이가 웃으며 마주 보니 “나 당신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출거요, 세상에 당신 같이 귀중한 것이 어데 있어요, 남들이 처복, 처복 하지만 나만치 처복 있는 사람 어데 있어요, 자 어서 나의 복덩이여!”하고 두 팔을 쩍 펼쳤다.

   석준이는 영숙이를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돌아가다가 그만 엎어지면서 그들은 한동안 잔디밭에 뒹굴었다. 석준이는 더 얼싸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영숙이가 간신이 빠져나와 다시 잔디밭에 앉았는데 둘 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있었다.

   “여보 당신 돌았어요. 왜 안하던 짓을 해요, 너무 기뻐 이성을 잃은 것 아니에요? 물론 기업에 열성을 다 하여야지만, 그러나 기업한다고 마음이 온통 들떠서 습작은커녕 독서도 안하니 여태 하던 당신의 문학창작을 포기할 가봐 걱정이내요, 당신이 시 한편 소설하나 쓰는 것이 그 무엇보다 고상하고 아름답고 보람 있는 줄 아시요.” 뜻하지 않은 영숙이 충고에 석준이도 “평생해온 문학을 버릴 순 없지요, 나 우리 문학창작실부터 꾸릴 거요.” 한다. 영숙이는 너무 기뻐 손뼉을 치며 석준이 팔짱을 겼다. 두 사람은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나 전번 한국 오빠가 와서 들춰보던 당신의 옛날 원고뭉치에서 58년 연변문학 잡지사가 너무 관조적이라며 퇴고한 <산골 풍경>이란 단시 한편을 낭송할게요, 나는 그 시가 맘에 들어 암송했어요, 왜 째불시고만 봐요, 나도 학생 때는 시랑송도 했더라오, 그럼 들어 봐요”


              희디흰 양의 떼 언덕을 넘고

              한복판에 목동이 피리를 부네

              피리소리 골안에 메아리쳐 흐르고

              개울가에 빨래하던 한 처녀

              한동안 빨래방치 놓고 귀 강구더니

              구름타고 가는 신선보라며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네

     높낮게 가야금을 퉁기는 듯한 맑은 계곡물소리에 영숙의 낭랑한 목소리가 노래처럼 울리자 석준이는 다시 한번 귀중한 아내의 손을 굳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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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홍암: 소설책 이름

          쨩졔: 홍암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쪼판파이: 문화 대혁명때 홍위병과 같은  단체 조직

          이쿠스톈대회: 고통스런 옛사회를 회상하고 오늘의 현실을 긍정하는 대회

          뎬펀: 볏집 같은 나무뿌리로 만든 전분가루

          천영구이: 다락 밭을 일구어 전국 모범이 되고 국무부총리가 된 인물

          짱톄성: 대학 입시에 빵점을 맞고도 중앙 교육부에 오른 인물

          썬반: 토질을 개량한다고 생땅을 깊이 파는 것

          투궈루: 황토흙을 쌓아서 만든 작은 용광로

          공사: 군 밑에 있는 행정기구

          초슈: 북조선 수정주의

          퍼셰; 헌신짝이란 의미로 남녀 불륜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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